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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혁명에 단두대는 필요없다-118화 (118/258)

118화. 혁명 수호 전쟁 - 카이제린

라파예트 후작의 앞에 2만에 달하는 제국군이 무릎 꿇었다.

1만이 도망치다 혁명군의 샤쇠르들에게 붙잡히거나 항복했고, 무질서하게 패퇴하는 과정에서 수도 없이 많은 군사들이 탈영해 버렸다.

평소라면 탈영병들을 단속하고 잡아들일 제국의 후사르들은 프랑지아의 기병대에게 무너진 지 오래.

제국군은 가까스로 라인란트로 물러나는데 성공은 했으나, 그렇게 도착한 제국군은 고작 1만에 미치지 못했다.

5만에 달하던 제국군이 한순간에 소멸해 버렸고, 제국의 영웅이자 명장 요한 레오폴트 대공마저 쓰러져 버렸다.

그런 상황에 혁명군이 라인란트로 진격해오자, 하인리히 공작과 비텔스바흐 백작은 잔존 병력이나마 수습하여 후퇴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 * *

게르마니아 제국의 수도, 게르만부르크.

“요한, 요한……!”

제국의 카이저, 오토 2세는 술잔을 벽에 집어던지며 레오폴트 대공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제국의 군대를, 내 군대를 돌려다오!”

“폐하…….”

체칠리아는 그런 남편을 차마 말리지도 못한 채 입술을 깨물었다.

“10만, 10만의 군대가 다 어디로 가버렸단 말이더냐!

거친 숨을 몰아쉬던 오토 2세는 몸을 휙 돌려 체칠리아에게 다가갔다.

“이게 어찌 된 일이오, 체칠리아! 그대가 저자를 믿으라고 하지 않았소! 그런데 요한, 그 자가 짐의 은혜를 이런 식으로 배은망덕하게 답하다니!”

“폐, 폐하. 진정하셔-”

“5만이나 남아 있던 군대가 싸워보지도 못하고 사라져?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오? 애초에 내전으로 피폐해진 프랑지아 따위에게 제국군이 연전연패한 것부터 이상했어! 요한, 그자가 프랑지아와 내통한 것이 틀림이 없어!”

울부짖는 황제의 앞에서, 체칠리아는 두 눈을 질끈 감으며 입을 열었다.

“폐하, 레오폴트 대공은…….”

그러나 체칠리아가 미처 말을 다 잇기도 전에, 오토 2세가 두 손을 뻗어 그녀의 양 어깨를 잡았다.

“체칠리아, 나의 사랑하는 체칠리아. 지금 설마 짐의 앞에서 그 무능한 패배자를 옹호하시려는 거요?”

“폐하, 저는…….”

“그대는 그러면 아니 되지 않소. 저 무도한 자들이 늘 짐을 무시하고 짐을 부정할 때, 그들이 짐의 진의를 알아보지 못할 뿐이라고 말해주지 않았소. 모두가 짐에게서 등을 돌릴 때 그대만은 언제나 짐의 편이지 않았소.”

체칠리아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 오토 2세는 반쯤 미쳐버린 눈으로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내가 내치려는 그 자를 옹호해 준 것이 그대였지……. 설마하니 그대마저, 아니,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폐하, 고정하셔야 합니다. 지금은 제후들이-”

체칠리아는 어떻게든 오토 2세를 진정시켜보려고 두 손을 뻗어 그의 손을 잡았으나, 오토 2세는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시끄럽소! 나보고 저 이리 떼들에게 물어뜯기는 수모를 다시 겪으라는 말이오?”

“폐하!”

“그, 그대가 청해서 일어난 전쟁이 아니오. 체칠리아, 그대가 나서주시오. 짐의 뜻이 곧 그대의 뜻이지 않소? 그대는 언제나 짐을 위해 일해주지 않았소.”

그렇게 말하는 오토 2세는 이미 크라프테의 대왕에게 패배했을 때만큼이나 피폐해 보였다.

그 긴 세월 그를 어르고 달래고 위로한 끝에 간신히 얻어낸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감각에, 체칠리아는 휘청거릴 뻔했다.

“이번에도 짐을 좀 도와주시오. 이 전쟁은 계속되어야 하오. 반드시 이겨야만 하오! 이대로 끝낼 수는 없어! 이대로 끝났다간 짐은, 짐은 다시는 그때와 같은…….”

