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혁명 수호 전쟁 - 붕괴 (3)
발루아 전투로부터 2주 뒤 메츠, 게르마니아 제국군 주둔지.
“혁명군입니다, 대공 전하! 추정 병력 6만가량이 메츠로 접근 중입니다!”
“결국, 오고야 말았군.”
참모장 하인리히 공작의 보고를 받은 레오폴트 대공은 나직하게 탄식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국군의 병력은 5만.
지난 전투의 패잔병들과 로렌 지방의 주둔군까지 싹 긁어모은 병력이지만, 군사들의 사기는 더는 없을 정도로 저조하고 이젠 오히려 적 병력이 이쪽보다 많아졌다.
레오폴트 대공은 그의 책상 위에 놓인 명령서를 바라보았다.
제국의회가 개최되어 논의 중이니, 점령지를 방어하며 기다리라는 간단한 내용만이 적힌 명령서.
그도 제국이 바로 평화 협상을 해줄 거라고 기대하지는 않았다.
당연히 제국은 혼란에 빠졌을 테고, 그 혼란이 가라앉고 책임소재를 정할 때쯤에야 평화 협상이 시작되겠지.
그도 안다.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의 부하들이 절망적인 얼굴을 한 채, 무기를 들고 저 혁명군에 맞서다 죽어 나가야 한다는 현실은 도저히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저 멀리에서 전쟁을 실감조차 하지 못한 채 배를 두드리며, 제국군의 나약함과 그의 무능함을 탓하며 탁상공론을 벌이고 있을 자들을 위한 죽음을.
“……차라리 사절을 보낼까?”
“예?”
“차라리 저들의 혁명군에 사절을 보내서, 이미 본국에서 평화 협상을 위한 논의가 진행 중이니 잠시 휴전하자고 청해보는 건 어떨까.”
“하, 하오나, 대공 전하.”
하인리히 공작의 떨떠름한 반응에, 대공은 손을 들어 눈가를 짚었다.
애초에 논의가 진행 중인 거지 확정이 된 것이 아니다.
지금 남은 제국군 전 병력이 증발해버리는 것이 아니고서야, 제국이 작정하면 추가 병력을 동원해서라도 전쟁을 이어나갈 여력이 없는 건 아니다.
대공은 극도로 이미 불리한 전황이고 이제 와서 병력을 더 동원한들 이 전쟁은 필패라고 생각 중이지만, 현장의 분위기를 모르는 저 후방의 제후들은 매몰 비용에 잠식되어 있을 테니까.
그러니 라파예트 후작은 받아들이지 않을 거다.
대공 본인조차 과연 제국이 전쟁을 끝내주기는 할 건지를 확신할 수 없는데, 후작이 곧이곧대로 믿고 전쟁을 멈춰줄 리가 있을까.
논의 끝에 평화 협상이 결정된다고 해도, 그 시점에 제국이 얼마나 궁지에 몰려있는지가 그 조건을 정하게 될 터다.
기만술로 여기든, 아니면 진짜로 여기든 혁명군이 이미 잡은 승기를 놓고 기다려줄 이유가 없다.
“아니, 아닐세. 내가…… 지친 모양이군.”
“대공 전하…….”
대공은 하인리히 공작에게 씁쓸하게 웃어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승리할 수 있을까?
5만이라는 병력이 결코 적지는 않다.
적들은 그들에 맞서 이보다도 더한 격차에서 훌륭하게 방어전을 벌인 전례가 있다.
그러나 원래부터 5만이었던 군대와, 11만이 5만으로 쪼그라든 군대는 비교할 수가 없다.
당장 너무나 큰 손실을 입은 부대들을 통폐합해, 서로의 이름이나 출신조차 잘 모르는 군사들을 섞어놓은 부대가 대부분이니 소속감이나 조직력 같은 것이 생길 리가 없다.
그럼에도 선택지는 하나뿐이다.
대공은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적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지.”
설사 그들이 승리를 기대하기 어려울지라도.
여기서 죽어 나가는 군사들의 피 값에 의미가 없다고 해도, 패전의 책임을 감당해야 할 그의 명예가 땅에 떨어진다고 해도.
