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이베리카 - 드론
이베리카 반도 남부, 대치 중인 전선.
이베리카의 형제들은 포르투 항구 근처까지 진격했지만, 더 이상 전진하지 않고 대치하는 중이었다.
우선 포르투의 주력군을 묶어둔 상태에서 다른 동맹 부족들의 영역을 확보하는 것이 더 용이하다는 전략적 판단 때문이었다.
실제로도 유효한 전략이었고 크록스가 휩쓸고 다니면서 이베리카 반도의 대부분이 넘어왔지만, 대치 중인 병력들 입장에선 지루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당연히 그런 지지부진한 대치가 꽤 긴 시간 지속되면서, 일선 병력들의 긴장은 다소 풀려 있었다.
크록스가 경계를 늦추지 말라는 지시 정도는 간간히 했지만, 그런 명령을 듣고 마음을 다잡는 것도 한 두 번이지 전투도 없는데 계속 그러는 것도 힘드니까.
그래서 불침번으로 나온 오크는 망루에 기대어 꾸벅꾸벅 졸고 있는 인간을 보고도 피식 웃고 말았다.
“이봐, 일어나. 교대다.”
“어? 아아,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나.”
“처자고 있었으니 시간이 빨리 갔겠지.”
“하하, 미안, 미안. 근데 너무 지루한걸.”
실없는 대화를 주고받던 중, 오크가 갑자기 눈을 가늘게 떴다.
“...저건 뭐지.”
“음? 뭔데?”
인간도 시선을 돌렸으나, 어슴푸레한 어둠 속에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에이, 아무것도 없...어?”
그렇게 생각한 순간 저 어둠 속에서 마치 파도치듯 움직이는 무언가가 보였다.
“뭔가 접근한다!”
“어, 어이! 불 밝혀!”
긴가민가하던 것도 잠시, 순식간에 소름이 돋은 불침번들의 외침이 연쇄적으로 퍼져 나가고, 이내 잠든 군사들을 위해 일부 꺼두었던 횃불과 모닥불이 전부 피어올랐다.
지근거리만 보이던 어두운 구릉지가 순식간에 대낮처럼 밝아졌다.
“헉...”
그리고 모두가 보았다.
구릉지를 뒤덮은 채 접근 중인 적들을.
구릉지 전체를 뒤덮을 만큼 많은, 바글바글한 적들이 파도처럼 움직이며 접근하고 있다.
적. 분명히 적이다. 그러나 누구도 그것을 군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뭐야 저게.”
파도가 친다.
지평선을 뒤덮을 만큼 많은 적들이 완전히 동일한 동작으로, 한 걸음을 내딛는다.
다시 또 한 걸음에 파도가 쳤다.
빠르게 달려오고 있는 것조차 아니다. 다만 천천히 걸어오고 있을 뿐.
그러나 단 한 치의 오차조차 없이, 생물이라면 당연히 있어야 할 걷는 동작의 낭비 따위가 없다.
마치 인간을 어떻게 움직이면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최대의 효율로 이동할 수 있는지를 연구하고, 그에 짜맞추어놓은 듯한 각진 움직임은 부자연스럽다 못해 기괴하다.
분명히 움직이고 있는데 생기나 감정 따위가 느껴지지 않는, 단지 ‘전진한다’라는 목적성만을 가지고 움직이는 듯한 그 공포스러운 물결의 접근에 모두가 말을 잊은 채 멍하니 서 있었다.
“전투 준비!”
뒤늦게 뛰어나온 크록스의 10번째 심복, 브롤의 외침이 울려 퍼지고서야, 정신을 차린 군사들이 집결하여 전투태세를 갖추기 시작했다.
아군이 그렇게 분주하게 난리를 치는데도, 적들의 움직임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그저 파도치듯 일정한 걸음걸이로 걸어오고 있을 뿐.
브롤은 그 광경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전장의 흥분이나 긴장감 따위가 전혀 없는 그 움직임이 오히려 초조함을 부추긴다.
“사격 준비!”
브롤의 지시를 받은 고블린과 인간들이 일제히 활을 들어 올리고-
“발사!”
