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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혁명에 단두대는 필요없다-140화 (140/258)

140화. 이베리카 - 불꽃

단체로 마력 폭풍에 휩쓸렸을 때만 해도 어찌 되려나 싶었지만, 생각 외로 다들 빨리 회복할 수 있었다.

가스통과 샨드라, 제롬 모렐은 며칠 지나지 않아 쌩쌩해져서 돌아다녔고, 폭풍의 중심부에서 휩쓸렸던 오스텔과 수인들도 시간은 좀 더 걸렸지만 어떻게든 회복한 모양이다.

그나마 신성력의 보호를 받은 나도 마력 폭풍에 휩쓸린 직후에는 몸이 엉망진창이었던 걸 생각하면, 아직은 에리스보다 자신이 조금 더 능숙하다는 그레모리의 말이 허세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심란하네.

이번에는 방심시켜서 어떻게든 처리했지만, 파이몬도 전력을 다했다면 절대 이렇게 만만하게 잡힐만한 놈이 아니었다.

조금 더 냉정하게 말하면 이번에 우리가 이길 수 있던 건 어디까지나 그레모리의 조력이 있었던 덕분이다.

그레모리야 악마치고는 그럭저럭 말도 통하는 상대고 이번에는 이해의 일치로 서로 협조하긴 했다만…….

만에 하나라도 저 정도로 강력한 신성력을 다루는 서큐버스와 적으로 만나게 되기라도 하면 골치가 아플 것 같은데.

나는 파이몬을 빼돌려간, 무슨 생각 하는지 모를 서큐버스의 얼굴을 떠올리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왜 그러나, 형제?”

“아, 아무것도 아니야. 잠깐 다른 생각 좀 하느라.”

나는 시선을 돌려, 딜루스의 시가지를 바라보았다.

그레모리의 주장은 거짓이 아니었다.

체내의 마력이나 체액을 한 점 남김없이 빨려버린 육체를 마도 공학으로 가동해, 텅 비어버린 혈관에 마력을 주입해 육체를 유지하고 움직이는 꼭두각시.

마력 공급이 차단된 드론들은 불과 몇 시간 만에 완전히 가루가 되어 흩어져 버렸다.

아이러니하게도 수만의 드론 시체를 치울 필요는 없어져서 복구 작업이 편해지기는 하겠다만, 이래서야 그레모리의 말대로 우리가 드론을 고발해 봐야 제대로 된 증거가 없다.

나는 혀를 차곤 온갖 폭발과 전투로 난장판이 되어버린 시가지에서 열심히 복구 중인 딜루스의 주민들을 바라보았다.

“각오는 했지만, 시가지의 피해가 꽤 심하군.”

새삼 크록스의 각오와 그에 따른 이베리카 형제들의 충성이 대단하게 느껴진다.

만약 내가 뤼미에르의 시가지를 폭파시켜가며 적을 막자고 한다면, 솔직히 나는 바로 모가지 당할 것 같은데.

크록스는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히죽 웃더니 답했다.

“그러나 이베리카의 형제들은 무사하다.”

그러고는 발을 들어, 바닥에 널브러진 잔해를 힘주어 밟아 산산조각 내버리며 말했다.

“위험을 꺾고, 하나로서 단결한 형제들이라면 도시는 능히 다시 일으킬 수 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인간과 오크, 고블린에 간간이 보이는 수인들까지 활기차게 잔해를 나르고 치우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래, 그렇겠지.”

내가 자연스럽게 웃으며 답하자, 크록스도 나를 마주 웃으며 말했다.

“그대의 덕분이다, 형제여. 그대가 없었다면 우리는 이 위기를 극복하지 못했을 지도 모르지. 이 크록스와 이베리카의 형제들은 그대와 한 약조를 잊지 않을 것이다. 그대와 프랑지아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순간, 우리는 기꺼이 그대들과 함께 한다!”

“하하, 그거 좋군. 그러면, 나도…….”

나는 아직은 약간 뻐근한 몸을 풀며 말했다.

“기왕 온 김에 일은 확실히 하고 가야지. 드론들도 끝장났겠다, 그동안 살맛 나서 설치던 놈들에게 응분의 대가를 치러주어야 하지 않겠나?”

내 말을 들은 크록스도 송곳니를 한껏 드러내며 흉포하게 웃었다.

