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혁명에 단두대는 필요없다-112화 (112/258)

112화. 혁명 수호 전쟁 - 결전 (4)

이번 전쟁에서 제국군은 단 한 번도 뭔가를 주도해본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첫 전투에서는 빤히 열세인 적 병력에 엄청난 손실을 입으며 상처뿐인 승리를 거두었지만, 정작 적들이 자진해서 물러나 버린 덕분에 일선 병사들은 승리를 제대로 체감하지도 못했다.

그 이후에 당한 건 지옥 같은 보급선 파괴와 중독된 보급품으로 인한 굶주림과 고통뿐.

브장송 서부 평야 회전에서는 레오폴트 대공이 라파예트 후작을 함정에 빠트리는 데 성공했지만, 결과는 다 이긴 것처럼 보였던 전투에 크록스가 난입해서 겪은 처절한 대패였다.

일선 제국군 병사들의 입장에선 이 전쟁 내내 라파예트 후작의 함정에 제국군이 휘둘리는 일밖에 없던 것처럼 느껴진 거다.

그런 상황에서 누군지도 모를 제국군 병사가 저도 모르게 내뱉은 한 단어.

함정.

단 하나의 단어가 가진 파급력은 엄청났다.

최악으로 떨어졌던 제국군의 사기를 일시적으로라도 끌어올리기 위해, 레오폴트 대공은 그동안 혁명군에 밀렸던 전술적 요소들을 역전시킬 비책들을 철두철미하게 준비했다.

이 공세는 그걸로 제국군 병사들에게 이기고 있다는 희망을 심어 준 덕분에 이어질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희망이 전부 착각이었다는, 혁명군에 의해 의도된 것이었다는 생각.

그 인식이 제국군에게 파고든 순간, 어렵게 회복시켰던 사기는 그대로 더 깊은 나락으로 반전되었다.

“언덕을 넘어간 병력은 다 어떻게 된 거야, 어디로 간 거냐고!”

“보고도 몰라? 다 죽은 거잖아! 빌어먹을, 이건 미친 짓이야! 나, 난 더는 못 싸워!”

“또 라파예트의 함정이야! 도망쳐, 도망쳐!”

언덕으로 넘어간 그 무수한 동료들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렸고, 그 대신 혁명군이 언덕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광경을 본 제국군은 완전히 공황 상태에 빠져들었다.

레오폴트 대공은 손에 든 망원경을 부러트릴 듯 강하게 쥐었다. 최전방에서 터져 나오는 절망과 아우성이 대공이 있는 자리까지 들려오지는 않는다.

그러나 싸워볼 생각은커녕 앞다투어 등을 돌려 뛰는 병력의 움직임만으로도, 제국군의 지휘관들이 그토록 우려했던 사기의 붕괴가 실제로 일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 대공 전하.”

참모장인 하인리히 공작은 차마 뒷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나 이 전투도 결국 패배했으니, 물러나야 한다.

그런 의도만큼은 레오폴트 대공에게 가차 없이 전해졌다.

대공은 뿌드득 소리 나게 이를 갈았다.

“아니, 아직 아니야.”

언덕을 달려 내려오며 혁명군이 역습을 펼치고, 제국군이 그것을 피해 무너져 내리는 지옥 같은 전장에서.

레오폴트 대공은 이제 막 서로 격돌하여 뒤엉킨 혁명군과 제국군의 중기병대를 쏘아보며 내뱉었다.

“예비대를 전부 투입해서 잠깐이라도 공세를 저지해! 적 경기병들이나 보병대가 기병전에 끼어드는 사태를 막아야 한다!”

“예, 옛! 대공 전하!”

마지막의 모든 것을 몰아넣은 이곳에서 이렇게 패배한다면, 이 전쟁은 그대로 끝이다.

그 무수한 죽음이 개죽음으로 끝나버리게 된다.

이렇게 된 이상 제국군이 승리할 길은 오직 하나만이 남았다.

비텔스바흐 백작의 기병대와 암살자들이 라파예트 후작을 쓰러트리는 데 성공한다면.

그렇게만 된다면 혁명군을 동요시키고 제국군의 사기를 반전시켜 그걸로 어떻게든 만회할 수 있다.