머리를 쥐어뜯던 오토 2세는 핏대가 선 눈으로 중얼거렸다.

“짐은 그렇게는 살 수가 없어. 제후들이 뭐라고 하든, 제국의 모든 걸 다 불태우는 한이 있어도 이 전쟁은 반드시 이겨야만 해. 무슨 일이 있어도,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이 전쟁을 승리로 끝내시오!”

* * *

게르마니아 제국의 카이제린, 체칠리아는 황궁의 복도를 걸으며 창 아래에 비치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한여름을 맞이하여 푸르고 아름답게 자란 초목으로 가득한 정원에 꽃이 만개하였으나, 체칠리아에게는 그저 무채색으로만 보였다.

아직 어린 소녀일 적 그녀가 처음 제국으로 시집왔을 때 보았던 것과 놀랄 만큼 닮아 보이는 풍경에, 체칠리아는 조소를 흘렸다.

-전쟁을 계속하겠다고? 지금 당장 제국이 저들의 군홧발에 짓밟히고 있지 않습니까? 미치지 않고서야 여기서 전쟁을 이어가겠다는 결정을 할 수가 있소?

-카이저의 뜻이라면 다인 줄 아시오? 그 카이저가 그대의 치마폭에 감싸여 있는 것을 누가 모를 줄 알고. 아, 혹시 그대가 저 프랑지아 놈들의 핏줄이라 그러시오? 제국을 파멸로 몰아넣으려는 건가?

-스트라스 공국은 이 전쟁에서 발 빼겠소. 하, 철수시킬 군대는 잘나신 제국의 영웅이 다 갈아버렸으니 군비 지원만 끊으면 되겠구려!

-우리는 굴욕을 참으며 빌어먹을 반란분자들의 가족을 송환해야 하는데, 정작 전쟁을 벌인 제국은 아무것도 해줄 수 없으면서 휴전도 하지 않겠다니? 제후국을 보호해 줄 수 없는 제국에 대체 무슨 가치가 있단 말인가?

-결코 이대로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요, 카이제린. 카이저께서 우리가 겪은 이 손해와 수모를 갚아주지 않겠다면, 갚게 만들 거요.

체칠리아는 카이저 없이, 홀로 날 선 제후들의 비난과 성토를 홀로 감당해야 했다.

결국 단 하나도 빠짐없이, 모든 제후국이 전쟁 지지를 철회하는 것은 물론 그동안 지원한 모든 군비에 더해 그들이 프랑지아에 송환할 투항자들의 가족에 대한 손해배상까지 제국에 청구했다.

제국이 송환하라고 명령을 내린 것도 아니건만, 당장 혁명군이 자신의 영지를 공격할까 두려운 제후들은 저들끼리 담합하여 멋대로 결정 내린 후 일방적으로 통보해왔다.

제국에 제공하거나 혁명군에 맞설 군대와 군비는 없지만, 저들끼리 담합하여 주력군이 전부 붕괴된 제국을 겁박할 군대는 준비할 수 있는 모양이지.

하지만 지친 몸을 이끌고 온 체칠리아를 기다리던 것은 휴식이 아니었다.

“전하. 손님이 와 계십니다.”

“손님?”

“어비스 코퍼레이션 ‘프라이드’ 사와 ‘라스’ 사의 대표이사가 알현을 청하고 있습니다만, 어찌하시겠습니까?”

“후-”

체칠리아는 바람 빠지는 실소를 흘렸다.

과연 악마들이라고 해야 할지.

가장 절실한 순간에, 정확히 찾아온다니.

“들여라, 맞이해야겠구나.”

* * *

이대로면 제국은 파멸할 터다.

그럼에도, 그의 남편은 전쟁의 지속을 원한다. 전쟁의 패배를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

-정녕 왕족으로서 고국의 국민들을 보살펴야 한다는 책임감을 가지고 계시다면, 그들을 기쁘게 하고 싶으시다면. 전하께서 물러나셔야 해요.

그 맹랑한 배다른 동생의 말을 듣고 물러났더라면, 이렇게는 되지 않았을까.

아니.

-그건 원래부터 내 권리야.

체칠리아는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던 어린 그녀를 적국에 팔아치우고 자신의 왕국을 시대에 뒤처지게 만든 아비.

