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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혁명에 단두대는 필요없다-128화 (128/258)

128화. 이베리카 - 출항

탈레랑이 동방 제국과의 재차 접선 시도를 승인받기 위해 수도로 올라가고 얼마 뒤, 우리는 이베리카 반도로의 출정 준비를 끝마쳤다.

“어서 오십시오, 여왕 폐하.”

나와 장군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여 보이자, 에리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수고하시네요.”

왕궁에서 도피한 왕녀로서 내전을 경험하고, 떠돌이 음유시인으로서 생활하다 역병이 터지자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치유하고.

성녀로서 혁명기의 혼란을 지나, 여왕으로서 제국과의 전쟁까지 치른 에리스는 많이 변했다.

여전히 이상주의자지만 다소 철부지 같던 모습은 없어졌고, 제법 현실과 타협하는 법을 배운 현명한 여왕.

이제는 나와 장군들이 예를 갖추는 것도 제법 익숙해져서 부담스러워하지 않는다.

“그래도 출정이 겨울이라 다행이네요. 이베리카 반도는 무척 덥다던데, 미리 가시니 조금씩 적응하실 수 있겠죠?”

“하하하…….”

베일로 가려져 있긴 하지만, 장난기가 서린 목소리에 장군들도 슬며시 웃음을 흘렸다.

많이 변했어도, 이런 점만은 여전하다.

언제나의 흰 로브에 후드를 쓰고 베일까지 두른, 사치스러운 품위와는 거리가 먼 모양새도 그렇고.

에리스는 이베리카 원정에 따라가지 않는다.

지금까지는 전시상태기도 했거니와 직접적으로 프랑지아 왕위가 걸린 전쟁이었으니 에리스가 전선에 섰지만, 그때도 내켜 하지 않던 의회는 남의 전쟁에까지 여왕이 따라가는 건 당연하게 반대했다.

조금 더 정치적인 문제로 들어가자면 교국에서 자신들이 정식으로 인정한 성녀왕이 이교도인 크록스의 전쟁을 도우러 가는 건 원하지 않는다고 넌지시 전달했다는 것도 컸지만.

명색이 악마들과 손잡은 자들을 중앙 대륙에서 몰아내기 위한 전쟁인데, 그것보다 성녀가 이교도와 함께한다는 쪽이 더 못 마땅하다니 신성 교국도 참 웃기는 자들이야.

성녀씩이나 되는 에리스가 신성 교국을 떨떠름해하는 것도 다 그럴 만한 거지.

내가 상념에 잠긴 사이, 이번 원정에 참여하는 이들과 하나하나 눈을 마주치는 듯하던 에리스가 작게 탄성을 질렀다.

“와-”

베일로 가려져 있지만 고개가 향한 방향이 너무나 명확하다.

“여왕 폐하.”

크리스틴은 가볍게 미소 지은 채 에리스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이번에는 목적지도 비교적 가까워서 그리 긴 항해가 아니고, 크리스틴도 명색 제독인데 정식 임무를 수행한 적이 없다 보니 우리군을 호송하는 임무를 맡아 함께 출항하게 되었다.

“와, 제독의 제복인가요? 멋지네요, 아키텐 백작님.”

“감사합니다, 폐하.”

에리스의 말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크리스틴은 언제나 상복처럼 보이는 수수한 검은 드레스를 입고 다녔는데, 정식으로 제독으로서 출정하기 위해 군복을 차려입은 그녀의 모습은 실로 근사하다.

크리스틴 아니랄까 봐 검은색의 군복에 망토를 두르고 금실로 장식한 옷을 차려입은 그녀의 모습은 생각보다도 더 잘 어울려서, 여자가 제독이라니 말도 안 된다고 했던 국민의회의 의원들에게 보여주고 싶을 정도다.

아니, 아니다. 그런 놈들한테 이렇게 멋진 모습을 굳이 보여줄 필요는 없지.

내가 실없는 생각을 하는 사이, 크리스틴을 비롯해 다른 장군들과 가볍게 대화를 나눈 에리스가 내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면, 라파예트 후작님. ……전쟁이니까, 희생자가 없을 순 없겠지만 너무 무리하지는 않으시길 기대할게요. 되도록, 다들 무사히 돌아올 수 있기를.”

베일로 가려져 있어도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알 것 같아서, 나는 에리스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각별히 신경 쓰겠습니다, 여왕 폐하.”

“좋아요, 그러면-”

에리스가 손을 하늘로 들어 올리자, 그녀의 손에서 찬란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오오오-”

장군들은 물론이고 여왕을 맞이하기 위해 일제히 나와 서 있던 군사들이 탄성을 질렀다.

하늘로 뻗어나간 찬란한 빛이 가루가 되어 천천히 내려앉는 광경은 언제 봐도 장관이다.

나는 그런 에리스를 보며 피식 웃었다.

과연 성녀왕, 이젠 이런 정치적인 퍼포먼스도 곧잘 한단 말이지.

처음 같으면 상상도 못했- 어?

