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혁명 수호 전쟁 - 결전 (3)
“공격, 공격하라!”
“제국을 위해! 카이저를 위해!”
제국군의 기세는 어느 때보다도 드높았다.
처음이다.
전쟁이 시작된 후 처음으로, 그들의 공세가 안전하게 보호받고 있다.
늘 그들의 측면에서 호시탐탐 노리며 불안감을 안기던 샤쇠르들이 저지당하고 있다.
좀 밀어붙이는 것 같으면 난데없이 나타나 난동을 부리며 모든 것을 파괴하던 저들의 흉갑기병대는 물러났다.
대신, 제국 최고의 기사가 이끄는 아군 흉갑기병대가 그들을 보호하며 위축된 적의 기병대들을 견제하고 있다.
적의 포격이 아군을 강타하는 동안, 아군의 포격을 저지하던 그 금빛의 장벽도 모습을 감췄다.
지금껏 전투 때마다 겪었던 불리함이 해소되었다는 것이 눈에 보이고, 그 공포의 가스통이 쓰러졌다는 소식은 단번에 제국군의 사기를 드높였다.
그래서 공세 자체는 이어지고 있지만…….
“저주받을 자식! 대체 왜 무너지지 않는 거야!”
바덴 백작은 적진에서 펄럭이고 있는 미르보의 깃발을 보며 울분을 토했다.
니콜라 네의 선봉대조차 병력 차에 비해 지긋지긋할 정도로 버티다 간신히 패주시켰다.
그러나 미르보의 군대는 한술 더 뜨고 있었다.
마치 어디가 흔들리고, 어디가 무너지기 시작할지 모든 것을 예상한다는 듯이 가장 적절한 순간에 적절한 순서대로 예비대가 투입되고 있다.
차라리 무너트릴 수 없을 통곡의 벽처럼 보이면 모를까, 빤히 흔들리며 밀리고 있는 것이 눈에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적절한 증원으로 간신히 위기를 넘기는 것을 반복한다.
바덴 백작은 마치 희망 고문하는 듯한 미르보의 방어선에 공격을 가하는 그의 군대를 불안 초조한 얼굴로 지켜보았다.
일단 이기고 있는 것처럼 보이긴 하니 공세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출정 전만 해도 제국군의 사기는 저조하기 그지없었다.
레오폴트 대공이 철저하게 준비한 대책과 암살자라는 기책에 의해 일시적으로 되찾은 사기다.
그게 한 번 꺾이는 순간, 돌이킬 수 없게 될 수 있다는 것을 다른 누구도 아니고 제국군의 지휘관들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또, 다시 또.
알자스에서.
낭시에서.
그리고 이곳, 발루아에서까지?
또다시, 저 저주받을 미르보 백작에게 패배한다고?
진중에서 일개 병사들 따위가 바덴 백작의 경솔함과 무능함을 조롱하고 있는데, 여기서 또 미르보에게 무너지면 무슨 낯으로 제국으로 돌아간단 말인가?
그런 일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된다.
바덴 백작은 뿌드득 소리 나게 이를 갈며 말을 몰아 전방으로 달려 나갔다.
“백작 각하! 위험합니다!”
“저들은 총사령관부터 최전선에서 설치지 않나! 나도 기사다!”
바덴 백작은 참모의 만류를 뿌리치고 제국군의 깃발을 든 채 진격하는 군사들의 뒤까지 달려가, 그것을 높이 들어 올리며 소리쳤다.
“위대한 제국의 군사들이여! 쉴 새 없이 몰아쳐라! 승리가 눈앞에 있으니, 영광이 머지않았다!”
바덴 백작뿐만이 아니다.
군힐드 공작을 비롯해, 엄청난 병력을 받고도 얕잡아보았던 평민의 괴뢰정부에게 대패한 그들은 어떻게든 이를 만회하지 못하면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제국군의 모두가 절박하게 공세를 가하는 와중에, 뿔나팔 소리가 울렸다.
그러자 악과 소음, 총성이 가득한 전장에 진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전장의 소음을 모조리 뒤덮는 웅장한 말발굽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적 흉갑기병대다!”
“히익-!”
공세가 좀 풀린다 싶을 때마다 나타나 그들을 헤집어놓던 자들, 이번 전투에서는 보이지 않던 자들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만으로도 군사들이 동요해서, 바덴 백작은 다급하게 소리쳤다.
