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혁명 수호 전쟁 - 붕괴 (2)
현장 수습은 내 기대보다도 훨씬 더 오래 걸렸다.
데미앙 드 미르보의 남부군을 낭시로 진격시켰는데, 추격대로 나선 샨드라가 정말 끝도 없이 포로들을 보내왔기 때문이다.
제국군은 추격대에게 잡힐 것 같으면 항복하고, 배고프면 항복하고, 하여간 너무 쉽게 항복해버렸다.
심지어 나중엔 병력이 부족해졌는지 샨드라가 항복한 제국군을 호송 병력도 없이 그냥 우리 주둔지로 보냈는데, 그들은 제 발로 고분고분하게 우리 본대까지 걸어와서 얌전히 포로가 되었다.
이게 대체 무슨 꼴인지…….
결과적으로 포로가 3만이 넘는 숫자가 되어 발루아에 남은 우리 군과 거의 비슷한 규모가 되었고, 덕분에 나는 드제와 함께 포로들을 수습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저만한 규모의 포로를 미흡하게 관리했다가 폭동이라도 나면 진짜 사고도 그런 대형사고가 없으니까.
정작 이 사태를 만든 장본인께선 뭐라고 반응하셨냐면.
-여왕 폐하, 이건 좀 아니지 않습니까? 효과가 좋다 못해 지나친데?
-음……. 좋은 게 좋은 거 아닐까요?
-우리가 포로 수습하느라 진격을 못할 정도로 눈 돌아가게 바쁘다는 점을 제외하면 말이지. 이미 한번 후하게 대접해 줬는데 줬다 뺐으면 개판날 것이 뻔하니 제대로 먹이고 재워줘야 하는데, 이 보급 관리가 얼마나 힘든지 폐하께서--앗, 벌써 시간이. 저는 부상자 치료로 바빠서 이만!
-폐하! 어디 가, 이 망할 성녀님이! 에리스!
-힘내세요, 후작님!
저러고 도망가 버렸다.
내가 드제, 베르테르와 함께 한숨을 푹푹 내쉬며 잔업을 하는 바쁜 나날을 보내던 중, 가스통이 눈을 떴다.
* * *
나는 병상 옆에 오렌지 바구니를 올려두고, 가스통을 바라보았다.
“라파예트 후작 각하.”
“가스통.”
그새 조금 수척해진 란 가스통은 침대에 누워있다가 허리를 일으켜, 나에게 꾸벅 고개를 숙여 보였다.
나는 손으로 그를 다시 눕히며 말했다.
“프랑지아 최고의 기사가 꼴이 말이 아니군.”
에리스에 따르면 크리스틴과 카론 남작이 당한 것과 같은 독이라고 들었는데, 두 사람은 에리스가 온 힘을 불어넣으며 한 명에게 매달려서 회복이 빨랐던 걸까.
어쩌면 악마들이 그 독을 더 개량한 건지도 모르겠다.
“송구합니다, 각하. 제가 부족하여…….”
“아니, 그 상황에선 누구라도 당했어. 그대 탓이 아니야. 오히려 그대가 쓰러지는 순간까지 상황을 파악하고 보고해 준 덕분에 우리가 이길 수 있었다.”
재수 없어서 첫 기습에 당한 것이 나였다면, 그대로 전투 패배로 직결될 수도 있었다.
오히려 그런 상황에서도 일단 적 기병대를 저지하고 생환한 그가 대단한 거지.
나는 그래도 송구하다는 얼굴의 가스통을 내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대가 무사해서 다행이야.”
“……감사합니다, 후작 각하.”
나는 잠시 가스통과 마주 보았다.
회귀 전, 최후의 전투에서 가스통이 나에게 보여준 얼굴을 떠올렸다.
그때의 란 가스통이 왜 끝까지 나를 따르다 끝내 전사했는지, 나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때 나에게 보여준 얼굴보다, 지금의 그가 보여주는 얼굴이 더 낫다는 것만큼은 확신할 수 있다.
