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이베리카 - 동방 제국
십만에 가깝게 모집되었던 혁명군은 대부분 소집 해제되었다.
내전부터 혁명, 루이 왕과 게르마니아 제국에 맞서 끊임없이 사투를 벌인 이들은 잠시나마 일상을 되찾았다.
10만의 상비군을 10년간 복무시키며 강군으로 훈련시킨 크라프테군에 맞서려면 2년간 소집 해제하지 않고 맹렬하게 훈련시켜야 한다고 주장한 자들도 없지는 않았다만…….
크라프테를 그저 그런 제후국에서 제국 북부의 패자로 만들어 일약 시대의 아이콘으로서 광신적으로 추종 받는 대왕과 달리, 우리는 일단 국민들을 신경 쓸 수밖에 없다.
당장 크라프테와의 전쟁 전에 선거가 있을 거라 어느 당도 여기서 군사들을 계속 끌고 가자고 주장하지 못했다.
어차피 그러려고 해도 정부에 돈도 없고.
그렇다고 아주 방치할 수도 없으니, 대신 루이 드제와 총참모장인 알렉상드르 베르테르가 남아 해산된 혁명군을 예비군으로서 정기적으로 훈련시키기로 했다.
그러는 동안 혁명 근위대와 흉갑기병대를 위시하여, 해산되지 않은 상비군은 이베리카 반도로 파견될 준비가 한창이었다.
내가 이끌고 가서 크록스를 돕고, 동시에 군사들에게 실전 경험을 쌓기 위해.
샨드라의 말에 따르면 내가 다녀갔을 때 어비스 코퍼레이션이 가져다 둔 로켓으로 포르투와 손잡은 부족들의 군대를 초토화시켜 놓아서, 그리 큰 저항은 없다고 하니 잘만 하면 이베리카 반도의 전쟁을 빠르게 끝내버릴 수도 있겠지.
제국과의 전쟁에서도 어떤 식으로든 개입한 악마들이다.
대왕의 성정을 볼 때 악마들과 손을 잡을 것 같지는 않지만, 악마들도 마땅히 손을 뻗을 곳이 없다면 그나마 저들의 영향력이 남은 이베리카에서 수작을 부릴 가능성이 높지.
그러니 미리부터 뿌리 뽑아 크록스를 통해 후방을 안정시키고, 크라프테와의 전쟁에서 도움받을 수 있다면 최상의 시나리오인 셈이다.
육로로 남부 산맥을 지나갔던 지난번과 달리, 이번에는 군항 브레스트로 이동해 해로를 통해 이베리카로 간다.
우리가 제국과 전쟁을 치르는 사이 크리스틴이 이베리카 북부에 투자하여 교역항을 건설한 덕분이지.
시간 관계상 아직 큰 규모의 항구는 아니지만, 어차피 병력이 그리 많지 않으니 순차적으로 나르는 정도라면 가능하다.
그렇게 혁명군을 이끌고 브르타뉴 지방으로 내려와서 출발 준비를 하고 있던 중.
나는 항구에 나와 거대한 전열함이 정박하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정작 제독인 크리스틴이 타지 않은 채 먼 항해를 다녀온 프랑지아 해군의 기함, 전열함 리브레.
뱃멀미로 고생깨나 한 나와 달리, 멀쩡해 보이는 얼굴의 남자가 내려서 싱긋 웃어 보였다.
“아, 오랜만입니다. 크라프테에서 라파예트 후작님께서 내륙으로 귀국했다는 걸 듣고 깜짝 놀랐는데, 친히 저를 맞이해주러 나오실 줄은 몰랐군요.”
나는 모리스 탈레랑 총재에게 마주 웃어주며 답했다.
“오랜만입니다, 총재. 돌아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어차피 출항을 준비하기 위해 와 있던 김에 그냥 나와본 거지만 굳이 알려줄 필욘 없겠지?
* * *
나는 리브레의 선장인 뒤헝에게 수고했다며 가볍게 치하해 준 뒤, 탈레랑과 자리를 마련했다.