“공세에 집중하라! 우리에게도 비텔스바흐 백작의 흉갑기병대가 있다!”
아니나 다를까, 비텔스바흐 백작의 기병대도 언덕을 타고 내려오는 적 흉갑기병대를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바보 같은, 암살자들도 그대로 있는- 억?”
바덴 백작은 적 흉갑기병대의 경솔함을 비웃다가, 그들의 선두에 있는 깃발을 보고는 경악했다.
라파예트 후작. 적 총사령관의 깃발이 흉갑기병대의 선두에 있다.
가스통이 선봉에 섰다가 암살자들에게 당한 걸 알고도, 총사령관이 또 선봉에 선다고?
이건 대체 무슨?
바덴 백작의 머리가 잠시 정지한 사이, 저 위에 있던 미르보의 진지에서 지휘 깃발이 올라왔다.
후퇴 신호!
그와 동시에, 그때까지 악착같이 버티고 있던 미르보의 군대가 썰물처럼 물러나기 시작했다.
“하하, 하하하. 으하하하!”
그제야 바덴 백작은 상황을 파악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저들은 완전히 한계에 달한 거다.
그냥 패주하면 우리 기병대에게 심각한 피해를 입을 것이 뻔하니, 시간을 벌기 위해 암살자들 때문에 위축되어 있던 귀중한 전력을 어쩔 수 없이 투입했다.
그것도 가스통을 잃고 사기가 떨어진 저들을 어떻게든 내보내기 위해, 총사령관이 솔선수범해서!
제국군은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 채 멍하니 도망치는 적들과, 서로를 향해 접근 중인 기병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귀족의 체면이고 뭐고 다 치운 바덴 백작은 있는 대로 마나를 끌어 모은 뒤, 증폭된 목소리로 크게 외쳤다.
“잘했다! 적들의 방어선이 무너졌다! 몰아쳐라! 승리는 우리의 것이다! 제국을 위해, 돌격!”
“와, 와아아아-!”
구릉지를 덮은 바덴 백작의 외침이 멍하니 있던 제국군에게 단번에 기세를 불어넣었다.
“도, 돌격하라!”
“공격, 공격하라!”
도망치는 혁명군을 쫓아 언덕을 뛰어오르는 제국군을 보며, 바덴 백작은 환희에 차올랐다.
마침내, 마침내!
비텔스바흐 백작이 어떻게든 적 기병대를 막아주는 사이, 지금 추격해서 미르보 백작의 군대를 재기불능으로 격파해 버리면 이 전투는 제국군의 승리다!
* * *
후방에서 망원경을 든 채 적 흉갑기병대를 살피던 레오폴트 대공은 선봉의 깃발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여기서 라파예트 후작이 직접 나선다고?”
저들도 제국 기병대에 암살자들이 섞여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터다. 실제로 프랑지아 최고의 기사라던 가스통이 당하지 않았나.
그런데 여기서 총사령관이 직접 위험을 무릅쓴다?
“저들의 총사령관은 늘 가장 위험한 전선에 뛰어들었습니다. 아무래도 저들이 후퇴할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서 나선 것 아닐지요? 가스통의 부상이 생각보다 저들 기병대의 사기를 많이 떨어트린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참모장 하인리히 공작의 말에, 레오폴트 대공은 눈을 가늘게 떴다.
아니, 아니다.
다른 자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몰라도, 적어도 레오폴트 대공이 생각하는 피에르 드 라파예트는 가슴이 뜨거운 덕장과는 거리가 있다.
그보다는 차라리, 필요하다면 군인들을 패로서 희생시켜서라도 승리를 쟁취해내는 냉철한 유형의 장군이다.
자기 자신마저 그 패로 써서 승리를 쟁취해내기에, 마치 부하들을 너무나 아껴서 직접 위험을 무릅쓰고 최전선에 나서는 것처럼 보일 뿐이겠지.
적어도 지금까지 피에르 드 라파예트가 위험을 무릅쓴 순간은 늘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서였다.
저들이 정말 한계에 달해서 물러나고 있는 거라면, 고작 그들에게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귀중한 기병대와 자신의 목숨을 건다는 것은 지금까지 라파예트 후작의 행보로 보면 이상하다.
