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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혁명에 단두대는 필요없다-120화 (120/258)

120화. 혁명 수호 전쟁 - 크라프테 (2)

나는 혁명군을 드제와 미르보에게 맡기고 수도 뤼미에르로 돌아왔다.

크라프테의 참전을 막기는 해야겠는데, 저들의 대왕이 직접 나를 지목했다니 별 수 있나.

아쉬운 쪽이 가는 수밖에.

혁명군 총사령관인 내가 전쟁 중인 제국의 육로를 지나서 크라프테로 갈 수도 없으니, 결국 프랑지아에서 배를 타고 가야 한다.

살다 보니 내가 배를 타고 제국 북부까지 갈 일이 다 생기네.

그렇게 수도로 돌아온 나는 생각도 해보지 못한 소식을 들었다.

“……해군 총사령관. 그러니까, 제독이라고요? 당신이?”

뭐야, 이게 무슨 일인데?

나는 당황하고 있었지만, 정작 크리스틴은 홍차를 한 모금 머금고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곤 여상하게 답했다.

“그렇게 되었네요.”

원래 프랑지아 왕국의 해군은 최대 군항이 있는 브르타뉴에서 관리했었다.

그리고 그 브르타뉴 공작은 내전 중 나와 싸우다 전사했고, 그 직후 혁명이 터지면서 브르타뉴 공작령은 혁명에 가장 먼저 휩쓸린 지역이다.

혁명 초기의 광기 속에 해군 장교고 뭐고 남아나질 않았으니, 프랑지아의 해군은 거의 처음부터 다시 만들어낸 상황이라는 거다.

거기까진 좋은데.

그게 왜 크리스틴에게 넘어간 거야?

“아니…… 어떻게?”

크리스틴은 느긋한 태도로 홍차를 다시 한 모금 마시더니 답했다.

“군함 건조 과정을 총괄한 게 어디죠?”

“……아키텐 상단이죠.”

“이 나라에서 가장 많은 선단을 운용해본 곳은?”

“……아키텐.”

“이 프랑지아의 고위층 중에 저만큼 많이 항해를 해본 사람이 있을까요?”

“……없겠네요.”

“네, 그래서 제가 맡게 된 거예요.”

이렇게 생각해 보니 진짜 왜 떠올리지 못했나 싶을 정도로 그녀가 적임자긴 한데…….

크리스틴의 능력이야 어쨌든, 20대의 젊은 여성인 것만으로도 트집 잡을 사람은 차고 넘친다.

심지어 중앙당에서조차 나이 많은 귀족들은 그녀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경우가 있으니까.

“혁명당이나 자유당에서 가만히 있었을 것 같지 않은데요. 그건 대체 어떻게?”

와중에 육군 총사령관도 내가 하고 있는데 해군까지 중앙당이 잡겠다고 하면 저들이 입에 거품을 물었을 텐데.

“그쪽이 추천한 인사들과, 공개적으로 모의전을 벌였죠.”

“…….”

“혁명당과 자유당 총재들 표정이 볼 만하더군요.”

크리스틴은 그렇게 말하며 슬며시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과연.

크리스틴은 자존심을 건드리는 작자들에게는 절대로 관대한 사람이 아니지.

나름 해군 제독을 꿈꾸며 나와서 개망신 당했을 자들도 안 되었군.

나는 복잡한 심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걸…….

“축하해 줘야 하나, 말려야 하나 고민하고 계시네요.”

“언제부터 독심술을 익히셨는지.”

크리스틴은 싱긋 웃더니 말했다.

“당신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결정한 건 미안해요.”

“……아니, 그건 당신의 일이니까요.”

내가 혁명군 총사령관으로서의 일을 일일이 그녀에게 허락받지 않는 것처럼, 그녀도 자신의 일에 대해 일일이 허락받을 필요는 없지.

“그러면?”

크리스틴은 어째 즐거운 기색으로 물었다.

……다 아시는 분이 굳이?

“만에 하나라도 해전이 벌어지거나 하면 당신이 위험할 것 같으니 말리고는 싶은데, 제게 그럴 자격이 없어서요.”

크리스틴에게 군재가 제법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나에게 패배한 직후라고는 해도, 데미앙 드 미르보를 일방적으로 압도할 정도였으니까.

막상 써보니 그 데미앙 드 미르보가 제법 쓸만한 능력을 가졌던 걸 감안하면, 크리스틴은 혁명군 기준으로도 능히 1개 군을 맡길 정도의 능력은 가졌다는 거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녀를 혁명군에 참여시키지 않은 건 그녀가 더 잘 할 수 있는 다른 일들이 있다는 이유가 반, 나머지 반은 그녀가 전장에서 위험에 노출되는 것이 싫어서였다.

육군이라면, 어차피 나를 비롯해 그녀 말고도 잘할 수 있는 사람이 충분히 있으니까.

육군이라면 그렇지.

해군이면 내가 대체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크리스틴의 말대로 가장 적임자가 그녀라는 걸 공개적으로 증명한 이상 여기서 말리는 건 그냥 내 이기심의 발로겠지.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표정을 고친 다음 입을 열었다.