“동포를 배신하고 악마에게 팔아치워, 영혼 잃은 인형으로 만든 자들은 그 대가를 치러야지.”

드디어 이베리카의 잔당들을 쓸어내리고, 중앙 대륙에서 악마들의 영향력을 완전히 축출해낼 순간이 왔다.

* * *

이베리카 서쪽의 바다.

목조 범선의 선체 위에 철판을 두른 철갑선이 돛을 활짝 펼친 채, 바다 위를 미끄러지듯 항해하고 있었다.

그 배 안.

“흠~ 흐흠~♬”

수녀복을 입은 금발의 서큐버스 그레모리는 콧노래를 부르며 죽 그릇을 올린 쟁반을 든 채 경쾌한 발걸음으로 복도를 걷다가, 선실의 문을 열면서 기세 좋게 소리쳤다.

“파이몬 어린이~ 죽 먹을 시간인 것입니- 흐이야아악!”

기세 좋게 소리치던 그레모리는 기겁하며 괴상한 소리를 냈다.

침대 위에 걸터앉은 파이몬이 자신의 잘려 나간 뿔 쪽을 손으로 어루만지고 있었기에.

“노, 놀래라. 파이몬, 벌써 일어나 있을 줄은 몰랐던 것입니다. 방금 한 말은 그레모리의 농담 같은 거니-”

“그레모리.”

그레모리는 딸꾹질을 했다.

“……네?”

“드론들은?”

“그야, 마력 공급원을 잃었으니 전부 붕괴된 것입니다.”

파이몬은 탄식하듯 물었다.

“내가 졌나?”

“라파예트 후작이 이긴 것입니다, 파이몬.”

파이몬은 헛웃음을 흘렸다.

“너는 만족하겠네?”

그레모리는 답하는 대신, 당황하던 태도를 지우고 슬며시 웃기만 했다.

“아-아- 설마하니 져버릴 줄이야. 그것도 그렇게 어이없게…….”

드론의 투입 자체가 그의 주장으로 인해 이루어진 것이니, 그 책임도 자신이 져야 할 터다.

아마 대표이사 자리 자체를 잃을 테고, 운이 좋아도 슬로스 사의 입지가 대폭 약화되겠지.

그럼에도, 그레모리가 보기에 파이몬은 딱히 분노하거나 당황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멋져.”

파이몬의 입가에 너무나 황홀한 미소가 걸려 있었으니까.

“파이모온……? 혹시 뿔이 잘리면서 정신에 문제라도 생긴 것입니까?”

“그레모리. 네가 본 라파예트 후작은 어땠지?”

“문제가 생긴 것 같네요…….”

제대로 된 대화가 성립되지 않아서 그레모리가 적당 적당하게 답하자, 파이몬은 잘려나가버린 뿔을 손으로 매만지며 황홀하게 말했다.

“기대 이하인 줄 알았는데, 기대 이상이었어. 완벽하게 완벽해.”

“그레모리의 생각에, 파이몬은 라파예트 후작님 생각이 아니라 본인 생각을 해야 할 입장인 것입니다. 우리는 곧, 어비스 코퍼레이션에 귀환할 테니까.”

“어비스 코퍼레이션…….”

파이몬은 느릿하게 그 이름을 읊더니, 광기에 가까운 미소를 지었다.

원래 파이몬이 라파예트 후작에게 가진 감상은 단순한 흥미에 지나지 않았다.

구시대의 프랑지아 귀족 주제에 혁명에 동참하고, 온갖 돌풍의 중심이 되어서 수백 년의 마생 중 가장 인상적인 인간이였지만 그뿐이었다.

어디까지나 ‘인간치고’ 혁신적이라고 생각했다.

어비스 코퍼레이션이 라파예트 후작에 대해 번번이 오판하고 조금씩 손해 보아 온 것이 쌓이고 쌓여서 더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 되기는 했다.

파이몬은 그에게 휘둘리는 어비스 코퍼레이션을 보며 제법 유쾌하게 생각했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인간으로서 끼칠 수 있는 영향력을 넘어서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어비스 코퍼레이션은 너무나 거대하고 강대하다. 인간 하나 따위가 제아무리 발버둥 쳐도 귀찮게 할 수 있을 뿐이지, 위협이 될 수는 없다.