그래도 최소한, 제국군이 허무하게 무너져서 제국 그 자체를 뒤흔드는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그걸 위해 최소한 평화 협상이 결정될 때까지, 대공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제국이 점령한 영토를 지켜내야만 한다.
오직 그것만이 군인으로서 제국과 카이저에 충성을 다해온, 요한 레오폴트 대공의 인생을 증명할 길이니까.
* * *
메츠, 제국군 방어선 근처 혁명군 주둔지.
나는 저 멀리에 있는 제국군의 진지를 망원경으로 살피며 입을 열었다.
“잘 될지 모르겠군.”
“라파예트 후작 각하, 정말로 그런 게 먹힐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다소 불안해하는 루이 드제.
“크흠, 크흠. 라파예트 후작 각하께서 하시는 일인데 당연히 효과가 있지 않겠습니까?”
저렇게 말하는 주제에 표정에서 불신을 지우지 못하는 데미앙 드 미르보.
“참모장으로서 진언해드리자면, 솔직히 타국의 군대를 상대로 이런 일을 시도한 전례 자체가 없습니다. 자칫 잘못해서 실패하면…….”
역시나 회의적인 참모장 베르테르의 말을 들은 나는 픽 웃으며 고개를 돌려, 조용히 있던 에리스를 바라보았다.
“여왕 폐하께서는 어찌 생각하십니까?”
물론, 에리스라면-
“잘…… 될까요?”
“…….”
정작 에리스도 불안한 말투다.
김빠지네, 이거.
“저들도 기회만 있으면 우리와 같은 일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하신 건 폐하십니다만. 그새 낭만을 잃으셨습니까?”
그걸 부정한 나에게 쫌생이 의심병 환자라며?
애초에 에리스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런 발상을 해보지도 못했을 거다.
군인인 나에게 타국의 적병은 효율적으로 죽이고 파괴할 대상이지, 그들이 처한 상황을 인간으로서 이해하고 감정을 이용하겠다는 생각 따위를 했겠나.
“그, 그렇네요.”
에리스는 조금 머쓱해하더니, 이내 두 손을 주먹 쥐더니 말했다.
“행운을 빌어요, 후작님. 전투가 벌어지면 희생될 양군 모두의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주세요.”
“여왕 폐하의 분부대로.”
나는 시선을 돌려 드제와 미르보, 그리고 베르테르와 한 번씩 눈을 마주친 후 입을 열었다.
“그럼, 뒤는 그대들을 믿겠다. 호응은 제대로 해주길 바라지.”
그래도 표정들이 애매해서, 나는 픽 웃으며 덧붙였다.
“너무 걱정 어린 얼굴들 하지 말라고. 실패해봐야 그냥 내 체면 좀 구기고 말 텐데, 그럼 정공법으로 싸우는 것뿐이야.”
“알겠습니다, 후작 각하.”
“맡겨주십시오! 이 데미앙 드 미르보, 결단코 후작 각하를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나는 픽 웃으며 등을 돌리곤 말을 몰아, 제국군의 진지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물론 나라고 에리스가 말하던 낭만만을 믿고 이런 짓을 하냐면 그건 아니고.
손실과 포로로 잡혀 빈자리가 너무 많은 나머지 얼기설기 통폐합되어, 자기네 병력 단속도 제대로 못 하고 있을 저 제국군 속에 크리스틴이 심어뒀을 자들을 믿는 거지.
계산속에서 시도하는 낭만이라고 할까.
* * *
메츠 시가지에 진을 친 제국군과 거리를 조금 벌린 채 혁명군이 도열한 상황.
혁명군에서 말을 탄 한 사람이 달려 나왔다.
“흠, 사절인가?”
레오폴트 대공은 천천히 망원경을 들어, 이쪽으로 접근해오는 사람을 살폈다.
“……라파예트 후작?”
빤히 전투를 눈앞에 둔 시점에 적군 총사령관이 단기필마로 접근해오고 있다.
후작이 손에 백기를 들고 있는 건 아니지만, 제국군의 누구도 그 후작을 공격하려고 들지 않았다.
상식적으로 혼자서 무슨 적대행위를 하려고 달려오고 있는 건 아닐 테니까.
“흠, 일단 말을 가져오게.”
“옛, 대공 전하!”
심지어 대공조차 후작이 사절로서 왔다고 생각하고 응대하기 위해 말을 찾는 순간.
