144화. 크라프테 전쟁 - 귀로
재정비를 마치고, 봄이 끝나갈 무렵.
우리는 이제 이베리카 형제국의 소유가 된 포르투 항구에서 성대한 환송식을 받고 이베리카를 떠났다.
다들 여름이 오기 전에 이베리카 반도를 떠날 수 있어서 무척 기쁜 모양이었다.
작년 여름엔 다들 정말 빌어먹게 덥다고 기겁하고, 일사병으로 쓰러지는 이들까지 속출해서 정말 큰일이었지.
내가 갑판에 서서 멀어져 가는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어주는 이베리카의 주민들을 보고 있자, 오랜만에 보는 리브레의 선장 뤼도빅 뒤헝이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하하, 이베리카가 굉장하긴 한 모양이군요. 다들 피부색이 달라졌습니다.”
“프랑지아와는 날씨가 좀 많이 달라서. 놀라셨습니까?”
내가 픽 웃으며 답하자, 뒤헝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예, 다들 피부색이 구릿빛이 되어 있어서 꽤 놀랐습니다. 프랑지아인이 아니라 이베리카인들 태우는 줄 알았답니다, 하하!”
그러게.
이베리카의 땡볕 아래에서 열심히 전쟁을 수행한 결과, 우리 모두 샨드라 만큼은 아니어도 제법 갈색 피부가 되어 있다.
“피부색 그거 별거 없단 이야기죠. 아, 그래도 빌바오와 달리 큰 포르투 항구에서 승선한 덕분에 프랑지아의 함대를 제대로 보여줄 수 있던 건 좋더군요. 다들 놀라워했습니다.”
확실히 좁은 빌바오에서 교대로 들락날락해야 했던 것에 비해 포르투 항구는 충분히 거대해서, 프랑지아의 함대 전부가 정박할 수 있었다.
거대한 기함 리브레를 포함해서, 다섯 척의 전열함과 호위로 따라온 수십 척의 프리깃, 슬루프까지.
이베리카 원정군 철수를 위해 프랑지아가 보유한 해군의 절반 이상을 데려온 덕분에, 아직까지 변변한 해군이 없는 이베리카의 형제들은 상당히 깊은 인상을 받은 것 같았다.
심지어 어지간해선 호탕하게 웃기만 하던 크록스도 입을 떡 벌리며 내심 부러워하는 눈치였으니 말 다 했지.
“그건 그렇고, 리브레의 외관이 조금 변한 것 같습니다? 신형함인데 벌써 개수라도 한 겁니까?”
이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내가 이 화제를 절대로 꺼내지 말았어야 했다는 사실을.
사람 좋은 호인 인상이던 뤼도빅 뒤헝 선장은 내 말을 듣자마자 기묘하게 눈을 빛내더니, 기다렸다는 듯이 엄청난 속도로 떠들기 시작했다.
“역시 라파예트 후작님! 육군 총사령관으로서의 눈썰미와 식견이 어디 안 가시는군요! 그러지 않아도 육군에선 누구도 이 근사한 변화를 알아보지 못하는 건가, 하고 내심 실망하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잘 보셨습니다! 프랑지아 해군의 자랑, 아키텐 제독 각하의 기함 리브레에 중대한 개선점이 생겼습니다! 이건 다름 아니라 마도왕국 홀란트와의 교류를 추진해온 아키텐 제독 각하의 업적입니다만, 리브레는 마도 공학 기관을 달아서 선체를 보호할 수 있는 장벽을 생성할 수 있게 되었을 뿐 아니라 해전이 발생하면 전투 시에도 마력을 이용해 더욱 속도를 가속하여 민첩한 전투기동이 가능해졌습니다! 그뿐이라면 섭하죠! 86문의 대포에도 마력보조 장치를 장착하여-”
……솔직히 뭐라고 하는지 반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함장은 내가 알아듣거나 말거나 나를 붙잡고 열성적으로 떠들며 리브레의 엄청난 성능에 대해 자랑하기 바빴고, 내 간절한 바람과 달리 그를 떼어내 줄 크리스틴은 끝까지 갑판에 등장하지 않았다.
* * *
뒤헝의 리브레 자랑은 그가 대략 2시간 정도 떠들고 내 입에서 혼이 빠져나가기 직전이 되어서야 멈췄다.
