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이베리카 - 전역 개시
이베리카로의 짧은 항해는 금세 끝났다.
……아니, 정말로 짧게 느껴졌다.
멀미에 허우적대며 크라프테로 향할 때는 정말 언제나 도착하나 싶은 기분이었는데, 시간 가는 줄 모르다 정신 차리니 도착했으니까.
나는 크리스틴과 함께 갑판에 나와, 리브레가 천천히 속도를 줄이며 항구에 진입하는 광경을 보고 있었다.
도착한 빌바오는 산지로 둘러싸인 분지로 바다가 깊숙하게 들어온 지형이다.
“확실히, 항구도시로 쓰기 좋아 보이는군요.”
“네. 마침 근처에 철광산이 있어서 크록스 왕이 추천한 자리기도 하고, 저도 직접 와보고 바로 여기로 승인했어요.”
지금이야 크리스틴의 투자를 받아 이제야 항구로서 구색을 갖춘 단계지만, 이만한 입지니 시간이 지나면 프랑지아와 이베리카 교역의 허브 도시로서 잘 성장하겠지.
나중에는 이베리카의 아키텐처럼 되지 않으려나.
그렇게 크리스틴과 가볍게 대화를 나누는 사이, 항구에 리브레가 정박하고 하선을 위한 판자가 내려졌다.
나는 거기서 오랜만에 반가운 얼굴과 마주할 수 있었다.
“아. 오랜만이군, 핫산.”
“크록스 왕의 두 번째 심복 핫산이 왕의 형제, 피에르 드 라파예트 후작 각하를 뵙습니다.”
핫산은 가볍게 미소 지으며, 나에게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 보였다.
* * *
제일 먼저 정박한 건 리브레지만, 다른 함선들도 속속 정박하기 시작했다.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제독님.”
“그래. 맡기지, 뒤헝.”
아직 항구 규모가 부족하다 보니 제일 덩치 큰 리브레는 운송하는 인원들을 하선시키자마자 자리를 비켜줘야 했다.
뒤헝의 지휘 아래 리브레가 항구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본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려 크리스틴과 대화 중인 핫산을 바라보았다.
“제독이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아키텐 백작님.”
“고마워요. 빌바오가 빠르게 발전하고 있는 걸 보니 기쁘군요. 그대의 수완이겠죠.”
크리스틴은 그리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지만, 나는 역시 좀 신경 쓰인다.
오랜만에 만난 핫산이, 뭔가, 뭔가…….
“파하하하하!”
난데없이 터져 나온 웃음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휙 돌아갔다.
모두의 시선이 향한 곳에서, 눈가에 눈물까지 맺힌 샨드라가 핫산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큰 소리로 외쳤다.
“불쌍한 우리 오빠, 10년은 더 삭았어!”
……그래, 저거.
내가 아는 한 핫산은 아직 20대 후반인데, 멋들어진 수염을 기른 얼굴에 주름이 조금씩 잡힌 걸 보니 아무리 봐도 40대가 넘은 걸로밖에 안 보인다.
이제 막 세워진 국가의 기초를 다지는 일이 쉬울 리는 없고, 핫산은 아무래도 역할이 크록스의 재상인 듯했으니 고생이 심했을 것 같긴 하지만…….
나뿐 아니라 모두의 표정이 절로 측은해지고, 심지어 크리스틴도 약간 뻣뻣한 미소를 건 채 입을 다물었다.
핫산은 표정을 일그러트리더니, 샨드라에게 대꾸하는 대신 나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송구합니다, 후작님. 저 예의도 모르는 철부지가 프랑지아에서 실수를 많이 했을 것 같아-”
“아니, 잘하던데.”
솔직히 나도 지나치게 자유분방한 샨드라가 문제를 일으키는 걸 우려하지 않은 건 아니었는데, 본인이 강력한 전사이면서도 붙임성이 좋은 성격과 제법 시너지가 났는지 뤼미에르에서 샨드라는 나름 호평이었다.
위기에 처했던 우리를 크록스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와서 도와준 것도 있지만 샨드라가 제법 친근하게 군 덕분에, 야만족이라던 이베리카 형제들의 인식은 이제 와서는 우리와는 다르지만 나쁘지는 않은 이웃 정도로 격상되었으니까.
정작 내 말을 들은 핫산은 믿을 수 없는 이야기라도 들었다는 듯이 충격에 빠진 얼굴이 되었다.
“파하하하하, 오빠 표정 진짜 웃겨!”
고생 끝에 삭아버린 그와는 대조적으로 반질반질해진 얼굴로 그를 가리키며 웃고 있는 샨드라를 한참 바라보던 핫산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세상이 말세로군요.”
참…….
사이좋은 남매로군.
* * *
항구 수용량의 한계로 병력과 장비의 하역에는 근 반나절이 걸렸다.
“바로 돌아가시는군요. 여기까지 오셨으니 딜루스에서 왕을 뵙고 가신다면 좋을 텐데. 왕께서 아키텐 백작님의 투자로 건설된 항구와 거래의 성과에 꽤 만족하셨습니다.”
