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혁명에 단두대는 필요없다-119화 (119/258)

119화. 혁명 수호 전쟁 - 크라프테 (1)

게르마니아 제국.

게르만 민족들을 중심으로 하여 중앙 대륙의 반 이상을 차지한 광범위한 제국이지만, 실제로 황제가 통치하는 영역은 그 광대한 영토의 절반조차 되지 않는다.

나머지 영토는 전부 제후들이 통치하며, 각 제후들은 적어도 자신의 영지에서는 왕과 다를 바 없는 지위를 누리고 있다.

그중에서도 게르마니아 제국 북부의 패자이자 황제 다음가는 영토를 지배 중인 크라프테 왕국은 사실상 독립국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애초에 지금 재위 중인 국왕 카를 2세부터가 제국의 황제를 상대로 전쟁을 치러 부유한 영토를 차지한 끝에 ‘대왕’이라 칭송받고 있을 정도니 더더욱.

제국의 카이제린, 체칠리아는 마차에 탄 채 그 크라프테 왕국의 수도 미텔부르크를 바라보고 있었다.

신흥 강국의 수도임에도, 미텔부르크의 시가지는 제국의 영광이자 찬란한 문화가 깃든 게르만부르크와 달리 지극히 단조롭고 투박하다.

애초부터 이교도들을 정벌하며 제국의 강역을 확장하기 위해 세워진, 변경백의 영지에 불과했으니 당연한 노릇이다.

그러나 짧지 않은 여정 끝에 미텔부르크의 중심지를 벗어난 대왕의 궁에 도착했을 때, 체칠리아는 압도당하는 기분을 느꼈다.

궁이 제국의 황궁에 비해 화려한가?

아니다.

제국 황궁의 그 찬란함에는 감히 비할 수조차 없다.

그녀가 목적지를 미리 알지 못했더라면, 이게 한 나라의 국왕이 기거하는 궁이라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을 테니까.

좌우로 조금 길긴 하지만, 고작해야 2층으로 구성된 낮은 궁은 왕이 아니라 공작에 불과한 제후들의 궁에 비해서도 작다.

사치스러움도, 화려함도, 웅장함도 없는 궁임에도 불구하고.

그 궁을 둘러싼 광대한 연병장이 그 작고 간소한 궁에 위압감을 부여한다.

수만의 군대가 능히 집결하고도 남을 법한 그 거대한 연병장은 텅 비어 있었다.

그 살풍경한 모습이 도리어 체칠리아의 가슴을 선득하게 만들었다.

마차에서 내린 체칠리아에게 국빈에 어울리는 환대 따위는 없었다.

그녀는 미리 마중 나와 있던 한 명의 시종에게 안내를 받아 궁으로 들어섰다.

굴욕을 참으며 짧은 1층의 복도를 지나, 2층.

“대왕 폐하, 게르마니아 제국의 카이제린 체칠리아 전하께서 당도하셨습니다.”

옥좌는커녕 작전회의실을 연상시키는 길다란 탁자와 즐비한 의자들만 있는 방 너머, 광대한 연병장이 내려다보이는 발코니에 서 있던 남자가 천천히 등을 돌렸다.

왕의 화려한 의복이 아니라, 군복 차림의 백발노인은 무뚝뚝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어서 오시오, 카이제린 체칠리아. 크라프테 왕국의 대왕이자 제국 변경백 카를 2세가 그대를 환영하오.”

“……오랜만이군요.”

대화는 간단하기 그지없었고, 카를 2세는 손을 휘저어 시종을 내보냈다.

으레 있을법한 미사여구도, 자리나 마실 것을 권하는 말도 없다.

카를 2세는 지팡이 위에 두 손을 얹은 채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체칠리아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체칠리아는 잠시 카를 2세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게르마니아 제국의 카이제린으로서, 대왕과 협상을 하고자 찾아왔습니다.”

카를 2세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답했다.

“유감이지만, 카이제린. 협상이란 주고받을 패가 있을 때나 가능한 것이오만.”

체칠리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망설임은 찰나에 불과했고, 그녀는 카를 2세가 바라보는 앞에서 천천히 허리를 숙여 무릎을 꿇었다.

그제야 무표정하던 카를 2세의 얼굴에 표정이랄 것이 생겼다.

