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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혁명에 단두대는 필요없다-141화 (141/258)

141화. 이베리카 - 그림자의 대결

크라프테 왕국, 수도 미텔부르크.

“흐으음.”

크라프테 왕국의 재상, 유스틴 폰 비텐펠트는 손에 쥔 서류를 보며 싱긋 미소 지었다.

“즐거워 보이십니다, 재상님.”

보좌관의 말을 들은 비텐펠트는 웃음소리를 흘리며 답했다.

“하하하……. 재미있지, 재미있고말고.”

그리곤 손에 든 서류를 흔들어 보이며 덧붙였다.

“아키텐의 검은 마녀께서 굉장히 애쓰시는 것 같아서 말이야.”

“흥미로운 행동이라도 했답니까?”

“아아, 아니. 아주 놀라울 정도로 별것 안 하고 있어.”

“예?”

“보고에 따르면, 그냥 의회에 출석하고 상단 관리하며 이베리카 반도에 나가 있는 라파예트 후작과 편지를 주고받는 데 열중하고 계신 모양이라네.”

“허허, 낭만적이군요.”

보조관의 말에, 비텐펠트도 안경을 손으로 슥 추워 올리며 웃었다.

“둘 다 꽤 오래 알고 지냈을 텐데도 뜨겁지. 대체 왜 아직도 결혼 안 했나 싶을 정도로 과시한다니까.”

“뭐어, 라파예트 후작이 좀처럼 수도에 붙어 있질 않으니까 말입니다. 맨날 부대끼고 살아보면 달달함은 금세 사라지고 화상으로만 보일 텐데.”

“오, 자네도 그런가? 나도 그렇다네! 그 예쁘던 아내가 어찌 그리 얄미운지! 아아, 젊은 날의 나를 만날 수만 있다면 ‘당장 멈춰!’ 라고 해줄 텐데.”

“인생이 다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하하하하!”

보조관과 마주 보며 웃던 비텐펠트는 마치 스위치를 내리기라도 하듯, 웃음을 뚝 그치더니 물었다.

“이제 슬슬 그 시간인가?”

보조관도 언제 그렇게 웃었냐는 듯 바로 차분한 얼굴로 답했다.

“시간이죠, 재상님.”

비텐펠트는 슬며시 입꼬리를 틀어올리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보좌관도 자연스럽게 그를 뒤따랐다.

둘은 관저를 빠져나가, 마차를 타고 어느 저택에 들어섰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움직임에 귀찮게 구는 이들도 없이, 마주치는 자들이 정중히 고개를 숙여 보일 뿐.

그렇게 저택의 지하실에 들어선 비텐펠트는 음습하고 악취 나는 지하실의 공기를 들이마시더니 한마디 했다.

“숙성이 잘 된 것 같군.”

비텐펠트의 말이 마치 신호라도 되는 양, 의자 위에 앉혀진 채 결박된 남자가 힘겹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땀으로 뒤범벅이 된 옷은 이미 넝마가 되어 있고, 찢겨진 옷 사이로 드러난 몸에는 피딱지가 가득하다.

“으으, 마, 말하겠습니다.”

남자는 자비를 갈구하듯 힘겹게 입을 열었지만, 비텐펠트는 자연스럽게 옆에 서 있던 수하에게 손을 내밀어 집게를 받았다.

“다, 말, 말- 으, 으아아악!”

남자의 손에 하나 남아있던 손톱이 뽑혀져 나왔다.

“아악, 아아아악-!”

남자가 비명을 내지르는 사이, 비텐펠트는 수하에게 집게를 다시 건네주고 손에 끼고 있던 장갑을 벗어서 바닥에 던졌다.

보좌관은 아주 자연스럽게 새 장갑을 꺼내 정중한 태도로 비텐펠트에게 건네주었고, 비텐펠트는 그것을 받아들어 느긋하게 손에 끼웠다.

“말, 말 한다고! 말 한다니까아아아!”

거의 악에 받쳐서 눈물 콧물을 다 쏟으며 외치는 남자를 보며, 비텐펠트가 입을 열었다.

“착각하지 않아주시면 좋겠습니다.”

느긋하게 말하는 비텐펠트의 목소리만큼은 지극히 친절했다.

“무, 무슨 소리야…….”

“말하면 고통이 멈추는 것이 아닙니다. ‘제대로’ ‘모든’ 것을 쥐어 짜낼 때까지 당신은 언제라도, 언제까지나 고통받을 수 있습니다.”

덜덜 떠는 남자를 마주 보며, 비텐펠트가 싱긋 웃었다.

“그러니 얼마든지 허위자백을 하셔도 좋고, 함구해도, 우리를 교란할 거짓 정보를 주셔도 좋습니다. 모략가에게 있어 이런 과정을 지켜보는 것 자체가 제법, 꽤나 즐거운 일이니까요. 우리에겐 시간이 아주 많으니, 느긋하게 즐겨보도록 하지요.”

