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혁명 수호 전쟁 - 올가미
발루아 주둔 혁명군 사령부.
방문한 총재들과 여왕 에리스까지, 프랑지아의 수뇌부가 모인 자리.
“흠, 포로들을 반환하자고요.”
혁명당 총재 탈레랑은 슬며시 미간을 좁히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2,000명이나 전향시키신 여왕 폐하의 노고에는 깊이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하지만 그러고도 남은 게 1만 명이나 됩니다.”
“지난 전투는 후작과 여왕 폐하의 활약에 증원까지 있어 이겼지만 적도 증원이 도착해서 아직도 적의 병력이 많은 상황인데, 반환하기엔 너무 많은 것이 아닌지……?”
그래도 온건파인 자유당 총재 니콜라 브리소도 회의적이고…….
“애초에 포로들을 너무 후하게 대접하고 있소. 차라리 노역이라도 시키며 잡아두는 것이 어떻소?”
중앙당 총재 앙쥬 백작은 기사 출신 아니랄까 봐 역시나 과격하다.
사실 우리가 포로 취급을 좀 많이 후하게 하기는 했다.
딱히 강제 노역을 시키는 것도 아니고, 먹을 것도 제대로 챙겨준 데다 무려 여왕이 직접 치료해 주는 호사까지 누리게 해줬으니.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잡아두고 싶지는 않아요.”
하지만 에리스의 의지는 확고하고, 나도 거들 겸 입을 열었다.
“전투가 소강상태인 지금이야 괜찮습니다만, 저 정도의 병력을 계속 잡아두려면 나가는 돈도 돈이고 저들을 통제하기 위해 우리도 어느 정도 병력을 빼둘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저런 자들을 가둬둘 전문적인 수용시설이라도 지어두었다면 모를까, 그런 것도 아니니까.
“흠…….”
“그리고 저들이 제국군에게 복귀한다고 해서 유효한 전력이 될 거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내 말을 들은 탈레랑은 슬쩍 나를 보더니 물어왔다.
“어떤 연유입니까, 후작님?”
“우리가 저들을 후하게 대했기 때문에요.”
기사들의 시대에 냉병기를 들고 싸우던 군인들과 달리, 전열보병이라는 건 기본적으로 총탄이 빗발치는 거리까지 접근해서 대열을 지키면서 싸워야 한다.
당연히 제정신으로 할 만한 짓이 아니고, 그렇게 위험한 전장에 세우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극단적인 방법을 쓴다.
우리 혁명군은 아예 민중혁명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자신들을 위해 싸우니까 별개지만, 그건 우리가 특이한 경우고.
주로 가장 널리 쓰이는 방법은 죽도록 패며 가혹한 규율, 그리고 엄격한 처벌을 통해 질서를 유지하는 거다.
도망치거나 대열에서 벗어나면 어차피 죽으니, 차라리 총탄이 나를 빗나가길 기도하며 싸우게 되도록.
“밀집해서 싸우는 이상, 한 명의 이탈도 전열의 연쇄적인 붕괴를 유발하기 때문에, 가혹한 규율을 강요하는 것이 군대입니다. 그런데 저들은 차라리 항복해 버리면 우리가 후하게 대접해 주는 걸 이미 알아버렸죠.”
그냥 저런 자들이 대열에 있기만 해도 그 대열은 균열이 간 벽과 같은데, 심지어 저들은 동료들과 말하고 사실을 퍼뜨릴 수 있는 살아있는 사람이다.
“저들이 돌아가면 우리에게 받은 대우를 알게 모르게 퍼뜨릴 테고, 그런 류의 소문은 통제하려 든다고 쉽게 통제되는 것이 아닙니다. 특히나 목숨을 걸고 전장에 서는 신세를 공유하는 자들 사이에서는 더더욱.”
“흠…….”
총재들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말씀드리자면, 당장 저들을 보낸다고 해서 전투가 벌어질 걸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건 어떻게……?”
탈레랑의 의아한 시선을 받은 나는 크리스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시선을 받은 크리스틴은 언제나처럼 검은 부채를 살랑이고 있더니 입을 열었다.
“점령지가 될 알자스로렌에서 대피를 거부한 주민 중 일부를 미리 매수해서 간자로 쓰고 있습니다. 저들은 방어전에 대비한 시가지 요새화와 장기전을 위한 물자 비축에 여념이 없다고 하더군요.”