탈레랑이 다녀온 곳은 동방 제국.
광범위한 영토에 엘프들이 군림하며 다양한 종족을 통치하는, 도대체 얼마나 거대한지 헤아릴 수조차 없는 동쪽의 국가.
기대했던 크라프테 왕국이 적국으로 확정된 이상, 이들에게서라도 긍정적인 답을 들어야 좋은데.
“크라프테와는 역시 그렇게 되었군요.”
이제 막 동방 제국에서 귀환한 거니 자세한 사항을 들었을 리도 없는데, 탈레랑은 2년 뒤 크라프테와 전쟁을 치르게 되었다는 말을 듣고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
“……그럴 거라고 생각하신 겁니까?”
“예, 외교의 기본은 상대의 성향 파악이죠. 대왕의 성정을 보았을 때 굳이 외교 책임자인 저를 마다하고 후작을 부른 시점에, 충돌은 반쯤 확정이라 판단했습니다.”
어째 기껏 크라프테까지 와서 나만 내려주고 바로 가버리더라니, 이 인간...
“그 정도로 확신하셨다면 미리 좀 말씀해 주시지 그러셨습니까.”
“하하, 그래도 만약이라는 것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괜히 안 좋은 소리 해서 보내면 후작님도 될 협상도 못 할 텐데, 별로 기대는 안 하고 맡겨본 거지요.”
나는 슬며시 한숨을 내쉬었다.
덕분에 나는 그 미친 대왕 앞에서 진땀을 빼야 했는데.
하여간, 사람이 유능은 한데 재수가 없어.
“그래서, 총재는 성공하셨습니까?”
내가 실패하고 댁이 성공하면 혁명당도 국민의회에서 면이 살 거라며, 벼르고 가지 않았던가?
내 말을 들은 탈레랑의 얼굴은 좀 미묘해졌다.
이 인간도 실패한 건가?
“엘프들은 참, 흠. ……거만하더군요.”
“그건 익히 아는 것 아니었습니까?”
인간들을 깔보고 거만하게 군림해대는 엘프야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데.
“인간 국가 간의 전쟁에 개입하는 건 관심이 없고, 차르께 입조해야 상대해 주겠다고 하더군요.”
“입조? 뭡니까 그게.”
“조공을 바치라는 이야기입니다.”
“…….”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건 상상한 것 이상인데?
프랑지아면 그래도 중앙 대륙 서부의 강국인데 취급을 이렇게 한다고?
“뭐 조사한 바에 따르면 단순히 조공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차르가 그에 상응하는 하사품으로 보답한다고는 합니다만, 그렇다고 우리가 저들의 신하가 될 수는 없는 법 아니겠습니까?”
“아니, 그럼 아무 소득 없는 겁니까?”
“엘프들의 보드카는 끝내주게 화끈하더군요.”
이 인간이 지금 가서 하라는 협상은 못하고 술만 얻어먹고 온 거야?
내가 점점 어이 없어질 때쯤, 탈레랑이 슬며시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인간 왕국 간의 전쟁이면, 그렇고.”
“흠?”
“동방 제국은 어비스 코퍼레이션이라면 치를 떨더군요.”
“치를 떠는 걸로 치면 인간의 국가들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탈레랑은 검지를 들어 올리더니 휙휙 내저었다.
“저런, 그 정도가 아닙니다. 동방 제국은 이 중앙 대륙이 아니라, 머나먼 동쪽의 구대륙에서 아예 어비스 코퍼레이션과 반쯤 전쟁 상태라고 합니다.”
“흠…….”
동방 제국의 주장에 따르면 저들의 영토는 중앙 대륙의 동부에서 저 먼 구대륙의 동쪽 끝까지 이르고 있다고 한다.
어비스 코퍼레이션이 발표한 바에 따르면 중앙 대륙의 서쪽으로 항해하면 신대륙이 존재하고, 다시 그 신대륙의 서쪽으로 항해하면 구대륙이라는데.