그래서 안도하며, 말했다.
“그럼 푹 쉬면서 몸조리 잘 하게. 앞으로도 나를 많이 도와줘야지.”
나도 그만큼 가스통에게 보답할 테니.
“알겠습니다, 각하. 심려를 끼쳐드려 송구합니다.”
“송구할 일 없다니까. 아, 그래도 그대 상태가 그럭저럭해 보이니, 이건 둘이 먹으면 되겠군.”
내가 오렌지 바구니를 가리키며 말하자, 가스통은 의아하다는 얼굴이 되었다.
“둘이…… 말입니까?”
“그래.”
나는 바로 방문을 열었고, 그 앞에 서 있던 샨드라가 헤실헤실 웃었다.
“아, 후작 각하. 볼일은 끝나셨습니까?”
“그래, 끝났지. 그럼 나는 그대가 추격전을 너무 잘해준 나머지 쌓인 일거리를 마저 처리하러 가야겠어.”
전장에서 죽거나 다친 적병보다 포로가 훨씬 많을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
샨드라는 쾌활한 미소를 지은 채, 경례를 붙이며 답했다.
“잘 부탁드립니닷!”
“그래, 뭐…….”
나는 가스통을 흘긋 본 다음 샨드라에게 답했다.
“좋은 시간 보내면 좋겠군.”
그렇게 방에서 나서, 복도를 걷고 있자.
“파하하하! 다녀오겠다더니 제가 다녀왔네요!”
“크흠, 크흠.”
복도까지 다 울리도록 웃음을 터뜨리는 샨드라와, 민망하게 헛기침을 하는 가스통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픽 웃으며 등을 돌렸다.
나도 크리스틴이 보고 싶은데.
아, 그 망할 놈의 포로 관리 언제까지 해야 하지.
……편지라도 써볼까.
* * *
그 뒤로 다시 사흘이 흘렀다.
눈 돌아갈 것처럼 바쁘던 포로 정리도 어느 정도 끝났다.
그리고, 그사이 내가 쓴 편지는 그 장본인을 이곳으로 불러왔다.
“이번에는 포로를 해방하지 말자는 의견이 대세에요.”
“음, 역시 그렇게 됩니까.”
아무래도 지난번처럼 포로들을 해방해서 적의 사기를 떨어트린다는 전술을 쓰기엔 포로의 수가 과하게 많다.
어차피 우리의 포로 대우가 관대하다는 소문이 제국군에 충분히 퍼져있다는 건 저 무수한 포로들이 증명하는 셈이니 굳이 더 필요하지도 않고.
“그런데, 저 포로들을 먹이는데 드는 물자도 장난이 아닙니다. 이걸 국민의회가 계속 제공한답니까?”
제국군 포로가 무려 우리 총 병력의 절반에 가깝다.
마음 같아선 대충 안 죽을 만큼만 먹이고 싶지만 에리스가 좋아할 리도 없고, 우리의 후한 대우를 믿고 항복한 놈들이다.
기대한 만큼의 대우를 받지 못하면 그만큼 더 쉽게 반발할 수 있다는 거고, 저만한 숫자를 처박아둘 수용시설이 있는 것도 아니고 관리할 병력이 넘치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차라리 저들이 만족할 대우로 얌전하게 만들어 두는 쪽이 더 효과적이다만, 돈 문제가…….
크리스틴은 천천히 다리를 꼬더니 답했다.
“그래서, 국민의회는 당신이 저 제국군을 빠르게 붕괴시켜서 평화 협상을 체결하길 기대하고 있어요.”
“남의 일이라고 너무 쉽게 말하는데요.”
내가 조금 어이없다는 듯이 답하자, 크리스틴은 쿡쿡거리며 웃었다.
그녀의 웃음에 따라 움직이는 몸의 감촉이 느껴져서, 나는 슬며시 시선을 피했다.
“그래서, 크리스틴?”
“네?”
“언제까지 이러고 계실 겁니까?”