하늘로 솟구친 화살들이 접근 중인 적들에게 빗발치듯 떨어졌다.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분명히 화살이 흩뿌려졌는데, 적들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이쪽으로 접근 중이다.
“저, 저게 뭐야!”
척-
제법 가까워진 거리에 기계처럼 일제히 움직이는 적들의 발소리가 울려 퍼진다.
“어떻게 합니까?”
척-
크록스의 자랑스러운 10번째 심복이자 용맹함을 인정받은 지휘관, 브롤조차 그 공포스러운 울림에 무어라고 명령하지 못했다.
“재, 재차 사격 준비!”
척-
활을 쥔 자들의 손이 덜덜 떨려서 느려진 재장전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초조한 얼굴로 검과 창을 들고 전방에 선 자들은 가까워진 거리로 적들의 형상이 더 잘 보이기 시작했다.
인간이라기엔, 지나치게 말랐다.
“헙-”
무엇보다도, 몸에 화살이 박힌 채 접근 중인 자들이 보인다.
몸에 빤히 화살이 박혀있는데, 마치 아무것도 못 느낀다는 듯 다른 자들과 완전히 동일한 동작으로 걸어오고 있다.
“발사!”
다시 한번 화살들이 솟구치고-
척-
이번에는 브롤의 눈에도 똑똑히 보였다.
척-
적들은 빗발치는 화살에도 생물이라면 당연한 행동들, 움츠러들거나 방어하려는 어떤 움직임조차 취하지 않았다.
척-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화살비 속에서도 기계처럼 일정한 동작으로 발걸음을 내디딜 뿐.
척-
화살에 맞은 몇이 쓰러지기는 했다.
그러나 대부분은 몸에 화살이 박힌 채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계속 접근하고 있다.
“히, 히익, 괴물들!”
척-
“이, 이건-”
후퇴해야 하나?
척-
이제는 지면의 진동이 느껴질 듯한 거리에 브롤의 머리가 혼란에 빠졌을 때, 일정하게 지면을 울리며 진군해오던 소리가 그쳤다.
모두가 그 고요한 변화에 소름을 느끼는 순간, 접근해오던 기괴한 인간의 형상들이 고함조차 없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 * *
“흐어억!”
브롤은 비명을 내지르며 깨어났다.
그러나 벌떡 일어나려던 몸은 우스꽝스럽게 넘어져 버렸다.
“으윽...”
그제야 자신의 몸이 밧줄로 묶여있다는 것을 깨달은 브롤의 머릿속에 번개가 내리쳤다.
끔찍한 광경.
아무런 소리조차 내지 않은 채 달려든, 비쩍 말라비틀어진 인간처럼 보이는 무언가들.
울려 퍼지는 비명과...
“흡...!”
브롤은 그의 옆에 서 있는 그 적들을 보고는 숨을 삼켰다.
‘그것들’은 미동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육체의 형태는 인간이다.
보다 정확히는, 마치 인간을 바싹 말려놓아 말라비틀어진듯한 형태다.
보기에는 차라리 시체에 가까운 모양새지만 브롤은 저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저 말라붙은 몸에서 어떤 힘이 나오는지를 똑똑히 보았다.
원리는 모르겠지만, 크록스의 10번째 심복으로서 힘이라면 자신이 있는 그가 몇 대 얻어맞자 버티지 못하고 기절해버렸을 정도다.
무엇보다도.
브롤은 자신이 직접 도끼를 휘둘러 어깨를 반쯤 쪼개버렸는데도, 그 적이 아무렇지도 않게 그의 팔을 휘두르던 모습을 떠올리고 몸서리쳤다.
“브, 브롤님.”
브롤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대부분은 아직 깨어나지 못했지만, 그의 부하들이 그처럼 밧줄에 묶인 채 처박혀 있다.
전투는 거의 일방적으로 패배했지만, 부하들은 대부분 생포당한 걸로 보인다.
인간과 오크만, 기묘하리만치 많이 살아남았다. 마치 전투의 승리가 아니라 생포가 목적이기라도 했다는 양.
그럼에도, 분명히 있었을 고블린들은 단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다.
그 기괴한 차이가 브롤에게 오히려 꺼림칙함을 느끼게 했다.
