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혁명에 단두대는 필요없다-131화 (131/258)

131화. 이베리카 - 시우다드 전투 (1)

프랑지아와의 무역을 위해 건설된 항구도시이니만큼, 빌바오에서 딜루스로 이어지는 도로는 제법 잘 깔려 있었다.

덕분에 빌바오 항구를 떠나 남하한 우리들은 며칠 걸리지 않아 딜루스에 도착할 수 있었다.

두 번째로 방문한, 크록스와 이베리카의 형제들이 세운 수도.

“오오-”

어느 족장이 왕처럼 군림하겠답시고 지은 성채 주변으로 자리 잡은 대도시의 광경은 프랑지아에서 온 우리가 보기에도 제법 그럴싸하다.

특히나 프랑지아의 베르됭 요새보다도 큰 규모의 성채를 보고 감탄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사실상 이베리카에 존재한 적 없던 통일 국가의 수도라서 그런가, 시간이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았는데도 지난번에 왔을 때보다 확연히 커진 것 같네.

제법 감회가-

“야만족의 도시에는 아까울 정도로 근사한 성채- 헛, 죄, 죄송합니다, 후작 각하!!”

내 감회를 박살내버린 데미앙 드 미르보는 내 눈총을 받고는 바로 사죄했다.

“씁, 한 번만 더 그런 소리 하면 사병들과 함께 재교육당할 줄 아시죠.”

그나마 도시 가까이 도착해서 핫산과 샨드라가 크록스에게 고하겠답시고 먼저 가서 망정이지.

“소, 송구합니다…….”

데미앙은 연신 고개를 숙이며 굽신거렸지만, 나는 갑자기 찬물을 끼얹은 기분이었다.

아직도 이런 생각을 하고 입으로 내는 멍청이가 남아 있는데, 심지어 그게 혁명군에 단 둘뿐인 사령관 중 하나라니. 허.

샨드라와 지난 전쟁에서 도움 받은 건으로 인식이 많이 개선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갈 길이 먼걸.

인간의 편견이라는 걸 내가 너무 쉽게 생각한지도 모르겠다.

“……혹시 모르니까, 그대 같은 실수 하는 자가 나오지 않도록 제대로 단속하세요. 우리가 여기 왜 와있는지도 모를 만큼 멍청한 작자가 사령관 자리에 앉아 있는 건 아니리라 믿죠.”

빚도 갚고 이들을 확고한 동맹으로 삼아서 크라프테와 전쟁에서 도움받으려고 온 건데, 하찮은 편견으로 그걸 망쳐놓기라도 하면 아주 그냥.

“아, 알겠습니다. 후작 각하.”

“만에 하나라도 이들을 야만족이라고 비하하거나 멸시하다가 문제라도 일으키는 놈이 나오면 그땐 진짜…….”

나는 굳이 말로 하는 대신 데미앙을 뚫어져라 노려봐주었고, 데미앙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여, 여부가 있겠습니까…….”

“좋아, 믿겠습니다.”

데미앙 드 미르보가 인성이야 어쨌건 자기 보신을 위한 조치 하난 확실하게 하는 인간이니, 부대를 뒤집어엎든 뭘 하든 해서라도 이런 일은 없게 만들겠지.

그건, 그렇고.

나는 눈을 가늘게 뜬 채로 딜루스의 분위기를 살폈다.

내가 처음 사절단 이끌고 왔을 때만 해도 군대가 길을 지키며 맞이해주는 것은 물론 엄청난 환영인파가 있었고, 크록스가 근위대까지 동원해서 다소 위압적이지만 예우를 갖춰 환영했었는데.

지금 우리가 지나는 길에 인파가 좀 나와서 환영해주고 있기는 한데, 군대는 없고 어째 어수선한 분위기를 감추지 못하고 있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무언가 느낌이 싸한데.

그러고 보니 크록스도 느낌이 좋지 않다고 했다지 않았던가?

그렇게 생각할 때쯤, 맞은편에서 말을 타고 헐레벌떡 뛰어오고 있는 핫산과 샨드라의 모습이 보였다.