그녀가 먼 타국에서 무슨 고생을 하든 말든 신경조차 쓰지 않은 채, 권력을 탐하며 왕국을 내전으로 몰아넣은 오라비들.

프랑지아의 옥좌에 그들보다는 차라리 그녀가 더 걸맞다. 체칠리아는 지금 이 순간까지도 그렇게 믿는다.

그러나.

-잃어버린 것만을 갈구하다가, 남아있던 것마저 잃어버리면 더한 괴로움만이 남아요.

프랑지아 폭도들의 괴뢰정권과 귀족의 배신자에게 추대된, 서출의 꼭두각시 여왕.

-저는 정말로 그런 일을 피하고 싶지만, 불가피하다면. 제가 있을 곳은 옥좌가 아니라 그들의 옆이에요. 그들이 피 흘릴 전장에서, 그들의 깃발 아래에서, 제 몸이 부서지는 순간까지 그들을 지키겠어요.

맹랑함을 보이던 배다른 동생은, 과연 그녀가 스스로 내뱉은 말을 지켰다.

적국의 군대도, 심지어 단순히 보고서를 받아볼 뿐인 체칠리아조차 ‘성녀왕’이라는 칭송을 감히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전쟁을 일으켰다. 그것 외에는 그녀가 빼앗긴 것을 보답받을 길이 없었기에.

한때 그녀를 어린 이방인으로서 멸시했으나, 제국의 카이제린으로 칭송하게 된 자들을 전장으로 내몰았다.

질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당연히 승리하고, 그녀가 거머쥐어야 했을 권리를 얻는 것이 순리라고 믿었으니까.

그러나 침공을 했다면, 침공 받을 각오도 하는 것이 당연하다.

빼앗으려 들었다면, 빼앗길 수도 있는 것이 도리다.

알고 있었을 터인데.

제국의 카이제린 체칠리아에게, 프랑지아의 왕위를 탐낸 왕녀 세실리아에게.

-전하께는 그런 각오가 있으신가요? 전장으로 보낼 군사들과 같은 전장에 서실 건가요? 그들의 죽음으로 슬퍼할 가족들에 대해 생각해 보신 적은 있으신가요?

그런 각오는 있었는가.

카이저가 없는 알현실에서 황후의 옥좌에 앉은 채 상념에 잠겨 있던 체칠리아는 고개를 들어, 성큼성큼 걸어 들어오는 두 악마를 바라보았다.

쪼개진 마왕의 관으로 장식한 칠흑의 갑주를 입은, 백발의 거한.

제독의 옷을 입고 모자를 쓴, 붉은 머리의 악마를.

“어비스 코퍼레이션, ‘프라이드’사의 대표이사 바엘이 인사드리오, 게르마니아 제국의 카이제린 체칠리아.”

“어비스 코퍼레이션, ‘라스’사의 대표이사 바르바토스가 인사함!”

체칠리아는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답했다.

“게르마니아 제국의 위대한 카이저를 대신하여 그대들을 환영하노라. 하여, 용건은?”

“어비스 코퍼레이션을 대표하여, 당사가 제공한 대출금의 상환 문제를 논의하고자 왔소.”

“그래, 그렇군.”

제후들과 함께 승리하여, 프랑지아를 거머쥔다면 능히 갚을 수 있을 거라 믿고 빌렸던 악마들의 돈.

그 돈으로 받아낸 군대는 전부 적들에게 굴복하거나, 전멸하거나, 그도 아니면 제후들이 철수시켜 제국을 겁박할 용도로 쓰이게 되었다.

“이렇게 말씀드리게 되어 애석하나, 최근의 전황으로 미루어 보아 당사는 제국과 카이제린의 신용등급을 다소 조정할 필요성을 느꼈소.”

그렇게 말하는 바엘의 얼굴은 어디까지나 근엄하고 무표정하여, 전혀 애석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하, 그래. 하여, 그대들의 돈을 받아내고자 왔다 이거로군?”

“하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겠지. 그대의 카이저께서 전쟁의 지속을 원하신다 들었소만.”

“……그래서?”

바엘은 체칠리아를 닮은, 입꼬리만 비틀어올리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대출금의 상환은 어렵겠지만, 다른 대체제가 있지 않소?”

“‘대체제’라.”

“그렇소. 마침 프랑지아에서 퍼트린 불온한 사상 때문에 제국민들이 동요하고 있다고 들었소만. 그 ‘불순한’ 자들에게 본보기를 보인다면 제국도 더욱 안정되지 않을지?”

