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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혁명에 단두대는 필요없다-126화 (126/258)

126화. 이베리카 - 반도 전쟁의 서막

크라프테의 주선으로 체결한 정전협정의 결과, 우리 군은 라인란트에서 철수하여 수도 뤼미에르로 복귀하기 시작했다.

빤히 2년 뒤 크라프테와의 전쟁이 알려졌고 소집 해제될 일반 병사들도 정기적인 훈련이 예고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혁명군의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혁명군이 지나는 마을마다 주민들이 나와 성대하게 환영하고, 없는 살림이나마 쪼개 우리를 대접하려고 들었으니까.

어쩌면 일선 병사들과 주민들은 잠깐이나마 평화를 찾았다는 것만으로도 즐거워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미래에 다가올 거대한 위협보다는, 당장 강대한 제국에 맞서 프랑지아가 승리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근심을 내려놓고 기뻐할 수 있는 거지.

다가올 미래에 대비해야만 하는 책임을 가진 자로서는, 저런 것도 부럽군.

그리고 수도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데미앙 드 미르보는 지젤 다비가 올린 온갖 제안서 뭉치를 들고 나에게 찾아왔다.

하지만 정작, 나는 그 제안서를 보지도 못한 채 데미앙을 상대하는 중이었다.

“후작 각하. 어떻게, 어떻게 좀…….”

“안 됩니다. 돌아가세요. 바꿔줄 생각 없으니까.”

내 단호한 말에, 데미앙 드 미르보 백작의 얼굴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가, 각하. 이제야 막 전쟁이 끝난 참인데 저도 그동안 밀린 자산 관리도 좀 하고…….”

“영지도 재산도 공화국에 넘긴 백작이 관리할 자산이 뭐가 있다고 그러는지. 다음 전쟁이 기다리는데 전쟁이 끝나긴 뭐가 끝납니까?”

데미앙은 아주 울상이 되었다.

“후작 각하. 그러지 마시고 좀…….”

슬슬 짜증이 나서, 나는 이 답답한 백작에 대한 공대를 때려치웠다.

“왜, 야반도주라도 하고 싶어서 그러나?”

데미앙은 딸꾹질을 했다.

“제국도 간신히 이겼는데 크라프테랑 싸운다니까 무서워서 버틸 수가 없고 그러지?”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아니긴 뭐가 아니야. 맞구만.

나는 정말 한심하기 짝이 없는 ‘방어의 명장’ 데미앙 드 미르보를 쏘아보았다.

이게 무슨 놈의 얼어죽을 방어의 명장이야.

그냥 인생 편하게 살아남기만 하면 되는 바퀴벌레지.

나도 능력만 아니었으면 이런 놈 굳이 쓰고 싶지 않다.

“뭐가 되었건, 인선 변동은 없어. 이베리카 반도로는 그대가 간다.”

데미앙의 표정이 절망에 휩싸였다.

“아니면 뭐, 내가 이런 그대에게 수도를 맡기고 드제 사령관을 데려가야 하나?”

여러모로 성실함이나 관리 양쪽에서 능력을 입증해 전쟁 대비를 믿고 맡길 수 있는 드제를 놔두고, 이놈에게 수도를 맡기라고?

지금 이렇게 야반도주할 궁리만 하고 있는 인간을 뭘 믿고?

“그대가 내가 입안한 신병 양성 계획과 훈련과정을 드제만큼 잘 처리해 내고, 군수품 비축과 보급 계획도 전부 빈틈없이 관리해낼 자신이 있다면 못 남길 것도 없지.”

내가 잠깐 이베리카에 다녀오는 사이에도 태업하다가 뒤늦게 부랴부랴 보고서를 급조해 내던 놈이 그런 능력이 있을 리가 없다만.

“게다가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미르보 백작. 설마하니 프랑지아만 떠나면 잘 먹고 잘살 수 있을 거라고 믿는 건 아니겠지? 아키텐 백작을 너무 얕보는 거 아닌지 모르겠어.”

“그, 그게, 아니, 절대 그런 것이 아니라…….”

나는 창백해져선 덜덜 떠는 데미앙을 보며 단언했다.

“그대가 내 앞에서 살려달라고 외치며 항복한 시점부터, 그대는 우리와 한배를 탄 거야. 근데 이 배는 목적지에 도달하기 전엔 정박을 안 하거든. 그러니까 탈 때는 마음대로였겠지만, 내릴 때는 아니라네.”

“그, 그럴 수가…….”

입에서 혼이 빠져나가는 것 같은 데미앙을 보며, 나는 씩 웃었다.

“약혼녀가 있는 나도 간다는데 쓸데없는 핑계 대지 말고 출발 준비나 착실히 해두라고. 우리 가서 즐겁게 지내야지. 응?”

네놈이 선택한 길이다. 악으로 깡으로 버텨라.

그게 싫었으면 단두대 갔어야지.

* * *

그렇게 데미앙을 가차 없이 다룬 나는 지금 식은땀을 흘리는 중이었다.

“……크리스틴?”

“네, 피에르.”

