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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혁명에 단두대는 필요없다-125화 (125/258)

125화. 혁명 수호 전쟁 - 정전 (2)

레오폴트 대공이 한 말이 빈말이 아니었는지, 대공저의 대접은 제법 융숭했다.

그렇게 은근히 씁쓸한 뒷맛을 씹으며 대공저를 떠나고 삼일 뒤, 우리 일행은 라인란트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럼 협상장에서 보도록 하겠네, 라파예트 후작.”

“……여기까지 데리고 와주신 대왕 폐하와 크라프테군의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대왕은 픽 웃으며 손을 저어보이곤, 우리 측이 준비해둔 크라프테군의 주둔지로 향했다.

나는 그제서야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좀 살 것 같네.

살다 살다 내가 크라프테군의 호위를 받으며 게르마니아 제국을 내륙으로 횡단하는 경험을 다 해볼 줄이야.

대왕과 헤어져 주둔지로 향하자, 제일 먼저 헐레벌떡 뛰어나온 것은 데미앙 드 미르보 백작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후작 각하! 눈이 빠지도록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크라프테 왕국과 싸우게 될 거라는 소문이 있습니다! 무려 라파예트 후작 각하께서 협상하러 가셨는데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있겠습니까? 국민의회의 협잡꾼들이 각하를 모함하지만 저만큼은-”

“사실이야.”

“예?”

“크라프테가 우리와 전쟁할 작정이라고.”

나는 그대로 딱딱하게 굳어버린 미르보 백작을 내버려 둔 채 진지로 발을 옮기려다가, 뒤에서 굉장히 유감스럽다는 얼굴로 데미앙을 보고 있던 여장교와 눈이 마주쳤다.

“복귀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라파예트 후작 각하!”

경례하면서 외치는게 거의 척수반사 수준인 것이, 군기가 바짝 들어 있는데.

“그래, 그대가 다비 중위?”

“옛! 지젤 다비 중위가 혁명군 총사령관 각하를 뵙습니다!”

“지난 전투에서 그대 공이 컸다고 들었네. 눈여겨보고 있으니 앞으로도 분발해 주면 좋겠어.”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더욱 임무에 충실히 임하겠습니다!”

바로 방금까지만 해도 한심하다는 눈으로 데미앙을 보고 있던 지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아서, 나는 픽 웃었다.

아직 어린 태가 조금 나는데, 얘가 전술적에선 그렇게 우수하다고 했지?

“아, 그래. 크라프테 왕국과의 전쟁에 대해서는 어찌 생각하나?”

“후작 각하의 빛나는 업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엉?”

나는 순간 당황했지만, 지젤은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떠들었다.

“크라프테 왕국이 전쟁을 결단한 이상, 우리에게 시간을 줄 이유가 없습니다. 여기서 2년의 정전을 이끌어낸 것은 전적으로 후작 각하의 협상력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아니, 그런 거 아닌데.

그냥 대왕이 미친놈이라 그런 건데.

그보다 얘 어째 과도한 존경심을 뿜어내는 것이 부담된다.

데미앙 드 미르보는 뭔가 가식적이라 더 재수가 없는데, 얘는 진심 같아서 다른 의미로 어렵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크라프테와의 전쟁에 대비한 의견이 있으면 나중에 미르보 백작 통해서 올리게.”

“옛, 철저하게 준비해서 올리겠습니다!”

나는 직감했다. 얘는 빠른 시일 내에 엄청난 분량의 제안서를 보내오겠군.

날로 먹고 싶은 데미앙 드 미르보의 휘하에 의욕이 넘쳐흐르는 부관 조합이라…….

나쁘지 않은데.

얘를 잘 써먹으면 데미앙 드 미르보를 더 효과적으로 부려 먹을 수 있을지도.

그렇게 생각하며 지나치자, 혁명군의 장군들이 모두 나와 있다가 경례했다.

“어서 오십시오, 후작 각하!”

“아, 그래. 내가 없는 동안 수고들 했네.”

