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이베리카 - 딜루스 수호전 (3)
아군을 굳건히 보호해주리라 믿었던 성채의 벽은 순식간에 돌파 당했다.
“X발, X발, X바아알!”
심지어 그걸 그 어느 누구도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한 끔찍한 방법으로-사령부가 상정했던 어떠한 경우의 수보다도 더 빠르게 돌파해버리자 남은 건 군사들의 패닉뿐이었다.
“아아아악!”
드론의 손이 마치 칼날처럼 가슴팍을 꿰뚫어버리자, 그 불운한 병사는 처참한 비명을 지르며 피를 쏟았다.
“뭐, 뭐야! 기절만 시킨다며!”
군사들을 공포와 혼란이 잠식하는 것은 순간.
“히이익, 살려줘, 살려줘어어어!”
비좁은 성벽 위에 근접전 특화인 드론들이 뛰어올라 날뛰기 시작하자, 성벽 위에 있던 군사들은 순식간에 휩쓸리기 시작했다.
* * *
“허억, 허억, 허어억-”
데미앙 드 미르보는 달리고 있었다.
이건 미친 짓이다. 저런 걸 무슨 수로 막으라고.
막을 수 있는 걸 막으라고 해야 막으려고 노력이라도 해볼 것 아닌가.
그에겐 가스통처럼 괴물 같은 무예가 없다.
라파예트 후작처럼 자기 몸이 전부 불타도 뛰어드는, 광기에 가까운 집념 같은 것도 없다.
그 인간 같지도 않은 아키텐 백작처럼 머리가 좋은 것도 아니고, 레오폴트 대공처럼 경험이 많지도 않다.
그냥, 그냥 운이 좀 좋아서 지금까지 어떻게든 이겨왔을 뿐이다.
이 전장은 완벽하게 규격 외다. 저런 상황에서 이길 수 있는 법 따위, 그는 배우지 못했다.
그러니까, 이렇게 도망치는 것도.
애초부터 원하지도 않던 자리에 앉아서, 원하지도 않던 전장에 끌려온 거니까--아니, 그러게 남들처럼 그냥 만만한 영지나 털지, 왜 라파예트 후작령을 건드려선. 백작 각하께 총애 좀 받는다고 그렇게 제 잘난 맛에 살더니 정신을 못 차려서…….
“내 잘못이 아니야.”
-‘귀족의 수치’한테 무참하게 패배하고 몸값이나 내주다니, 우리가 작은 도련님을 크게 잘못 본 모양입니다.
“내가 원해서 여기 있는 것도 아니잖아.”
-아버지와 형이 죽은 전장에서 혼자 겁쟁이처럼 도망쳤다죠? 그래놓고 백작이라니, 미르보의 위신도 참…….
“같이 죽을 필요는 없잖아.”
-그래도 명색이 기사가문의 백작인데 일개 상단 출신 가문의 여자한테 그렇게 참패를 당하다니. 어휴, 저 같으면 자결해서 명예라도 지켰을 겁니다.
데미앙은 눈물을 줄줄 쏟으며 달리다가, 멈춰 섰다.
-쯧쯧, 미르보 가문도 이젠 끝장이군.
결국 그가 원했던 건 뭐 하나 얻지 못했다.
어떻게든 살고 싶다고 명예고 작위고 다 단념하고 라파예트 후작에게 생명을 애걸하여 꿈꿔온 모든 걸 내려놓고서야, 무언가를 얻을 수 있었다.
라파예트 후작에게, 아키텐 백작에게 끌려다니며 여기까지 왔다고, 모든 것이 자기 의지는 아니라고 입버릇처럼 우겼는데.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 채 끝나는 것이 더 무섭습니다. 그래서 꿈도 이뤄보고 싶고, 명예도 얻어 보고 싶습니다.
실패하고, 실패하고, 실패하고.
그나마 뭐라도 해보고 싶어서 라파예트 후작에게 비굴하게 굴고, 아키텐 백작에게 천거 받아서 사령관이 된 것 아니었나?