“……편하십니까?”

“네.”

대화는 그걸로 끝났다.

크리스틴은 소파에 나를 앉혀두고 내 무릎 위에 머리를 대고 누운 채, 눈을 감고 조용히 있다.

대놓고 따지고 항의하는 것보다 이쪽이 더 무섭다…….

나는 난감한 기분으로 얌전히 누워있는 크리스틴을 내려다보았다.

기껏 제국과의 전쟁이 끝났는데, 그녀와 잠깐의 시간도 못 보내고 바로 이베리카 반도로 향해야 하는 처지라니 그나마도 내가 없는 사이 수도의 정치세력을 관리하고 크라프테와의 정보전을 진행해야 하는 건 역시나 크리스틴이다.

정말이지 짐만 지우고 뭐 하나 제대로 해주는 것이 없다.

……이 와중에도 뚜렷한 이목구비가 아름답다는 생각이나 들고 있으니, 자괴감이 드는데...

나름 버텨보았지만, 결국 충동에 진 나는 손을 뻗어 크리스틴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그러자 크리스틴이 천천히 눈을 떠서 나를 올려다보았다.

“저 지금 토라진 건데요.”

……크리스틴이 이런 식으로 솔직하게 말해버릴 줄은 몰랐는데.

“미안합니다.”

“당신이 미안할 일은 아닌 것 같은데, 기분은 별로네요.”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여기서 이런 식으로 솔직하게 감정을 말해주는 그녀가 귀여워 보인다고 말했다간, 진짜로 미움 받게 될지도.

결국 나는 다른 소리를 했다.

“……우리, 꽤 멀리 왔죠?”

크리스틴은 눈을 깜빡이더니, 다시 눈을 내리감으며 답했다.

“그러네요, 피에르.”

“아키텐 가문을 차지했고, 루이 왕과 싸우고. 공화국에 가담하고, 폭풍의 마녀를 쓰러뜨리고…….”

마치 내 말을 받듯, 크리스틴이 눈을 감은 채 입을 열었다.

“발리앙을 몰락시키고, 이베리카 반도에 다녀와선 여왕을 옹립해서 제국에 맞서 싸우셨죠. 이젠 다시 이베리카, 그 다음은 크라프테…….”

크리스틴은 천천히 눈을 떠서 나를 바라보았다.

“정말이지, 바빠도 너무 바쁘시네요.”

나는 웃으면서 답했다.

“당신도 그렇죠.”

내가 저러고 다니는 동안 나 혼자 싸운 것이 아니라, 언제나 크리스틴이 뒤에서 나를 도와줬으니.

나는 크리스틴의 검은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입을 열었다.

이제 곧 새해가 되면, 우리는 25세가 된다.

“크라프테와의 전쟁이 끝나면.”

크라프테와의 전쟁이 2년 뒤니까.

나는 손을 뻗어 크리스틴의 손을 잡았다.

“그때는 아마, 루이스도 성년이겠죠.”

크리스틴은 슬며시 웃었다.

“그 이야기는 조금 비겁하네요.”

“그런가요?”

나도 웃었다.

둘 모두 혼기는 한참 전에 지나게 만든, 꽤 긴 약혼이지.

“하지만 제가 선택해서 기다리겠다고 했으니까.”

크리스틴은 맞잡은 손을 끌어당겨, 내 손에 가볍게 볼을 비비며 답했다.

“그러니까, 비겁하다는 말이에요. 그때까지 기다려준다고 한 당신 앞에서, 또 기다려야 한다고 마음이 상한 제가 너무 속이 좁은 것 같으니까.”

“원래 먼저 반한 사람이 지는 거 아니겠습니까?”

내 말을 들은 크리스틴은 결국 소리 내서 웃어버렸다.

나는 그녀의 웃음소리가 잦아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속삭이듯 고했다.

“당신이 너무 오래 기다리지 않도록, 가능한 빨리 끝내고 오겠습니다.”

사절단으로서 몸만 갔던 예전과 달리, 이번엔 혁명군의 병력을 제대로 대동해서 간다.

일단은 공식적으로 정전 상태니 징집된 병력 상당수는 소집 해제하여 정기훈련만 시키겠지만, 혁명 수호대를 비롯한 정예 상비군은 이런 시간을 허비할 수 없으니까.

크라프테의 강군에 맞서야할 혁명군의 경험을 쌓아주고, 크록스의 이베리카 반도 통일을 완전히 이루어내기 위해 이베리카로 향한다.

크리스틴은 나를 올려다보며 미소 지었다.

“그래요. 그럼 당신을 믿고, 저도 제 역할을 하면서 기다릴게요.”

유스틴 폰 비텐펠트.

머릿속에 전쟁만 든 크라프테의 대왕을 보좌하여, 크라프테를 게르마니아 제국 북부의 패자이자 강국으로 만든 재상.

동시에, 크리스틴과 같이 그림자 속에서 움직이는 다른 이면을 가진 자.

그자는 아마도 크라프테와의 전쟁이 시작되기도 전부터 미리 프랑지아에 비수를 숨겨두겠지.

