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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혁명에 단두대는 필요없다-143화 (143/258)

143화. 이베리카 - 기사, 그리고 형제

승전과 이베리카 형제국의 건국을 선포한 뒤.

크록스는 아주 대대적으로 군량을 풀고 가축을 잡아 전국적으로 며칠에 걸쳐 성대한 축제를 열기로 결정했다.

나는 아무리 전쟁이 끝났다지만 군량을 다 동낼 기세라 이래도 되나 싶었는데, 크록스의 답은 간단했다.

-식량은 다시 사오거나 키워낼 수 있지만 이런 날은 두 번 다시 오지 않는다!

이런 호쾌하다 못해 오늘만 사는 오크 같으니…….

뭐, 크리스틴이 유지해주는 무역로는 건재하고 프랑지아의 작년 소출도 썩 괜찮았던 모양이니 어떻게든 되겠지.

이러나저러나 이베리카 반도에 처음으로 건국된 통일국이다. 그렇지 않아도 종족 구성이 다양한 나라니, 민심을 사고 주민들을 안심시킬 필요성이 있는 것도 맞겠지.

나는 축제가 한창인 포르투 항구의 시가지를 느긋하게 걷고 있었다.

조금 떨어진 축제 거리에서는 밤임에도 대낮처럼 밝혀진 채 웃음소리가 들려오고, 축제의 불길이 닿지 않는 거리는 어둡다.

그 빛과 어둠의 가운데 쯤을 걷는 것은 은근한 평온감을 주어서, 나는 묵묵히 나를 따르고 있던 가스통을 돌아보며 말을 걸었다.

“결국 이곳에서의 임무도 어떻게든 무사히 끝났군.”

“그렇습니다, 후작 각하.”

언제나 과묵하게 나를 따르고, 묻는 것에만 간단하게 답한다.

혁명군의 장군으로서 산전수전 다 겪어왔고 위명도 떨칠 만큼 떨쳤는데도, 가스통은 변화 없이 늘 한결같다.

그의 태도는 기사제에서 나를 이긴 뒤, 영지에 처박혀 나의 일개 호위기사로서 일하던 시절에서 크게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인다.

청기사도 젊었을 적에는 기사의 귀감이었다고 들었는데, 그렇게 변해버렸는데 말이지.

“우리 참 고생 많이 했지. 라파예트 후작령을 떠나서 프랑지아, 게르마니아 제국, 심지어 이젠 이베리카의 남쪽 끝까지 와 있으니.”

“후작 각하를 여기까지 따라올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가스통은 정말 진심이라는 듯이 그렇게 답했다. 그것참, 고지식하기도 하지.

“나를 따라다니다가 벌써 제국의 암살자들에게 한 번, 여기서 마력 폭풍에 휩쓸려서 두 번 죽을 뻔 했는데도 그런가?”

그에게는 말할 수 없지만, 회귀 전에도 그는 별로 존경할만한 인간도 아니었던 나를 위해 싸우다 죽었다.

……어쩌면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가 꿈꿔온 기사도를 위해.

“기사에게 주군과 함께 위험을 이겨내는 것은 명예이니까요.”

흔들림 없이 나온 대답에, 나는 몸을 돌려서 가스통을 마주 보았다.

아니, 아니군.

태도는 비슷할지 모르겠으나, 그의 눈 안에 담긴 것은 그 시절의 후작령이나 회귀 전에 나를 보던 그것과는 크게 달라졌다.

불빛이 비추는 가스통의 눈동자 안에 담긴 것은 확연한 자부심이어서,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나는 기사도와는 영 거리가 먼 주군이야. 필요하면 불명예스러운 짓도 서슴지 않고, 이성을 잃은 나머지 시가지 한복판에서 의원들과 어쩌면 하수인일 뿐인 자들을 모조리 참살한 적도 있지.”

크리스틴이라면 이런 나라도 기꺼이 사랑해주겠지.

하지만 기사도 그 자체를 신봉하는 가스통은.

“기사도에 주군께 정의를 강요하는 법은 없습니다, 후작 각하.”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 그냥 충성하고 명예롭게 굴라는 왕과 귀족들이 저들 편할 대로 지은 그런 내용이긴 하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가스통이 확신에 차서 말했다.

“그러나 저는 후작 각하를 따르는 매 순간, 각하의 길을 따를 수 있어 영광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후작 각하께서 어찌 생각하시든, 각하께서 지나오신 길은 조국을 지키고 많은 이들을 구했습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정도지.”