정작 바다를 헤집고 다니며 마음대로 다른 대륙으로 진출하는 건 반쯤 악마들만의 전유물이었으니 우린 그냥 그런가 보다 할 뿐.
“그런데, 어비스 코퍼레이션과 전쟁이라. 그런 것이 가능합니까?”
그 대단하다는 크라프테의 대왕도 어비스 코퍼레이션이 응하지 않으면 전쟁을 벌일 수 없는 이유는 간단하다.
저들이 섬에서 기어 나오면 모를까, ‘라스’사의 함대를 뚫고 저들의 섬에 발을 들일 방법이 전혀 없으니까.
우리도 86문급 전열함 ‘리브레’를 비롯해 강력한 전열함을 몇 척 건조했고, 앞으로도 할 예정이지만 그게 저 ‘라스’ 사의 함대에 비할 수준이냐면 그건 절대 아니다.
탈레랑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했다.
“일단 엘프들이 말하길 저들의 함대는 엄청난 규모이고, ‘리브레’보다도 더 강력한 함선도 보유하고 있다고 합니다.”
“정말입니까? 믿기 힘든데요. 그런 해군은 다 어디에 있답니까? 저들의 수도에 그런 해군이 있었습니까?”
“아니요, 저들의 서방 영토…… 그러니까 수도인 차르그라드는 어마어마한 해안 요새로 보호받고 있긴 하지만 ‘리브레’보다 구식으로 보이는 전열함 몇 척이 있을 뿐이었습니다만…….”
그래, 적어도 우리가 아는 한 동방 제국의 중앙 대륙 영토에는 그렇게 대단한 함대는 없었다. 있었다면 우리가 모를 수가 없지.
“하지만 동쪽으로 뻗은 저들의 영토는 중앙 대륙 서쪽 끝인 이베리카 반도에서 동방 제국에 이르는 땅보다도 더 길게 이어져 있다고 합니다. 당연히 그에 따라 엄청나게 긴 해안선이 펼쳐져 있고, 저들의 ‘청룡’ 함대와 ‘현무’ 함대가 남쪽과 동쪽 바다를 지킨다더군요.”
“그것참. 오만한 엘프들 특유의 허세인지, 진짜인지 모르겠군요.”
“저도 반반 정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어쨌거나 차르는 인간 국가 간의 분쟁에 간섭할 의사는 없지만, 어비스 코퍼레이션의 악마들에 맞설 동맹이라면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고 합니다. 자세하게 말해주진 않지만, 어비스 코퍼레이션에서 동방 제국에 굉장히…… 많은 수작질을 부리고 있는 모양입니다.”
“흠.”
어비스 코퍼레이션.
산업혁명을 비롯하여, 중앙 대륙의 인간 국가들에 비해 확연히 우월한 기술력과 강력한 함대를 보유한 공포의 악마들.
중앙 대륙을 위협할만한 힘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닐 텐데, 100년 전쟁에서 마왕을 처단하고 건국된 이후 중앙 대륙을 상대로는 큰 위협을 가한 적이 없다.
위협을 하는 것보단 저들의 우월한 상품을 팔아먹으며 장사하는 것이 더 이득이니까 그러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만약 그게 아니라면?
중앙 대륙 따위는 어차피 변변한 해군이 없어서 별 위협이 안 되니까 굳이 적대하느니 돈을 버는 데 쓰고, 그걸로 위협이 될법한 다른 국가를 견제하는 데 쓰고 있다면.
어비스 코퍼레이션은 동방 제국을 견제하느라 중앙 대륙과는 겉으로나마 준수한 관계를 유지하며 군비를 충당하는 거고, 강대한 해군을 보유한 동방 제국은 악마들을 막느라 인간들의 국가에 관여할 여력이 없는 상황이라면.
그렇다면 어디까지나 엘프들의 주장이 사실이라는 전제하에서지만, 어지간한 중앙 대륙의 인간 국가들은 압도할 법한 두 나라가 중앙 대륙에는 직접적으로 개입하지 않는 이유가 설명이 된다.
“……당장은 아니지만, 나중을 위해 고려해볼 만하겠군요.”
