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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혁명에 단두대는 필요없다-135화 (135/258)

135화. 이베리카 - 딜루스 수호전 (1)

“처분?”

나는 슬며시 눈을 가늘게 떴다.

“내가 알기로 너희는 7개 사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7개 사 중 하나의 수장인 널 처분한다는 건 더 상위 회사라도 있다는 건가?”

그레모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명시적으로는 없어요. 하지만 암묵적으로 있죠. ‘프라이드’사의 대표이사 바엘. 판데모니움의 마왕을 직접 참살하고, 새로운 마왕이 될 수 있었지만 대신 어비스 코퍼레이션을 설립한 대악마.”

“……그 악마가 대표이사 하나쯤 썰어버려도 될 정도로 권한이나 힘이 강하다는 건가.”

그레모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네, 아직까지는 어디까지나 어비스 코퍼레이션의 규정에 따라서만 그 힘을 휘두르고 있지만요.”

나는 가만히 그레모리를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이지, 이 악마.

“사실인지 거짓인지 모르겠는데, 내가 확인해 본답시고 어비스 코퍼레이션에 찌르면 어쩌려고?”

그러자 그레모리는 슬며시 웃었다.

“그러신다면 ‘그나마’ 인간에 호의적이고 어쩌면 후작님과 협조가 가능할지도 모를 반쪽짜리 악마 대신 조금 더 어비스 코퍼레이션의 입맛에 맞는 ‘보다 악마적인’ 대표이사가 러스트 사를 맡게 되겠죠?”

“허.”

만약 그레모리가 지금 나를 기만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내가 섣불리 시험해 봤다가 이 서큐버스가 처분이라도 당하는 건 많이 아쉬운 일이긴 하지.

파이몬의 상태를 볼 때 이 서큐버스보다 더 나은 대표이사가 있기는 할지도 의문이고.

그렇게 생각하게 하려고 일부러 나를 기만하기 위해 허위 정보를 뿌린 걸 수도 있기는 한데…….

나름대로 퍼즐 조각은 맞는데도 불구하고 계속 의심하고 있는 내가 어째 나와 크리스틴을 무작정 적대하던 공화국 같아서 기묘한 거부감이 든다.

그것조차 이 서큐버스가 유도한 건 아닌지 계속 솟구치는 의심 속에서, 나는 결국 계속 묻고 싶었던 걸 물었다.

“이해할 수가 없군. 그래, 네 말대로 인간도 가축을 소중하게 여기거나 하곤 한다. 하지만 그걸 위해 목숨을 거는 경우는 거의 없을 텐데. 너는 뭘 믿고 이러고 있는 거지?”

그레모리는 입가에 손을 가져다 대곤 으음- 하는 소리를 흘리더니, 고개를 슬쩍 기울였다가 다시 똑바로 세우곤 입을 말했다.

“후작님이 화내실 지도 모르겠는데.”

“네가 더 이상 시간 끌면 확실히 화날 것 같기는 해.”

그러자 그레모리는 쿡쿡 웃더니, 이내 표정을 고치고 입을 열었다.

“서큐버스가 꿈에 숨어든다는 건 곧, 그 사람의 무의식 일부를 본다는 의미에요.”

나는 거기서 굳었다. 그러고 보니 이 악마, 크리스틴을 거의 완벽에 가깝게 재현했었지.

내가 눈치챈 건 어디까지나 크리스틴 본인의 심상까지 알아야만 구현할 수 있는 부분 덕분이었고.

“후작님은 꽤, 꽤, 이해하기 어렵더군요. 뭔가가 뒤죽박죽, 말이 안 되는 것들끼리 이어져 있는 느낌?”

“너…….”

어디까지 들여다본 거지? ‘돌아왔다’는 것도?

내가 고민에 빠진 사이, 그레모리는 다른 소리를 했다.

“말이 안 되는 것들끼리 이어져 있는데, 그 가운데엔 신성력이 작용하고 있어서 제대로 들여다볼 수 없어요.”

“뭐라고?”

그러자 오히려 그레모리가 눈을 깜빡였다.

“후작님, 신성력을 통해 뭔가 부자연스러운 일을 겪지 않았나요? 본인도 모르게 이럴 수가 있나?”

부자연스러운 일이야, 겪었지. 회귀. 하지만 그게 신성력으로 일어난 일이라고?

“……전혀 모르겠는데.”

그레모리는 고개를 갸웃해 보였지만, 이내 어깨를 으쓱하며 다시 말했다.

“그래요. 저도 모르겠지만, 일단 저보다 강한 신성력을 가진 존재가 했다는 건 알겠네요. 어쨌거나, 저는 후작님의 무의식을 좀 들여다봤어요. 허락받지 않은 일이니, 조금 늦었지만 사과드릴게요.”

“뻔뻔하기도 하지.”

그레모리는 슬쩍 혀를 내밀더니 한마디 했다.

“뻔뻔함은 악마의 미덕인 것입니다.”

그리곤 이내 표정을 고치더니, 진지한 얼굴이 되어 덧붙였다.