냉정하게 말해서, 이번 싸움에서 파이몬이 허무하게 패배한 건 그만큼 라파예트 후작을 만만하게 생각했기 때문임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파이몬이 틀렸다.

라파예트 후작은 어비스 코퍼레이션이 판단한 것 이상의 전력을 보여주었고, 생판 처음 볼 드론에 대한 대처도 기대치를 아득히 초월할 수준으로 잘 해냈다.

수상하리만치 잘 해냈다는 점에서, 파이몬은 흘긋 그레모리를 바라보았다.

“……?”

가증스러운 서큐버스, 그레모리는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천진난만한 얼굴로 웃어 보였다.

저 서큐버스의 능력 특성상 증거 따위는 구할 수 없겠지만, 짚이는 것은 있다.

그럼에도, 파이몬은 그것까지 포함해서 라파예트 후작에 대한 평가치를 대폭 수정했다.

본인이 파악해서 대처했다면 이미 한낱 인간을 초월한 지성이요, 어비스 코퍼레이션의 대표이사가 정보를 넘겨줄 마음이 들게 했다면 그것 또한 불확정 변수로서의 능력이다.

당장 돌아가면 대표이사직을 지키는 것부터 힘들어질 거라는 상황 따위, 파이몬에게 조금의 위기의식도 주지 못했다.

희열에 찬 파이몬은 수만의 존재를 잇던 뿔이 잘려나가 공허하게 텅 비어버린 정신에, 새로운 각본을 채워 넣기 시작했다.

저 라파예트 후작이라면, 그를 잘 이용하며 슬쩍 무게 추를 얹어준다면.

이 따분하도록 정체된 권세, 어비스 코퍼레이션을 붕괴시키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 * *

수개월이 흘러, 여름.

게르마니아 제국 서부, 루르 지방.

수염이 덥수룩한 남자가 선술집의 의자에 앉아 신문을 펼쳐 읽고 있었다.

행색은 그리 변변하지 못하고 수염도 덥수룩하지만, 누구도 그 남자에게 섣불리 다가서거나 행패를 부리지는 않았다.

남자의 태도에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귀족적인 몸짓이 묻어 나오고, 수염으로 가려진 얼굴에서도 평민과는 다른 단정함이 드러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신문을 대충 읽으며 넘기던 남자는 한 면에서 멈칫했다.

그 면에는 황무지의 왕을 자처한 야만족 크록스와 프랑지아 혁명군 총사령관 피에르 드 라파예트가 포르투 항구와 동맹 부족들을 연파하고 있다는 내용의 기사가 적혀 있었다.

게르마니아 제국의 신문답게 이교도 야만족과 손잡고 ‘일단은’ 빛의 교단의 신도들이 거주하는 포르투 항구에 맞서고 있는 라파예트 후작을 비방하는 어조로 가득했지만, 어쨌거나 그들도 연전연승하며 이베리카 반도를 빠르게 평정 중인 연합군의 승리를 부정하지는 못했다.

남자, 질 드 리오넬은 가만히 그 기사 내용을 읽다가 눈을 감았다.

-행운을 빕니다, 후작님.

-리오넬이 주었던 도움에는 감사드립니다. ……혹시나 상황이 변하여 생각이 바뀐다면 도울 의향도 있으니, 언제라도 말씀해 주시길 프랑지아의 남부에서, 라파예트 후작과 주고받았던 마지막 말은 결코 잊히지 않는다.

둘 모두 그런 관계가 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주고받은, 공허한 인사.

-가라, 아들아. 가문의 명예를 짊어지고 죽을 자는 하나면 족하니, 너는 이대로 떠나 리오넬의 대를 이어라.

그렇게 말하며 그를 떠나보낸 아버지는 라파예트 후작과의 결투 끝에 죽었다.

뭘, 이제 와서.

질 드 리오넬이 스스로에게 조소하며 신문을 넘기려고 하는 순간, 삐걱대는 소리와 함께 선술집의 문이 열렸다.

질은 무심하게 흘긋 시선만 들어 올렸다가, 문으로 들어선 자가 수행원으로 보이는 자들을 데리고 그에게 접근하자 신문을 보던 손을 슬며시 내렸다.

내린 손으로, 망토 속에서 허리춤에 찬 검의 손잡이를 잡았다.

울부짖는 사자의 문양. 라파예트의 그것과 기묘하리만치 닮은 것이 새겨진 검을.