크리스틴은 지금 내 다리 위에 걸터앉은 채, 팔로는 내 목을 끌어안고 몸을 기대고 있다.
내 말을 들은 크리스틴은 가만히 나를 보더니 슬며시 입꼬리를 틀어 올리며 물었다.
“싫어요?”
부드러운 숨결이 턱에 닿-
“아니, 그건 아닌데.”
어느 쪽이냐면 좋은 쪽이다만…….
여기가 내 사령실이고 지금은 대낮이며, 밖에는 부하들이 있다는 사소한 문제점이 신경 쓰일 뿐이지.
크리스틴은 슬며시 고개를 기울이더니, 낮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받은 편지를 읽자니 당신이 저를 무척 그리워하시는 것 같아서, 저도 당신을 이만큼 그리워했다고 표현해본 건데, 역시-”
나는 바로 팔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잡고, 입술을 포갰다.
서로의 호흡을 먹어치우는 듯한 입맞춤을 나누고, 크리스틴이 내뱉는 가쁜 숨을 느끼면서 말했다.
“다시 생각해 보니 엄청 좋네요.”
크리스틴은 완전히 새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과감한 것 같으면서도 묘한 데서 부끄러워한단 말이지.
그게 또 귀여워서, 나는 그녀를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바쁘셨을 텐데, 절 위해 이렇게 직접 와주셔서 무척 기쁩니다.”
“어차피 국민의회의 의견을 전달할 사람이 필요하니, 제가 자청한 것뿐이에요.”
이렇게 솔직하지 못한 점도 포함해서,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약혼녀가 굳이 이 멀리까지 와주었는데 낮이면 어떻고 사령실이면 어떤가.
그냥 이 귀한 시간을 마음껏 즐겨야-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크리스틴이 잽싸게 일어나려고 해서, 순간 그녀를 붙잡고 이 모습 그대로 부하를 맞이할까 하는 심술이 발동했다만-그랬다간 정말로 미움받는 수가 있으니 참았다.
“들어오게.”
“전령! 후작 각하! 남부군 사령부의 서신입니다.”
“음, 보지.”
나에게 경례를 붙인 전령이 내민 서신을 받으며 흘긋 시선을 옆으로 돌리자, 크리스틴은 언제 그랬냐는 듯 검은 부채로 입가를 가린 채 차분한 얼굴을 하고 있다.
나는 서신을 뜯어보았다가 두 눈을 크게 떴다.
“낭시를 점령했다고? 무혈입성?”
“그렇습니다, 후작 각하! 레오폴트 대공의 제국군은 메츠로 물러난 듯합니다!”
레오폴트 대공이 낭시 같은 요충지를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내주다니, 아무래도 제국군의 상태가 내 생각보다도 훨씬 심각했던 모양이다.
아니면 데미앙이 내 기대보다 훨씬 빠르게 기동해서 대공이 미처 재수습할 시간조차 주지 않은 거던가.
“그래, 수고했네. 미르보 백작에겐 잘 해주었고, 이쪽도 상황이 수습되는 대로 출발하겠다고 전해주게.”
“알겠습니다, 후작 각하!”
전령은 바로 경례하고 물러갔다.
제국군이 피해에서 수습되기 전에 낭시를 확보하고 싶긴 했지만, 본대가 상황을 수습하기도 전에 데미앙이 단독으로 낭시를 떨어트릴 거라고 기대하고 보낸 건 아니었는데?
진짜로 그놈이 내가 올 길을 닦아놓고 기다리고 있게 생겼잖아?
어이가 없네. 이거 완전-
“……미르보 백작을 영웅으로 만들어주셨네요?”
크리스틴의 입에서 나온 말에, 나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 자가 답지 않게 내 의도를 정확하게 읽고 미리 기동할 준비를 마쳐둔 터라 그 자에게 맡긴 겁니다. 딱히 그 자를 밀어줄 생각은 아니었는데…….”
크리스틴이 전부터 미르보 백작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은 걸 알고 있어서 변명조로 말하자, 크리스틴이 의외의 답을 했다.