“제가 본 바로 후작님이라면 쓸데없는 호기심으로 저를 처리하는 것보단, 조금이라도 더 나은 길을 가려고 절 이용하려고 하실 거라고 판단했어요.”

“……하.”

뭔가 이렇게 대놓고 말해버리니 더 기묘한 반발심리가 드는데.

그러자 그레모리는 가슴께에 손을 얹더니, 조금 처량한 표정이 되어 물어왔다.

“서큐버스도 이렇게 위험을 무릅쓰고 인간을 도우려고 하는데, 후작님은 의심만 하고 계시니 저는 무척 슬프답니다. 제 진심을 믿을 수 없으시다면, 하다못해 서큐버스인 저를 믿어주시면 안 되나요? 감정도 없는 꼭두각시 드론들로 가득 찬 세상이라니, 서큐버스는 그런 세상에선 살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아~.”

반쯤 나에게 매달리는 듯한 그레모리의 모양새에 나는 굉장히 심란해졌다.

겉만 보면 정말 순수하게 자신을 믿어주지 않아서 서글픈 여인의 모습인데, 애초에 무해해 보이려고 작정하고 허당처럼 굴었다고 자기 입으로 실토한 서큐버스잖아.

지금도 은근슬쩍 그러면서 경계심을 깎아내리고 있고.

와중에 내 회귀에 신성력이 관계되었다는, 심지어 성녀인 에리스에게서도 듣지 못했던 정보가 마음 한구석을 어지럽힌다.

하지만, 딱히 다른 대안도 없군.

나는 결국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좋아, 거래 성립이다.”

그레모리는 화사하게 웃더니 눈을 빛내며 소리쳤다.

“현명한 선택인 것입니다! 제가 진~짜 잘 해드리는 것입니다!”

뭘 잘 해줘? 이거 일부러 이러는 거지?

* * *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나는 그동안 크리스틴과 탈레랑, 에리스에게 각각 이베리카 반도의 상황과 안부에 대한 편지를 써서 보냈고, 그 사이 니콜라 네와 제롬 모렐이 이끄는 2,000의 후발대도 도착했다.

하지만 전황은 좋지 않다.

크록스와 나는 이베리카 반도 전역이 그려진 지도를 들여다보며 얼굴을 구기고 있었다.

“이놈들, 노리는 것이 너무 뻔한데.”

내 말을 들은 크록스가 거대한 송곳니가 난 입가를 씰룩거리며 내뱉었다.

“악마에 빌붙은 배신자들…….”

크록스는 드론의 위협을 방어하기 위해 다른 전선의 부대를 일부 딜루스로 불러들였는데, 그러자마자 지금껏 각기 소굴에 처박혀 있던 포르투 항구와 협력 부족들이 다시 공세를 시작했다.

그것도 이베리카 형제들의 영역을 외곽부터 갉아먹어 들어가는 모양새로.

크록스의 부하들은 나름대로 분전하는 모양이지만 그렇지 않아도 5,000이나 쓸려버리며 병력에 구멍이 났는데 드론들이 시우다드까지 점령하며 돌출부를 형성한 상황이다.

드넓은 영역에서 이어지는 공격에 크록스의 부하들은 계속해서 밀려나고 있고, 그렇게 아군을 밀어내는 공세의 공통점은 명확하다.

모든 공세가 밀려난 군대와 주민들이 딜루스로 철수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덕분에 딜루스의 시가지는 몰려온 피난민들로 가득해졌다.

이건 보나 마나 악마들의 지시겠지.

크록스의 형제들을 전부 딜루스로 몰아넣고, 딜루스를 함락시켜서 한 번에 그 많은 주민들을 잡아들일 셈이다.

나는 슬며시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주민들을 대피시킬 만한 지역이 있나?”

하지만 크록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베리카 북부의 토지는 척박하다. 주민들이 살아갈 수 있는 땅은 적고, 아무 대비도 안 된 채로 겨울에 대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땅은 더더욱 없어. 지금 딜루스에 몰려든 주민들을 먹이는 것도 그나마 프랑지아와 형제의 도움 덕분이네.”

“……그렇군.”

수도 딜루스는 그래도 북부의 교역항 빌바오까지의 도로가 잘 닦여 있어서, 프랑지아에서 수입되는 식량을 어떻게든 운송하여 배분하는 것이 가능하다.

하지만 주민들을 북부의 드넓은 땅에 퍼뜨리면 그마저도 힘들겠지.

“그렇게 되면, 외통수인가.”

결국, 어떻게든 주민들을 끌어안은 채 딜루스에서 방어전을 펼치는 수밖에 없다.

마침 딜루스에는 어느 욕심 많은 오크가 지은 거대한 성채도 있으니까, 방어전에는 제격이지.

“지금이야 시가지에 있다지만, 공격이 시작되어 성채에 주민들을 전부 수용하게 되면 식량이 그리 오래 버티지 못하는 것이 문제인데…….”

크록스의 우려는 내가 해결해주었다.

“저들은 포위하고 우리를 말려 죽인다는 선택지는 고르지 않을 거야.”