천천히 다가오던 자는 정확히 검이 닿지 않을 정도의 간격을 두고 멈추어 서더니, 모자를 벗었다.

모자를 벗은 자는 3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안경을 쓴 남자였다.

그는 짐짓 사람 좋은 얼굴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지나가던 여행객인데 잠시 동석해도 되겠습니까?”

질 드 리오넬은 여전히 망토 아래로 검을 잡은 채 답했다.

“다른 곳에도 자리가 많을 텐데.”

“하하하…….”

안경 쓴 남자가 싱글벙글 웃으며 손을 들어 올리자, 그의 수하들이 선술집에 있던 다른 손님들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이, 이보시오, 무슨- 엇. 헉! 되, 됩니다, 되고말고요.”

그걸 제지하려던 주인은 수하 하나가 던져준 돈주머니를 벌려보더니 이내 태도를 전환하고 굽신거렸다.

밑바닥 인생일수록, 위험한 기운을 풍기는 자들은 귀신같이 알아보는 법.

평소엔 술을 퍼마시며 행패를 일삼던 자들은 감히 함부로 반항하지도 못한 채 쫓겨나고, 마침내 선술집이 조용해졌다.

그제야, 안경 쓴 남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자리야 많지만, 프랑지아에서 혁명의 불길을 피해 도망친 리오넬 가문의 후예가 앉은 자리는 하나뿐이지 않습니까?”

질 드 리오넬은 곁눈질로 안경 쓴 자가 데려온 수하들의 전력을 가늠해 본 후, 빠르게 판단을 내리고 검에서 손을 떼었다.

“넌 누구냐.”

“아, 이런, 이런. 소개가 늦었습니다. 크라프테 왕국에서 위대한 대왕 폐하를 모시는 재상, 유스틴 폰 비텐펠트라고 합니다.”

“……크라프테의 재상이라. 높으신 분이셨군.”

비텐펠트는 별로 감흥 없이 말하는 질의 말에도 사람 좋은 미소를 유지한 채 입을 열었다.

“하하, 뭐 잡일꾼에 가깝지요. 주로, 대왕께서는 관심을 두지 않으시는 일을, 제 취향대로 처리하는.”

“그래서, 크라프테 왕국의 귀하신 분이 내겐 무슨 일이지?”

질의 질문을 받은 비텐펠트는 슬며시 시선을 내려, 그가 읽고 있던 신문의 페이지를 보고 싱긋 웃었다.

“기묘하지요? 귀하와 함께 왕국의 내전에서 싸웠던 동지가 귀하의 가문을 멸하고, 이제는 혁명군의 사령관이 되어 동분서주하며 위명을 드높이고 있으니 말입니다.”

질은 대답하지 않았다.

비텐펠트는 그것도 신경 쓰지 않은 채, 말을 이어 나갔다.

“개인적으로, 권선징악의 이야기를 꽤 싫어합니다. 현실에선 정의와 악이 모호함은 물론이고, 정의가 승리하고 악이 패배하는 일 따위는 좀처럼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

“낭만적인 이야기와 달리 현실에서 대의와 정의를 표방하던 이들이 자신의 과오와 마주하면, 그것은 그의 정의에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독선적으로 부정하거나, 혹은 과오일지언정 자신의 길이 더한 선을 위한다는 위선을 보일 뿐이니까요.”

“……높으신 분들은 궤변을 좋아한단 말이지.”

질의 신랄한 말에, 비텐펠트는 싱긋 웃었다.

“저는 대신 다른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그리곤 안경알을 빛내며, 질 드 리오넬을 주시하며 말했다.

“힘이 없으니 감정을 삼킨 채 냉소와 관조를 겉으로 두른 사람에게, 그 정당한 결의를 위한 힘을 쥐여주면 그것을 어떤 식으로 휘두르게 될지. 유치하고 교훈적이기만 한, 재미없는 이야기보다는 이쪽이 훨씬 더 흥미진진하거든요.”

질은 비텐펠트를 뚫어져라 노려보다,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제 와서?”

“이제 와서가 아닙니다, 질 드 리오넬.”

비텐펠트는 다소 뜸을 들인 후, 차갑고 냉소적인 눈동자의 표면 아래에 끈적하게 눌어붙은 불꽃을 들여다보며 진하게 미소 지으며 덧붙였다.

“‘드디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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