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혁명에 단두대는 필요없다-114화 (114/258)

114화. 혁명 수호 전쟁 - 붕괴 (1)

지쳐서 잠든 에리스를 숙소에 눕혀두고 나왔을 때는 이미 전투가 완전히 끝난 뒤였다.

“와아아아!”

“혁명 만세!”

“프랑지아의 승리다!”

레오폴트 대공의 제국군은 패주해 낭시로 물러났고, 혁명군은 끝도 없는 포로들의 행렬을 보며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다.

에리스의 의도가 기대 이상으로 먹힌 것 같은데? 포로가 저렇게 많아서야 수습하는 시간은 더욱 오래 걸릴 거다.

이래서야 바로 낭시로 진격하는 게 가능할까?

낭시는 겨울 내내 대공이 요새화시킨 도시다. 정석으로 공략하려면 희생이 클 테니 제국군이 정신 차리기 전에 선점해야 하는데.

내가 생각에 잠긴 채 진중을 걷고 있자, 데미앙 드 미르보가 헐레벌떡 뛰어와서 떠들기 시작했다.

“대승입니다, 라파예트 후작 각하! 그야말로 전설적인 위업입니다! 이토록 불리한 상황에서 이런 대승을 거둘 수 있을 거라고 누가 생각했겠습니까! 바로 저, 후작 각하의 충신 데미앙 드 미르보만이-”

“미르보 백작.”

“예, 옛! 하명하십시오, 라파예트 후작 각하!”

“내 명령은 받았나? 낭시로 진격할 준비는 얼마나 진행되었지?”

전달된 시간을 생각하면, 빠르면 두 시간 정도 뒤려나.

나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데미앙이 바로 각 잡힌 경례 자세를 취하며 답했다.

“준비는 거의 끝나서, 30분 이내로 가능합니다, 후작 각하! 명령만 내려주십시오!”

“……바로?”

그게 되나?

내 명령을 전달받고 바로 준비하기 시작했다고 해도 과하게 빠른데?

이 인간 또 허위보고 아니야?

내 눈초리를 어떻게 느꼈는지, 데미앙은 더욱 각 잡힌 자세로 바로 입을 열었다.

“후작 각하께서는 늘 사소한 전과 확대보다는 더 큰 국면을 보면서 움직이시지 않으셨습니까! 각하시라면 잔당 추격 대신 더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 공략을 우선하실 것이라 믿고 미리 준비했습니다!”

그렇게 답하는 데미앙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기쁨과 뿌듯함이 가득하다.

정작 나는 떨떠름했지만.

“그, 그래?”

아니, X발.

다른 놈도 아니고 데미앙 드 미르보가 이 정도로 내 행동 패턴과 심리를 분석하고 이해하고 있다고?

이런 유능한 부하를 데리고 있는 건 분명히 기뻐야 하는데…….

뭔가, 뭔가 말로 형언하기는 어렵지만 묘한 불쾌감이…….

내 의도를 읽어낸 사람이 다른 자도 아니고 하필 이놈이야.

나는 굉장히 떫은 기분을 지우지 못했지만, 어쨌거나 할 일은 해야 하므로 데미앙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좋아, 데미앙 드 미르보 사령관. 아주 훌륭하군. 지금 즉시 남부군을 이끌고 낭시로 진격하도록. 샨드라와 이베리카군이 적을 추격하며 재집결을 최대한 늦춰놨으니, 잘만하면 남부군 단독으로 낭시를 함락시킬 수도 있을 거다.”

하필 내 의도를 읽어낸 인간이 데미앙이라서 꺼림칙하긴 하지만, 그래도 남부군의 준비가 마침 거의 끝났다니 여기선 남부군만 보내고 드제의 북부군에겐 현장 정리와 포로 수습을 맡게 하는 쪽이 효과적이겠지.

“나도 북부군과 함께 이곳을 수습한 다음 바로 뒤따르겠다. 중요한 기회니 나를 실망시키지 말도록.”

북부군은 여기 남고, 남부군에겐 엉망진창인 적을 밟고 요충지를 점령할 공을 세울 기회를 준다. 그 의도를 바로 이해한 데미앙은 만면에 화색이 가득해서 답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후작 각하! 낭시에서 각하께서 오실 길을 닦아놓고 기다리겠습니다!”

