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혁명 수호 전쟁 - 정전 (1)
게르마니아 제국 서부, 라인란트 ? 프랑지아 혁명군 점령지.
혁명군 총사령관인 라파예트 후작은 물론 외교담당인 탈레랑 총재마저 부재중인 상황에 크라프테 왕국으로부터 2년간의 정전 후 선전포고하겠다는 통첩이 날아들었다.
프랑지아는 당연하게도 난리가 났다.
그나마 크라프테의 대왕이 라파예트 후작과 함께 제국과의 정전을 주선하기 위해 이곳으로 오고 있다는 소식이 같이 전해진 덕에 판단은 그때까지 보류하자는 쪽으로 기울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안감과 어수선한 분위기를 미처 숨기지 못했다.
특히나 호들갑을 떨며 이젠 끝장이라고 떠들던 데미앙 드 미르보 백작이라던가.
에실리스테 릴리안느 드 프랑지아, 여왕 에리스는 그렇게 혼란한 혁명군 속에서 발걸음을 서두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으십니까?”
뒤에서 들려온 조심스러운 물음에, 에리스는 언제나처럼 그녀를 지켜주고 있는 프레데릭 드 보몽을 돌아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프랑크 아저씨.”
“오랜만에 그리 부르시는군요.”
“아아~ 힘드네요. 드디어 이겨서 끝나는구나 싶었는데, 2년의 정전 후 다시 싸운다니…….”
그것도 상대는 그 크라프테 왕국.
지금 영토의 고작 반인 중소국가일 때 제국을 상대로 전쟁에서 승리해 땅을 넓혀 대왕이라 불리게 된, 살아있는 전설의 군대에 맞서야 한다.
“다들 저를 안심시키려고 하지만 미처 동요를 감추지도 못하고. 아아, 라파예트 후작님 바보.”
보몽 경은 애매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라파예트 후작께서도 최선을 다하셨을 겁니다.”
정치라곤 관심도 없는 고지식한 기사가 딴에는 피에르를 변호해서, 에리스는 슬며시 웃으며 답했다.
국민의회에서는 벌써부터 일부 의원이 라파예트 후작의 책임론을 꺼내는 자도 있었다고 하지만, 에리스가 그렇게 여기지는 않았다.
“당연하죠. 그건 믿어요. 당장 싸우는 게 유리할 크라프테가 2년의 정전을 제안한 건 이유가 있겠죠. 의회에서야 뭐라고 하든, 저는 후작님이 돌아오시는 것만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는걸요.”
하지만 에리스의 말을 들은 보몽 경의 표정은 더욱 미묘해졌다.
그게 숫제 정혼자도 있는 남자에게 마음을 준 것이 아닌가 하고 딸을 걱정하는 아버지 같아서, 에리스는 쿡하고 소리 내어 웃어버렸다.
“전하, 혹시…….”
근위기사로서의 모든 걸 포기하고 지금껏 그녀를 지켜준, 어머니를 사모한 남자.
그래서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생각하시는 건가.
아마도 그녀를 딸처럼 여기고 있는 아저씨에겐 미안하지만 그게 제법 귀엽게 느껴져서, 에리스는 장난스럽게 씩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지금 안 계시니 어쩔 수 없죠. 제가 더 힘내는 수밖에.”
그리고 두 손을 들어 자신의 뺨을 찰싹 소리 나게 치고 힘주어 말했다.
“저는 프랑지아의 여왕이니까.”
그리고는 목적지로 나아갔다.
도착한 사절단의 거처에서 시종이 안으로 고하고, 에리스는 보몽 경을 돌아보며 미소 지어 그를 안심시켜 주고 안으로 들어섰다.
“……어서 오세요, 3왕녀. 크라프테의 대왕이 회담을 주선해 주겠다 하고 다른 곳에 들러 오느라 기다리며 지루한 참이라, 혈육 간에 대화나 하고자 만남을 청했답니다.”
두 번째로 마주한 이복 언니의 앞에서, 에리스는 싱긋 웃으며 답했다.
“이제는 여왕입니다, 체칠리아 전하.”
* * *
20세의 겨울, 알프스 왕국에서 두 사람이 마주한 이후 1년 반이 지났다.
그러나 나이 차가 커 어머니와 딸뻘인 두 자매의 상황은 역전되었다.
그때는 제국이 유리한 상황에 전쟁을 벌이고자 저들이 마련했던 자리였으나, 지금은 패배한 제국이 크라프테가 주선한 자리에 불려온 상황이니까.
그러나 당돌하게 답한 에리스의 예상과 달리, 체칠리아는 분노하는 반응을 내보이지 않았다.
입술을 깨물고 잠시 침묵하던 체칠리아는 에리스에게 자리를 권하며 답했다.
“……존중은 해주어야 옳겠으나, 제국은 아직 그대의 여왕 즉위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전하.”
잠시 마주 보는 시간이 흐른 끝에, 체칠리아가 입을 열었다.
“그래, 그대가 이겼군요. 기쁘십니까?”