조금 아쉬워하는 듯한 핫산의 말에, 크리스틴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네, 라파예트 후작님과 제가 모두 수도를 비우는 건 짧을수록 좋으니까요. 업무적으로 필요한 논의는 핫산 님과 진행했으니, 폐하께는 대신 전달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지요, 아키텐 백작님.”
핫산이 정중히 예를 갖추며 가볍게 목례하자, 크리스틴은 나를 돌아보았다.
이제 한동안은 보지 못하겠지.
잠시 눈을 마주친 끝에, 크리스틴은 나에게 경례했다.
“그러면 귀군의 건투와 무운을 빌겠습니다, 라파예트 사령관님.”
“귀국하시는 길에 바다가 평온하기를 바라죠, 아키텐 제독님.”
담백한 인사를 주고받은 크리스틴과 나는 가볍게 미소 지어 주고 그대로 등을 돌렸다.
개인적인 시간은 오는 사이에 충분히 공유했고, 나도 그녀도 서로가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줄 것이라 믿으니까.
그래도 출항한 리브레와 함대가 조금씩 멀어지는 동안, 크리스틴은 갑판에 나와 나를 보고 있었다.
마침내 리브레가 완전히 멀어지고서야, 나는 가볍게 심호흡을 하고 등을 돌려 부하들을 바라보았다.
언제나처럼 충직한 얼굴을 하고 있는데- 옆에서 재잘대는 샨드라 덕에 조금 피곤해 보이는 가스통.
그리고 울상을 짓고 있는 데미앙 드 미르보와 그의 지휘관 페터 드 카젤, 부관인 지젤 다비까지.
“자, 그럼. 딜루스로 향하지. 크록스 왕을 도와, 이 긴 이베리카 반도의 전쟁을 끝낸다.”
* * *
“병력은 우선 3,000이군요.”
핫산의 말을 들은 나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래, 숫자는 그리 많지 않지만 프랑지아 최정예인 상비군이네. 혁명 수호대와 흉갑기병대를 대동했으니 전력으로선 제법이겠지. 시간 차를 두고 2,000이 추가로 도착할 거야.”
아무래도 해상으로 이동하면 시간도 훨씬 단축되고 보급도 비교적 용이하지만, 아직은 이베리카의 항구 수용량 문제로 동시에 이동할 순 없었다.
나머지 2,000은 니콜라 네와 제롬 모렐이 인솔해올 거다. 어딘가의 백작과 다르게 저 둘은 전투광들이라 제발 좀 데려가 달라고 자원했거든.
“든든하군요, 후작님. 그러지 않아도 샨드라가 프랑지아의 혁명 수호대와 흉갑기병대에 대해 상당히 호평 일색의 보고서를 올려서 크록스 왕도 궁금해하시던 참입니다.”
“실망하지 않을걸.”
나는 자신 있게 답했다. 저들이야말로 그랑제콜 과정의 성과를 가장 직접적으로 받은, 프랑지아의 강군이니까.
“그건 그렇고, 전황은 어떻지?”
“들으신 대로, 그동안 적들은 상당히 소극적으로 일관해왔습니다. 왕께서는 상당수의 영토를 장악했고, 이제 남은 건 포르투와 그 인근, 남서쪽 지방뿐입니다.”
“흠, 그래.”
기껏 우리가 온 것이 무색하게 전황은 좋아 보이지만…….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겠지?”
“그렇습니다.”
핫산은 차분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후작님께서 다녀가신 이후, 악마들이 개입한 전투는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만약 악마들이 개입했다면 전황이 이리 순조롭지는 않았겠지요. 또한, 이건 왕께서 하신 말씀이십니다만.”
“흠?”
“……느낌이 좋지 않다고 하시더군요.”
“과연.”
다른 자라면 모르겠는데, 오크의 특성인지 크록스의 특성인지 몰라도 저건 단순한 기분 탓이 아니라 야성적인 직감에 가깝다.
오직 감만으로 크리스틴의 위험성을 간파할 정도니 믿을만하겠지.
“크록스의 느낌을 차치하더라도, 전략적으로 악마들이 이대로 이베리카에서 손을 뗄 수가 없는 상황이야. 기존에 저들이 투자했던 곳은 실패했고, 다른 투자처도 거절해버렸거든.”
악마들이 제국과 프랑지아의 전쟁에 개입하고 있던 정황은 명백하다.
그러나 제국은 루이 왕의 프랑지아와 달리 악마들의 꼭두각시로서 한계에 달할 때까지 전쟁을 지속한다는 선택지를 포기하고, 사실상 탈전하는 대신 크라프테를 불러들였다.
악마들에게 전쟁을 청했다는 대왕의 언사로 미루어 볼 때, 악마들이 크라프테에도 손을 뻗긴 한 것 같지만 대왕은 그들에게 응하지 않았다.
