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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혁명에 단두대는 필요없다-121화 (121/258)

121화. 혁명 수호 전쟁 - 크라프테 (3)

수도에서 며칠 머무른 뒤, 나는 크리스틴에게 안내받아 브르타뉴 지방의 군항 브레스트로 향했다.

사람들과 배로 가득해 활기차던 무역항 아키텐의 동적인 분위기와 달리, 거대한 전열함과 군함들이 정박한 채 해군이 움직이는 군항 브레스트는 꽤 정적인 분위기였다.

내가 탈 배가 정박 중인 곳으로 가자, 미리 기다리고 있던 남자가 다가와 크리스틴에게 경례했다.

“어서 오십시오 아키텐 제독 각하, 라파예트 후작 각하.”

군복 차림의 선장이 경례하고, 드레스 차림의 크리스틴이 경례로 답해주는 건 꽤 묘한 느낌인데.

“오늘의 나는 안내역으로 잠시 들린 것뿐이니, 편히 있어도 좋아, 뒤헝 선장.”

경례를 받아준 크리스틴은 부채로 입가를 가리며 덧붙였다.

“그대가 맡은 바 임무를 완벽하게 해주리라 기대하지.”

“물론입니다!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라파예트 후작 각하. 저는 프랑지아 해군 소속 뤼도빅 뒤헝이라고 합니다. 각하께서 이번 항해에 탑승하실 군함이자 아키텐 제독 각하의 기함, 86문급 전열함 ‘리브레’의 선장을 맡고 있습니다.”

“아아, 잘 부탁하지. 이게 그 배인가.”

나는 고개를 들어 제법 거대한 전열함을 올려다보았다. 리브레. ‘자유로운’이라는 이름의 전열함.

참고로 이름은 탈레랑이 제안했다고 한다.

……그래놓고 제독의 기함을 뺏겼으니 얼마나 상심했을지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군.

어쨌거나 수많은 대포를 싣고 적함과 교전하기 위해 만들어진, 그야말로 전투만을 위해 건조된 대형 범선은 보기만 해도 웅장해지는 맛이 있었다.

구 프랑지아 왕국에서도 전열함을 몇 척 가지고는 있었지만, 혁명 당시 불타 버렸고 있었어도 이 최신형 군함에 비할 바는 아니었겠지.

내가 잠시 배를 올려다보고 있자 뒤헝 선장은 신이 난 모양이다.

“실로 아름답지 않습니까? 이 배는 중앙 대륙 최대의 군함입니다! 아키텐의 선박 기술자들이 모여 집대성한 기술력과 막대한 인력으로 2년 넘게 걸려 건조한 최강의 전투함이죠! 보고만 있어도 가슴이 뜨거워지는-”

“뒤헝.”

“아, 죄송합니다.”

크리스틴에게 말이 잘린 뒤헝은 머쓱해했지만, 장본인인 크리스틴의 표정은 지극히 담담해서 그녀가 지휘할 기함에 대해 별 감흥도 없어 보였다.

나와 단둘이 있을 때와는 표정 변화가 확실히 달라서 묘하게 재미있단 말이지.

“그럼, 피에르.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물론입니다. 뭐, 외교사절이니 문제는 없겠죠.”

나는 고개를 돌려 거대한 전열함을 보았다.

이게 대포만 86문 탑재된 전열함. 노던 연합 왕국에서 네 척 운용하는 전열함이 50문을 탑재했다고 했던가?

“이런 배에 시비를 걸 자들도 없을 것 같고요.”

방금 뒤헝 선장이 배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을 땐 덤덤한 얼굴로 끊어버린 크리스틴은 쿡, 하고 웃으며 답했다.

“그러네요.”

정작 그녀가 웃는 모습을 본 뒤헝 선장의 눈이 튀어나올 기세라 좀 의아해야 했지만.

……제독으로서의 크리스틴은 대체 어떤 모습인 거지.

“그럼-”

“잊으신 것 없습니까?”

크리스틴에게 작별 인사를 하려는데, 갑자기 끼어든 음성이 있었다.

나와 크리스틴이 모두 고개를 홱 돌리자, 탈레랑 총재가 숨을 고르다가 입을 열었다.