어차피 혁명 프랑지아도 어비스 코퍼레이션과는 친하게 지낼 수 없는 사이다.
혁명이 터진 명분부터 악마들에게 국민을 팔아치우는 국왕에 대한 반기였고, 신성 교국에서 인정한 성녀 에리스가 여왕인 이상 악마들과 손잡는 건 빈말로라도 불가능한 일이지.
나 개인적으로도 저 악마들에게 기회만 되면 엿을 먹여주고 싶기도 하고.
“예, 다만 뭐…… 기대한 소득은 아니어서 아쉽군요.”
탈레랑은 입맛을 다셨다.
악마들을 상대하기도 바쁜 엘프들의 제국은 크라프테와의 싸움에는 관심도 없을 테니, 결국 이 전쟁에선 도움이 안 되겠군.
탈레랑은 커피를 홀짝이더니 물었다.
“그런데, 왜 여기 나와 계시는 겁니까?”
“음?”
“설마 후작이 저를 환영하러 여기까지 내려와 있을 리는 없지 않습니까.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아주 잘 알고 있네.
“크라프테의 대왕이 2년의 시간을 줬으니, 그 사이에 혁명군의 정예 상비군을 이끌고 이베리카 반도로 가서 크록스 왕을 도울 겁니다. 경험도 쌓고, 후방 안정과 크라프테와의 전쟁에서 원군을 받아내기 위해서요.”
내가 피식 웃으며 답하자, 탈레랑은 조금 뜸을 들여서 되물었다.
“흠, 그럼 포르투 항구와 야합한 부족들과 싸우러 가시는 거군요?”
“예, 그렇죠.”
탈레랑은 손으로 턱을 매만지더니 나직하게 말했다.
“동방 제국에 다시 다녀와야겠군요.”
“흠? ……아!”
갑자기 무슨 소린가 했는데, 크록스를 섬기는 형제들은 이베리카 반도에서 악마들과 야합한 항구도시 포르투와 그에 붙은 부족들에 맞서 싸우고 있다.
우리가 악마들에 적대하는 세력과 함께 중앙 대륙에서 악마들의 영향력을 축출해 내는 전쟁을 벌이는 이상, 이건 동방 제국에게 우리가 저들의 우방이 될 수 있다는 확실한 증명이 될 수 있겠지.
“동방 제국이 크라프테와의 전쟁에는 관심이 없어도, 우리가 악마들에 맞선 저들의 동맹으로서 가치가 있다고 증명하면 뭐라도 주고받으며 협력하는 건 가능하겠죠.”
오, 확실히.
동방 제국 입장에서도 악마들에 맞선 동맹을 찾기가 쉽지 않을 테니, 말만 잘하면 협력 정도는 가능하겠지.
특히 군사 방면이라면…….
“저들의 화포 기술이 그렇게 좋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총재.”
내 말을 들은 탈레랑은 어처구니없다는 얼굴이 되었다.
“대놓고 입조하라고 해대는 오만한 차르의 비위를 맞춰서, 저들의 군사기술을 받아오라고요?”
“그런 거 적당히 어르고 달래가며 그럴듯하게 입에 발린 말로 꾀어내는 것이, 총재가 제일 잘하는 일 아닙니까?”
“남의 일이라고 너무 쉽게 말씀하시는 거 아닌지…….”
탈레랑 총재가 떨떠름하게 답해서,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했다.
“뭐, 총재가 그러는 동안 저도 이베리카로 가서 바쁘게 싸워야 크라프테가 준 시간 전에 복귀할 수 있을 텐데요.”
그러니까, 제한된 시간 안에 우리 둘 다 열심히 굴러 보자고.
“기대하시지요. 총재가 실패하고 저만 성공한다면 중앙당도 국민의회에서 면이 좀 살지 않겠습니까?”
그 말을 들은 탈레랑 총재는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답했다.
“오, 그 꼴은 못 보지요. 기대하시지요, 후작. 그 오만한 차르가 프랑지아와 사랑에 빠지게 만들어 보일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