“쯧.”

무슨 일이 터진지는 몰라도, 보통 일은 아닌 것이 확실하군.

불길한 예감은 왜 틀리질 않냐.

* * *

전날까지만 해도, 크록스는 수도 딜루스에서 우리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일 아침 급보가 들어왔고, 워낙 심상치 않은 사태였는지 바로 군대를 이끌고 출정해버렸다고.

송구하다며 연신 사과하는 핫산과 샨드라를 괜찮다고 안심시켜주고, 딜루스에서 딱 하루를 휴식한 우리는 바로 크록스의 뒤를 따라 남하했다.

다행히 데미앙을 미리 조져둔 덕분에 함부로 불만을 표하거나 이베리카의 형제들이 무례하다는 등의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 자들은 없었다.

역시 데미앙 드 미르보가 다른 건 몰라도 자기 안위가 걸린 일 하난 확실하게 한단 말이지.

어쨌든 그리 멀리 갈 필요도 없었고, 우리는 딱 이틀을 남하한 끝에 시우다드에서 크록스의 부대와 합류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합류한 크록스에게서 들은 소식은 그리 달갑지 못했다.

“이틀 만에 최전선의 주둔지 세 곳이 전멸이라고?”

“그래, 형제. 그래서 그대들을 맞이하지도 못하고 다급하게 내려왔어. 미안하네.”

그 호쾌하던 오크, 크록스가 제법 심란하다는 투로 말해서 나는 손사래를 쳤다.

“아니, 그런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지. 오히려 좋은 판단이라고 생각하는데. 정확히 좀 알려줄 수 있겠나?”

동맹국이긴 해도, 허무하게 치명적인 패배를 당한 상황이다.

굳이 알려주기보다 숨기려고 들 수도 있겠지만, 크록스라면 여기서 그런 우를 범하지는 않겠지.

크록스는 역시나 굵직한 손가락으로 지도를 짚으며 입을 열었다.

“공격받은 곳은 여기, 여기, 그리고 여기네.”

크록스가 전멸이라고 표현해서 설마했는데, 진짜 장난이 아닌데.

“전부 포르투 항구 쪽 전선과 가까운 곳이군.”

내 말을 들은 크록스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답했다.

“그래, 전령들의 보고대로 들으면 시간 순서대로 움직이며 순차적으로 습격한 모양이야.”

“……순차적으로? 동시다발적인 것이 아니라?”

이거 뭔가 이상한데.

세 곳의 주둔지 사이에 거리가 은근히 있다.

이틀 안에 저걸 순차적으로 습격하려면 군대가 거의 쉬지 않고 행군해야 가능한 수준일 텐데.

하물며 전투를 치르면 이기든 지든 뒷수습에 시간이 소요되기 마련이다.

“……부대를 나눠서 공격한 건가?”

그렇다기엔, 부대 배치가-

“그랬다면 뒤쪽 주둔지들을 습격하러 가는 부대가 발각되었어야 해.”

“……피해 규모는?”

“손실은 내 10번째 심복을 비롯해 지휘관 다수, 그리고 병력 5,000가량.”

5,000. 내가 데리고 온 병력보다도 많다.

장기간 대치중이었다고는 해도, 적의 주력인 포르투 항구와 대치중인 전선이었으니 병력이 많이 배치되어 있던 것도 이해할만하다.

와중에, 크록스는 전멸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면 소수병력에 기습당한 수준이 아니라, 아예 저 정도로 많은 병력에 궤멸적인 피해를 입힐 수준의 적 주력군과 맞붙어서 쓸려나갔다는 소리다.

그럼 당연히 앞에 돌출 되어 있는 주둔지에서 그 정도 규모의 군대를 놓쳤을 리도 없으니...

“정말로 순차적으로 이 정도 거리에 포진한 주둔지 셋을 쓸어 버린거군. ……이틀만에.”

전술적인 상식으로는 말이 안 되는데, 결론이 이미 나와 있으면 상식이 잘못된 거니 어떻게든 끼워 맞춰보는 수밖에.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생존자들은 뭐라고 하나?”