여기서 이대로 도망치면.
영주 대리랍시고 멋대로 굴다가 영지를 말아먹은 무능한 놈, 아비와 형을 버리고 달아난 겁쟁이, 군사라곤 다뤄본 적도 없는 여자한테 무참하게 패배한 머저리.
다음은 뭐지?
-각하께서 혁명군 사령관으로서의 명성을 내려놓으신다면, 뭐가 남습니까?
시건방진 부하의 목소리가 머리를 때렸다.
“X발.”
데미앙은 등을 돌려,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봤냐? 봤어? 난 약하지 않아! 라파예트 그 작자가 이상한 거였어! 봐라, 자식들아! 난 강하다!
기껏 멀어져가던 비명과 소음이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오, 우오오오!
달리고, 달리다.
-미, 미르보 백작 각하 만세!
검을 뽑아 들었다.
“X바아아알!”
욕설을 내뱉으며 단번에 계단을 뛰어오른 데미앙은 냅다 검을 휘둘러서, 바닥에 쓰러진 부하에게 손을 찔러 넣으려던 드론의 목을 날려버렸다.
“허억, 헉, 백작 각하? 도망-”
저도 모르게 말하려다 두 손으로 제 입을 턱 막은 지젤 다비에게 손을 뻗어, 일으켜 세운 데미앙은 아비규환의 수라장이 된 성벽의 꼴을 보곤 마력을 있는 대로 끌어모아 소리쳤다.
“정신 차려, 새끼들아! 성벽 뚫리면 뭐 할지 세워둔 계획 있잖아! 병신같이 왜 여기서 싸우고 있어! 후퇴해, 빨리! 니콜라 네 장군! 살아 있나?”
“흐아아압! 살아 있습니다, 사령관!”
총검으로 드론의 머리를 찍어버리며 등장한 니콜라 네를 보며, 데미앙은 어느 때보다도 열의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척탄병들 집결시키시오! 나와 함께 군사들의 후퇴를 엄호합시다!”
* * *
저 멀리 딜루스 방면에서 아득하지만 확실하게, 연쇄적인 폭음과 포성이 들려온다.
“후작 각하, 아직입니까?”
샨드라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직이야.”
샨드라는 굉장히 답답하다는 얼굴이지만, 일단은 물러났다.
그러는 사이에도, 다시 저 멀리에서 폭음이 들려왔다.
“에, 후작 각하. 웬만하면 지금까진 후작 각하께서 명하시는 대로 따랐지만, 지금 좀 이상한 거 아시죠?”
제롬 모렐의 말에, 나는 아무 답도 하지 않은 채 흘긋 내 옆에 서 있는 가스통을 바라보았다.
그는 묵묵히 나를 기다리고 있지만, 그의 이마에도 땀이 흘러내리고 있다.
……이게 정말 맞나?
그 서큐버스를 믿고 딜루스의 주민들과 크록스의 군대, 심지어 혁명군의 부하들까지 판돈으로 걸고 대기하고 있어도 되는가.
샤쇠르를 풀어서 직접 찾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그러면 우리가 기병대를 빼둔 위치를 발각당할 수밖에 없다. 제때 찾지 못하면, 눈치챈 파이몬이 몸을 피할지도 모른다.
최악의 경우 딜루스로 귀환해, 도시는 포기하더라도 저들의 추격을 차단하며 주민들과 크록스의 후퇴를 지원하는 것까지 상정해두었다.
하지만 결국, 내가 선택을 미루고 있는 순간에도 희생은 발생하고 있을 거다.
어쩌면 악마를 믿고 기다리느니, 지금이라도 다 포기하고 딜루스로 달려가는 것이 조금이라도 피해를 줄이는 길인지도 모른다.
아니, 조금 더. 조금만 더.
피를 말리는 감각 속에, 내 눈에 익숙한 존재가 들어왔다.