정확히는, 그는 더 하려고 했는데 조타수가 그를 데려가며 나를 해방시켜주었다.
……나중에 그 친구에게 선물이라도 주던가 해야지.
나는 혼미한 정신과 멀미가 올까 말까 하고 있는 몸을 어떻게든 잡아끌어 제독의 방으로 향했다.
“저입니다, 크리스틴.”
노크를 하고서야, 내가 그토록 듣고 싶어 했던 음성이 들려왔다.
“들어오세요.”
문을 열고 들어가자, 크리스틴은 책상에 앉은 채 책상에 쌓여있는 서류를 점검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심지어 내 얼굴도 흘긋 보곤 다시 서류로 시선을 내렸다.
그러고 보니 아까도 잠깐 상륙해서 크록스와 간단하게 인사를 나누고 대화를 하면서도 내 쪽으로는 눈길만 몇 번 주고 말았다.
1년도 넘게 지나고서야 간신히 만나는 건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크리스틴이 나한테 이러다니.
내심 서운한 기분이 들어서, 그녀가 앉아 있는 책상으로 다가가자 크리스틴이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네요. 무사하신 것 같아서 다행이에요, 피에르.”
“그러게요. 오랜만입니다, 크리스틴.”
내가 답하자, 크리스틴은 정리하고 있던 서류를 탁탁 쳐서 정리하더니 내게 건네주었다.
“그동안 뤼미에르에서 일어난 정치적 사안에 대한 정리 보고서, 그리고 동방 제국에서 탈레랑 총재가 거둔 외교적 성과에 대한 보고에요.”
“아, 고맙습니다.”
나는 크리스틴이 건네준 서류를 빠르게 훑었다.
국민개병제의 확대 시행 통과.
혁명군 총사령관 대리 루이 드제의 지휘 아래, 총 24만에 달하는 예비군이 기초군사 과정을 마쳤다는 내용.
……크라프테를 상대로 맞서 싸울 기초 병력 확보는 어떻게든 된 모양이네.
이만하면 질은 몰라도 최소한 병력에서 밀릴 일은 없겠지.
탈레랑이 걸작이었는데, 무슨 짓을 한 건진 몰라도 거의 반년간 동방 제국에 머무르며 차르로부터 명예 남작 작위를 받았다고 한다.
탈레랑의 정성 덕분인지, 처음에 입조하라는 어이없던 반응을 보인 동방 제국의 차르가 프랑지아를 우방국으로 인정하고 무역도 시작되었다고.
이대로면 반농담 삼아 주문했던 저들의 화포 기술 도입도 아주 꿈은 아니겠는데?
대단하긴 대단하네, 탈레랑. 우리 대결은 이번에도 무승부라고 해야 하나?
보고서에는 그 외에 잡다한 정치적 사안도 빼곡하게 차 있었는데, 솔직히 별로 눈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음, 크리스틴?”
“네, 피에르.”
“……이게 다입니까?”
크리스틴은 처리 중인 서류에 박고 있던 시선을 들어 올려, 말간 눈으로 나를 보더니 천천히 눈을 깜빡이고는 입을 열었다.
“아.”
그리곤 주머니를 꺼내, 나에게 알약을 하나 건네주었다.
뭐야, 이거 설마 또 피임약이야? 나야 좋지만…….
그런 것치곤 크리스틴의 표정이 너무 담백해서 조금 당황했지만, 일단 그걸 그대로 받아서 삼켰다.
그런데 정작, 크리스틴은 그런 다음에 다시 서류작업으로 돌아갔다.
이쯤 되자 나도 오기가 생겼다.
“……크리스틴?”
“네, 피에르.”
“방금 주신 건 뭡니까?”
“멀미약이요.”
“…….”
내가 할 말을 잃은 채 멍하니 있자, 크리스틴이 슬며시 고개를 들어 올려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멀미에 굉장히 약하시다고 해서, 홀란트에 주문해서 만들어봤어요. 임상실험 결과는 제법 괜찮았다고 하던데.”
“그, 그래요……. 고맙……습니다.”
이게…….
고마워야 하는 건데.
고마워야 하는 게 맞는 것 같은데, 떨떠름함을 지울 수가 없다.