“...우리는 포로가 된 것 같군.”
그들은 포르투 항구와 손잡은 부족들이 악마들에게 동포를 노예로 팔아치우는 것을 막고자 일어났다.
그러니 아마도 그들은 악마들에게 노예로 팔려나가게 될 신세가 될 거다.
자연스럽게 그렇게 생각했지만, 브롤은 애써 부하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말했다.
“왕께서 곧 도우러 와주실 거다.”
그 직후.
미동조차 하지 않아 기괴한, 생기 없는 군대들의 사이로 확연히 생기가 넘쳐 오히려 이질적으로 보이는 존재가 나타났다.
보라색의 드레스 위에 백의를 걸친 괴상한 패션에, 피처럼 붉은 머리칼을 휘날리는 아름다운 자.
그러나 그 존재의 머리에 난 뿔을 본 브롤은 이를 갈았다.
“악마.”
그 악마, 파이몬은 브롤은 안중에도 두지 않고 잔뜩 붙잡힌 포로를 보며 싱긋 웃더니 입을 열었다.
“아, 역시 뭐든 직접 해야 효율이 나온다니까.”
브롤은 되도록 굴욕을 참으려고 애쓰며 입을 열었다.
“...그대가 지휘관인가? 나는 크록스 왕의 10번째 심복인 브롤이다. 나의 왕께서는 포로교환에 응하실 의사가 있을 거다.”
파이몬은 그제야 브롤에게로 시선을 내렸다.
브롤이 밧줄에 묶여서 악마를 올려다봐야 하는 굴욕을 참는 사이, 파이몬이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아, 지휘관이셨습니까? 이런, 실례. 서비스를 제공하는 입장에서 사전설명이 없었군요. 어비스 코퍼레이션 산하, ‘태만’의 대표이사 파이몬이 인사드립니다.”
마치 아름다운 선율과 같은 목소리와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친절한 말투, 거기에 익숙하지 않은 용어들이 브롤의 머리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서비스? 사전설명? 무슨 소리지.”
“유감스럽지만 당사의 계획에 포로교환은 없습니다. 대신, 축하드리도록 하죠. 귀하와 부하들은 어비스 코퍼레이션의 ‘상품’으로 ‘매입’되셨습니다.”
“무, 뭐라고?”
브롤이 잠깐 말을 이해하느라 애쓰는 사이, 파이몬은 브롤의 옆에 서서 미동도 하지 않는 말라비틀어진 시체 같은 인간의 형상에 다가가 그 가슴팍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웃었다.
“아, 그래. 당사의 ‘드론’을 체험해 보신 소감은 어떠십니까?”
브롤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으나, 파이몬은 제멋대로 떠들기 시작했다.
“아름답지 않습니까? 이것이야말로 극한의 효율, 태만의 궁극적인 실현 형태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로 완벽하게 완벽하죠.”
브롤은 그 정신 나간 악마의 말에 대꾸하는 대신, 조금 전부터 불길하게 느껴지던 것을 물었다.
“...고블린들은 어디에 뒀지?”
“아하, 본사의 ‘드론’ 기술은 철저한 규격화와 효율을 추구합니다. 고블린은 종족 특성상 신체 규격도 영 맞지 않고, 마력도 일천하여 별로 효율성 있는 ‘상품’이 아닌지라. 전부 ‘처분’되었습니다.”
브롤의 머리로는 무슨 말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으나, 그의 고블린 부하들을 전부 죽였다는 사실만큼은 이해했다.
분노와 침통함에 잠긴 브롤의 얼굴을 내려다 본 파이몬은 짐짓 친절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귀하와 이 자리에 있는 부하들은 그런 비참한 취급을 받지 않으실 테니까요. 오히려 당사는 여러분께서 최대의 가치 실현을 하실 수 있게 모든 기술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을 거랍니다.”
“...무슨, 소리냐.”
“하핫, 하하하. 본 ‘드론’기술의 핵심을 설명하기 위해, 제가 이 완벽하고도 완벽한 기술을 고안하게 된 계기를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군요.