금빛과 검은 색이 섞인, 독특한 문양의 날개를 가진 나비.
이내, 익숙한 이질적인 감각과 함께 내 근처에 대기하고 있던 이들과 기병들이 모두 사라졌다.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쉴 뻔해서, 애써 억누르며 말했다.
“……늦어.”
내 앞에 나타난 그레모리는 날개를 펄럭이며 한 바퀴 돌더니, 싱긋 웃었다.
“저도 찾느라 시간이 걸리는 건 어쩔 수 없다고요.”
그리곤 다시 한번 빙글 몸을 돌려, 저 먼 방향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이곳으로부터 북북서 방면, 거리는 대략 1,400야드 가량. 딜루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 호위하는 드론은 3,000가량 있어요.”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많네?”
그레모리는 슬쩍 웃으며 답했다.
“파이몬이 워낙 신중한 편이라.”
“……좋아. 정보가 정확하다면, 거래는 지키지.”
내 답을 들은 그레모리는 진하게 웃더니, 손으로 키스를 날리는 시늉을 하며 윙크했다.
“그리 말씀해주시니 기쁘네요. 그러면, 제가 늦는데도 참을성 있게 기다려주신 후작님께 서비스~”
동시에 그레모리의 손이 빛을 발하고, 부드럽고 따스한 빛이 내게 스며들었다.
마치 에리스의 그것과 같은 축복이.
수녀복을 입은 금빛의 악마가 더없이 경건해 보이는 태도로, 기도하듯 양손을 모으며 말했다.
“후작님께 신의 가호가 있기를.”
몸을 타고 도는 활력을 느끼며- 내가 답했다.
“살면서 받아본 기도 중에 제일 황당한데.”
그레모리가 쿡쿡 웃으며 천천히 흐려지고, 나는 다시 공기가 바뀌는 이질적인 감각을 느꼈다.
“후작 각하? 지금 갑자기 사라졌다가 나타나셨-”
“나중에 설명하지, 가스통. 부대 이동 준비! 북북서, 거리는 대략-”
나는 조금 당황하는 가스통의 말에 자세히 설명해주기보다는 바로 명령하려다가, 멈칫했다.
아, 시발.
1,400야드면 미터법으로 얼마지?
이 멍청한 서큐버스가 야드로 알려줘서 모르겠네.
악마들이나 쓸법한 더러운 단위를 내가 어떻게 아냐고!
* * *
다행히 정확한 거리까지는 몰라도 상관없었다.
그 방향으로 좀 달리다 보니, 드론들이 알아서 마중 나왔으니까.
“모렐!”
“하핫, 옙! 맡겨주십쇼!”
내 외침을 들은 모렐은 장난스럽게 경례하는 시늉을 하더니, 샤쇠르들과 함께 앞장서 나갔다.
빠르게 전력 질주해오던 드론들과 샤쇠르들의 거리가 빠르게 가까워지고-
“핫, 이랴!”
아슬아슬한 거리에서 제롬 모렐과 샤쇠르들이 고삐를 움직여 좌우로 갈라지면서 말의 방향을 틀자, 드론들은 그대로 따라붙었다.
일순, 샤쇠르들을 따라 돌진하는 드론들의 대형이 반으로 갈라지고- 내가 이끄는 흉갑기병대는 그대로 텅 빈 정중앙을 질주하기 시작했다.
나는 흘긋 고개를 돌려, 곡예라도 하듯 드론들과 아주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며 피해 다니는 모렐과 샤쇠르들을 바라보았다.
그레모리가 제공한 정보는 아주 정확하군.
거리유지만 잘하면 드론들은 가장 가까운 적을 우선으로 공격할 뿐이다.
제아무리 공포도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 무시무시한 병기라고 한들, 지능이 없는 꼭두각시의 한계라는 건 그런 거지.
나는 저 앞에 아직도 여전히 바글바글한 드론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한 가운데에 의자까지 가져다 놓고, 우아한 폼으로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핏빛 머리의 악마까지.