“거, 어차피 가는 배 좀 얻어 탑시다.”

나는 크리스틴과 마주 보았지만, 크리스틴도 다소 당황한 눈치였다.

……태업 상태라서 안 가는 거 아니었어?

* * *

브레스트에서 출항한 뒤.

나는 생전 처음으로 배를 타고 여행 중이었다.

드넓은 바다를 가르며 항해하는 나날은 처음에는 잠깐 새롭고 즐거웠지만, 이후로는 그렇지 못했다.

크리스틴의 기함이자 중앙 대륙 최대, 최강의 군함.

이런 배로 가는 여로에 문제 따위 있을 리가 없다.

……라고 생각했었다.

나는 갑판 위에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숨을 골랐다.

“으으, 이제 좀 살 것 같군요.”

꽤나 한심하다는 얼굴로 나를 보고 있던 탈레랑이 입가에서 미처 웃음을 지우지 못한 채 답했다.

“이거, 프랑지아의 영웅이자 제국 최고의 기사를 꺾은 후작께서 뱃멀미를 이리 심하게 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처음이라 그렇습니다, 처음이라.”

...아마도.

그냥 접대 멘트인지도 모르겠지만 뒤헝 선장도 그렇게 말해줬으니 제발 그렇기를 빌 뿐.

크리스틴의 명령으로 나는 파격적이게도 제독의 선실에 머무르게 되었고, 배 안이라는 것이 무색하게 제법 편하게 지낼 수 있었다.

……만, 역시나 안에서 가만히 있자니 속이 울렁거려서.

크리스틴과 같이 오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다.

그녀와 즐겁게 여행하는 기분을 만끽하고 싶었던 거지, 그녀 앞에서 멀미로 허덕이는 모습 따위 보여주고 싶겠냐고.

나는 시선을 돌려, 이죽거리는 미소를 참는 시늉- 도 안 하고 그냥 대놓고 이죽거리고 있는 탈레랑을 바라보았다.

원래부터 상행을 다니며 배에 익숙할 크리스틴이야 당연히 멀미 따위와 거리가 멀 테지만, 이 양반은 의외로 멀쩡하네.

“그래서, 저를 크라프테에 내려주고 그대로 동방 제국으로 가신다고요.”

“그렇습니다. 동방 제국에 우리도 면이 살려면 이 정도 배는 끌고 가 줘야 할 텐데, 가뜩이나 운용비도 비싼 배로 두 번이나 오가면 아깝잖습니까.”

뭐, 타당한 의견이긴 한데…….

“그걸 당일에 나타나서 말하다니.”

제멋대로인 것에도 정도가 있지.

마침 제독인 크리스틴이 현장에 있다가 선선히 동의해 주어서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출항부터 취소되고 일정을 재논의해야 할 뻔했잖아.

“크흠, 급하다 보니 부득이하게. 전날까지의 저는 수심에 빠져 있었지만, 사랑하는 아내의 호통…… 아니, 격려로 재기했으니까요.”

아, 그러세요.

총재라고 막시밀리앙 이지도르처럼 엄격, 근엄, 진지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하여간 이상한 감수성이야.

“뭐, ‘자유로운’ 군함을 타고 동방 제국에 가시려던 꿈은 이루셨군요.”

탈레랑의 표정은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그래, 꿈은 이루어졌지. 그 군함을 지휘할 제독님이 혁명당의 후원자가 아니라 크리스틴이라 문제지.

“크흠, 너무 여유 부리지 마시지요, 후작. 저는 동방 제국에서 반드시 성과를 가져올 텐데, 후작은 저 크라프테의 대왕에게서 성과를 가져올 수 있겠습니까?”

“…….”

그러게.

크라프테와의 전쟁은 반드시 피하고 싶긴 하지만, 애초에 나는 외교관도 뭣도 아니다.

크록스야 차라리 외교관이 아니라 기사인 나라서 더 나았던 경우지만, 크라프테의 대왕이 굳이 왜 나를 지목했는지 도통 예상이 안 된단 말이지.