첫 대면과는 달리, 둘 모두 처음부터 아무도 대동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체칠리아는 공대로 대해주고 있다. 에리스는 그걸 새삼스럽게 느끼며 답했다.
“우리는 아직 이기지 못했습니다, 전하. ……전하께서 부른 국가와의 전쟁에 대비해야 할 처지이니까요.”
에리스는 잠시 뜸을 들였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야말로 여쭈어보고 싶네요. 전하를 위해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는데도, 그걸로는 부족했나요? 이런 전쟁을 더 이어나가야만 했나요?”
체칠리아는 말없이 찻잔을 들어 그것을 마시고, 천천히 내려놓았다.
그 느릿느릿한 동작이 이어지는 동안 에리스가 빤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자, 체칠리아가 입을 열었다.
“제국군을 후하게 대접하고 치료해 준 것은 그대가 한 생각입니까?”
에리스의 물음에 대한 답은 아니었다.
그래도 에리스는 잠시 뜸을 들인 뒤 답해왔다.
“……네. 국민의회의 동의를 받아서요.”
“그들을 해방시키고, 제국군의 사기를 뒤흔들어 붕괴시키는 것도?”
“저는 해방만 제안했어요. 붕괴시키는 건 제가 떠올린 건 아니지만, 찬성했죠. ……불필요하게 흐를 피를 줄일 수 있으니까.”
체칠리아는 픽 웃으며 답했다.
“그래, 그렇군요.”
저 순수한 선의가 다른 무엇보다도 제국에 치명타를 입혔다는 것이 마치 싸구려 희극처럼 느껴졌다.
꽤 긴 침묵이 흐른 끝에, 체칠리아가 입을 열었다.
“부럽군요.”
에리스는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뭐가 말씀이시죠?”
“국민의회의 꼭두각시.”
-제아무리 그럴싸한 말로 포장한들, 네가 두른 위선이 고결해 보인들. 너는 어차피 타인에 의해 만들어진, 국민의회의 꼭두각시일 뿐이야.
“라파예트 후작의 패.”
-너를 성녀로 만들고, 왕위에 앉히려는 후작은 아무 사심 없이 그랬을 것 같더냐?
조용히 있는 에리스를 보며, 알프스에서 그녀 자신이 했던 말들을 곱씹은 체칠리아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인정하죠. 내가 그대를 잘못 보았다는걸.”
정말로 전쟁을 막기 위해 옹립한 꼭두각시 여왕이었다면, 라파예트 후작이 권력을 쥐기 위해 쓰고 버릴 말이었다면 저런 발상을 한들 허용될 리가 없다.
폭풍의 마녀와의 전투에서 보여준 활약까지는 성녀로서의 존재감을 알리고 옥좌에 추대되기 위한 명분이라고 볼 수 있어도, 이번 전쟁에서 에리스가 보인 존재감은 그걸 아득히 넘어섰으니까.
이제는 프랑지아의 누구도 전 국민의 칭송을 넘어서 중앙대륙 전역에 성녀왕이라는 이름을 널리 알린 배다른 동생을 함부로 좌지우지하려 들지 못하겠지.
……어쩌면, 알프스 왕국에서 대면한 순간에도 이미 그렇다는 걸 어렴풋이 깨달았는지도 모른다.
-최소한 나의 자리는 내 손으로 일궈낸 것이야. 내 운명은 나의 것이고, 앞으로도 내가 움직인다.
체칠리아가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뿐.
-네 스스로 거머쥐어본 것조차 없는 너는, 네 운명마저 타인에게 휘둘릴 것이야. 이 전쟁에서 나에게. 아니라고 해도 제 야망을 위해 널 허울뿐인 옥좌로 올리려는 그 자에게.
그저 선량할 뿐 세상을 모른다고 생각한 이복동생에게 한 말이, 사실은 전쟁을 시작했을 뿐 끝내는 것을 허락받지 못한 자신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것을 그때는 왜 몰랐을까.
체칠리아는 자조 섞인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내가 진정으로 크라프테 왕국을 부르고 싶어서 불렀다고 생각합니까?”
제국이 벌인 전쟁에서 패배하여, 반황제파의 수장으로 취급받는 나라의 대왕에게 손을 벌렸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제후는 아무도 없을 거다.
그럼에도 그래야만 했다.
오토 2세. 황제가, 전쟁의 패배를 인정하지 못하니까.
그는 차라리 백성을 팔아서라도 악마들의 힘을 빌리려 하겠지만, 체칠리아가 그것만은 용납할 수 없기 때문에.
그래서 굴욕을 참고 자식에게 약속되어야 했을 제관을 포기하며 무릎을 꿇었다.
그렇게라도 해야.
프랑지아의 왕위를 탐내다 자식의 제위를 날려버린 어리석은 황후가 될지언정, 책임을 저버리고 제국을 무너트린 황후로 남지는 않을 테니까.
“그러시다면, 차라리 전쟁을 끝내시면 될 텐데요.”
다만 올곧고, 자신의 뜻을 펼치도록 도와주는 이들과 함께 싸우는 성녀왕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 순백의 빛이 어쩐지 눈이 아파서, 체칠리아는 눈을 내리감으며 답했다.