에리스가 흩뿌린 빛이 닿자, 몸에 무언가 따뜻하면서도 힘이 담긴 기운이 감도는 것이 느껴졌다.

이거, 설마.

아니나 다를까 한참 빛을 뿜어내고 팔을 내린 에리스가 휘청거려서, 하늘에서 흩뿌려지는 신비한 금빛에 정신이 팔린 다른 사람들이 보기 전에 내가 그녀의 팔을 잡아주었다.

“에리스……!”

지금 여기 사람이 몇인데, 대체 또 무슨 짓을 한 거야.

내가 작게 탓하자, 에리스도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며칠 쉬면 나아요. 같이 가지도 못하니까, 이 정도는 하게 해주세요.”

베일로 가려져 있어도 창백할 얼굴이 보일 것 같은데, 정작 말투는 장난기가 가득하다.

그런 얼굴을 하고서도 장난스럽게 혀를 내밀고 있을 표정도 알 것 같아서, 나는 에리스가 균형을 잡도록 기다려주곤 손을 뗐다.

“……그래.”

내 여왕 폐하께선 이렇게라도 해야 조금이라도 마음이 편하신가 보니, 어쩔 수 없지.

찬란하게 빛나는 가루가 닿고 몸에서 느껴지는 기운에 모두가 즐거워하다가, 그 빛의 장막이 모두 사그라든 뒤.

“그러면 잘 다녀오시리라 믿겠습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신의 가호가 있기를.”

한때 신 따위는 믿지 않는다고 했던 성녀가, 간절한 기원을 담아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 * *

출항 뒤.

프랑지아 해군 기함 86문급 전열함 ‘리브레’.

“오오오…….”

갑판 위에는 장군이고 장교고 병사들이고 할 것 없이 너도나도 몰려나와 드넓게 펼쳐진 수평선과 저 멀리 보이는 프랑지아의 영토를 감상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갑판이 지나치게 번잡해져서 항해에 방해될까 봐 조를 짜서 교대로 구경시켜야 할 정도니 말 다했지.

나는 그런 이들을 보며 픽 웃었다.

대부분 배 같은 걸 타본 적이 없는 이들 뿐이니 신기한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저것도 처음뿐이지, 조금만 보면 질릴걸. 그러고 나면 지옥 같은 뱃멀미만 남을 텐데.

그래도 이번엔 병력을 운송하기 위한 함대라 크라프테 때와 다르게 여러 척의 선단이 일제히 움직이는 것이 상당히 웅장한 맛은 있네.

아, 이번엔 좀 괜찮아야 할 텐데.

그나마 꽤 긴 항해를 해야 했던 크라프테로의 뱃길과 달리 이베리카는 며칠 걸리지 않는 짧은 여정이다.

크리스틴에게 뱃멀미로 개고생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는 않은데.

그러고 보니, 아직까진 멀쩡한 것 같네. 뱃멀미도 익숙해지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며 제독의 방에 가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접니다, 제독님.”

“들어오세요.”

안으로 들어서자, 크리스틴은 마치 처음부터 이게 그녀의 자리었다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모양새로 책상에 앉아 있었다.

위에는 해도가 펼쳐져 있고 옆에는 뒤헝 선장이 있는 걸 보니, 회의 중이었나?

“아, 방해가 되었습니까?”

“아, 하하, 아닙니다, 후작님! 그러면 제독님, 보고드릴 사항은 다 보고드렸으니 저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그래, 물러가보도록, 뒤헝 선장. 수고하게.”

크리스틴은 어디까지나 차분한 얼굴로 고개만 까닥하며 답했고, 뒤헝은 크리스틴에게 경례를 붙인 후 빠르게 나가-면서 나에게 가볍게 윙크해 주고 나갔다.

괜스레 헛기침을 하며 문을 닫고 돌아서자, 크리스틴은 언제 그랬냐는 듯 살짝 부드럽게 미소 지은 채 나를 보고 있다.

솔직히, 나는 이런 순간이 좋았다.

매사에 냉철하고 감정 기복이 적은 크리스틴이 나만은 특별 취급해 준다는 걸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이니까.

“크리스틴.”

자연스럽게 웃으면서 부르자, 크리스틴은 부드럽게 미소 지은 얼굴 그대로 물어왔다.

“여왕 폐하는 어떻던가요?”

“…….”

기분 탓인가.

여전히 부드럽게 웃고 있는 것 같은데 약간 싸늘한 느낌이...

“……힘을 무리하게 쓴 것 같기는 한데, 본인 말로는 며칠 쉬면 괜찮아질 거랍니다.”

……말하면서 깨달았다.

첫 항해 때는 배에 타고 잠깐 경치 구경하다가 바로 뱃멀미에 시달렸는데, 지금은 그런 기미조차 전혀 없다.

설마 이것도 에리스가 걸어준 뭔지 모를 축복의 힘인가?

아니, 지금은 그것보다도.

“……보셨군요?”

“네, 봤죠. 꽤나 자연스럽게 잡아주시던걸요.”

크리스틴은 선선하게 답했다.