아니, 애초에 저 크라프테의 대왕 자체가 상식이 통용될 상대가 아니다.

대왕이 게르마니아 제국에게 선전포고했을 때 크라프테의 국력은 황제 직할령의 1/5조차 되지 않았고, 모두가 크라프테의 만용을 비웃었으니까.

그런데 그걸 이기고 대왕이라 칭송받게 된 미친 패기의 인간이 무슨 짓을 벌일 줄 알고 예상을 해?

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저 엘프들의 차르도 그리 상대하기 편한 자는 아닐 테니, 잘해보시죠.”

탈레랑은 자신 있어 보이-

기보다는 재수 없어 보이는 얼굴로 픽 웃으며 답했다.

“기대하시지요. 후작님이 실패하고 제가 성공한다면 혁명당도 국민의회에서 면이 좀 살지 않겠습니까?”

“하하…….”

……이 인간, 설마하니 그래서 나온 거냐.

외교무대에서 군사령관을 상대로 승부욕을 불태우는 외교관이라니, 이 나라 이래서 괜찮은가…….

* * *

뒤헝 선장의 리브레와 호위 선단은 나를 크라프테 북부의 항구 슈테틴에 내려주고 동방 제국을 향해 출항했다.

나는 소규모 사절단을 이끌고 저들의 수도 미텔부르크로 향했고, 왕국이 제공한 숙소에서 하루 쉬자마자 바로 대왕의 별궁으로 초대받았다.

말이 별궁이지, 애초에 대왕은 역대 국왕들이 머물던 수도의 왕궁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지은 별궁에만 기거한다니까 거기가 본궁 아닌가?

내가 마차에 타고 대왕의 별궁으로 향하는 중, 나와 동석한 남자가 입을 열었다.

“대단한 위명을 가진 혁명군의 총사령관께서 이토록 젊으시니, 프랑지아의 축복이로군요.”

“과찬이십니다. 살아있는 전설로 불리는 크라프테의 대왕 폐하께 비할 바는 아니겠지요.”

나는 앞에 있는 남자가 묘하게 불편했다.

30대 후반 정도의 나이로 보이고 안경을 쓴 남자.

혼자 와서 처음에는 안내역의 적당한 귀족인가 했더니, 대왕의 재상 유스틴 폰 비텐펠트라고 자신을 소개했을 때는 굉장히 놀랐다.

대왕 카를 2세와 함께, 크라프테의 황금기를 이끌고 있는 것으로 유명한 남자.

입가에 자연스러운 미소를 걸고 있긴 하지만, 어째 이쪽을 들여다보는 듯한 눈동자와 특유의 분위기가 빈틈없는 느낌을 준다.

“게다가 후작님의 정인께서도 젊은 나이에 놀라운 두각을 드러내고 계시죠.”

아, 그렇군.

……왜 묘하게 불편한가 했더니, 크리스틴이 내가 아닌 다른 자들을 대할 때 취하는 태도와 비슷한 느낌이다.

“……제게는 과분한 사람이죠.”

비텐펠트는 싱긋 웃더니 답했다.

“그렇습니까? 뭐어, 제국과의 전쟁에서 아키텐 백작께서 보여준 모습이 제법 흥미로웠던지라.”

이건 무슨 의미야.

제국과의 전쟁에서 크리스틴이 공작을 벌여서 우리를 지원해 준 건 맞지만, 그걸 공표한 것도 아닐 텐데.

아니, 애초에 크리스틴의 대외 이미지는 아키텐 상단주이자 중앙당의 의원이다.

프랑지아 국내에서야 그녀가 정계의 거물이자 대상인으로서 제법 인지도가 있었지만, 그게 외국의 재상이 눈여겨볼 정도인가?

“아, 너무 그렇게 경계하지 마십시오. 그저 업무적인 흥미였습니다. 이 바닥이라는 것이 의외로 관심 가질 만한 ‘동류’를 찾기가 쉽지 않은지라.”

말을 마친 비텐펠트는 손가락으로 안경을 추켜올리며 웃었다.

“그 정도로 아키텐 백작께서 보여준 능력이 굉장했다는 뜻으로 이해해 주시면 됩니다.”