“파이몬…….”
그 순간 핏빛의 악마의 머리에 난 뿔에서 보라색의 빛이 번쩍이고-파이몬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드론들이 일제히 이쪽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확실히, 저자가 드론들의 사령탑인가!
“가스통, 샨드라! 맡긴다!”
“후작 각하의 분부대로!”
“맡겨주시죠!”
가스통과 샨드라가 다시 흉갑기병대를 이끌고 갈라지며 드론들을 짓뭉개버리고, 나는 다시 말의 엉덩이를 박차며 옅어진 중앙의 전열로 뛰어들었다.
바로 나에게로 뻗어오는 드론의 팔을 잘라내 버리고, 이내 목을 날린다.
손에 쥔 미스릴 검이 마치 깃털처럼 가볍게 느껴졌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레모리가 확실히 도움이 되긴 하는군 눈앞에 보이는 모든 드론들의 목을 날리며 정신없이 질주하고 있자, 불쾌하리만치 아름다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저를 정말 여러 번 놀라게 하시는 군요, 라파예트 후작님. 이렇게 친히 찾아와주실 거라고 미리 말씀해주셨다면, 이보다는 한결 더 제대로 된 접대를 정성 들여 준비했을 텐데요.”
파이몬은 아주 나태한 얼굴로 보라색 드레스 위에 흰 가운을 걸친 채 다리를 꼬고, 반쯤 눕다시피 한 폼으로 의자에 앉아서 느긋하게 떠들고 있다.
“하, 아주 여유작작하시군.”
나는 눈앞에서 달려드는 드론을 오른손에 든 검으로 베어버리면서, 바로 왼손으로 허리춤에서 단도를 뽑아 내던졌다.
파이몬은 내가 날린 단도를 눈으로 보면서도 전혀 대응하지 않았다. 그저, 그 자세 그대로 늘어지게 하품을 할뿐.
나름 마력도 담아서 날렸는데, 기껏 날린 단도는 파이몬의 마력 방벽에 가볍게 막혀 그대로 산산조각 나버렸다.
천천히.
일부러 뜸을 들이며 아주 느릿느릿하게 몸을 일으킨 파이몬이 드레스 자락을 들어 올리면서 머리를 숙여, 마치 인간의 레이디처럼 인사했다.
“그럼. 어비스 코퍼레이션 산하 슬로스 사 대표이사, 파이몬이 프랑지아 혁명군 총사령관 피에르 드 라파예트 후작님을 맞이하도록 하지요.”
그러나 파이몬이 머리를 들어 올린 순간, 그때까지 두르고 있던 모든 나태함이 날아가 버렸다.
파이몬은 마치 황홀경에라도 빠진 듯한 미치광이의 얼굴로, 두 팔을 벌리며 외쳤다.
“이 순간을 너무나도 오래 기다려왔습니다, 라파예트 후작님! 먼 길을 돌고 돌았지만, 이제라도 본 대표이사의 초대에 응해주신 것, 진심으로 기쁘게 생각합니다!”
“악마 놈들이란, 하나같이-”
나는 바로 말을 몰아, 온 마력을 들이 부으며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파이몬은 이번에도 의자 위에 선 채,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드론이 뛰어들어 내 검을 맞았다.
“쯧-”
그러자마자 동시에 사방에서 드론이 달려들어, 나는 마력을 두른 채 검을 크게 휘둘러 그들을 베고, 쳐내며 거리를 벌렸다.
그 사이 파이몬은 마치 인형사를 흉내 내기라도 하듯, 두 손을 기묘한 모양으로 펼친 채 고했다.
“모처럼 친히 특등석까지 왕림해주셨으니, 슬로스 사의 대표이사가 나태함을 무릅쓰고 손수 펼치는 인형극을 부디 즐겁게 관람해주시길.”
내가 답했다.
“미안하지만 취향이 아니라서. 네놈의 역겨운 극단은 오늘부로 폐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