……하긴, 그녀가 그런 화려한 빛에 시선을 빼앗길 사람은 아니었지.

“아니, 그건 어디까지나 걱정의 영역입니다.”

“신하로서, 주군을?”

“그래요, 그거.”

크리스틴은 싱긋 웃으며 답했다.

“저도 알고 있어요.”

……그럼 뭐가 문제지?

아니, 애초에 크리스틴이 지금 불쾌감을 느끼는 걸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럼 정말로 그냥 에리스를 걱정해서 물어본 건가?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사이, 자리에서 일어난 크리스틴이 걸어왔다.

내 쪽으로 오는가 했는데, 나를 지나친 크리스틴이 문을 잡고-철컥, 소리가 났다.

“……크리스틴?”

문은 왜 잠그는 거지.

크리스틴이 몸을 빙글, 돌리자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망토가 펄럭이며 시선을 사로잡았다.

“피에르.”

“……말씀하세요, 크리스틴.”

“뒤헝에게 듣자니 첫 항해 때는 뱃멀미를 좀 심하게 했다던데, 지금은 좀 괜찮아요?”

“아, 예.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 에리스의 축복 덕분인 것 같은데-”

나도 모르게 답했는데, 에리스의 축복이라는 부분에서 크리스틴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아, 이건 기분 탓이 아니다. 절대로 기분 탓이 아니야.

크리스틴은 미소 지은 그대로 나에게로 다가와, 내 양어깨를 손으로 잡았다.

내가 반사적으로 허리를 조금 낮춰준 순간, 부드러운 감촉이 입에 와 닿았다.

부드럽고, 따뜻하고, 달콤한. 행복한 감촉인데.

……왜 등골이 서늘하냐.

그런데도, 그녀와 호흡을 나누는 것에 취해 정신이 팔리는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잠시간의 입맞춤 뒤 떨어진 크리스틴이 그제야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이제야 좀, 머릿속이 빈 것 같네요.”

“아.”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이제 고작 며칠 뒤엔 이베리카에 도착해서 앞으로 꽤 긴 시간 못 볼 텐데.

크리스틴의 앞에서도 에리스 걱정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고 있었군.

나를 데려다 준 뒤, 그녀는 수도에 돌아가 크라프테와의 전쟁에 대비해 바쁘게 일해야 할 텐데도.

“미안합니다, 크리스틴.”

크리스틴은 슬며시 웃더니 대답 없이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서, 입에 물었다.

그대로 나에게 다시 입을 맞춰 와서, 그녀가 넘겨주는 대로 삼킨 뒤 물었다.

“뭡니까?”

일단 주는 대로 삼킨 다음에 묻는 게 퍽 마음에 들었는지, 크리스틴이 진하게 미소 지으며 답했다.

“피임약이요.”

“……엥?”

그거 꽤 비싸서 돈 남아도는 인간들이나 쓸 텐데, 아니 그것보다 이걸 왜 지금?

머릿속에 혼란만이 가득 번지는데 크리스틴이 여전히 미소지은 채 망토에 달린 금줄을 풀었다.

그녀의 어깨에서 망토가 느릿하게 흘러내려 바닥에 떨어지는 것이 어째 묘하게 현실감이 없다.

지금? 여기서? 벌건 대낮에 제독의 방에서?

“어, 크리스틴? 밖에 부하들도 돌아다니고 있을 텐데요.”

이건 아무리 나라도 당황스러워서 묻자, 크리스틴의 답은 상상을 초월했다.

“제독의 방에서 제독을 안아보는 거, 당신이라면 한 번쯤 해보고 싶어 할 것 같아서요.”

……크라프테로 가는 동안 제독의 방에 머물면서 그런 망상을 한 번도 안 해봤냐면, 그건 아니지만.

“……당신이 이런 취향인 줄은 몰랐는데요.”

크리스틴이 이런 모습을 보여줄 거라곤 상상도 못 해봤는데, 이게 또 좋은 걸 보니 나도 참 구제불능이야.

내 말을 들은 크리스틴은 답 없이 손을 뻗어 내 가슴팍을 살짝 밀었다.

그녀가 미는 대로 밀려서 방 가운데에 있는 책상에 등이 닿자, 크리스틴이 도발적으로 웃으면서 말했다.

“저를 다리 위에 앉혀놓고, 부하들 앞에서 보이면 제가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해하지 않았었나요?”

이건 진짜 소름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와서, 나도 모르게 반문했다.

“진짜로 독심술합니까?”

크리스틴은 슬며시 고개를 기울이더니 웃으며 답했다.

“당신 한정으로는, 조금은.”

그리곤 두 팔을 뻗어 내 목에 두르며 말했다.

“그리고 지금 깨달았는데, 당신이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 보기 꽤 즐겁네요.”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자, 확 가까워진 크리스틴이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이베리카에 도착할 때까지, 저 말고는 생각할 수 없게 해드리죠.”

“그건 이미 성공하신 것 같습니-”

미처 나오지 못한 말은 그녀의 입술에 틀어 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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