크리스틴도 내 기색을 눈치챘는지, 슬며시 고개를 기울이더니 말간 얼굴로 물어왔다.
“……뭐라고 생각하셨는데요?”
이건, 이건.
고의다. 반드시 고의다.
나는 바로 크리스틴의 어깨를 끌어안고 입술을-
……포갤 것처럼 굴다가, 그녀의 코앞에서 멈춰 선 채 가만히 기다렸다.
눈을 질끈 감았던 크리스틴이 기다리다 지쳐 슬쩍 한쪽 눈만 떠서 나를 보는 걸 보자니,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다.
그래도 열심히 참으며 짐짓 화난 표정으로 그녀를 쏘아보고 있자, 크리스틴이 입을 열었다.
“……안 하시나요?”
“하길 바라신 겁니까?”
“…….”
크리스틴은 방금까지 하고 있던 말간 표정을 잃은 채, 살짝 붉어진 얼굴로 눈알만 이리저리 굴리더니 슬쩍 고개를 비틀어 내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생각해 보니 언제나 당신은 여유 있는데, 저만 애타는 것 같아서 조금 심수ㄹ- 흡!”
입맞춤은 긴 그리움을 채울 만큼 길었다.
내가 집요하게 숨결을 먹어 치운 탓에 떨어지자마자 숨을 헐떡이는 크리스틴을 끌어안으며-
“제가 잘못했군요. 무척이나 잘못한 것 같으니.”
내가 속삭이자, 크리스틴의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제가 얼마나 애가 탔는지 열과 성을 다해서 보여드리죠. ……당신이 두 번 다시 그런 기분을 느끼지 않도록.”
프랑지아에 도착할 때까지, 시간은 많으니까.
* * *
마도왕국 홀란트, 마탑.
이제 16세가 된 루이스 다키텐은 프랑지아로 향하는 마차에 타고 있었다.
멋들어진 마법사의 로브를 차려입은 루이스의 가슴팍에는 마탑에서 받은 배지가 달려 있다.
마탑의 초급과정을 졸업했음을 증명하는 배지.
11살에 프랑지아를 떠나와서 5년이 넘는 기간 동안 노력한 끝에 능력을 인정받았다는 증명.
아키텐의 루이스가 아니라, 이본느의 아들이 아니라 루이스 자신의 노력으로 받아낸 성과.
루이스는 내심 가슴에 차오르는 뿌듯함을 느끼며, 마탑을 떠나기 전 늙은 탑주와 했던 대화를 떠올렸다.
-정말로 프랑지아로 돌아갈 셈이냐. 초급과정을 조기 졸업한 네 노력과 집념은 높이 평가한다만, 마법사로서의 너는 아직 갈 길이 멀다. 너처럼 유망한 후학을 그냥 보내주기는 우리도 많이 아쉽구나.
-높이 평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탑주님. 현자라 불리는 분께서 과분한 평을 해주시는 것만으로도 영광입니다. 하지만 어엿한 한 사람분의 마법사가 되었는데, 조국의 전쟁을 모른 척할 수는 없어서요.
-그깟 속물적인 국가 간의 전쟁에 무슨 가치가 있다고. ‘폭풍의 마녀’의 전례를 알고 있을 것 아니더냐. 네 재능은 아깝다. 조금만 더 일찍부터 마도의 길을 걸었더라면 이보다 한결 나은 성취가 가능했을 것을, 더 정진하진 못할망정 떠나겠다니. 에잉, 쯧쯧…….
-하하하…….
-그래서, 네 배다른 누이를 도우러 가는 거냐?
-……예.
-내 그간 네 누이가 알게 모르게 너를 도와준 걸 봐서, 너와 네 누이의 사이가 세간에서 말하는 관계와는 사뭇 다르다는 건 알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한들 기껏 찾은 자기 자유와 창창한 미래를 버리고 네놈을 싫어할 놈들만 가득한 자리로 기어들어 가겠다는 네놈도 정상은 아니야.
-저도 아키텐이긴 한가보죠. 탑주님.