“하, 하하하…….”

체칠리아는 실소를 흘렸다.

카이저는 전쟁의 지속을 원한다.

그러나 제후들이 전부 발을 빼버린 지금 제국에 그럴 돈은 없다.

악마들의 대출금을 상환하는 것만으로도 벅찬데 전쟁을 수행할 여력 따윈 나올 리가 없다.

“그러니까, 제국민을 그대들에게 판매하여 빚을 갚으라?”

“그렇소. 제국에는 인간이 충분히 많으니, 귀하께서 결단만 내려준다면 당사는 제국의 신용도를 대폭 상향 조정할 의사가 있소. 그런다면, 전쟁을 지속하기 위한 추가 자금 조달도 가능하겠지. ……필요하지 않소?”

그 모든 것을 단번에 해결해 줄 대안을, 저들이 제시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가장 절실한 순간에 나타나 가장 달콤한 유혹을 건넨다.

“내 못난 오라비에게도, 그대들은 이런 식으로 했겠구나.”

바엘은 답하지 않았고, 체칠리아는 웃었다.

-전하. 그런 행위가, 전하의 슬픔과 고난을 외면하며 제국으로 보내버린 아바마마와 어디가 다른가요?

그녀에게서 빼앗기만 하고 멋대로 사라져버린 이들을 증오했기에.

그것을 어떻게든 보상받고 싶어 했기에, 그녀는 그들과 같은 곳으로 떨어질 수는 없다.

체칠리아는 옥좌에서 일어서며 답했다.

“거부한다.”

“……이해할 수가 없군. 귀하께서 당사의 제안을 거부한다면, 당사는 대출금의 회수를 위해 제국의 자산을 압류하는 절차를 밟을 거요.”

어비스 코퍼레이션의 자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굳이 황실의 재산이 아니라도, 제국 소속이라는 빌미로 제후국의 자산을 압류해버리면 어비스 코퍼레이션을 어찌할 힘이 없는 제후국들은 대신 황실에 그 책임을 묻게 된다.

“그러면 귀하께선 전쟁을 수행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질 텐데?”

체칠리아는 조소를 흘리며 손을 들어 올렸다.

“다른 방법도 있지 않느냐.”

그와 동시에 알현실의 문이 열리고, 중무장한 기사와 군사들이 우루루 몰려 들어왔다.

“어비스 코퍼레이션의 대표이사 둘이라면, 신성 교국에서는 그보다 더한 보상을 쥐여주고도 남지 않겠느냐?”

찰나의 정적이 흘렀다.

알현실에 들어오기 전에 무기가 없는 것을 확인했다. 대악마라고는 해도, 이만하면 할만할 터다.

그렇게 판단한 체칠리아가 마른 침을 삼키는 순간.

“큭, 으하하하하하!”

그동안 근엄한 표정을 유지하던 바엘이 별안간 웃음을 터뜨렸다.

단 두 명의 악마가 수백의 기사와 군대에 둘러싸인 상황에 터트린 웃음에 모두가 잠시 굳은 사이, 바르바토스가 입을 열었다.

“바엘, 허가 요망. 싸워도 됨?”

“허가한다, 바르바토스.”

“하하핫!”

“쳐라!”

바르바토스의 웃음과 체칠리아의 음성이 동시에 터져 나오고, 기사들이 달려드는 순간.

바르바토스가 두 팔을 펼치자 그녀의 양손에는 이미 권총이 들려 있었다.

“어, 어디서?”

체칠리아가 당황하는 사이, 두 권총에 박힌 피처럼 붉은 광석이 섬뜩한 빛을 뿌리고-총성이 울려 퍼졌다.

“크헉!”

“아악!”

총성이 연발로 울려 퍼지는 사이 재장전 따위는 없다.

눈으로 따라잡기도 힘든 속도의 양손이 춤을 추듯 움직이고, 그에 맞춰 기사들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양팔을 뻗고, 내밀고, 교차로 꺾어가며 알현실 안을 한 바퀴 돈 바르바토스가 과도한 마력 투사로 열기를 뿜어내는 권총을 입으로 훅 불었을 때.

바엘과 바르바토스에게로 달려들던 기사들은 전부 쓰러져 있었다.

“으, 으아아…….”

“괴물……!”