귀하께서도 아시겠지만, 인간과 오크를 비롯하여 충분히 진화한 영장류는 모두 마력을 보유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제대로 다룰 수 있는 자들은 필요한 수련을 거친 자들뿐이고, 그마저도 적성에 따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자들이 많지요.”
파이몬은 천천히 양손으로 뺨을 뒤덮더니, 매우 애석하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닙니까? 열등한 삶을 살며 자신이 가진 자원을 활용하지도 못한다니요? 그것은 실로 비효율적이며, 기껏 진화해온 영장류로서도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여, 생각한 겁니다. 모든 영장류가 마력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그들이 최대의 가치 실현을 하게 해주는 지고의 기술이 아닌가 하고.”
기가 질린 브롤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긴 연구 끝에, 당사는 영장류가 품고 있는 마나를 에너지로 추출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해냈습니다. 가장 많은 양의 마나를 적절한 기간 내에 추출하기 위한 밸런스 조절과 그간의 생명유지에 다소 애먹긴 했지만, 결국은 해냈습니다!”
파이몬은 옆에 서 있는 드론의 가슴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입을 열었다.
“마력의 추출이 끝나 텅 빈 영장류의 육체는 마도공학 공정을 거쳐 그대로 드론으로 활용하게 되며, 드론의 동력원 또한 영장류에서 추출해낸 마력입니다. 즉, 영장류에게서 추출한 마력으로 드론을 유지하고, 마력의 추출이 끝난 영장류는 새로운 드론으로 활용하게 됩니다.”
브롤은 그제야 이 미친 악마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완전히 이해했다.
“이론상 하나의 ‘드론’은 최소 10년 이상, 단 한순간도 쉬지 않고 주어진 임무를 수행할 수 있습니다. 당연히, 마력 추출을 끝낸 드론은 살아있지 않으므로 어떤 감정도 고통도 느끼지 못하며 휴식도 필요 없지요. 동력도 마력이면 충분합니다!
그와 부하들이 어떤 운명에 처하게 될지도.
“감히 단언컨대 그 어떤 노동자도, 그 어떤 노예도 이런 놀라운 효율을 창출할 수 없을 겁니다. 그야말로 최대 효율로 순환하는 혁신! 혁명을 가져다준 제품이니, 가히 완벽하게 완벽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혼자 신이 나서 떠들던 파이몬은 브롤의 표정을 보더니 마치 달래듯이 입을 열었다.
“아, 저런.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귀하와 부하들은 마력을 모두 소모하여 생명활동이 정지될 때까지 ‘러스트’사에서 제공하는 기술에 의해 더없이 즐겁고 행복한 꿈을 꾸게 된답니다. 솔직히 다소 비용 낭비라고 생각합니다만, 인도적인 공존을 추구하는 어비스 코퍼레이션의 방침입니다.”
“미, 미친 소리...”
“오, 이 기술적 혁신의 놀라운 가치를 몰라보신다니, 슬프기 그지없군요. 여러분은 원래라면 무작정 노예로 끌려가서 일평생 고생만 하며 불행은 불행대로 겪고, 저조하기 그지없는 효율만을 내다가 고통 속에 죽어야 할 운명입니다.”
파이몬은 진하게 미소 짓더니, 두 팔을 펼치며 소리쳤다.
“하지만 당사의 기술과 함께라면 평생 힘겹게 노동하고 살며 고통받으면서도 버러지 이상의 효율을 내지 못 할 자들이 모든 고통으로부터 해방된 채, 행복한 꿈을 꾸면서도 최대효율로 가치를 창출하게 됩니다! 그야말로 모든 노동과 고통으로부터의 해방! 진정한 의미로 태만의 실현입니다! 실로 완벽하게 완벽하지 않습니까?”
“...크록스 왕께서 네놈들을 가만두지 않을 거다.”
“하핫, 하하핫.”
브롤의 말을 들은 파이몬은 웃음을 흘리더니 말했다.
“저도 무척, 무척, 무척이나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군요.”
그리곤 브롤의 양어깨를 잡곤, 더없이 잔혹하게 웃으며 속삭였다.
“드론이 된 부하들에게 붙잡혔을 때 크록스 왕이, 라파예트 후작이 어떤 표정을 보여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