관심을 가질 만한 동류라.

이 인간.

크리스틴의 대외 이미지가 아니라, 그녀가 이면에서 해온 일들을 말한 건가?

나는 마차의 창을 통해 들어오는 역광으로 빛나, 그의 눈동자를 가려주는 안경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척 보기에도 마력을 수련하기는커녕, 왜소해 보이기만 하는 책상물림의 남자인데.

그에게서 풍기는 분위기가 신경을 긁으며 경종을 울린다.

나는 이제야 비로소 크록스가 크리스틴에 대해서 한 말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크록스는 크리스틴에게서 지극히 위험한 부류의 인간이 풍기는 냄새가 난다고 했었지.

크리스틴이 나에게는 그런 분위기를 풍기지 않으니까 깨닫지 못했지만, 크록스는 이런 분위기를 그녀에게서 느꼈던 거군.

본능이 경고한다.

이자, 지극히 위험한 부류의 인간이다.

그것도 나와 같은 군사령관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크리스틴과 같은 유형의 심각한 위협.

……하지만, 이해할 수가 없군.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크리스틴이 정보조직을 관리하고 필요하다면 사람 한둘 정도 제거하거나, 군대에 독을 푸는 일조차 할 수 있는 사람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런 크리스틴도 본인의 대외 이미지 관리에는 제법 신경을 쓰는 편이고, 덕분에 프랑지아 내부에서도 그녀를 고용인들에게 관대한 상인 출신 귀족으로서 좋게 보는 편이다.

애당초 그림자에서 활동하는 사람이라면,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최대한 은폐해야 맞다.

정보의 우위.

그들에게는 그것이 곧 힘이자 무기이기도 하니까.

그런데 이 작자는 대체 왜?

크리스틴에 대해 파악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자신이 동류라는 사실을 왜 굳이 스스로 드러내는 거지?

“그야…….”

비텐펠트는 입가에 검지를 가져다 대더니, 답했다.

“그쪽이 재미있을 것 같으니까요.”

“……성격이 나쁘시군요.”

내 말을 들은 비텐펠트는 역광을 받아 빛나는 안경알 뒤에서 웃으며 입을 열었다.

“반쯤은 농담이고.”

반은 진담이란 소리인데.

“대왕 폐하의 뜻이십니다.”

“……허허.”

그 크라프테의 대왕은 대체 무슨 생각이지?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재상이랍시고 있는 자가 이런 자인 시점에서 벌써부터 협상이 피곤해질 것 같다는 강렬한 예감이 느껴진다.

쉽게 갈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초장부터 지치는군.

내가 지끈거리는 이마를 손으로 짚으며 잠시 생각에 잠겨 있자, 비텐펠트가 입을 열었다.

“아, 다 왔군요.”

나는 비텐펠트의 말을 듣고 고개를 들어, 마차의 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광대하게 펼쳐진 연병장과 그 살풍경한 공터에 덩그러니 있는 대왕의 별궁을 볼 수 있었다.

한 나라의 국왕, 그것도 대왕이라 불리는 남자의 궁치고 근처에 어떤 정원도 건물 같은 것도 없다.

으레 왕족이나 귀족이라면 궁의 주변을 꾸미고 있을 그런 것들 대신, 군사들이 연병장을 가득 메우고 있다.

크라프테군의 상징, 검은색과 흰색 조합의 군복을 입은 군사들이 일제히 도열해 총을 들고 있다가 우리의 마차가 지나는 순간마다 그것을 돌리며 고쳐잡는 퍼포먼스를 벌인다.

대체 얼마나 집요하게 훈련을 했는지,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군사들의 모습을 보자니 기가 질리는 기분인데.

이건 단순한 예우인가, 아니면 위협인가.

고민하고 있는데, 비텐펠트가 자랑스럽다는 투로 입을 열었다.

“크라프테 왕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라파예트 후작님.”

처음 저들의 항구에서 내렸을 때도, 수도 미텔부르크에서 재상과 만났을 때도 듣지 못한 환영사.

그것을 오직 군대와 대왕의 별궁만이 있는 드넓은 연병장 앞에서 들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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