레오폴트 대공은 그 미약한 희망에 매달린 채, 초조한 얼굴로 저 멀리서 난전 중인 기병대를 바라보았다.

* * *

군마의 울부짖음과 고함, 검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가득한 중기병들의 전장.

손에 쥔 검을 휘두르자, 마력을 듬뿍 흡수한 미스릴 검의 날이 번뜩인다.

“크하아악!”

팔이 검과 함께 절단된 적 기병은 피를 뿜는 팔을 다른 손으로 붙잡은 채 비명을 지르다 낙마했다.

직후 단도가 날아들었으나, 나는 그것을 바로 검으로 쳐냈다.

익숙한 각도, 익숙한 감각.

기사를 상대하는 암살자들이 어떤 순간에 어떤 식으로 끼어들 것인지는 내가 더 잘 알고 있다.

나는 바로 허리춤에서 단도를 뽑아 내던졌고, 암기가 가볍게 막히자마자 반격 받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하고 있던 암살자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한 채 낙마했다.

미간에 단도가 박힌 채로.

“겁먹지 마라! 이미 존재가 알려진 암살자는 전면전에 취약한 자들일 뿐이다! 마력 방벽에 기대지 말고 그대들의 무예와 기술을 믿고 맞서라!”

내가 소리치면서 말을 박차고 다시 뛰어들어 다른 기병을 갈라버리자, 처음에는 조금 당혹스러워하던 기사와 흉갑기병들도 기세를 높이기 시작했다.

“후, 후작 각하를 따르라!”

“죽어라, 제국의 침략자들!”

그 모습에 오히려 제국의 흉갑기병대가 당황하기 시작하고, 나는 다시 한번 날아드는 단도를 피해내고 단도를 뽑아 내던졌다.

“이,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또 다른 암살자가 가슴팍에 단도가 박힌 채 허무한 얼굴로 뇌까리며 그대로 쓰러졌다.

“으으, 어떻게……?”

제국군의 흉갑기병대는 명백하게 동요하고 있다.

암살자들은 양날의 검이다.

애초에 자신들이 밀린다는 걸 자각하고 있으니 기책 따위를 쓰는 거고, 그 기책이 눈앞에서 정면으로 부서진 순간 없는 것만 못해지는 거다.

아예 존재를 몰랐다면 기습으로는 먹힐 수도 있겠지. 당장 가스통이 그렇게 당했으니까.

하지만 암살자들은 본질적으로 기습에 쓰이고 버리기 위해 키워진 자들.

결국 쓰고 버리는 자들이 전장에서 낼 수 있는 기량이 제아무리 높아봐야 기사에 미칠 수가 없다.

하물며, 애초부터 내가 익힌 기술이 곧 저들의 기술이다.

내 힘으로는 도저히 상대할 수 없는 압도적인 힘과 마력을 지닌 기사를 따라잡기 위해, 기사의 빈틈을 어떻게든 파고들기 위해 암살자의 기술을 익힌 거니까.

나는 파고 드는 다른 단도를 다시 쳐내버리고 내 단도를 내던져 박아버린 후, 내 앞에서 주춤거리고 있는 기병들을 보며 웃었다.

“뭐야 이거. 제국이 고용한 암살자씩이나 되는 자들이 실력이 고작 이따위 밖에 안 된다니, 제국이 돈이 없나? 정예라는 흉갑기병대는 암살자들에게 기댄 채 쥐새끼처럼 피해 다니고.”

“으, 으으. 쳐라!”

“제국의 흉갑기병대를 모욕하다니-! 크학!”

“후작 각하를 지켜!”

그렇게 뛰어들던 적 기병은 옆에서 난입한 혁명군 기병에게 당해 쓰러졌다.

나도 나에게 달려들던 다른 기병을 베어 죽이면서 바로 단도를 뽑아 다른 암살자를 처리했다.

어떤 식으로 어디에서 기사를 노려야 효과적일지, 내가 저들보다 더 잘 안다.

내가 이렇게 앞으로 돌출되어서 나서면 암살자들도 당연히 일반 기병들이 아니라 나를 노리고, 오히려 그 편이 내가 저들의 행동을 예상하기도 쉽고 다른 기병들이 활약하기도 좋다.

사각이라도 있었다면 위험할지 모르겠지만, 내가 전방에서 날뛰는 덕분에 기본적인 역량에서 우위인 우리 기병대가 따라오며 길을 넓히고 있다.