“그래, 기대하지.”

나는 신이 나서 달려가는 데미앙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등을 돌려 북부군 사령관 루이 드제, 그리고 혁명군 총참모장 알렉상드르 베르테르와 딱 마주쳤다.

“대승을 축하드립니다, 라파예트 후작 각하.”

“위기였는데도 후작 각하의 훌륭한 작전 덕분에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그대들도 수고 많았네, 드제 사령관, 베르테르 참모장.”

사실상 내가 현장을 비우고 전선에 뛰어들 수 있게 해주는 두 사람.

이들은 이번 전투에서도 나를 대신해 군을 총괄하느라 무척 바빴겠지.

나는 싱긋 웃으며 드제를 보았고, 드제는 조금 머쓱해했다.

출진 전, 나와 그는 상당한 언쟁을 벌였다.

-내가 흉갑기병대를 이끌고 적 흉갑기병대와 싸운다. 본대는 언제나처럼 드제 사령관에게 맡기지.

-혹시 미치셨습니까? 아니면 정말 만용을 부리다 죽은 졸장으로 남고 싶으신 겁니까? 암살자입니다! 그 대단한 가스통 장군도 단번에 사경을 헤매게 만든 독을 쓰고 있는데, 총사령관 각하께서 그들에게 뛰어드시겠다니요?

-그 정도로 절박함을 보이지 않으면 확실하게 제국군을 끌어들일 수 없어. 필요한 역할에 가장 적합한 인사가 나일 뿐이지. 그리고 모르는 상태로 기습이라면 모를까, 이미 존재를 아는 암살자들에게 당할 정도로 어설프지 않다.

-외람되나 역사적으로 선봉에 나섰다 죽은 사령관 중에 자기가 죽을 거라 생각하고 나선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후작 각하.

-그대의 우려는 타당하지만, 우리는 이미 충분히 불리한 상황이야. 이대로면 이 전투는 결국 대패로 끝난다. 그러면 지금껏 흔들어온 제국군의 기세엔 불이 붙을 거고, 수도가 바로 위험해지겠지. 나는 내 뒤를 맡길 그대를 믿으니, 그대도 나를 좀 믿어주길 바라네.

결국 드제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어색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직접 하신 말씀을 지키셨군요, 후작 각하.”

“그래, 그대도 내가 믿고 맡겨준 책임을 무사히 수행했지.”

드제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나에게 허리를 숙여 보였다.

“출진 전 무례한 언행을 사과드립니다, 후작 각하.”

“그대의 충언을 기꺼이 용서하지. 하지만 그건 그거고, 포로가 생각보다 많으니 북부군은 현지 수습을 해줘야겠어. 낭시로의 진격은 미르보에게 맡긴다. 어차피 북부군은 준비가 덜 되었겠지?”

드제는 쓴웃음을 짓더니 답했다.

“이런, 후작 각하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날로 먹는 자리를 그 치에게 빼앗기다니, 다음부턴 충언도 좀 적당히 해야겠습니다.”

“아, 그건 곤란하니 낭시를 먹는다고 공적을 미르보에게 밀어주는 짓은 하지 말아야겠는걸?”

농담을 주고받은 나와 드제는 잠시 서로 마주보다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이렇게 서로를 믿고 싸우는 감각도, 나쁘지 않네.

* * *

발루아 구릉지에서 대패한 제국군의 상태는 간단하게 표현할 수 있었다.

절망과 공포.

샨드라가 이끄는 오크와 고블린, 인간의 혼성부대는 제국군을 정말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고, 수도 없이 많은 이들이 낙오하고 항복했다.

피에르 드 라파예트는 그 중요한 국면에서 제국을 함정에 빠트리고 승리를 거둔 것도 모자라, 그에 취하지 않고 바로 외곽의 경기병대를 협공하여 붕괴시켜버렸다.

오랜 기간 제국군에서 정찰과 후퇴할 아군의 엄호를 담당하면서, 동시에 각 부대 간 전령 역을 맡아준 후사르들은 완전히 붕괴되어 버렸다.

덕분에 군의 연락체계마저 엉망진창이 된 제국군은 제대로 된 사태 파악조차 할 수 없었고, 그저 추격하는 샨드라의 군대를 피해 혼비백산하며 패주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고생하며 퇴각한 끝에, 가까스로 낭시에 도착한 레오폴트 대공은 절망적인 보고를 듣고 있었다.