다크 서클이 짙은 사람이 많은 걸 보니, 충격적인 소식을 받고 꽤나 심란했던 것 같아서 괜히 미안해진다.

……생각해 보면 내 잘못은 아닌데.

그래도 할 말은 해야지.

“2년 뒤, 크라프테 왕국과 전쟁을 벌인다. 철저히 준비해야 하니 앞으로 바빠질 거야.”

“후우, 반신반의했는데 정말이군요. 크라프테는 대체 왜 제국을 위한 전쟁에 낀답니까?”

루이 드제의 질문에, 나는 어색하게 웃어야 했다.

그 대왕의 정신 나간 사고방식을 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하지.

“……우리가 강해 보여서 한 판 붙고 싶나 본데.”

역시나 드제의 표정은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아니, 그렇게 강한 놈하고 싸우고 싶으면 차라리 악마 놈들이랑 싸우라지 그럽니까?”

드제가 어이없다는 듯이 답했지만, 나도 더 어이없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싸우자고 했다던데.”

“진짭니까?”

“그래. 근데 싫다고 하고 섬에서 안 나오니 어쩔 수 없다나.”

“어비스 코퍼레이션에 당당하게 전쟁하자고 덤비는 미친놈과 싸워야 한다니...”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는 루이 드제.

“골치 아픈 상대군요. 차라리 전략 목표라도 있으면 타협이 가능할 텐데.”

한숨을 내쉬는 알렉상드르 베르테르.

“휘유~ 내 옛 친우가 존경한 인간이 그렇게 대단한 또라이였다니. 아, 생각해보니 발리앙 그 친구도 좀 또라이긴 했지. 비슷한 인간이라 서로 좋아한 건가?”

너무 자연스럽게 고인드립을 치는 제롬 모렐.

“크라프테군의 전설적인 용맹은 익히 들었습니다! 저를 선봉에 세워주십시오!”

……크라프테군에 취직시키면 코드가 잘 맞을 것 같은 니콜라 네.

어째 우리 쪽도 상태는 별로 안 좋은데?

결국 내가 가스통과 마주보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있자,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라파예트 후작님.”

익숙한 백색의 로브.

나는 바로 에리스의 앞에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피에르 드 라파예트 후작이 크라프테 왕국으로의 사절 임무를 마치고 복귀했습니다, 여왕 폐하.”

“수고하셨어요, 후작님. ……그렇게 말해주고 싶지만, 결국 크라프테 왕국과는 전쟁을 벌이는 건가요?”

“……예. 정식 회담에서 확정 나겠지만, 그렇게 될 겁니다. 여왕 폐하.”

에리스는 잠시 말이 없었지만, 이내 작게 한숨을 내쉬고 답했다.

“그렇군요. 그 대왕이라는 자, 어떤가요?”

나는 절로 쓴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여왕 폐하와는 완전히 상극입니다.”

* * *

다음날, 정전 협상이 열렸다.

무려 프랑지아의 여왕과 크라프테의 대왕, 거기에 제국의 황후까지 직접 참석한 자리.

그러나 참석자들의 무게와 다르게 정전 협상은 정말 명목상으로만 진행되었다.

어차피 게르마니아 제국은 크라프테 왕국에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고, 프랑지아 입장에서도 전쟁하겠다는 크라프테 상대로 내밀만 한 뭐가 없으니까.

“프랑지아 국민의회는 전쟁을 원하지 않습니다. 크라프테의 대왕께서는 협상할 의사가 없습니까?”

“미안하지만, 없소.”

대왕이 웃으면서 하는 뻔뻔한 말에, 자유당 총재 니콜라 브리소는 할 말을 잃었다.

탈레랑이 부재중인 상황에 나나 에리스만 믿고 기다릴 순 없으니 국민의회에서도 나름대로 협상해 보겠다고 보낸 건데, 온 것이 무색하게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카를 2세의 일방적인 통보만을 들어야 하는 상황이라니.