저 자라면 차라리 다음에라도 승리하기 위해 최대한 전력을 온존하려고 들어야 맞는데.
“일단, 전군에 정지 명령을 하달해. 추격하지 말라고 해.”
무언가가 있다. 분명히, 무언가가.
레오폴트 대공은 망원경으로 질주하는 적 기병대와 그 선두에서 휘날리는 라파예트의 깃발을 보며 고심에 잠겨 있었다.
그러나-
“대, 대공 전하! 아군이 돌격합니다!”
“뭐라고?”
적 기병대의 움직임을 관측하던 레오폴트 대공은 다급하게 망원경을 눈에서 뗐고, 제국군이 도망치는 혁명군을 따라 맹렬한 기세로 언덕을 뛰어오르고 있는 광경을 보고 기함했다.
“전령! 대공 전하, 적들의 방어선이 무너졌습니다! 아군은 바로 총 공세를-”
마침 뛰어온 전령에게, 대공은 분노에 차서 소리를 질렀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누가 멋대로 공세를 명했어!”
“바, 바덴 백작 각하의 명령입니다, 대공 전하! 적들이 무너졌으니 단번에 추격해서 격멸하라는…….”
현장에서, 언덕을 올려다보는 최전선에서는 착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대공이 있는 후방에서는 언덕을 따라 움직이는 혁명군의 움직임이 너무나 극명하게 보인다.
대공은 기가 찼다.
기가 차서, 저 언덕을 달려 올라가고 있는 프랑지아군을 손으로 가리키며 소리쳤다.
“세상의 어떤 군대가 저렇게 질서정연하게 무너져서 일제히 물러난단 말이냐! 당장 공세 중지시켜! 지금 바로!”
“예, 옛, 대공 전하!”
창백한 얼굴의 전령이 바로 다시 달려가는 모습을 본 대공이 바로 등을 돌리는 순간-가장 앞장서 달리던 제국군은 이미 언덕을 넘어서고 있었다.
-
제국군이 철저한 준비와 기책으로 전쟁 개시 후 처음으로 주도권을 가져온 전투.
바닥을 치고 있던 사기를 억지로 끌어올려서 간신히 성립시킨 정면 회전이다.
처음.
니콜라 네의 선봉대가 패퇴했을 때였다면 제국군도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했을 거다.
선봉대가 제법 잘 버티긴 했지만, 적의 병력은 아직 충분하고 처음으로 겪어본 승리에 얼떨떨하여 확신이 없었을 테니까.
그러나 두 번째.
마치 마술처럼 가장 적절한 순간에 예비대를 투입해가며 무너질 듯, 무너지지 않을 듯 희망고문하며 악착같이 버티던 미르보의 방어선이 드디어 무너져 내리는 것처럼 보였을 때.
제국군은 드디어 저 지긋지긋한 방어선이 무너졌다는 상황에 취했다. 승리가 눈앞이라는 희망에 사로잡혔다.
심지어 암살자들의 등장 이후로 저들이 마지막까지 아끼고 아끼던 흉갑기병을 총사령관이 직접 몰고 나온 상황이, 혁명군이 그만큼 절박하다는 확신을 심어주며 등을 떠밀었다.
바덴 백작이 마력까지 실어 가며 돌격을 종용한 순간 그뿐 아니라 군힐드 공작이, 제국군의 모든 지휘관이 그렇게 여겼다.
애초부터 그들이 그렇게 여기도록 만드는 것이 라파예트 후작의 계획이라는 것을 눈치챈 자는 아무도 없었다.
레오폴트 대공이 다급하게 보낸 전령의 외침도, 대공의 명령 하에 본진에서 죽어라 북을 치며 정지 명령을 내리는 깃발 신호도.
긴 고생 끝에 눈앞까지 다가온 승리의 희망과 전장의 소음에 묻혀 버렸다.
“헉, 헉, 와아아- 억?”
언덕을 뛰어오르며 거친 숨을 몰아쉬던 제국군이 언덕 위에 올라 마주한 것은 고작 30미터가량의 거리를 두고 일제히 총구를 향한 혁명군이었다.