크록스는 미간을 구기더니 송곳니를 손으로 매만지고, 이내 침울한 기색으로 말했다.

“……정확한 정보가 없어.”

“5,000이나 당했는데 정보가 없다니?”

하다못해 패잔병이라도 있을 거 아니야.

이건 이틀 만에 주둔지 세 곳과 5,000이 쓸렸다는 것보다 더 충격인데?

“세 곳 전부 다, 처음 습격이 시작할 때 보낸 전령 외엔 후퇴해온 병력이 없어.”

“아니…….”

패주하는 군대라는 건 죽기 살기로 도망치기 마련이고, 추격하는 군대는 결국엔 지쳐서 추격을 멈출 수밖에 없다.

그런데 처음에 공격받기 시작할 때 보낸 전령 외엔 패잔병조차 안 남았다고?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는 몰라도, 그동안 잠잠하던 악마들이 뭔가 대단한 수작질을 부렸을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데.

“……전령들의 보고는?”

“여태껏 본 적 없는, 이상할 정도로 질서정연해서 한 몸처럼 움직이는 군대가 엄청난 숫자로 몰려왔다고 하네. 세 곳 다 똑같아. 그 이상 본 자들은 어찌 되었는지 모르겠군.”

이상할 정도로 질서정연해서 한 몸처럼 움직이는 군대라. 망할 대왕의 군대가 생각나긴 하는데…….

“적들이 기병대로 구성된 군대였다고 하나?”

원래 이베리카 반도에서는 말이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말 자체가 더위에 꽤 약하기도 하거니와, 엄청난 양의 건초와 물을 먹어대는 생물이다.

평야지대가 적고 산지가 많은데다 심지어 덥기까지 한 이베리카에서 군마로 활약시키겠다고 키우기엔 비용이 너무 많이 드는 셈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이베리카 현지의 사정이고, 당장 우리도 본국에서 보급받으며 운용할 생각으로 기병대를 대동해 왔다.

어비스 코퍼레이션이 못할 것도 없지. 적이 기병대를 대거 데려왔다면 추격섬멸 당했다는 걸로 어느 정도는 설명이 된다.

“아니, 기병은 보이지 않았다던데.”

“…….”

뭐지?

그러니까 군대가 행군만 해야 이틀 안에 닿을 수 있을법한 거리를 둔 주둔지 세 곳을 이틀 만에 쓸어버리고, 기병도 없는 적들이 패주하는 부대를 완전히 전멸시켜버렸다고? 그것도 5,000이나?

크록스는 분명히 10번째 심복도 당했다고 했다. 크록스가 심복이라 부르는 자들은 하나같이 우수한 인재들이니, 당한 쪽이 아주 무능한 바보라서 그렇게 당한 것도 아니라는 건데.

내가 아는 전쟁의 상식이 통째로 부정당하는 느낌이다.

나는 슬며시 고개를 돌려, 멍청한 얼굴을 하고 있는 데미앙 드 미르보를 바라보았다.

...내가 기대할 놈에게 기대해야지.

가스통도 미안하지만 이런 쪽에선 별 도움이 되지 않고.

아.

나는 미약한 기대를 걸고 뒤에 서서 우리의 회의를 보고 있던 지젤 다비를 돌아보았지만, 다비도 송구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떨구었다.

“형제도 잘 모르겠는 모양이군.”

크록스는 조금 낙담한 얼굴이었다. 이 용맹 빼면 시체인 오크가 왜 이곳에 가만히 있나 했더니, 피해는 큰데 상황파악이 안 되니 나라도 기대해본 모양이군.“

“……그래. 솔직히, 이런 건 완전히 처음 보는데. ……그래도 하나는 알겠군.”

나는 지도를 손으로 짚었다.

“적이 공격한 주둔지의 위치들을 본다면 적의 목표는 딜루스일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데, 각 거점 간 기동거리를 봐서 똑같은 속도로 진격했다면 진작에 이곳에 도착했어야 해. 전술적으로도 그런 기회를 놓칠 이유가 없고.”