내게 최우선은 여전히 크리스틴과 내가 지켜야 할 이들이다.

굳이 따지자면 그 안에 에리스도 포함되니, 프랑지아의 국민을 지키고 싶어 하는 여왕의 뜻을 내가 가급적 들어주고 싶을 뿐이지.

잠자코 듣고 있던 가스통이 반문했다.

“허나 각하. 결국 각하의 길이 많은 이들을 지키고 구하고 있다면, 누가 감히 그 길에 명예가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거기까지 듣자, 나도 결국 웃을 수밖에 없었다.

“하하, 하하하……. 이미 봉건제는 사라진 지 오래고, 그대와 내 관계는 군 상급자와 부하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그대에게 나는 기사로서 따르기에 합당한 주군인 건가?”

“그렇습니다, 후작 각하. 지금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일말의 흔들림도 없이 답하는 기사에게, 나도 웃으면서 답해주었다.

“그렇다면 나도 말하지. 란 가스통 경. 그대는 이야기 속의 기사들을 동경해 그런 존재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일개 용병의 아들로 태어나, 일평생 어린 시절의 꿈만을 따르며 장군이 되어서도 흔들림 없이 그 길만을 걷는 기사에게.

“기사와 귀족이 최후를 맞이해가는 시대에 마지막 남은 귀족으로서 말하는데, 그대는 이야기 속의 어떤 기사보다 용맹하고 어떤 기사보다도 충직하다. 그대는 최후이자 최고의 기사로서 남아, 오래도록 회자 될 거야.”

가스통은 내가 이런 말을 해줄 줄은 몰랐다는 듯 눈을 둥그렇게 뜨더니 이내 한쪽 무릎을 꿇으며 예를 갖추었다.

“영광입니다, 후작 각하!”

“자, 그럼.”

지금까지도 고생했지만 이제 귀국하면 크라프테 왕국이라는 강적에 다시 맞서야 할, 가장 많은 시련을 겪을 기사.

“용맹과 명예는 충분히 증명했는데, 그것만 있으면 이야기가 너무 심심하잖아.”

“예?”

나는 의아한 얼굴의 가스통을 보며 픽 웃곤, 손가락으로 그의 뒤를 가리켜 보였다.

“어, 이야기에 방해된 건가요?”

조금 멀찍이에서 샨드라가 멋쩍게 웃고 있어서, 나도 마주 웃어주었다.

“아니, 마침 잘 왔네. 내 고지식한 기사는 레이디가 직접 청하지 않으면 댄스 타임도 놓칠 눈치 없는 자라서 말이야. 데려가게.”

“아하하, 감사합니다, 후작님! 그러면 기사 좀 빌려가겠습니다~!”

“원하시는 대로.”

“엇, 어……. 그, 그럼 물러가보겠습니다, 후작 각하!”

화끈한 이교도 전사인 샨드라는 기사도의 이야기에 나오는 레이디하곤 거리가 좀 멀지만, 저런 것도 맛이겠지.

나는 저 멀리에서 사람들이 프랑지아의 유려한 선율과는 다른 흥겨운 북소리와 타악기에 맞추어 모닥불 주위를 돌며 춤추기 시작하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가스통의 손을 잡고 그쪽으로 데려가고 있는 샨드라도.

……크리스틴과 함께 왔다면 나도 저기 끼었으려나?

그야말로 그린 듯한 귀족 레이디라는 느낌의 크리스틴이 저런 자리에 어울릴까 고민하고 있자, 숨기기도 어려운 거대한 기척이 다가왔다.

“축제가 한창인데 주인공이 자리를 비워도 되는 건가?”

내 말을 들은 크록스는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답했다.

“으하하하, 높으신 분은 적당히 빨리 비켜주는 것이 배려 아니겠나! 한가해 보이니 시간 좀 빌리지, 형제!”

나는 픽 웃었다.

이거야, 가스통에 이어 크록스라.

크리스틴이 없으니 대신 남자복만 넘치는구만.

* * *

포르투는 굉장히 오래된, 거대한 교역도시다.

그런 도시가 으레 그렇듯, 찬란하고 번화한 중심지가 있는가 하면 그만한 비참함과 어둠도 공존한다.

크록스는 거미줄처럼 어지러운 포르투의 빈민가와 뒷골목을 이미 전부 아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거닐었다.