남자는 그 느릿하고 자못 친절한 목소리가 사신의 속삭임이라도 되는 양, 공포에 떨었다.

잠시 뒤.

남자는 절박하게 아는 것을 다 털어놓았다.

아키텐 백작은 수도에서 아주 얌전하게 약혼자와의 원거리 연애나 즐기고 있는 것처럼 굴면서도, 착실하게 크라프테 왕국의 군대나 주요 거점에 첩자들을 뿌려대고 있다.

비텐펠트는 이미 여럿을 잡아들였음에도, 그들을 관리하는 주요 관리자에 대한 단서를 제대로 잡지 못했다는 것에 내심 감탄했다.

그리고 동시에, 과연 리스크 관리에 집착하는 상인 출신다운 한계라고 느끼기도 했다.

이렇게 점조직으로 관리하는 것이 요원이 체포당했을 때 누설되는 정보를 줄여 안정성을 올려주기는 하겠지만, 동시에 조직 간의 연계와 효율적인 침투는 그만큼 힘들어진다.

무엇보다도, 그런다고 해서 모든 정보를 보호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비텐펠트는 각각의 요원들에게서 추출한 정보를 착실하게 교차 검증 해나가고 있다.

정보라는 건 수집이고, 도출이다.

한 명의 요원에게서 추출해낸 정보만으로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여러 명의 정보를 종합적으로 분석해 보면 작고 제각각인 부분도 결국은 이어지는 결론을 도출하는 법이다.

비텐펠트는 그렇게 조금씩 끼워 맞춰져가는 퍼즐 조각을 보며, 슬며시 웃음을 흘렸다.

지금까지 보여준 것만 봐서는 기대치에 살짝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그것도 결국 눈에 보이는 현상에 불과하지.

자, 과연 이 정도가 전부일 것인가.

아니면…….

* * *

프랑지아의 수도, 뤼미에르.

크리스틴 다키텐은 책상에 가득 쌓여있는 서류들을 검토하고, 처리하는 것을 기계적으로 반복하고 있었다.

문득 새소리가 나서 흘긋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자, 저택의 작은 정원에 여름 특유의 푸르른 녹음이 펼쳐진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크리스틴은 잠시 그 풍경에 눈을 두었다가, 이내 다시 서류로 시선을 내렸다.

어느덧 25세의 여름이다.

이제 15세가 된 루이스는 마도 왕국에서 제법 두각을 드러내며 승승장구하고 있는 모양이다.

크리스틴은 마법에는 거의 문외한이지만, 그래도 동생이 원한 것과 재능이 겹친다는 사실은 만족감과 안도감을 주었다.

그게 일종의 얄팍한 보상심리라고 해도.

크리스틴은 서류를 처리해나가다, 이베리카 반도에서의 승전에 대한 보고서를 보고는 살짝 미소 지었다.

약혼 자체는 꽤 어릴 때 정해졌지만, 피에르와의 진짜 인연이 시작된 건 사실상 18세의 약혼 파기.

그로부터 어느덧 7년이 흘렀다. 둘 모두 혼기는 한참 전에 놓쳐버렸지만, 앞으로 남은 시간은 지금껏 보내온 시간보다 훨씬 짧으니까.

그렇게 생각한 순간, 노크 소리가 들렸다.

“백작 각하, 리나입니다.”

그 시간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을 제대로 처리할 필요성이 있지.

크리스틴은 가볍게 눈을 감았다 뜨는 것만으로 포근하던 표정을 무채색의 그것으로 갈아 끼웠다.

“들어와, 리나.”

시녀이자 수족인 리나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와서, 정중한 태도로 보고서를 올리곤 약간 주저하는 듯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크라프테 쪽 요원 둘이 추가로 연락이 끊겼습니다.”

“그래. 가족들에겐 제대로 보상해 주렴.”

“……네, 백작 각하.”

크리스틴은 리나의 표정을 흘긋 살피곤, 물었다.

“다른 직원들의 반응은 어떻니?”

“……다들 본보기로 받아들이고 경거망동하지 않도록 신경 쓰고 있습니다. ...백작 각하의 의도는 제대로 전달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크리스틴은 차갑게 웃었다.

피에르와 손잡은 이후, 아키텐 상단과 그녀가 수족으로 부리는 조직은 꽤나 긴 시간 동안 승승장구해 왔다.

경제적으로 놀랍도록 팽창한 것은 물론이고, 마음만 먹으면 프랑지아를 쥐고 흔드는 것도 불가능은 아닐 정도의 영향력을 확보했다.

그리고 그런 조직의 영혼에는 결국 지방이 끼기 마련이다.

제아무리 기여에 합당한 보상을 준들 주어진 것에 만족하지 않고, 조직의 힘을 자신의 힘으로 착각해 허락되지 않은 특혜 정도는 누려도 된다고 착각하는 자들.