제국군의 진지 가까이 다가온 후작의 외침이 마력을 가득 실은 채 제국군의 온 진영을 울렸다.
[프랑지아 혁명군 총사령관 피에르 드 라파예트가 고한다! 게르마니아 제국의 군사들이여, 들으라!]
전투를 앞두고 혁명군의 대병력과 대치하며 긴장한 채 방어선에 있던 모든 제국군의 시선이, 귀가 단번에 라파예트 후작에게 쏠렸다.
“무슨……?”
레오폴트 대공과 참모장 하인리히 공작조차 어안이 벙벙해진 사이, 라파예트 후작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혁명군의 총사령관으로서, 숱한 전투와 희생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전장에 선 그대들의 용기와 결의에 경의를 표한다!
그러나 같은 전장에 선 자로서, 그대들과 똑같이 전장에서 피 흘리는 이들을 이끄는 자로서 그대들에게 묻고자 한다. 제국군이여, 그대들은 지금 무엇을 위해 싸우고 있는가?
그대들이 피와 땀을 흘리며 죽음의 공포에 맞서면서까지 싸우는 순간, 그 이유를 단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그에 대한 답을 얻은 적이 있는가?
그게 아니라면 그대들은 그저 제국이, 제후들이, 그대들의 상관이 명했기에 전장에서 싸우고 있는 것은 아닌가?]
“아니, 저자가 지금 대체 무슨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건지…….”
하인리히 공작은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그러나 대공은 전신의 신경이 쭈뼛 곤두서는 것 같았다.
“마, 막아.”
“예?”
절박하게 흘러나온 말에 하인리히 공작이 의아하게 반문하는 순간, 대공의 입에서 비명 같은 외침이 터져 나왔다.
“저자를 막아!”
[한때 우리, 프랑지아인 또한 그대들과 같은 처지였다.
프랑지아와 제국의 전쟁은 이것이 처음이 아니다.
아마도, 마지막도 아닐 것이다.
이 자리에 있는 내 군사들의 부친과 조부가, 그대들의 부친과 조부와 같은 전장에서 싸웠다. 조국이 명했기에! 군주가 명했기에!
지금 숱한 패배와 절망을 딛고 전장에 서 있는 그대들과 마찬가지로, 그대들의 부친이, 그대들의 조부가 조국의 명에 따라 피 흘리며 싸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 헌신으로, 그 용기로 무엇이 달라졌는가? 무엇이 달라졌는가, 제국군이여!
아무것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그대들은 제국의 일개 병사이며, 군주가 원한 전쟁에 끌려 나와 피 흘리며 싸우고 있다!
이 전쟁이 그대들의 승리로 끝나도, 혹은 패배로 끝나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대들의 아들이, 손자가 원하지 않는 전쟁에 끌려 나와 군주를 위해 피 흘릴 것이다.]
“어, 어떻게-”
“치잇……!”
레오폴트 대공은 부관이 데려온 군마에 바로 올라, 노년의 몸으로 땀을 흘리면서 정신없이 말을 몰았다.
저자는 단순히 그의 호적수 따위가 아니다.
일개 적의 장군 따위도 아니다.
[언제까지 이런 일이 반복될 것인가?
영원히!
그대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지금까지처럼 그저 복종하기만 한다면, 그대들이 흘린 눈물과 피는 역사에 한 줄의 기록조차 남기지 못할 것이기에!
보라, 제국군이여.
한때 그대들과 같은 운명이었던, 같은 신세였던 우리를 보라.
이제 우리는 원하지 않은 전쟁을 위해 싸우지 않는다.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자유를 가지고, 그럼에도 제국의 침략으로부터 우리의 혁명을 지키기 위해 신분과 무관하게 한마음 한뜻으로 이곳에 서 있다.
총사령관인 내가 앞장서 피 흘리며 싸워왔음을, 우리의 여왕 폐하께서 옥좌가 아니라 병사들의 옆에서, 온 힘을 다해 그들을 지켜왔음을 우리와 그대들 모두 알고 있다.
그러나 그대들은 어떠한가?
그대들이 이 전쟁에서 피와 눈물을 흘리는 동안,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 한순간이라도 알고 싸운 적이 있는가?