사실 전쟁할 상황에 2년의 유예를 주는 것만도 파격적인 조건인 데다 대왕이 프랑지아에 바라는 게 없으니 제대로 된 협상 자체가 될 리가 없다.

결국 대충 형식적인 대화 끝에, 대왕은 빠르게 결정 내버린 내용을 읽어 주었다.

“혁명 프랑지아 왕국은 라인란트를 비롯한 점령지역을 반환하고 게르마니아 제국의 국경 밖으로 철수. 이후 양국은 2년간의 정전을 체결하며, 이는 크라프테 왕국이 보장한다. 정전이 종료되는 시점에 크라프테 왕국은 게르마니아 제국 측으로 참전하여 전쟁을 재개한다. 양측 모두 동의하시오?”

게르마니아 제국의 황후 세실리아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서명했고, 다음 차례인 에리스는 모두의 시선 속에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선택지가 있긴 한가요?”

카를 2세는 짐짓 친절하게 웃으며 답했다.

“싫다면 지금 당장 전쟁을 이어가도 된다오.”

“……동의하죠.”

에리스는 깃펜을 쥔 손을 조금 떨며 머뭇거렸지만, 결국은 협정서에 서명했다.

마지막으로 서명한 대왕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선언했다.

“좋아, 그럼 협정은 정식으로 체결되었소. 성공적으로 협상을 주선하게 되어 기쁘군.”

대왕의 선언을 끝으로 프랑지아는 잠시나마 평화를 찾았다.

2년 뒤의 전쟁이 예고된, 사실상 그에 대비할 시간일 뿐이지만.

회담장을 대충 갈무리한 대왕은 늘 들고 다니는 지팡이를 쥔 채 나에게로 다가왔다.

처음 봤을 때만 해도 저 지팡이가 나이 들어 힘든 몸을 가누기 위한 건 줄 알았지.

전쟁광의 관현악단 지휘봉일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나.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지, 대왕은 웃는 얼굴로 말을 걸어왔다.

“그럼, 라파예트 후작. 짐은 볼 일도 다 봤으니 이만 돌아가 볼까 하네.”

“일찍 돌아가시는군요.”

내 말을 들은 대왕은 씩 웃었다.

“피차 만찬 같은 걸 즐길 사이도 아니잖나.”

알긴 하시니 다행이네.

하는 짓이 과하게 대범해서 모르는 줄 알았는데.

그러고 있자, 에리스가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대왕님.”

“오, 프랑지아 국민에게 사랑받는 성녀왕께서 짐에게 무슨 볼 일이라도?”

에리스는 차분하게 가라앉은 보랏빛의 눈동자로 대왕을 빤히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크라프테 왕국은 무엇을 위해 이 전쟁을 결정한 거죠?”

대왕은 주저도 없이 자랑스럽다는 듯이 답했다.

“이 시대 최강이라는, 영원히 남을 영광을 위해.”

“……제게는 가치 없는 영광이네요. 아마 대왕님의 전쟁에서 희생될 많은 사람들에게도 그렇겠죠.”

에리스의 싸늘한 말에도 대왕은 여전히 웃는 낯이었다.

그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지팡이를 들어 올려 한 바퀴 돌렸다.

“아직 젊은 그대들에게 와닿을지 모르겠는데, 짐은 이리 생각한다네.”

그리곤 지팡이를 소리 나도록 그대로 바닥에 내리꽂더니, 그 위에 두 손을 얹고는 웃으면서 말했다.

“역사에 남은 위대한 정복 군주들은 대부분 당대 백성들의 비난과 원망을 받았네. 그러나 그가 이룩해낸 업적과 강대한 국가는 후대에 그 땅에서 살아갈 이들이 누릴 풍요와 자긍심의 원천이 되었지.”

대왕은 에리스를 보며 고했다.

“그대는 현시대의, 그대가 품은 이들을 위해 싸운다. 성녀왕이라 칭송받으며 국민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는 그대 또한 분명 존경받는 성군으로 남을 터. 짐은 기꺼이 경의를 표하는 바이네.”