전쟁이 터졌을 때 쓰기 위해.

“그럼, 저도 당신을 믿고 빠르게 다녀오겠습니다. 크리스틴.”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그자도 긴장해야 할걸.

“맡겨주세요. 사실, 조금은 자존심이 상했거든요.”

크리스틴은 그렇게 말하며 싸늘하게 웃었다.

“보란 듯이 선전포고를 해왔으니, 제대로 받아쳐주지 않으면.”

크리스틴의 자존심을 제대로 긁어놓았는데, 내 사랑하는 약혼녀께선 절대 성격 좋은 분이 못되시거든.

나는 크리스틴을 내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크라프테와의 전쟁이 끝나면, 청-”

그러나 내 말이 끝나기 전에, 크리스틴이 내 입가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왜 이러나 싶어서 의아하게 내려다보자, 그녀가 눈을 휘며 진하게 웃었다.

“기다릴게요. 그러니까,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세요. 피에르.”

나는 피식 웃었다.

그리곤 허리를 숙여, 자연스럽게 눈을 내리감는 크리스틴에게 입술을 포갰다.

나누는 숨결로 잠시나마 허전할 서로의 빈자리를.

갈구하는 듯한 애정으로 결의를 채우며.

* * *

이베리카 반도, 항구 도시 포르투.

어비스 코퍼레이션, 슬로스 사의 대표이사 파이몬은 침대에서 뒹굴 거리고 있었다.

불타는 듯한 적발머리가 침대 위에 흐드러지고, 백색 가운도 벗어던져 드레스만을 입은 몸은 아슬아슬한 매력이 가득했다.

……남자지만.

“아아, 지루해 죽겠네.”

파이몬은 지루해 죽을 지경이었다.

라파예트 후작이 이베리카 반도에 머무른 건 잠깐이었지만, 후작은 그 잠깐 동안 어비스 코퍼레이션이 야심차게 준비해준 병기를 이용해 포르투 연합군의 군대를 초토화시켜 버렸다.

그 결과 이베리카 반도에서 도시국가 포르투와 친 어비스파 부족들은 수세로 일관하고 있었다.

보다 더 정확히는, 그동안엔 재정비를 하느라 크록스가 친어비스파 부족들을 야금야금 하나씩 굴복시키는 동안 손놓고 보고 있었다는 표현이 옳았다.

파이몬은 다시 한번 침대에서 굴렀다.

별로 의미 없는, 나태함을 그대로 구현한 듯한 꿈틀거림이었다.

역설적으로, 나태를 관장하는 대표이사 파이몬이 가장 싫어하는 시간낭비이기도 했다.

슬로스 사의 대표이사가 나태함을 즐기는 것은 미덕이겠지만, 애초부터 자신이 담당하는 분야에만 만족하는 삶을 강요받아 수백 년간 나태함을 강제당한 악마는 그에 반기를 들고 싶은 마음만 가득하다.

일을 하지 않는 대신 에너지를 빨리며 생산성을 창출해내는 기술을 진정한 나태의 실현이라며 근면하기 그지없게 연구한 것도, 결국 슬로스 사의 가치관에 반하지 않는 기술이라며 눈 가리고 아웅하며 반기를 든 역설적인 행동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건 그거고, 본국에 있을 연구 장비고 뭐고 아무것도 없는 이베리카 반도에서는 뭘 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다.

“우와, 실로 나태 그 자체! 파이몬이 이렇게 모범적인 악마처럼 구는 모습은 귀한 것입니다.”

파이몬은 머리 위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미간을 구겼다.

“그레모리, 지금은 놀아줄 기분이 아니야.”

러스트 사의 대표이사, 수녀복을 입은 매혹적인 금발의 서큐버스는 키득키득 웃으며 날개를 펼쳐 허공에서 한 바퀴 빙글 돌더니 답했다.

“그레모리가 기억하는 한, 파이몬이 그레모리와 놀아줄 기분이 든 적은 없는 것입니다.”

“알았으니까 꺼져주면 좋겠는데.”

파이몬이 까칠하게 굴든 말든, 그레모리는 싱글싱글 웃었다.

“에에, 그레모리가 들고 온 소식을 들으면 생각이 달라질 것입니다.”

“뭔데.”

“맨입으로?”

그레모리는 얄밉게 웃으며 물었지만, 파이몬이 대답 대신 손을 뻗으려고 들자 냅다 두 손을 들어 올렸다.

“아앗, 야만적인 것입니다! 실로 악마적!”

“그래서 뭔데.”

그레모리는 날개를 퍼덕여 허공에 다리를 꼬고 앉더니, 혀로 손가락을 핥으며 말했다.

“라파예트 후작.”

파이몬의 기세가 변했다.

“이베리카로 오고 있는 것입니다.”

“아아, 드디어.”

파이몬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방 한구석에 걸어놓은 백색 가운을 걸쳤다.

“환영 인사를 준비해야겠군.”

나태함을 완전히 날려버린 핏빛의 악마가, 희열에 차서 읊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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