개중에서도 분수를 모르고 눈감아줄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 자들이 가장 위험한 임무를 받아 크라프테로 향했고, 그렇게 연락이 끊겼다.

크리스틴의 조직 내에서 그들이 어떤 운명을 맞이했는지 모를 정도로 어리석은 자들이라면, 애초에 그런 정보를 접할 수 있는 위치에 올라서지 못한다.

크리스틴은 내린 지 꽤 오래되어 차갑게 식은 커피를 입에 대곤, 그 씁쓸함을 음미한 뒤 물었다.

“리나, 너는 어떻니?”

“저……도…… 명심하겠습니다.”

크리스틴은 한때 그녀를 친근하게 아가씨라 부르며 따라다녔던 시녀에게 가볍게 웃어주었다.

처음 크리스틴이 정보 임무를 맡겼을 때만 해도 영광으로 여기고 열심히 일하던 꼼꼼한 시녀는 어느새 권력자의 얼굴이 되어 있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 붙어 다니던 첫 번째 시녀가 돈에 굴복해 그녀를 모함하던 순간을 기억하는 크리스틴으로서는, 두 번째 시녀가 그녀의 경고를 충분히 알아들었기를 기대했다.

루이스가 어떤 선택을 할지, 크리스틴은 모른다.

그러나 루이스의 손에 아키텐이 들어갔을 때, 예전부터 크리스틴을 모셔왔던 자들이 제가 주인이라는 양 착각하며 루이스를 허수아비 취급해버리면 곤란하다.

그래서 크라프테의 시선을 끄는 동시에, 조직을 솎아내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그러나…… 백작 각하. 외람되나, 이대로면 크라프테를 상대로 한 제대로 된 공작은 어려운 것이 아닐지…….”

리나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크리스틴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말대로네. 자신 있게 선전포고를 할 정도의 능력은 차고 넘치는 모양이야.”

크라프테가 예고한 전쟁까지는 아직 남았음에도, 저들의 재상은 아주 친절한 선전포고를 미리 날려주었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에도 프랑지아에는 저들의 비수가 하나씩 예비 되고 있을 테고, 크리스틴도 나름대로 저들의 요원들을 잡아들이고 있지만 그게 완벽할 거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그러면, 어찌하시려는지…….”

불안해하는 얼굴의 리나를 보며, 크리스틴은 슬며시 미소 지었다.

“크라프테의 군대에 직접적인 타격을 입힐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어. 나는 그보다는 다른 쪽을 준비하고 있으니 너는 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기만 하면 돼.”

리나는 약간 자존심 상한 얼굴을 했지만, 이내 허리를 숙여 보였다.

“알겠습니다, 백작 각하.”

리나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크리스틴은 심복이라고 해도 한 사람에게 모든 걸 의존하지 않는다.

결국 가장 효과적이지만 동시에 발각당하기 쉬운 쪽을 리나에게 맡겨서 저들에게 보여주었을 뿐.

크리스틴은 집무실 책상 위에 펼쳐져 있는 지도를 내려다보다가 펜으로 슥- 크라프테 왕국의 주변에 동그라미를 쳤다.

처음부터 의도가 위력 측정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리나의 시도를 통해 저들의 역량은 알 수 있었다.

군사 공작을 벌일 모략가로서, 아마도 유스틴 폰 비텐펠트는 크리스틴보다 한 수 위일 거다.

무엇보다도, 크리스틴의 조직은 결국 상단에서 출발했다.

근본부터 전쟁을 지원하기 위해 만들어졌을 저들의 조직에 맞서기에는 그 구조나 운용방식부터가 다소 불리하다.

저들은 군대나 군사거점에 잠입하는 요원들의 수법을 누구보다 더 잘 이해하고 있고, 누구보다 더 효율적으로 침투하는 법을 알고 있을 테니.

게다가 그는 크리스틴보다 먼저 그녀의 행적을 조사하고, 준비할 시간이 있었다.

저들의 재상은 크리스틴을 그와 같은 모략가로 판단하고, 자신이 능히 이길 수 있을 거라 판단하고 도전장을 던졌겠지.

그러나 모략가로서의 능력이 승부를 결정짓는 것은 아니다.

애초에 크리스틴은 그녀 스스로를 모략가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상단주이자 정치인, 제독, 그리고 모략가.

굳이 따지자면 크리스틴의 입장에서 모략은 수단 중 하나에 불과하니까.

그녀의 약혼자, 피에르 드 라파예트도 군재에서는 라파엘 발리앙을 능가하지 못했으나 승자가 되었듯.

굳이 적들이 자신 있는 분야에 기어들어 가 정면 승부를 펼칠 필요는 없는 법.

모든 것은 피에르 드 라파예트, 그리고 그녀 자신을 위해.

크리스틴은 지도에 그은 원과 다른 나라를 선으로 죽- 그으며 말했다.

“전술과 모략으로 이길 수 없다면, 전략과 정략에서 상대해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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