“현재까지 귀환한 부대는 4만 5천입니다, 대공 전하.”

10만이 출진해서, 절반조차 돌아오지 못했다.

아직 낭시로 돌아오고 있는 부대도 많긴 하겠지만, 상상조차 하지 못한 참혹한 대패다.

브장송 서부 평야에서의 싸움에서도 손실은 컸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예기치 못한 적의 증원군이 후방에서 공격하면서 벌어진 일이었다.

대등한 조건에서 정면 힘 싸움의 회전을 벌이고 지난 전투를 능가하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은 믿기지도 않고 믿고 싶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엄연한 현실에, 대공의 입에서 탄식에 가까운 말이 흘러나왔다.

“……바덴 백작은. 결국 찾지 못한 건가.”

“송구합니다, 대공 전하…….”

그에게 고개를 조아리는 참모장, 하인리히 공작도 입은 있으나 할 말이 없었다.

참모장으로서 그런 사태를 미리 예견하고 경고해야 했다.

혁명군에게 지독하게 시달리며 패배만을 겪어 복수와 승리를 갈망하던 제국군의 분위기를 파악하고 미리 경고했더라면, 라파예트 후작에게 그토록 쉽게 낚이는 사태는 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고, 누구보다 혁명군에 대한 복수를 갈망하며 돌격을 주도한 바덴 백작은 실종되었다.

말이 실종이지, 앞장서 돌격했을 그의 운명이 어찌 되었을지는 뻔하다.

전장의 무수한 시체 중 하나가 되었겠지.

레오폴트 대공은 손을 들어 짙은 피로감이 가득한 얼굴을 짚었다.

“비텔스바흐 백작은?”

“허벅지에 상처를 입은 채로 오랫동안 말을 달려서 부상이 심합니다. 응급처치는 했지만 당장 회복하기는 어려워 본국의 주교를 불렀습니다.”

“그래, 그렇군.”

대공은 허탈하게 답했다.

제국 최고의 기사 알베르트 폰 비텔스바흐 백작.

그가 저들 최강의 기사라는 가스통도 아니고 라파예트 후작과의 대결에서 패배했다.

제국의 모두가 유일한 희망, 제국 최고의 기사가 저들의 총사령관을 쓰러트리는 것만을 기대하며 힘겹게 버티고 있던 순간 그의 군기가 꺾여 추락하던 모습은 전 제국군에게 깊은 절망을 새겼다.

대공은 입술을 깨물었다.

피에르 드 라파예트 후작.

대공은 그 자를 그와 대등, 아니 그 이상 가는 위협으로서 간주하고 전투에 임했다.

결코 얕잡아보지 않았고, 방심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저들이 끝내 공세를 하지 않는 시간 동안, 어떻게든 우위를 점하기 위해 많은 것을 준비했다.

그러나 저들의 의표를 찌르기 위한 암살자들로도, 저들의 샤쇠르를 막기 위한 드라군으로도, 더 많은 병력으로도, 그리고 제국의 젊은 천재마저도.

끝내 저들을 꺾을 수 없었다.

레오폴트 대공은 힘겹게 끌어낸 대등한 조건의 정면 회전에서조차 피에르 드 라파예트에게 패했다.

피에르 드 라파예트에게는 믿을 수 있는 패가 많다.

제국군에게 사실상 통곡의 벽으로 인식되고 있는 방어의 명장 데미앙 드 미르보 백작.

냉정, 침착하여 라파예트 후작이 전선에 뛰어들어도 후방에서 전군을 무리 없이 지휘하여 작전을 그대로 수행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진 루이 드제.

기사 왕국의 명성을 유감없이 계승하고 있는 최강의 기사 가스통, 제국의 자존심이던 후사르를 압도하는 샤쇠르 지휘관 제롬 모렐, 늘 선봉에서 군사들과 위험을 함께하는 용장 니콜라 네.

온갖 기적을 발휘하며 존재 자체만으로 적들의 사기를 드높이고 이쪽의 사기는 꺾어버리는 성녀왕 에실리스테까지.

그러나 레오폴트 대공에겐, 그에게는.

그런 이들이 없다.