“에에, 본 신제품 성능은 우수. 그러나 발열이 지나침. 보완이 필요.”

바르바토스가 권총을 연신 입으로 불다가 한마디 하자, 그것이 신호가 되어 주춤거리던 기사들이 다시 달려들었다.

“지, 지금이다! 쳐라!”

바르바토스는 달려든 기사의 검을 권총으로 가로막고, 그대로 흘려 당겼다.

“어어엇?”

마치 권총을 단도처럼 다루는 유연한 움직임 속에 균형을 잃은 기사의 검을 바르바토스가 다시 권총으로 당기자-기사는 검을 바로 놓쳤다.

“유감. 본 대표이사는 백병전에도 능함.”

권총 한 자루를 허리춤에 찔러 넣고 그 검을 그대로 잡아챈 바르바토스가 검을 휘두르자, 투구를 쓴 기사의 머리가 마치 무처럼 잘려 나갔다.

한 손에는 검을, 한 손에는 권총을 든 바르바토스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귀군의 전력 평가는 지극히 열등, 긴장감 부족. 한 번에 와주길 바람.

그다음 순간부터는 일방적인 살육에 불과했다.

제국군의 비명과 유혈이 낭자한 가운데, 체칠리아는 떨리려는 몸을 억누르며 바엘과 마주하고 있었다.

그녀의 코앞에서 무기를 뽑기는커녕, 팔짱을 낀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악마를.

“이만하면 당사가 제국이 진 빚을 회수하기에 충분한 능력이 있음을 입증해 보였겠지. 다시 한번 묻지, 카이제린 체칠리아. 대출금 상환을 위해 제국의 ‘인간’을 제공할 의사가 있소?”

체칠리아는 곁눈질로 근위기사들이 모조리 도륙 당하고, 얼마 남지 않은 병사들이 결국 도망치는 광경을 보았다.

“없다.”

“그렇군. 하면, 카이제린. 귀하의 행위는 어비스 코퍼레이션에 대한 모든 신용을 져버린 적대행위이다. 따라서 우리가 귀하를 ‘처분’하지 않을 이유가 없군.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묻지. 번복은 없는가?”

체칠리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배다른 동생은 각오가 있느냐고, 물었다.

이 땅으로 온 순간 프랑지아의 왕녀 세실리아는 죽었기에, 제국의 카이제린이라는 지위는 그녀의 모든 것이다.

그녀가 제국의 위신을 일으키고 유능함을 칭송받을 때는 가장 게르마니아에 걸맞은 황후라 칭송하던 이들이, 지금 손바닥을 뒤집듯 프랑지아 출신 황후가 나라를 말아먹고 있다고 욕할 지라도.

보답을 갈구하여 일으킨 전쟁이 끝내 그녀를 파멸시킬 거라면, 그녀는 파멸하는 그 순간까지 악마들의 꼭두각시가 아니라 제국의 카이제린으로서 남을 것이다.

“그럴 수 있다면 나를 죽여보아라, 악마야. 내가 무얼 했든, 제국의 한가운데서 카이제린인 나를 죽인다면 수백 년간 네놈들이 공들여 희석시킨 위기감이 단번에 인류를 잠식할 테니.”

“후-”

바엘은 입꼬리를 틀어 올리더니, 체칠리아를 향해 손을 뻗었다.

체칠리아가 저도 모르게 움츠러 드려는 몸을 억지로 펴고 있자, 그녀의 어깨를 툭 친 바엘은 픽 웃었다.

“과연, 루이 왕보단 낫군. 바르바토스, 돌아간다.”

“엣, 전쟁 안 함?”

“안 한다, 바르바토스. 당사는 자산 압류만으로도 이득이다.”

“부- 부- ‘라스’사는 유감을 표명함. 너무 시시함.”

힘이 풀려 자리에 털썩 쓰러진 체칠리아를 뒤로 한 채, 두 악마는 당당하게 알현실에서 걸어 나갔다.

망연자실한 얼굴로 피바다가 된 알현실을 보고 있던 체칠리아에게, 시녀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카, 카, 카이제린. 괜찮으십니까?”

한참의 침묵이 흐른 끝에.

“크라프테 왕국에, 저들의 왕에게 전해라.”

체칠리아가 눈물을 쏟으며 말했다.

“제국의 카이제린이, 대왕을 찾아뵙겠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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