정적의 굴복을 보는 기쁨도, 승자의 오만함도 아니라.

지극히 미미한 흥미를 드러내며.

중앙 대륙 최고의 명장이 입을 열었다.

“그래, 최소한의 각오는 하고 왔구려.”

* * *

여름이 거의 끝나가는 시점.

나는 혁명군을 이끌고 제국의 국경지대인 라인란트를 점령한 채 그곳에 주둔 중이었다.

저항은 거의 없었다.

라인란트의 제후는 대공이 메츠로 후퇴하자 뒤늦게 동원령을 검토하던 모양이지만, 대공의 패퇴 소식을 듣고 그가 동원령을 내릴 때 우리는 이미 라인란트로 진입하고 있었으니까.

예상대로 게르마니아 제국의 제후들은 앞다투어 자신들은 이번 전쟁에서 손을 뗄 것이며, 프랑지아를 적대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표해왔다.

제후들에게서 혁명군에 투항한 제국군의 가족들을 데려오는 일은 맥 빠질 정도로 순조로웠다.

제국의 제후들은 어차피 제국군이 자신들을 보호해줄 수 없다는 걸 파악했고, 언제 혁명군이 진격해서 자신들의 영지도 라인란트 꼴이 날지 모른다는 위협을 제대로 받은 모양이지.

하지만 정작 중요한 제국의 반응은 우리 기대와는 조금 다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크흠, 크흠. 어째 좀 아쉬워하시는 것 같소?”

중앙당 총재 앙쥬 백작은 헛기침을 했다.

확실히 크리스틴이 아니라 그가 온 건 매우 아쉽다만, 그녀가 바빠서 이번엔 총재가 대신 와서 구색을 맞춰준 건데 이해해 줘야지.

하지만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고.

“제국이 평화 협상을 거부했다고요?”

“그래, 공식적으로 거부했다오.”

나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흘렸다.

제국의 제후들이 경쟁하듯 이 전쟁에서 손을 떼겠다고 선언하며 투항자들의 가족을 보내오고 있다.

사실상의 항복 선언을 하고 있는 셈이고, 라인란트도 점령당한 상태다. 그런데 여기서 평화 협상을 거부한다고?

대체 무슨 짓이지?

레오폴트 대공이 쓰러졌다는 소문은 듣긴 했지만, 황제가 미친 건가? 아니면 황후? 어느 쪽이지?

“이해할 수가 없군요.”

악마들과의 거래는 심증에 불과하지만 제후들이 맨입으로 지원했을 리도 없으니, 제국은 이미 빚더미에 앉은 셈이다.

황제가 더 강할 때도 제후들의 빚을 떼어먹으면 뒷감당과 반란 걱정을 해야 할 판인데, 우리에게 정규군이 다 분쇄당한 제국이 대체 무슨 배짱을 부리는 거지.

나는 기대도 안 했었는데, 진짜로 제국에서 혁명이 터지는 꼴을 보려고 이러나?

“차라리 이대로 진격해서 저 망할 제국의 수도를 함락시켜버리는 건 어떻소? 후작이 결심만 해주면 중앙당이 합심해서 통과시켜주리다.”

앙쥬 백작은 은근히 기대하는 얼굴로 말했다.

기실 중앙당이 합심하고 말고도 없다.

라인란트 진격도 국민의회에서 거의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는데, 뭘.

국민의회의 의원들은 할 수만 있다면 제국을 아예 통째로 붕괴시켜버리고 싶어 한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애초부터 우리가 라인란트를 점령하고 협박 중인 상황 자체가 일종의 허세다.

“우리는 알프스 왕국과 이베리카 반도에 식량을 대량으로 수출 중인데, 이번에 제국 출신 망명자들에 그 가족까지 대거 받아들였죠. 이만한 대병력의 원정용 식량까지 공급하는 건 무리입니다.”

프랑지아 왕국은 농사에 축복받은 땅이다만, 우리는 전쟁 중이다.

군대는 생산 따윈 없이 소비만 해대는 집단이니 동원해둔 병력은 죄다 부담일 뿐이고, 와중에 제국의 망명자들이 당장 농사 따위를 지어둔 것도 아니니 저들도 정착시키는 동안은 식량을 지원해 주어야 한다.

게다가 보급이라는 건 거리가 멀면 멀수록 어려워진다.