“……매번 위험을 무릅쓰고 전방으로 뛰어드는 제가 당신을 말릴 수는 없죠. 프랑지아의 해군 제독이 되신 걸 축하합니다, 크리스틴.”

그제야 크리스틴이 눈을 곱게 휘며 웃었다.

“고마워요, 피에르. ……자각은 있으셨네요?”

나는 슬며시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가, 헛기침을 하고 입을 열었다.

“그러면, 제독님. 크라프테로 가는 배편은 어떻게 됩니까?”

“86문 전열함 ‘리브레’. 제독의 기함으로 만든 건데, 이번엔 당신에게 빌려드릴게요. 혁명군 총사령관이 프랑지아를 대표해서 가는데 그 정도 구색은 맞춰야겠죠? 물론, 호위 함대도 따라갈 거예요.”

“제법 호사스러운 대접이군요.”

“있는 패는 활용하는 것이 좋으니까요. 노던 연합 왕국이 딴마음 품지 못하게 제대로 경고하는 의미도 있고요.”

갓 완성된 신형 전열함을 타고 크라프테 방문이라.

“그런데, 저만 갑니까?”

“네. 듣지 않으셨나요?”

“듣기는 했는데, 탈레랑 그 치가 안 가는 건 좀 신기해서.”

“아…….”

크리스틴은 슬며시 고개를 기울이더니 빙긋 웃었다.

“심통이 난 모양이에요.”

“……심통? 그 양반이?”

“기껏 혁명당의 이념에 걸맞은 자칭 노련한 선장 출신을 구해 와서 시민을 위한 해군을 떠들었는데 저한테 무참하게 깨졌고, 나름 외교 전문가인데 크라프테가 그의 방문은 거부하고 당신을 직접 지목해서요.”

그러니까, 요는.

해군만큼은 자기네가 먹고 싶었는데 공개적으로 개망신을 당하면서 뺏기고, 자기 몫인 외교도 나한테 넘어가니까 화나서 태업 상태다 이거냐.

“그것참, 하여간 희한한 양반이군요.”

“특이한 감수성이 있긴 하죠. 그러니까 드워프들과 친구가 되는 게 가능한 지도.”

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배편으로 크라프테 방문이라. 왕복과 체류 기간까지 치면 한 달은 족히 걸리겠는데? 그걸 혼자 간다라.

나는 괜히 아쉬워서 크리스틴을 바라보았다.

같이 가면-

“같이 가고 싶어요?”

크리스틴이 자연스럽게 물어 와서, 나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야 같이 가고 싶지.

마침 해군 제독이 되셨으니 명분이 없지도 않고, 둘이서 여행 가는 기분으로 다녀오면 좋을 텐데.

좋기는 하겠지만…….

나는 내키지 않는 걸 억누르며 입을 열었다.

“무척 끌립니다만, 우리 둘 모두 프랑지아를 비웠다간 유사시에 대처가 불가능하니 어쩔 수 없죠.”

나는 없어도 드제가 있고, 그를 보좌해 줄 베르테르가 있다.

미르보도, 뭐. 영 미덥지는 못해도 제 역할은 충분히 한다.

하지만 크리스틴까지 자리를 비우면 수도의 정치동향에 대응하는 것이 어려워지는 건 물론이고, 만에 하나 혁명군이 교전을 벌이게 되는 사태가 생겼을 때 보급을 차질 없이 관리해 줄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

내 답을 들은 크리스틴은 진하게 웃었다.

“정답이네요.”

“네?”

“아무 생각 없이 같이 가자고 했으면 실망했을 거고, 단호하게 남으라고 했으면 서운했을 텐데.”

“하하, 그건 다행이군요.”

내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크리스틴의 곁에 가서 앉자, 그녀는 내게 몸을 살짝 기대 왔다.

먼 길을 다녀와야 하니, 출발하기 전에는 그녀와 충분히 시간을 보내야지.

크라프테야 뭐, 천천히 생각해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크리스틴이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자고 가실 거죠? 오늘은, 안전하니까.”

머릿속에 차 있던 생각이 단번에 날아가 버렸다.

* * *

게르마니아 제국 북부, 크라프테 왕국.

수도 미텔부르크의 외곽, 카를 2세 대왕이 직접 지어 기거하는 궁.

어비스 코퍼레이션, 프라이드 사의 대표이사 바엘과 라스 사의 대표이사 바르바토스는 주변에 광활한 연병장만이 펼쳐진 살풍경한 건물로 향하고 있었다.

그 연병장에 수천이 족히 넘는 병력이 도열해서 그들이 지나는 길을 지키고 있다.

질서 있는 걸 넘어서 인간이라기보다, 마치 기계라도 되는 양 움직이는 군사들을 본 바르바토스가 혀로 입가를 핥았다.

“제국군과의 상대평가, 압도적인 질적 격차. 전쟁하고 싶음.”

“기각한다, 바르바토스.”

바엘과 바르바토스는 언제나와 같은 대화를 나누며 건물로 진입해, 시종에게 안내받아 체칠리아가 대왕과 대면했던 방으로 들어섰다.