나는 다른 기병을 베어내고,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나를 노리는 암살자는…… 당장은 보이지 않는군.

어쩌면 충분히 죽인지도 모르지.

그렇게 한참을 설치고 있자, 제국군 기병대 사이에서 지휘관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가 나왔다.

“……놀랍군요.”

“그대가 비텔스바흐 백작?”

“그렇습니다. 알베르트 폰 비텔스바흐 백작이 인사드립니다. 귀하가…….”

백작의 시선이 내 가슴팍에 달린 흑장미 브로치로 향했다가, 다시 내 얼굴로 돌아왔다.

“피에르 드 라파예트 후작이겠군요. 싸우는 모습이 기사라기보다 암살자에 가까워서 잘못 본 줄 알았습니다.”

내가 피식 웃자, 비텔스바흐 백작이 다시 입을 열었다.

“궁금하군요. 기사이신 후작님이 대체 어떻게 암살자보다 더 암살자처럼 싸우고, 극도로 위험한 암살자들을 그렇게까지 효과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지.”

“흠. 저들을 키워내는데 한 5년쯤 썼으려나?”

암살자라고 하면 엄청나게 공포스럽게 들리는데, 현실은 어떻게든 대상을 죽이려고 쓰는 소모품에 불과하다.

그러니 육성이 지나치게 오래 걸리면 수지도 안 맞고, 현장에서 두드러지는 성과나 재능을 드러낸 암살자가 있어도 다른 암살자들을 육성하는 데 쓰이지, 현장에 투입되지는 않는다.

“……마치 암살자들의 생리를 잘 아시는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비텔스바흐 백작의 말에, 나는 웃으면서 답했다.

“그야 잘 알지, 암살자를 고용해서 기술을 배웠으니까. 내가 수련과 실전을 통해 익힌 기간은 그대들이 고용한 자들의 2배는 넘을걸?”

비텔스바흐 백작의 입가가 실룩거렸다.

“고작 20대 중반인 후작이 암살 기술을 10년 넘게 익혔다? 혁명군의 명장에게 허언증이 있으신 줄은 몰랐는데.”

“믿기 싫음 말던가.”

회귀 전과 후 합산이니까.

고작 소모품으로 쓰이는 암살자들 따위에게 당해줄 만큼 어설프지는 않은 거지.

나는 검을 들어 올려 까닥거렸다.

“제국 최고의 기사라더니, 입으로 딴 자린가?”

비텔스바흐 백작의 얼굴이 무시무시하게 일그러졌고, 다음 순간 검을 뽑아들고 돌진해왔다.

백작의 사브르는 빠르게 내 허리를 파고들었고, 나는 그것을 바로 쳐냈다.

하지만 쳐내기가 무섭게 마치 휘는 것처럼 보이는 검이 바로 내 가슴팍을 파고든다.

나는 다시 그것을 쳐내며 거리를 벌리려 했지만, 백작은 바로 따라붙으며 쉴 새 없이 검을 휘둘렀다.

“과연, 기교 하난 대단하네.”

비텔스바흐 백작은 내 말에 대답하는 대신 검을 휘둘렀다.

오른쪽 어깨? 아니, 가슴.

다음은 왼쪽 다리, 오른쪽 다리, 허리.

쉴 새 없이 검으로 찌르고 베며 나를 밀어붙인다.

변칙적이고 민첩한 움직임으로 물 흐르듯 이어지는 공격은 막아내기 쉽지 않다.

하지만-

한참의 검격을 이어간 끝에 먼저 물러난 쪽은 백작이었다.

내 검을 쳐내고 거리를 벌린 백작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입을 열었다.

“대체, 무슨? 어떻게?”

나도 조금 거칠어진 숨을 내쉬었지만, 백작보다는 한결 나은 숨을 고르며 웃었다.

이 자는 자신의 검술에 자신이 있었겠지. 확실히 자신할만한 실력이긴 하다만...

“확실히 제법 굉장한데, 상성이 안 좋네.”

개인 무력으로 나를 압도할 수 있는 자라면 청기사, 가스통, 크록스 같은 자들.

압도적인 마력 양과 힘으로 기교고 기술이고 정면에서 박살 내버리는 자들이다.