보급병도 먹어야 움직이고 물자를 실어 나르는 가축들도 식량을 소비하니까, 제국으로 깊숙이 들어갈수록 필요한 양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지.

최소한 우리가 혁명의 대의를 내걸고 제국 출신도 받아들이기로 했고 에리스가 여왕인 이상, 약탈을 통해 현지 보급을 한다는 것도 논외다.

“크흠, 곡물 수출을 일단 중지하는 건 어떨지…….”

“전쟁 중에 우리에게 원군을 보내준 동맹의 뒤통수를 칠까요, 아니면 탈레랑 총재가 어렵게 뚫어서 지금 우리 군대를 무장시킬 무기를 수출해 주고 있는 거래처를 끊을까요?”

내가 장담하는데 여기서 우리가 식량 수출을 끊으면 그 호쾌한 크록스라도 배신감에 치를 떨 거다.

알프스와의 거래를 끊어버리자고 하면 당장 탈레랑부터 입에 거품을 물테고.

“그…… 건 그렇구려.”

앙쥬 백작은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어차피 식량이 충분해도 우리의 보급 역량이 한계입니다.”

레오폴트 대공이 폭풍의 마녀를 데려와서 전쟁을 벌였을 때, 혁명군의 병력은 고작해야 4만 정도였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8만에 달하는 병력을 운용 중이다.

당연하게도 충분한 준비 없이 이렇게 병력을 급격하게 팽창시키는 건 상당한 부작용을 동반한다.

물자를 마련하는 것과 그걸 제때 운송해서 군대에 보급할 수 있느냐는 완전히 별개의 문제니까.

원래 같으면 우리는 이렇게 급속도로 팽창시킨 군대의 보급 문제만으로도 허덕이며 고생했어야 정상이지.

그러나 지금 우리의 보급에서 책임지고 있는 건 다름 아니라 프랑지아 전역에 걸쳐 광범위한 교역로를 관리해온 아키텐 상단이다.

크리스틴의 관리능력과 그동안 충분히 규모를 확장해온 아키텐의 인프라가 있으니까, 그것도 국내 지역에서만 전쟁을 이어왔으니 간신히 유지가 가능했던 거다.

라인란트까지는 그나마 프랑지아의 접경지역이고, 우리군도 전투가 아니라 주둔 중이니까 크리스틴이 어떻게든 유지해 주고 있다.

그것만 해도 대단한 건데, 제국의 수도까지 가자고?

크리스틴의 능력이 아무리 우수해도 아키텐 상단이 구축한 인프라가 있는 프랑지아 내부에서나 그녀의 역량으로 어떻게든 되는 거지, 아무것도 없는 제국 내에서는 무리다.

“게다가 우리가 제국의 본토 깊숙이까지 들어가면 제후들도 다시 황제에게 붙을 겁니다.”

지금이야 전쟁이 곧 끝날 거라 생각하니 자기네 일만 아니면 된다는 식으로 우리에게 굴복하고 있지만, 결국 우리가 제국을 짓밟으러 진격하기 시작하면 오히려 외통수가 된 저들도 적극적으로 황제를 돕겠지.

기껏 제국을 콩가루로 만들어놨는데 우리가 다시 저들을 결속시켜준다? 그런 바보 짓이 또 있겠나.

“크흠, 크흠. 그렇군…….”

구 프랑지아 왕국의 귀족 출신이 주축인 중앙당은 다 좋은데, 지나치게 호전적이란 말이지.

“제국의 수도로 진격하는 건 잊어주시죠. 우리는 어떻게든 저들을 압박해서 평화 협상장으로 끌어내는 것만 생각하면 됩니다.”

내 시선이 어땠는지, 앙쥬 백작은 조금 떨떠름해하더니 말했다.

“그거 말인데, 크라프테 왕국이 제국 측으로 참전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돌고 있소.”

“뭐라고요?”

아니, 미친? 그 소리부터 했어야지!

크라프테 왕국의 대왕은 이번 대의 황제를 상대로 전쟁을 치러 영토를 강탈해간 자고, 당연히 제국 내 반황제파의 거두다.

우리가 괜히 크라프테 왕국과 외교접촉을 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다.

저들은 우리와 이해가 일치한다고 생각했는데, 여기서 제국 편을 든다고?