원래라면 이곳에도 거주민들이 있었겠지만, 크록스가 모두에게 베푸는 축제를 선포한 덕에 이 지저분하고 비좁은 골목에 남아있는 자들은 거의 없다.

“이곳 길에 상당히 익숙해 보이는데?”

“이런 곳은 대개 변화가 없는 법이라네, 형제. 살던 자는 금방 죽고,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또 다른 자가 살아가다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죽고. 무언가를 바꿀 의지나 능력이 있는 자는 이곳에서 빠져나가려고 하지, 바꾸려고 하지 않으니까.”

과연, 그렇군.

솔직히 태어날 때부터 귀족으로 자랐고, 굳이 이런 곳까지 들어와 본 경험이 없는 나로선 꽤 생소한 기분이었다.

이 정도로 번창한 도시에도 이토록 비참한 공간이 공존하는 거군.

아마 뤼미에르에도 이런, 나는 존재조차 알지 못하던 곳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에리스가 빈민가를 전전하며 그들에게 구호활동을 펼쳤다는 보고를 받는 것과, 이런 곳에서 사람이 사는 것이 가능은 한가? 싶은 거리를 직접 눈으로 보는 경험의 사이에는 심각한 간극이 있다.

한참을 걷던 크록스는 이 골목에서는 그래도 제법 크기가 큰 건물 앞에서 멈춰섰다.

크록스는 문이 완전히 박살난 건물로 성큼성큼 들어서더니, 평소의 그 우렁찬 목소리가 아니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드디어 돌아왔군.”

“돌아왔다니?”

크록스는 씩 웃으며 나를 데리고 잘려진 족쇄들이 즐비하게 바닥에 들어찬 공간에 들어섰다.

모양새를 보아하니, 내가 푼 부하들이 노예를 해방시킨 곳 중 하나였던 모양이네.

“나는 이곳에서 태어나 자랐다. 내 어머니는 이곳의 노예였고, 아비는 누군지 모른다.”

“……그랬군.”

내가 인간들에 대해 기묘하게 잘 알고 있는 크록스에 대해 신기해하자, 인간들과 함께 자랐다는 말을 해준 기억이 있다.

그러나 그게 이런 빈민가에서 노예로서 태어나 자랐다는 의미일 거라고는 생각해보지 못했다.

“샨드라와 핫산은 이 상단에서 일하던 직원의 자녀였다. 그들은 노예면서 부지런하고 지식욕이 많은 나를 신기하게 여겨,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지.”

내가 뭐라고 말해주어야 할지 고민하며 말을 고르고 있자, 크록스가 나를 보며 말했다.

“이제 와서야 알려준 것은 미안하게 되었군. 나는 왕을 자처했으나 혈통은 비천하다. 날 때부터 귀족이었던 그대에겐 이런 내가 형제라 칭하는 것이 무례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어.”

“……뭘 새삼. 나는 신분제를 부정하며 일어선 혁명군의 사령관이야. 출신 따위 아무렴 어떤가. 그대가 이룩해낸 위업이 이토록 대단한데.”

크록스는 히죽 웃으며 답했다.

“그래, 그대는 그러했지. 우리가 야만족이라는 것보단 그대들에게 도움이 될지를 생각했으니.”

“신분 따위는 의도하지 않은 출발점에 불과하다는 걸 알았으니까.”

종족이나 신분 같은 건 애초부터 그 존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주어졌을 뿐인 것으로 그 존재를 함부로 판단하는 것은 얼마나 부당한가.

크리스틴은 작위를 돈으로 사들인 가문 출신이어도, 소위 고위 귀족들보다도 더 귀족적이고 현명하다.

에리스는 왕녀가 아니었어도 성녀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을 고결한 성품을 지녔다.

가스통은 일개 용병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그 잘나신 귀족 기사들보다도 더 기사답고 명예롭다.

일개 평민에 여성의 몸임에도 군에 입대해 능력으로 두각을 드러내고 있는 지젤 다비도 있지.

“내가 본 그대는 이베리카의 왕을 자처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마찬가지로, 그대의 시작이 어땠든 나는 그대 같은 자에게 형제라 불린다는 점에서 자부심을 가진다.”

“으하하하하!”

크록스는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리더니 후련한 얼굴이 되었다.

“그대를 형제라 칭하면서 숨기는 것이 영 찜찜하니 마음에 들지 않아 알려주었는데, 잘한 일 같군.”

“나야말로 기쁘군. 일국의 왕이 된 몸으로서 굳이 치부를 밝히는 것이 쉽게 할 결정은 아니지. 내가 그대들에게 그만한 신뢰를 준 것 같아.”