“그래서 그대가 부럽다는 겁니다.”
다시 침묵이 흘렀고, 에리스가 입을 열었다.
“제게 만남을 청하신 이유를 들을 수 있을까요?”
체칠리아는 천천히 눈을 떠,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첫째로는, 그대의 승리를 축하해 주기 위함이고.”
“감사드려요.”
에리스가 별로 감사하지 않다는 얼굴로 답해서, 체칠리아의 얼굴에 걸린 미소가 짙어졌다.
“둘째로는, 부탁이라고 할지.”
“부탁이라면?”
“……기왕 제국을 꺾었으니, 이번에도 이기세요.”
에리스가 보랏빛의 눈동자를 동그랗게 뜨고 깜빡여서, 체칠리아는 그제야 조금 유쾌한 기분이 되었다.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르겠어요.”
“이기라고 했습니다. 제 말이 어려웠나요?”
에리스의 표정이 더더욱 혼란스러워지는 걸 본 체칠리아는 나직하게 웃더니 말했다.
“아직 갈 길이 멀군요.”
에리스가 대놓고 표정을 구겼지만, 체칠리아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제국이 패배한 프랑지아를 크라프테 왕국이 단독으로 꺾어버리면 제국의 위신은 완전히 끝장나겠지요. 그러나 제국이 상처를 보듬는 사이 그대들이 크라프테 왕국에 맞서 승리한다면.”
“……그러면, 어떻게든 만회할 기회가 된다는 건가요.”
체칠리아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래요.”
에리스는 한동안 체칠리아를 빤히 보더니 입을 열었다.
“프랑지아의 왕위는 포기하시는 건가요?”
“크라프테 왕국이 이긴다 한들 프랑지아 왕위를 제국의 품에 안겨줄까요? 안겨준들 허울뿐이거나, 그보다 더한 대가를 제국에 요구할 테죠.”
담담한 말을 들은 에리스는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약간 억눌린 음색을 냈다.
“그렇게 포기할 수 있는 거였다면, 왜.”
“……에실리스테 릴리안느 드 프랑지아.”
체칠리아가 자매의 이름을 불렀다.
처음으로 입에 담은, 반이나마 피가 이어진 혈육의 이름에 생소함을 느낀 체칠리아는 헛웃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그래, 네 말대로 잃어버린 것만을 갈구하다가, 남아 있던 것마저 잃어버리니 더한 괴로움만이 남더구나.”
“후회하시나요?”
“후회, 후회라…….”
체칠리아는 그 단어를 곱씹듯이 입안에서 굴려보다가 입을 열었다.
“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 내가 일궈낸 많은 것이 이 전쟁으로 무너졌고, 내가 일으킨 전쟁으로 흐른 제국민의 피와 눈물은 그대로 원망이 되어 나에게로 쏟아질 터이니.”
체칠리아는 마치 뚫어볼 듯이 투명한 보랏빛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입가에 조소를 걸었다.
“너와 네 조국의 분투에는 마땅히 경의를 표하마. 하나 이 전쟁을 포기했다면 나는 갈 곳 없는 복수심과 박탈감 속에 살아가야만 했다. 결국, 내겐 이 길밖에 없었어.”
에리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전하. 그런 행위가, 전하의 슬픔과 고난을 외면하며 제국으로 보내버린 아바마마와 어디가 다른가요?
그러나 알프스 왕국에서 가슴에 깊숙이 파고든 말은 여전히 아프게 찔러서, 체칠리아는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다만, 그래. 그렇구나.”
체칠리아는 한탄하듯 읊조렸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본래부터 내게 주어진 것이 아니었음을, 내게 있어 프랑지아의 왕위 따위보다 제국이 훨씬 중한 것이었음을 미리 깨닫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울 따름이구나.”
그녀의 곁에는 그것을 알려줄 이도, 말려줄 이도 없었다.
-저는 가능하면 우리 모두, 더 이상 어느 것도 잃지 않기를 바랄 뿐이에요.
유일하게 그것을 알아보고 고해준 자가 적으로 만난 이복동생이라는 것에 깊은 회한만이 남을 뿐.
대화는 그걸로 끝났다.
정적만이 흐르는 자리에서, 에리스가 입을 열었다.
“전하의 뜻은 알았으니,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답은 없다.
에리스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고했다.
“저는 전하를 원망해요. 아마, 제국민들도 그렇겠죠. 후회는 해도 반성하지는 않으실 거라면, 그 고뇌는 하다못해 전하로 인해 많은 것을 잃어버린 이들을 위해 해주세요.”
말을 마친 에리스는 그대로 등을 돌렸다.
그녀가 방을 빠져나오기 직전에, 체칠리아의 음성이 들려왔다.
“나는 실패했다. ……너는, 이기거라.”
에리스는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물었다.
“우리 모두를 위해서요?”
“……그래.”
에리스는 천천히 몸을 돌려, 체칠리아에게 가볍게 목례를 해보이곤 답했다.
“최선을 다하죠. 우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프랑지아의 국민 중 하나로서, 그들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