북부의 노던 연합 왕국은 원래부터 제국을 조금 거드는 포지션에 그쳤지만, 기껏 파견한 군대가 우리에게 허망하게 무너져버렸고, 결정적으로 아키텐이 건조해낸 프랑지아의 신형 해군에 기가 질려서 손을 뗀 상태니 논외다.
“이제 악마들이 중앙 대륙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유일한 곳이 바로 이베리카 반도다. 지금까지 조용했던 것이 저들이 아직 다른 선택지가 남아있어서 손을 뗄 각을 재고 있었던 건지, 아니면 다른 걸 준비하느라 그런 건지까지는 모르겠지만.”
핫산은 손으로 수염을 매만지더니 답했다.
“흠, 과연. 우리는 다른 중앙 대륙 국가들의 사정에는 비교적 어두운 편이지만, 후작님께서 시기적절하게 지원 와주신 것 같군요.”
“우리 또한 그대들의 왕에게 가장 절실한 순간에 도움받았으니, 그만한 일은 해야지.”
나는 가볍게 답하고, 프랑지아의 드넓은 평야 지대로 이어진 지평선과 달리 능선과 산지로 가득한 이베리카의 거친 땅을 바라보았다.
생각나는 것은 피처럼 붉은 머리칼의 악마와, 하필이면 크리스틴의 환상으로 나에게 접근했던 금빛의 서큐버스.
“그 망할 놈들과 다시 보지는 않았으면 좋겠는데…….”
* * *
이베리카 반도 남부의 항구도시, 포르투.
항구도시 포르투의 인간들은 항구를 통해 도착하여, 질서정연하게 도열하고 있는 것들을 보고는 경악과 공포에 물들어 있었다.
그 광경을 보던 금빛의 서큐버스, 러스트 사의 대표이사 그레모리도 치를 떨며 읊조렸다.
“미쳤어, 미쳤어. 이 끔찍한 것들을 중앙 대륙에 들이다니. 이런 미친 짓을 바엘이 허가했다고?”
정작 이들을 불러온 장본인, 슬로스 사의 대표이사 파이몬은 여상하게 물었다.
“-것입니다, 컨셉 포기했어?”
그레모리는 정색했다.
“지금 그딴 것이 중요해? 프랑지아의 인간들에게, 라파예트 후작에게 이걸 보여주겠다고?”
“뭐, 어때. 제품을 만들었으면, 테스트를 해보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닌가?”
파이몬은 그의 역작 산업혁명의 결실들을 내려다보며 입가에 만족스러운 웃음을 내걸었다.
“바엘도 승인했어. 결국 프라이드 사가 개척하려던 다른 ‘재료’ 수급처가 전부 실패했으니, 마지막 남은 이곳을 그냥 넘겨줄 수는 없는 것 아니겠어?”
“나는 반대했어!”
그레모리가 펄펄 뛰었지만, 파이몬은 싱긋 웃으며 답했다.
“루이 왕을 부추겨서 라파예트 후작을 제거하겠다고 할 때, 나도 반대했어. 넌 찬성했고.”
그레모리는 말문이 막혔다.
평소에 여유작작하게 허공을 날아다니며 장난을 치던 서큐버스는 인상을 찌푸린 채 침묵하더니, 이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때야 라파예트 후작을 몰랐으니까. 이건, 미친 짓이야. 진짜 미친 짓이라고. 파이몬, 넌 대체 뭘 원하는 거야?”
파이몬은 그레모리의 물음에 대답하는 대신, 진하게 미소 지으며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그에 맞추어, 항구에 질서정연하게 늘어서 있던 ‘드론’들이 척-하고 일제히 한 발을 내디뎠다.
그 광경을 본 포르투 항구의 인간들이 공포와 경악에 벌벌 떠는 가운데.
모든 노동과 고통으로부터 해방되고도 움직이는, 진정한 의미로 태만을 실현한 존재들.
인간의 형상을 했으나 이미 인간이 아니게 된 군대를 바라보는 파이몬의 입가에 희열에 찬 광소가 걸렸다.
“아, 완벽하게 완벽해.”
“미친놈.”
그레모리의 욕설에, 파이몬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악마가 미친 게 뭐가 이상하지?”
파이몬은 수년 전, 아직 소후작이던 피에르 드 라파예트에게 보내고자 수정구에 녹화한 영상을 담던 순간을 떠올렸다.
-본사로의 초청 제안은 보통 예의상입니다만, 소후작님에 대해서만큼은 진심입니다. 그러면, 되도록 이른 시일 내에 직접 만나 뵐 수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제법 정성 들여 초청했는데, 피에르 드 라파예트는 매몰차게 무시해 버렸지.
본사로 초청해서 직접 보여주고 싶었던 광경이지만, 돌고 돌아 이렇게 늦게라도 보여줄 수 있게 되었다.
“오싹오싹해서 참을 수가 없어.”
파이몬은 두 팔로 몸을 끌어안은 채, 몸을 부들부들 떨더니 읊조렸다.
“이걸 본 라파예트 후작이 뭐라고 할지, 정말이지 너무 기대되는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