그대들이 원하지 않은 전장으로 그대들을 내몬, 권력을 위해 전쟁을 터트려 흐르지 않아도 될 피를 흩뿌리고 있는 압제자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맹렬히 말을 몰아 달린 대공은 포병진지에 도착하자마자 숨을 헐떡이며 말에서 내렸다.
“대, 대공 전하!”
“당장 포격해!”
“예, 예?”
“라파예트 후작, 저 자에게 포격하라고!”
[혁명군의 총사령관으로서, 나는 그대들의 처지에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무엇을 위한 용기이고, 무엇을 위한 헌신인가.
그대들 중 우리에게 포로로 잡혔던 이들이 있다면, 우리가 왜 그대들에게 후하게 대했는지 아는가? 한때 우리 또한 그대들과 다르지 않았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대들이 우리의 적이 아님을, 우리의 적은 그대들을 전쟁터로 내몰고 군림하고 있을 뿐인 저 제국의 주인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대들의 적이 아니다! 우리의 적은 이 전쟁을 일으킨 제국의 압제자들이며, 그대들의 진정한 적 또한 그렇다!
직시하라! 그대들의 진정한 적을-]
라파예트 후작이 총을 쏘면 총탄이 닿을 거리에서 제국군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는 순간, 연이은 포성이 터져 나왔다.
후작의 말이 멈춘 사이, 굉음을 내며 날아든 포탄 여러 발이 후작에게 날아들었다.
명예도, 귀족으로서의 존중도 없는 발악에 가까운 행위.
그러나 포탄이 후작에게 닿기 직전.
그의 앞에 제국군의 모두가 결코 잊을 수 없는, 금빛의 장벽이 펼쳐졌다.
포탄이 장벽에 부딪히는 굉음과 함께, 무력하게 땅으로 추락하는 모습을 이 자리의 모두가 지켜보았다.
모두의 정적 속에서, 결코 막을 수 없는 후작의 외침이 다시금 울려 퍼졌다.
[보라, 제국군이여!
우리와 마찬가지로 자유롭고 평등해야 하나, 그 어떤 권리조차 허락받지 못한 이들이여!
제국의 압제자들은 전투가 벌어져 그대들이 무의미하게 피 흘리는 것보다 그대들의 눈이, 귀가 열리는 것을 더욱 두려워한다!
저들은 그대들의 아비가, 조부가 그랬던 것처럼, 그대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대들의 아들도, 손자도 같은 운명에 처할 것을 원한다!
그대들은 그 비참한 운명에 순응할 것인가?
보라, 우리의 혁명을!
이것은 최초로 얻어낸 민중의 자유이며, 평등이며, 박애다!
그대들이 겪은 운명을 반복하고 싶지 않다면, 그 유일한 길이 여기에 있다!
그대들의 선조가 벗지 못한 굴레를, 그대들의 후손에게 물려주지 않을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다!
더 이상 복종하지 마라!
무의미한 희생을, 무의미한 싸움을 멈춰라!
다만 저항하라!
그대들의 자유를 위해!
일어나 그 손으로 쟁취해라!
그대들의 평등을!
우리와 함께하라!
그리하면 우리가, 그대들을 박애로서 품으리라!]
마력을 가득 머금은 후작의 외침이 메츠 전역을 뒤덮을 기세로 울려 퍼지고, 라파예트 후작이 검을 뽑아 들어 올렸다.
“와아아아-!”
그에 호응하듯 혁명군이 일제히 진격해오는 와중에도 제국군의 진지에는 정적만이 흘렀다.
그리고, 그 순간.
“어, 어어어!”
“자, 자리를 지켜!”
제국군 중 총을 내팽개치고 두 손을 들어 올린 채 혁명군 쪽으로 달리는 자가 나왔다.
고작해야 몇 명.
애초부터 제국군으로 위장해 심어둔, 크리스틴의 첩자로 시작된 투항.
그러나 그걸 본 제국군이 연쇄적으로 무기를 내던지며 혁명군 쪽으로 달리기 시작하는 데 불과 몇 분도 걸리지 않았다.
망연자실한 얼굴로 그 광경을 보던 레오폴트 대공의 입에서, 절망으로 가득 찬 탄식이 흘러나왔다.
“저자가, 제국의 파멸이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