“흠?”

“산 채로 잡아가기 위해 비효율적으로 살상을 배제한 전투까지 벌이던 적들이다. 기껏 잡아들이기 위해 딜루스로 몰아넣은 주민들이 성채 안에 갇힌 채 굶주리고 역병이 돌게 만드는 것보단, 온전하고 빠르게 잡아들이려고 하겠지.”

“하! 오만하군!”

크록스가 두 팔로 쾅- 소리 나게 책상을 내리쳤다.

강대한 오크의 팔뚝에서 근육이 꿈틀대며 춤을 추는 걸 보자니, 그의 분노가 어느 정도인지 알만하다.

잠시 분노에 몸을 떨던 크록스는 진정했는지, 손으로 송곳니를 매만지더니 물어왔다.

“정작 적들은 아직도 시우다드 근처에 머무르고 있는데, 그건 왜지?”

“……아무래도, 첫 전투에서의 문제점을 보완하고 있는 모양이더군.”

“흠, 과연. 아키텐 백작의 수완이 굉장하군, 형제.”

크록스의 말을 들은 나는 살짝 웃어 보이기만 했다.

우리를 포위해서 말려 죽인다는 선택지는 없다는 것까지 포함해서, 그레모리가 준 정보다.

크리스틴의 첩보망이 이베리카에까지 깔려있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악마에게 들은 정보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

잠시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크록스가 입을 열었다.

“면목이 없군, 형제여.”

“갑자기?”

크록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 있게 우리 힘으로 이베리카를 통일하겠노라고 호언장담을 했는데, 이렇게 궁지에 몰렸으니 할 말이 없어. 형제도 형제의 사람들을 책임져야 하는 몸이니, 철수해야 한다면 말하도록 하게.”

“…….”

그 자신감 넘치고 호쾌하던 오크에게 이런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는걸.

“하지만 크록스, 그대는 전쟁 도중에 내 부름에 응해 군대를 이끌고 달려와 주었다.”

어쩌면 그 요청을 무시하고 이베리카에서 더 유리한 상황을 만들 수도 있었을 텐데, 가장 절박한 순간에 크록스가 와주었기에 우리는 레오폴트 대공에게 이길 수 있었다.

“그때 나는 그대에게 빚을 졌노라고 했지. 나는 빚을 갚기 위해 왔는데, 그대의 상황이 어렵다고 해서 떠나서야…….”

나는 잠시 말을 골랐지만, 이보다 더 적절한 말이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그대로 입 밖으로 내었다.

“그래서야, 오히려 이쪽이 야만족이라 불려야 합당하지 않겠나?”

크록스는 입가를 씰룩거리더니 웃음을 터트렸다.

“으하하하! 형제의 말이 옳다! 이거 민망하구만! 이 크록스도 아직 갈 길이 먼 모양이야!”

“게다가, 나도 감정적인 이유만으로 여기 남는 것이 아니야. 악마들의 위협은 명백하고, 노골적이다. 그대들이 무너지는 걸 방관했다가 그다음 차례가 프랑지아가 아니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지.”

나는 지도 위, 시우다드에 올려져 있는 악마 모양의 말을 들어 올렸다가, 탕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그렇다면 여기서, 프랑지아가 전화에 휩싸이기 전에 분쇄한다. 그것이 혁명군 총사령관으로서의 내 판단이다. 물론, 그와 별개로 제대로 이번 빚에 대해 셈을 받아낼 테니 그대도 각오해두라고.”

“바라던 바! 이베리카의 형제들은 모두가 야만족이라 부를 때 우리를 받아들여준 그대의 관용과, 이토록 위험한 순간 함께해 준 헌신을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그대가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순간, 이 크록스가 할 수 있는 모든 도움을 주리라 약조하지!”

나는 호언장담하는 크록스를 보며 싱긋 미소 지었다.

무엇보다, 나도 믿는 구석이 있기는 하니까.

100% 신뢰할 수는 없겠지만, 걸어볼 만한 도박 아니겠어?

우리의 불행을 제물 삼아 배를 불리고 마치 벌레처럼 취급하는 저 악마들에게 한 방 먹이고 비극의 연쇄를 끊어낼 수만 있다면야, 까짓 서큐버스 한 번쯤 믿어볼 수 있지.

“그러면 이베리카 형제들의 왕, 크록스. 그대와 백성들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모든 걸 걸고 도박을 할 각오가 있나?”

크록스는 히죽 웃더니, 방 안이 울리도록 거대한 외침으로 답했다.

“나와 이베리카의 형제들은 악마들에게서 벗어나 자유를 쟁취하겠노라고 맹세했으니, 적들 앞에서 도망칠 자는 어디에도 없다!”

나는 그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판돈은 수도 딜루스와 그곳에 몰린 무수한 이베리카의 백성들.

“좋아. 그러면, 작전 개요를 설명하지.”

누구도 감히 승리를 장담할 수 없을 악마들에게 이기기 위해.

결코 실패해선 안 될 도박을 시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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