“그거, 미르보 백작의 생각이 아니라 지젤 다비의 진언이었어요.”
“……그렇습니까?”
하긴,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그렇게 읽기 쉬운 인간인가? 싶다가도 그랬다면 미르보 백작이 나한테 그렇게 연전연패했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새로 배속된 장교가 참모로서 보좌한 거라면 말이 되네.
“지젤 다비가 사관학교에서 전술평가를 높게 받은 건 알았지만 그 정도로 유능한 인재인 줄은 몰랐는데요. 알았다면 그치를 주느니 차라리 내가 쓸 걸 그랬네.”
아니, 잠깐.
잠시 멈칫했던 나는 슬며시 크리스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그걸 당신이 어떻게 알고 있습니까?”
크리스틴은 부채를 살랑거리며 미소 지었다.
“적만큼이나 면밀히 파악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 아군이니까요.”
마치 당연한 사실을 말한다는 듯 담담한 답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
어째 데미앙 드 미르보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던 크리스틴이 그를 남부군 사령관으로 천거할 때 의외라고 생각은 했는데, 이제 보니 목줄은 제대로 잡고 감시 중이었던 거였나.
나는 헛웃음을 흘리다가, 불현듯 다른 쪽에 생각이 미쳤다.
“……크리스틴?”
“네, 피에르. 말씀하세요.”
“……혹시 제 사령부에도 당신의 눈이 있습니까?”
크리스틴은 눈을 깜빡이더니, 이내 진하게 미소 지었다.
……미소만 지었다.
아니, 왜 답이 없으세요?
미소 지은 채 칠흑 같은 눈을 빛내는 크리스틴을 마주 보면서, 그제야 크록스가 했던 말이 제대로 실감되었다.
아무래도 내 사랑하는 피앙세께선 생각보다도 더 위험한 분이셨던 것 같은데.
그게 무섭다기보다는 오히려 든든하다고 느끼는 나도 정상은 아니야.
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뭐, 좋습니다. 크리스틴, 알자스로렌에서 고용한 현지인 중에 아직 연락망이 유지되고 있는 자들이 있나요?”
“네, 아직 있어요. 그리 많지는 않지만.”
“좋습니다. 그러면, 제게 생각이 있습니다. 당신의 협조를 구할 수 있을까요?”
크리스틴은 싱긋 웃으며 답했다.
“물론, 제가 도울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저 과도하게 많은 포로들을 이제 와서 박해했다간 기껏 에리스가 쌓아준 명분을 잃고, 그렇다고 저들을 돌려보내자니 너무 많고.
국민의회가 빠르게 결착을 내달라고 한 요구가 이상하진 않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숱한 희생을 냈고, 낭시까지 내주며 물러난 레오폴트 대공은 나름대로 부대를 수습할 시간을 벌었을 거다.
이젠 우리가 공격자인데 준비된 거점 방어에 정면으로 들이받는 것이 그리 현명하지는 않겠지.
특히나 저곳이 제국군의 마지막 거점이니만큼, 레오폴트 대공은 남은 병력과 여력을 모조리 끌어모아 필사적으로 지켜내려고 들 거다.
저기서마저 패배한다는 건 곧 제국의 전면적인 패배를 의미하니까.
그래도 저들은 이미 궁지에 몰렸고, 사기는 바닥이다. 그렇다면, 이용할 수 있는 건 이용해야지.
나는 에리스와 나눈 대화를 떠올리며 웃었다.
-좋습니다, 폐하. 이 정도까지 말씀하셨으니 저도 생각을 좀 달리해보죠.
-저들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라는 거요?
-……뭐, 제국군을 흔드는 방법으로서는 활용할 수 있어 보여서 말입니다.
-낭만이 없으세요.
낭만은 에리스에게 맡겼으니, 그녀의 선의가 빚어낸 결과를 전술에 활용하는 건 내 역할이다.
전쟁이라는 것이 꼭 명예롭고 정정당당하게 총칼만으로 해야 하는 건 아니지, 안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