“대왕 폐하, 어비스 코퍼레이션 프라이드 사와 라스 사의 대표이사께서 당도하셨습니다.”

지팡이에 양손을 짚은 채 발코니에 서서 창밖, 연병장을 가득 메운 채 질서정연하게 움직이는 군대를 내려다보고 있던 대왕이 천천히 등을 돌렸다.

“어서 오라. 악마들. 크라프테 왕국의 대왕이자 제국 변경백 카를 2세가 그대를 환영한다.”

“어비스 코퍼레이션, ‘프라이드’ 사의 대표이사 바엘이 인사드리오, 크라프테의 대왕 카를2세.”

“어비스 코퍼레이션, ‘라스’ 사의 대표이사 바르바토스가 인사함!”

카를 2세는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픽 웃었고, 바엘은 특유의 무뚝뚝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당사는 귀하께 사전에 안내드린 대로, 귀국이 프랑지아와의 전쟁을 벌인다면 그에 대한 자금 및 장비 지원을 제공하고자 하오. 만남을 수락한 귀하께서는-”

“쉿.”

바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대왕이 손가락을 입가에 가져다 대었다.

바엘이 입을 다물자, 카를 2세가 손을 귀에 가져다 대는 시늉을 하더니 물었다.

“그대들에겐 이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바엘은 눈을 가늘게 뜨고, 바르바토스가 고개를 휘휘 돌리더니 입을 열었다.

“뭐임? 뭐임? 무슨 소리 들림?”

백발이 성성한 대왕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짐에게, 일생일대이자 마지막 전쟁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린다네.”

“오, 본 대표이사도 전쟁 좋아함! 대왕도 전쟁 좋아하는 듯함!”

혼자 신이 난 바르바토스를 내버려 둔 채, 침묵을 지키던 바엘이 입을 열었다.

“그렇소, 대왕. 프랑지아와의 전쟁이 다가오니, 당사는-”

그러나 대왕은 이번에도 손을 들어 바엘의 말을 가로막고, 그대로 등을 돌리더니 지팡이를 들어 올려 발코니의 난간을 내리쳤다.

금속 재질로 만들어진 난간을 마찬가지로 금속으로 만들어진 지팡이가 내리쳐 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불과 몇 초 뒤에, 포성이 울렸다.

미리부터 대왕이 낼 소리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연쇄적인 폭음이 궁 전체를 뒤덮을 기세로 울려 퍼졌다.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순차적이고, 규칙적으로 터져 나오는 포성은 거의 30초간을 이어졌다.

신이 나서 뭐라고 외치는 바르바토스의 음성을 묻어버릴 만큼 길고 웅장하게.

리듬을 느끼고 있는듯하던 대왕이 지팡이를 지휘봉처럼 휘두르자, 마치 그의 신호를 보고 멈추기라도 한 듯 정확하게 포성이 멎었다.

대왕은 다시 등을 돌려, 악마들에게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전쟁이네, 악마. 짐이 손꼽아 기다리던 전쟁.”

바엘은 더는 그의 용건을 말하지 않았다.

“손쉬운 적을 짓밟고 하찮은 이권을 차지하기 위한 시시하기 짝이 없는 전쟁이 아니라, 짐이 쌓아 올린 위명에 부끄럽지 않을 강자와의 영광스러운 전쟁.”

대왕도 악마의 말을 기다리지 않았고,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지팡이를 그대로 바닥에 내리찍고 두 손으로 그것을 짚었다.

60이 넘은 백발의 노인은 절도와 힘이 넘치는 움직임 뒤, 오연하게 웃었다.

“짐이 그대들의 만남을 수락한 것은 다른 의미가 아니다. 악마들이여, 이 전쟁에 감히 관여하지 말라.”

인류 최정예의 군대를 이끄는 대왕이.

“이것은 짐의 전쟁이며, 오롯이 짐의 영광이다. 짐이 승리한다면 짐에게 더해질 영광이요, 짐이 패배한다면 승자는 인류 최강의 이름을 얻겠지.”

살아있는 인간의 전설이 마왕의 후예들에게 경고한다.

“그 전장 어디에도 악마들이 설 자리는 없다. 만약 그대들이 짐의 전쟁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싶다면…….”

대왕은 지팡이를 들어 올려, 바엘을 겨누며 웃었다.

“그대들, 악마들이 짐과 겨루어 보겠느냐?”

바르바토스는 전율했다.

“바엘, 바엘, 바엘! 전쟁, 전쟁, 전쟁 허가를! 이건 전쟁임! 진짜 전쟁임!”

바엘은 냉정하게 분석한 끝에, 결론 내렸다.

“……기각한다, 바르바토스. 예상되는 손실이 감당 가능한 범위를 벗어난다.”

바엘의 말을 들은 대왕은 지팡이를 다시 바닥에 내리찍고 손으로 짚었다.

“그대들이 짐에게 영광스러운 전쟁을 주지 않겠다면, 이대로 물러가라.”

그리곤, 등을 돌려 발코니로 향하며 덧붙였다.

“짐은 이 땅에 영광스러운 전쟁을 가져다줄 자를 기다릴 터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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