라파예트 후작이 세운 계획에 따라 제국이 최초에 패주시킨 니콜라 네의 부대를 기반으로, 미리 빼둔 예비대와 제일 후방에 있던 부대들부터 재배치해 데미앙이 윽박질러가며 준비한 매복.
“어, 억…….”
맨 앞, 전열보병의 대열 앞에 무릎 꿇고 있던 경보병들이 각기 사격을 가했다.
빗나가기도 힘든 거리에서 쏟아진 총격에, 제일 먼저 언덕에 오른 제국군들은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쓰러졌다.
그러나 언덕을 달려 올라가는 제국군은 그런 상황을 전혀 알 수 없었다.
다만 용맹하게 앞서나간 동료들을 빨리 따라가야겠다는 일념으로, 그들을 위해 준비된 처형장으로 달려 올라갔다.
처음에는 산발적으로 올라와 경보병들의 사격만으로 쓰러지던 제국군이, 마침내 무수히 올라오기 시작하자-그 광경을 보고 있던 데미앙 드 미르보의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내달렸다.
반신반의했는데, 설마하니 정말로 정확히 라파예트 후작의 계획대로 흘러가다니.
솔직히 그 전에 무너질 줄 알았는데 정말 신기할 정도로 방어선을 잘 읽는 여자를 장교후보생이랍시고 붙여준 것도 그렇고, 사실 그 작자는 모든 걸 다 예상하고 있는 거 아닐까?
내심 마른 침을 삼킨 데미앙이 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1열, 조준-”
“어, 어억?”
지근거리에서 총검이 번뜩이는 머스켓들이 일렬로 자신들을 겨눈 것을 본 제국군이 당황하는 사이-
“발사!”
늘어서 있던 혁명군 전열보병들의 머스켓이 일제히 불을 뿜었다.
힘들게 언덕을 올라온 제국군들은 그대로 픽픽 쓰러지며 최후를 맞이했다. 그나마 운 좋게 살아남아 충격과 공포에 빠진 이들마저 경보병의 사격이 마저 처리해 버렸다.
“1열 앉아! 2열, 사격 조준-!”
사격을 마친 1열의 보병들이 그대로 자리에 앉고, 2열의 보병들이 머스켓을 겨눈다.
“헉-”
뒤늦게 잔뜩 올라온 제국군은 발치에 즐비하게 쌓인 시체들을 보고 경악을 금하지 못했다.
“발사!”
미처 반응하지도 못한 사이 2열 보병대의 일제사격이 쏟아지고, 또다시 무수한 제국군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쓰러졌다.
“2열 앉아! 3열, 사격 조준-!”
이쯤 되자 언덕 위로 올라온 제국군은 시체에 발이 걸려 쓰러지곤, 지면에 가득 찬 동료들의 시체를 보고 패닉에 빠지는 자들이 속출할 지경이었다.
그 끔찍한 광경만으로도, 이미 제국군은 완전히 전의를 잃었다.
“발사!”
다시 한번 일제사격이 가해지고, 이제 더는 시체가 쌓일 곳조차 없어진 언덕 위에서 비틀거리며 쓰러진 제국군의 시신 몇이 언덕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무수히 많은 동료들이 언덕을 타고 넘어가는 광경을 보며 언덕을 뛰어올라가던 제국군이, 시체가 된 동료들이 다시 언덕을 굴러 떨어지는 광경을 보며 멈춰 섰다.
“무슨, 일이?”
제국군의 돌격이 멈추고, 기세가 꺾이고, 열기가 식어 내리고서야 후방에서 미친 듯이 치는 북소리가 들리고, 정지신호를 알리는 깃발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순간-
“공격 개시! 반격하라!”
“혁명군, 전진!”
“프랑지아를 위해!”
“와아아아-!”
데미앙 드 미르보의 마력을 실은 외침에 응해 니콜라 네가 명령하고, 일제히 고함을 내지르며 튀어나온 혁명군들이 언덕을 달려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 순간에야 비로소, 모든 제국군은 언덕 위를 넘어간 그 무수한 동료들이 어떻게 된 건지 깨달았다.
“하, 함정이다!”
누군가의 입에서 터져 나온 단말마에 가까운 외침.
그 소리가 울려 퍼지고,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멍하니 있던 군사들의 머리가 그것을 이해한 순간, 전 제국군에 공포와 공황이 번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