크록스는 히죽 웃더니, 다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잠시 그의 뒤를 따르자, 빈민가 끝자락을 빠져나와 언덕을 볼 수 있었다.

언덕 아래로, 아직은 어두운 밤바다가 펼쳐져 있다.

“이 시궁창 같은 곳에서 가슴이 탁 트이게 해주던 유일한 장소라네.”

“그래, 그렇군.”

노예시절의 그는 이곳에서 드넓은 바다를 내려다보며 꿈을 키웠나.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그대들의 혁명은 우리에게 일종의 희망이었다.”

“그랬나?”

“하하하, 노예로서 살며 어떻게든 악착같이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만을 하던 머릿속에 완전히 새로운 걸 불어넣어 줬거든.”

“아아. 그렇군.”

프랑지아에서 혁명이 터져 구체제를 몰아내는 모습을 보고, 크록스는 이 이베리카에 통합국가를 세워 포르투와 그 뒷배인 악마들을 몰아낸다는 발상을 한 건가.

“별로 그렇게 낭만적이기만 한 혁명은 아니었는데.”

나는 그렇게 말하며 절로 쓴웃음을 지었다.

지금은 내가 한 행동이 불러낸 여러 가지 우연이 겹쳐 이베리카 형제국이 건국되기에 이르렀지만, 회귀 전에는 아마도 그러지 못했을 거다.

광기로 폭주하던 혁명군이 최종적으로 구체제에 맞선 승리를 거두고 내가 처형당한 시점만 해도 지금으로부터 2년 뒤.

혁명의 전개 과정 자체가 너무나 오래 걸렸으니, 그때까지 노예 신세였을 크록스가 어떻게 되었을지는 모를 일이지.

“으하하하! 그래, 나도 그대와 샨드라에게 들은 바가 있어서 안다! 하지만 세상 일이 다 그런 것 아니겠는가! 겉으로 보이는 것과 안의 실상은 다른 법이지! 우리의 나라는 이제 막 건국된 참이니, 앞으로가 더 고생길이겠지.”

나는 픽 웃었다.

그래, 다행히 잘 알고 있는 걸 보니 이 호쾌한 오크가 아주 뇌에 근육만 들어찬 건 아니야.

“그러나, 그럼에도 그대들은 우리의 목표이자 희망이었다! 그랬기에 나는 반대를 무릅쓰고 그대들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 보았다.”

아, 그래서.

남부 산맥의 관문에 왕이 홀로 나와 직접 회담을 청하던, 그 괴이한 행동의 원인은 그런 거였나.

크록스는 송곳니를 드러내며 히죽 웃었다.

“그리고 그대를 만나, 여기까지 왔지. 그것만으로도 나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그대들의 혁명이, 그대가 진실로 우리의 희망이었고 여기까지 올 수 있게 이끌어주었노라고.”

나는 슬며시 웃었다.

“그건 기쁘군.”

어쩌면 이들은 악마들과 포르투 항구에 맞서 싸우다 멸망한, 한낱 야만족의 이름도 없는 국가로 남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내 이 자리에서 맹세한다, 형제. 그대들은 우리가 준 신뢰에 보답함은 물론이고 큰 은혜를 베풀어주었다. 이 크록스와 이베리카의 형제들은 그 은혜를 모두 갚는 그 날까지, 그 어떠한 일이 벌어진다 해도 그대들과 함께 할 것이다.”

단순히 국가와 국가 간의 외교적 약속을 넘어, 노예에서 시작해 통일 왕국을 일으킨 전설적인 오크의 영웅이 한 맹세.

나는 그에 미소로 답했다.

“나야말로 고맙군. 그대들의 손을 잡고 그대들을 위해 싸우기로 한 내 결정이 옳았다는 걸 보여주어서. ……그대가 쓰는 신화에 함께 할 수 있어서 영광이었어.”

내 말을 들은 크록스는 호탕하게 웃으며 내 어깨를 팡팡 쳤다.

“무얼, 나와 그대가 시작한 두 나라의 역사는 이제부터 시작인 것을!”

“하하……. 그것도 그런가.”

나는 슬며시 시선을 돌려, 저 멀리 수평선에서 어렴풋하게 빛이 밝아져 오는 광경을 보았다.

이제 시작이라.

자, 그러면.

이제 저 ‘대왕’에 맞서기 위한 최소한의 무게 추는 맞춰진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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