그러나 이 자는 기교와 기술에 의존하는 타입이고, 공교롭게도 그건 나도 그렇다.

애초에 정면에서 맞붙어서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적을 꺾기 위해 발전시킨 것이 내 검술이니까.

그리고 똑같은 기교로 싸우는 검술이라면-

“그대, 그대만 한 강자와 제대로 싸워본 적이 없지? 경험 부족이야.”

회귀 전과 후를 통틀어, 나는 애초부터 재능으로도 육체로도 나를 능가하는 자들을 극복하기 위해 수련했다.

그들의 압도적인 실력을 보며, 조금이라도 그들을 따라잡기 위해 필사적으로 나를 발전시켜야 했다.

하지만 저자는 어떻지? 저만하면 재능이나 실력으로 프랑지아에서도 최상위에 속하는 강자일 테니, 제국에선 비슷한 자조차 없었겠지.

나는 입꼬리를 틀어 올리며 웃었다.

“장담하는데, 그대가 가스통과 싸웠다면 목이 달아났을 거다.”

“이익……! 크학!”

내 도발에 발끈해서 달려 들려던 비텔스바흐 백작은 깜짝 놀라 다급하게 검을 휘둘렀지만, 간발의 차로 다리에 박히는 단도를 막지 못했다.

“거봐. 경험 부족 맞잖아.”

기사와 기사의 전투에서 감정에 휩쓸리고, 도발해놓고 암기로 급습할 걸 예상하지 못하는 것만 봐도.

“허, 헉! 백작님께서 지시다니!”

“각하를 지켜- 으아악!”

나는 비텔스바흐 백작을 지키려고 뛰어드는 적 기병들을 마구잡이로 베어내며 멍하니 나와 백작의 결투를 보고 있던 부하들에게 소리쳤다.

“침략자들을 곱게 보내줄 생각인가! 쳐라!”

“고, 공격해!”

“후퇴, 후퇴해라! 백작 각하를 모셔!”

퇴각하려고 안간힘을 쓰려는 적들에게 뛰어드는데, 또다시 단도가 날아들었다.

“쯧, 집요하긴!”

검으로 쳐내긴 했지만, 적들은 이미 멀어지고 있었다.

나는 바로 등 뒤에 걸고 있던 활을 꺼내 시위를 걸었다.

비텔스바흐 백작은-

기병들이 몸으로 아주 가로막아 대서 보이지 않는다.

대신, 나는 그 옆에서 따르고 있던 기수에게로 화살을 날렸다.

말에 타고 있던 기수의 목이 화살에 꿰뚫려 비척거리다 낙마하고-그가 손에 쥐고 있던 비텔스바흐 백작의 깃발이 땅바닥에 떨어졌다.

양측 기병대가 맞붙은 끝에 한쪽의 깃발은 제하고, 다른 한쪽의 깃발은 사라졌다.

그게 의미하는 게 뭔지, 이 전장의 모두가 깨닫겠지.

나는 시선을 돌려 저 멀리에서 최후의 희망마저 사라지는 모습을 보고 완전히 붕괴되어 패퇴하고 있는 제국군과, 그것을 추격하기 시작한 혁명군을 바라보았다.

나는 살짝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레오폴트 대공이 준비해온 패는 나를 꽤 놀라게 했지만, 우리가 더 어려운 전투를 하게 된 것이 역으로 적들을 더 쉽게 낚아내게 만들었다.

암살자들에게서 살아남을 자신은 있었지만, 또 나를 미끼로 쓴 계획이 성공을 거두어 승리할 수 있었다.

……크리스틴을 만나면 뭐라고 변명하지.

그건 나중에 생각하고.

나는 나를 둘러싼 흉갑기병대에게 명령했다.

“전령 보내서 모렐 장군에게 전해. 우리가 가세할 테니 적 경기병대를 정리해버리고 추격전을 벌일 준비를 하라고.”

“알겠습니다, 후작 각하!”

“그리고 본진의 드제와 미르보 사령관에게도 전령 파견. 추격은 적당히 하고 재집결해서 바로 낭시로 진격한다.”

완벽하게 잡은 승기다. 이걸 그냥 낭비할 수는 없지.

“제군, 침략자들을 이 땅에서 완전히 몰아낼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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