에리스를 낮게 보지 않으면서도 전혀 흔들림 없이, 웃으면서 선언한다.

“그러나 짐은 역사에 남을 짐과 군대의 위대한 이름, 그리고 짐의 국가에서 미래에 살아갈 이들이 영원히 품을 자긍심을 위해 싸운다. 서로의 관점이 다른 것일세.”

침묵하던 에리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대왕께선 지금도 위대한 명군으로 칭송받고 있죠. 만약 이렇게 일으킨 전쟁에서 패배한다면, 그래서 미래를 위한 명예가 아니라 지금껏 남긴 명군이라는 이름조차 잃는다면 이건 아무 가치 없는 전쟁이 아닌가요?”

대왕은 슬며시 미간을 좁히더니, 이내 웃음을 흘렸다.

“후, 흐흐흐. 훌륭하군, 훌륭해. 이 정도는 되어야 짐의 적이라 부를 수 있지 않겠는가. 프랑지아의 성녀왕이여, 인류 최강이라 불리는 짐의 군대를 상대로 이길 수 있다고 여기는가?”

“공교롭게도 그 최강의 군대를 이끄는 분께서 2년을 허락하셨으니, 최선은 다해보려고요. 제가 믿는 분들과 함께.”

“하하하하하…….”

대왕은 웃음을 터뜨리더니, 이내 지팡이로 바닥을 탕- 소리 나게 내리치곤 답했다.

“만약 짐이 패한다면, 짐과 짐의 군대는 이 시대 최강에 맞서 싸웠다는 영광을 누릴 터! 짐은 어느 쪽이어도 좋노라!”

에리스마저 말문이 막힌 사이, 대왕은 형형하게 눈을 빛내며 소리쳤다.

“에실리스테 릴리안느 드 프랑지아, 그리고 피에르 드 라파예트 후작. 2년간의 유예를 가치 있게 이용하길 바라지. 그대들의 결의에 걸맞은 전쟁을 기대할 테니, 짐을 실망시키지 말라!”

폭풍 같은 말을 끝으로, 대왕은 그대로 성큼성큼 걸어 회담장을 나가버렸다.

정적이 흘렀다.

한참 동안 대왕이 나가버린 쪽을 바라보고 있던 에리스가 나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절대, 절대, 절대 저런 사람에겐 지고 싶지 않아요.”

에리스라면 백성의 목숨 따위 군수품 정도로 취급하는 대왕을 질색할 거라고 생각했지.

나도 가볍게 한숨을 쉬며 답했다.

“동의합니다, 여왕 폐하.”

“계획은 있으신가요?”

잠시 뜸을 들이다 물은 에리스의 목소리에 미처 다 숨기지 못한 걱정과 불안이 묻어 나와서, 나는 되도록 자신 있는 목소리로 답했다.

“있습니다.”

강제로 게르마니아 제국을 육로로 횡단하는 여행을 하는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건 머리를 굴리는 것 밖에 없었거든.

2년이란 시간은 짧고, 우리는 아주 바빠지겠지.

혁명군의 장군들은 물론이고, 크리스틴에게 많은 도움을 받아야 할 거다.

그건 그거고.

“우선 이베리카 반도부터 정리하도록 하죠.”

크록스에게 진 빚은 갚아야지.

이베리카 반도에서 악마들과 손잡은 자들을 전부 몰아내고, 확실한 동맹부터 끌어들인다.

대왕은 아주 영광스럽고 명예로운 1:1 전쟁을 기대할까?

어쩌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저 미친 전쟁광이라면 적이 강하면 강할수록, 많으면 많을수록 흥분할지도 모르지.

나는 에리스를 보며 선언했다.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반드시 승리하겠습니다.”

어째 상대가 저 대왕이라면 무슨 짓을 벌여도 양심이 찔릴 일 따윈 없을 것 같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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