그러나 초반에 기습으로 주둔지를 세 곳이나 몰살시켜 버려놓고, 그 기습의 우위를 마저 살리지 않은 채 삼일을 허비했다.

“그런데 그러지 못했지. 저들의 군대도 그런 기세로 공세를 계속 이어나갈 수는 없는 거라고 생각하면 타당해. 무리한 강행군으로 인한 휴식 때문이든, 아니면 보급 때문이든.”

크록스는 송곳니를 매만지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으로서는 단서가 그 정도밖에 없군. 싸워보면 알겠지.”

그러던 중, 막사의 천막이 걷히고 익숙한 얼굴의 표범 수인이 나타났다.

“왕이시여, 적들의 군대가 이곳으로 접근 중입니다.”

다섯 번째 심복 오스텔의 말을 들은 크록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

“드디어 왔군. 놈들에게 대가를 치르게 해주자!”

“우오오오오! 형제들의 복수를!”

일제히 부르짖는 크록스의 제장들은 참 용맹해 보이긴 한데…….

……아마 당한 자들도 이러고 뛰어나갔다가 당했을 거란 말이지.

크록스의 병력이 2만, 내 병력이 3000. 크록스와 이들의 용맹함을 생각하면 그런 일은 없어야 하겠지만…….

이미 퇴각조차 못하게 군대를 쓸어버린 전적이 있는 놈들이 이쪽으로 공격해온다는 건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 거겠지.

이베리카에서 내내 싸운 크록스의 군대가 처음 본다는, 뭔지도 모를 미지의 적.

그렇다면 어비스 코퍼레이션이 직접 나섰을 가능성이 있다.

아무것도 모른 채 무작정 회전에 임했다가, 여기서 허무하게 대패해버리면 바로 이들의 수도 딜루스가 위험해진다.

“……크록스.”

“말하게, 형제.”

“보병대는 그대의 지시를 받게 하지. 이번 전투에서 내 기병대는 예비대로 따로 움직여도 되겠나?”

크록스는 찰나도 고민하지 않고 답했다.

“형제의 뜻대로 하게!”

하여간 호쾌하긴.

“아, 맡겨달라고.”

유사시 위험에 처할 본대의 퇴각을 엄호하기에 기병대는 가장 적절한 병과니까. 위험한 곳에 뛰어들어 커버하는 것만큼은 내가 자신 있거든.

그렇게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선 나는 데미앙 드 미르보와 시선이 마주쳤다.

“후작 각하, 저도-”

“안 돼.”

끝마치기도 전에 말이 잘린 데미앙은 억울하다는 얼굴이 되었다.

“동맹 지원하러 왔잖나. 전부 예비대로 빠질 거면 우리가 뭣 하러 여기 왔나? 보병대 지휘는 누가 하지? 지휘관 없이 보낼 건가?”

“그, 그렇지만…….”

뭐, 왜. 총사령관인 나만 예비대로 빠지니 부러워?

“나는 절실할 때 지원하려고 예비대로 빠지는 건데 그대는 위험하기 싫어서 빠지고 싶은 거잖아.”

“그, 그건…….”

데미앙이 얼굴을 구기면서도 차마 부정하지는 못해서, 나는 데미앙의 어깨를 툭툭 쳐주며 말했다.

“기대하지, 위험할 때만 유능한 ‘방어의 명장’.”

이 인간은 자기 생명의 위험을 느껴야 제 능력을 발휘하니까, 이 정도가 딱 좋다.

“자, 그럼.”

나는 데미앙과 가스통을 비롯한 지휘관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것은 프랑지아의 전쟁이 아니지만, 동시에 우리의 전쟁이기도 하다. 혁명이 무엇 때문에 터졌는지 잊지 마라. 국민을 악마들에게 팔아치운 국왕에 맞서 일어선 우리들이 동맹의 동포들이 악마들에게 팔려가도록 내버려 둔다면, 그것은 위선에 불과하다.”

어비스 코퍼레이션과의 첫 전투인가.

“가자, 저 악마들에게 우리의 가치를 보여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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