“갑자기 왜요?”

“난들 알겠소? 하지만 저들의 황후가 직접 크라프테 왕국에 방문해서 담판을 지었고, 크라프테 왕국 내부에서 논의 중이라는 소식이 들어왔소. 그래서 차라리 저들이 참전을 결정하기 전에 제국을 항복시키자고 하려던 거요.”

“탈레랑 총재는 대체 뭐 했답니까?”

우리 외교 담당이 그 사람이잖아.

애초에 크라프테 왕국과 접촉해보겠다고 한 것 아니었나?

지금껏 외교적 성과를 상당히 잘 내주어서 믿고 있었는데, 이렇게 중요한 국면에 가장 중요한 국가의 외교전에서 실패하면 어떻게 해.

“크라프테 왕국과 싸우는 건 절대로 피하고 싶습니다.”

크라프테 왕국은 정말 장난이 아니다.

국력 자체는 제국보다 약할지 몰라도, 전쟁에 있어서는 제국이 감히 비할만한 나라가 아니다.

애시당초 그 제국 최고의 명장이라는 레오폴트 대공이 제국의 영웅이 된 건 크라프테 왕국의 대왕을 상대로 승리해서가 아니다.

그 대왕을 상대로 ‘적당히 지면서도 대적은 할 수 있어서’ 제국의 전면적인 패배를 피하게 해주었다고 제국의 영웅으로 불리게 되었단 말이다.

나로서도 쉽지 않은 상대였던 대공에게 연전연패를 안겨준 작자가 그 대왕인데, 그자만 문제가 아니다.

크라프테는 프랑지아보다 영토도 인구도 훨씬 작은 주제에 상비군만 무려 10만을 넘게 유지하는, 군대에 미친 나라다.

이제 겨우 제국에게 이긴 참인데 여기서 그 대왕과 군국주의를 그대로 구현한 듯한 나라를 상대로 싸우라고?

“그러지 않아도 탈레랑 총재가 저들의 대왕에게 방문을 요청해놓았다오. 이번에 아키텐 백작이 건조를 마치고 취역시킨 전열함들도 있고, 제국군의 붕괴를 본 노던 연합 왕국이 우리 압박에 굴복했거든.”

오, 그럼 드디어 크라프테와 동방 제국으로 향하는 바닷길이 열린 거군.

그나마 희망적인 소식이다.

“다행이군요. 그러면 탈레랑 총재가 좋은 소식을 가져다주는 걸 기다려야겠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외교 분야에서는 그 사람을 믿을만하니까.

“크흠, 그래야지.”

앙쥬 백작은 어째 조금 못마땅한 것 같았다.

내가 다른 당 총재인 탈레랑을 제법 신뢰하는 것 같아서 저러시나?

그러고 보면, 그도 처음 만났을 때와는 인상이 굉장히 달라졌다.

역병에 걸려 죽어가던 막내아들을 에리스가 치료해 주어 무척 기뻐하고, 영지를 넘기고 공화국에 합류하자는 파격적인 제안을 수락할 때는 나름 부드러운 인상이었는데.

나는 그가 의회에서 목소리를 높이며 다른 당을 견제하고 강경한 태도를 보이는 한편, 나나 크리스틴이 중앙당과는 다른 생각을 품지는 않는지 경계하던 모습을 떠올렸다.

앙쥬 백작은 이제는 꽤나 권력 지향적이고 정치적인 인사가 되어버렸지.

원래부터 야욕이 있었던 걸까, 아니면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자,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게.”

들어온 소위는 나에게 경례를 붙이며 입을 열었다.

“수도 뤼미에르에서 온 서신입니다, 후작 각하.”

“음.”

내가 서신을 받자, 봉인된 서신에는 탈레랑의 문장이 찍혀 있었다.

“이것 참.”

“허허, 제 말 하고 있으니 바로 왔구려?”

“그러게나 말입니다.”

바로 봉인을 뜯어서 서신을 펼친 나는 슬며시 미간을 좁혔다.

“무슨 내용인데 그러시오? 설마 크라프테가 교섭에 응하지 않기라도…….”

“그건 아닙니다만…….”

나는 서신을 앙쥬 백작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저들의 대왕이, 교섭 상대로 저를 지목했다는군요.”

……대체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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