그나마 우수한 비텔스바흐 백작은 라파예트 후작에게 정면에서 꺾여버렸고, 대공 자신이 최대한 보수적으로 평가해도 제국의 지휘관들은 프랑지아 혁명군의 지휘관들에게 한참 미치지 못한다.

“우리는, 이 전쟁에서 졌어.”

“대공 전하…….”

다름 아닌 제국 최고의 지휘관이자 영웅의 입에서 나온 절망 어린 말이기에, 그 무게는 더욱 무거웠다.

“이 전쟁을 끝내야만 해.”

어떻게 해도, 이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길이 보이지 않는다.

황후 체칠리아가 요구한, 작은 승리라도 거두고 알자스로렌을 받아내며 전쟁을 끝내겠다는 비교적 합리적인 목표조차 달성할 수 없다.

아니, 오히려.

이제는 전면적인 패배를 걱정해야 한다.

“어떻게든 부대를 빠르게 수습해야 하네. 낭시는 충분히 요새화되어 있으니, 부대를 수습하고 방어진을 재정비한 채 빠르게 휴전을 청하자고 요청해야 하네. 낭시를 사수하며 점령지를 반환하고 저들의 여왕 즉위를 인정하는 조건으로 전쟁을 끝내는 것이 최선의-”

“전령! 대공 전하! 급보입니다!”

그러나 대공의 최후의 희망마저, 다급하게 달려온 전령에게 끊겨버렸다.

“무슨 일이지?”

“혁명군입니다! 데미앙 드 미르보 백작이 이끄는 혁명군이 낭시에 접근 중입니다! 최소 3만 이상으로 추정됩니다!”

레오폴트 대공은 눈을 부릅뜬 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대전투 이후였는데, 벌써 여기까지 왔다니?

대체 어떻게?

그런 것이 가능하려면 전투가 끝나기도 전에 부대를 수습해서 이동할 준비를 해야 한다.

그 젊은 후작이 그 전투 와중에 여기까지 미리 준비시켰다고?

레오폴트 대공은 전율을 감추지 못한 채 하인리히 공작을 바라보았으나, 공작은 절망적인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지금 우리군의 병력은 이제 간신히 낭시에 도착한 탈진한 병력들이고, 장비도 사기도 엉망입니다. 이 상태로는 도저히 저들에게 맞서 싸울 수가 없습니다.”

레오폴트 대공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그는 완전히 무너져 내리고 있는 제국군에 필사적으로 낭시로 물러나라고 전달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낙오된 무수한 제국군이 대공의 마지막 명령을 믿고 이리로 오고 있을 텐데.

“낭시를…… 버리고 물러난다. 메츠로, 가서…… 휴전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그곳이라도 지키세나.”

또, 또다시.

무엇을 위해서인지도 모를 전쟁에서 무수한 부하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그가, 또다시 부하들을 버리고 물러나라고 명령을 내려야 한다.

“……명을 받듭니다, 대공 전하.”

하인리히 공작이 전령을 데리고 뛰어나간 뒤, 대공은 서신을 보내기 위해 종이를 펼쳤다.

그러나 펼친 종이에 물방울이 떨어져, 대공은 인상을 쓰며 그 종이를 내던져 버렸다.

그럼에도 자꾸만 물이 떨어져, 대공은 입술을 깨문 채 떨어지는 물방울을 피해 팔을 뻗어 깃펜을 잡았다.

[게르마니아 제국의 아버지, 위대한 카이저시여.

제국의 전면적인 패배가 임박했습니다. 전황은 극도로 불리하며 더는 어떤 승리의 가능성조차 없습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카이저의 신뢰에 보답하지 못했으며, 제국의 명예를 실추시켰습니다. 저의 무능함과 어리석음이 무수한 제국의 아들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청컨대 부디 저의 죄를 벌하여주시옵소서.

다만 위대한 제국의 아버지께서 아량을 베푸시어, 저들과 휴전하고 아직까지 살아남은 제국의 아들들이나마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주십사 청합니다.]

형편없이 떨리는 손으로 엉망으로 쓰인 글씨를 보며, 대공은 웃었다.

계속해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한때 그가 자랑으로 여겼던 군복과 훈장들을 적시는 동안, 그는 허탈한 웃음소리만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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