-에잉, 쯧. 그래, 가라, 가. 네놈이 없어진다니 네놈 꽁무니만 따라다니던 아이들이 아쉬워할 꼴이 벌써부터 눈에 선하구나. 하여간 얼굴과 재능만 번드르르하니 잘 나면 뭘 하겠나. 머릿속에 든 생각이 정상이 아닌데.
-하하, 죄송합니다, 탑주님. 그러면 이만 물러가보겠습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루이스는 꼬장꼬장한 탑주가 얼른 가기나 하라는 듯 손사래 치던 모습을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그도 숨 막히던 유년기에 자유를 준 마탑을 벌써 떠나는 건 조금 아쉬웠다.
그러나 루이스 다키텐은 원래라면 허용될 리 없었을 그 자유가 누구의 호의에서 비롯되었는지를 잘 알고 있다.
그가 마도에 재능이 있었다 한들, 누이의 기부가 아니었다면 이미 입문하기엔 늦은 나이인 그를 마탑에서 받아줄 리가 없었다는 것 또한.
마탑에서 친하게 지낸 친구들은 그가 배다른 누이에게로 돌아간다고 하자 다들 미쳤다고 뜯어말렸지만, 인간의 탈을 썼으면 은혜 정도는 갚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닐까.
최소한, 루이스는 죽어버린 어머니와 같은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 상념에 잠겨 있던 와중.
퍽-
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
루이스가 당황하는 사이, 제대로 길을 따라가던 마차가 제멋대로 날뛰기 시작했다.
“마, 마부! 무슨 일- 헉!”
마부석을 들여다본 루이스는 목에 화살이 박힌 마부의 몸이 기울어, 바닥으로 굴러떨어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흥분하여 제멋대로 달리는 말들이 마차를 언덕 아래로 끌고 가고 있는 광경도.
“이, 이런 맙소사!”
엄청난 소음과 충격이 루이스를 덮쳤다.
* * *
“으, 으으으…….”
루이스는 완전히 망가지고 박살 난 마차의 잔해에서 비척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바로 다급하게 마력 장벽을 펼쳐, 그에게 날아드는 화살을 막아냈다.
“헉, 헉……. 너희들 뭐야!”
대답은 없다.
검은 옷을 두른 괴한들은 검을 뽑아 들었다.
‘제길……!’
아키텐 상단과 마주치기 싫다고 괜히 뱃길이 아니라 육로를 고른 게 실수였나?
누가 보낸 거지?
짚이는 곳이 너무 많아서 오히려 감도 오지 않는다.
누이에게 원한을 가진 자는 결코 적지 않을 터다.
오히려 누이에게 충성하기에 루이스를 제거하고 싶어 할 자들도 있다.
……그도 아니면, 어쩌면.
누이의 마음이 변한 거던가.
루이스가 이를 악물며 마력을 끌어모으는 순간.
언덕 위에서 뛰어내린 남자가 루이스에게로 달려들던 암살자를 단칼에 베어버렸다.
“어, 어?”
루이스가 당황하는 사이, 다른 암살자의 검을 쳐내서 날려버린 남자가 등을 돌려 루이스를 보며 씩 웃었다.
“이거, 곤란해 보이시는군요. 누군지 모를 마법사님.”
“그, 그대는 누구입니까?”
“지나가던 한가한 용병입니다. 마법사님 하기 나름에 따라서 마법사님의 용병이 될 수도 있고.”
남자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빈틈없는 실력으로 암살자들의 공격을 막아내며, 손을 들어 올려 동그라미를 그려 보였다.
“생각 있으십니까? 제가 좀 비싼 몸이긴 한데, 돈만 주시면 일처리는 확실하거든요.”
용병답게 껄렁한 복장과 말투.
그러나 루이스는 그에게서 어딘지 모르게 귀족적인 느낌을 받았다.
고민은 짧았다.
“고용하겠습니다! 저는 루이스 다키텐, 아키텐 가문의 차남입니다! 돈은 충분히 있습니다!”
“오- 아키텐. 아키텐이면 신용 확실하지. 이거 거물이셨네. 요즘 허탕만 쳤는데, 여기서 이런 운이?”
남자는 공격만 막아내던 태세에서 단숨에 전환하여 달려들던 암살자를 베어버리고, 씩 웃었다.
“자, 그럼 거래 성립입니다! 나중에 딴소리하시면 안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