“오…… 그런 건 언제 또. 대단하시구려, 아키텐 백작.”
앙쥬 백작의 감탄에 살짝 목례해 보인 크리스틴은 나에게로 시선을 돌렸고, 내가 이어서 말했다.
“아키텐 백작이 조사한 걸 토대로 볼 때 저들이 당장 우리를 완전히 굴복시키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했거나, 적극적인 공세를 벌일 여력이 없다고 봐야겠죠. 그래서 우리도 이대로 대치하며 장기전으로 끌고 가려고 합니다. 그런 상황이니 식량과 돈만 축낼 포로들도 저들에게 떠넘기는 쪽이 낫겠죠.”
“타당한 의견이긴 합니다만, 우리는 지금 영토를 점령당한 상황입니다. 알자스로렌에서 피난시켜 난민이 된 주민들도 있는데 무작정 대치만 이어가기는 곤란합니다.”
니콜라 브리소의 말에는 크리스틴이 답했다.
“그들은 아키텐 상단이 고용해서 전쟁 물자 생산 및 보급과 운송 업무를 맡겨 생계를 이어갈 수 있게 할 겁니다.”
“으으음, 아키텐 상단이……?”
니콜라 브리소는 조금 불편한 얼굴이 되었다.
기본적으로 자본가들을 지지층으로 둔 자유당으로서는 크리스틴의 영향력이 더 커지는 건 껄끄럽겠지.
신성 교국과의 무역? 성녀인 에리스가 여왕으로 즉위하며 무역 봉쇄가 풀리긴 했지만, 그 긴 시간 독점 무역을 이어온 아키텐 상단이 중요한 분야는 다 선점해둔 뒤다.
크록스와의 교역도 내가 주도했으니, 당연히 아키텐 상단이 큰 지분을 차지했다.
크록스에게서 받는 미스릴을 교역 재료로 쓰니, 마찬가지로 알프스 왕국과의 교역도 아키텐 상단이 거의 전담이다.
국내외 교역의 핵심을 아키텐이 쥐고 있고, 전쟁물자 조달과 보급은 물론이고 해군 건조도 거의 도맡고 있다.
한마디로 프랑지아의 경제 및 군수산업의 중추는 이미 아키텐의 영향력 아래 놓여있다는 소리다.
“다른 대안이 있으시다면, 기꺼이 들어보겠습니다.”
그러나 크리스틴이 은은하게 웃으며 말하자, 브리소 총재는 헛기침을 하며 답했다.
“아니, 아니오. 백작의 헌신에 감사드리오.”
뤼미에르에서 돈 놀음이나 하던 자본가들이 알자스 로렌에서 피난시킨 주민들의 고용대책 따위 생각해 본 적이 있을 리가 있나.
그들의 인원이 몇만 단위인데, 사전 준비도 없이 대책 따위가 튀어나올 수 있을 리도 없지.
“말씀드린 대로, 알자스로렌 지방에 남은 주민은 극소수고 그나마도 본인들이 선택해서 남은 겁니다. 피난시킨 주민들만 당장 생계를 걱정하지 않게 해준다면 당장의 불만은 억제할 수 있을 겁니다.”
나는 총재들을 한 번씩 둘러보고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는 영토를 점령당한 상황이지만 실상 그 지역은 텅 빈 무주공산입니다. 시간을 더 벌면 지금도 그랑제콜 과정으로 양성 중인 장교들과 병력이 투입될 테니 더욱 유리해집니다.”
저들이 공세를 아예 포기하고 수세로 전환한 것은 나로서도 조금 의외였지만, 전략적으로 나쁘지 않은 판단이다.
레오폴트 대공은 패잔병들을 추스르며 우리가 알자스 로렌을 탈환하기 위해 견고한 방어선에 들이받는 걸 원하고 있겠지.
그러나 우린 그럴 이유가 없다.
“반면 제국은 프랑지아 왕위를 얻겠다고 일으킨 전쟁에서 훨씬 많은 병력으로 대패를 당한 상황에 장기간의 전쟁을 이어가게 되는 입장인 겁니다. 단순히 전쟁을 유지하고 군비를 계속 지출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제국은 경제적 이전에 정치적인 부담에 압박받게 될 겁니다.”
전략적으로야 무리한 공세보다 수세가 낫다지만, 이건 부족한 명분으로 외국인 출신 황후가 일으킨 전쟁이다.
전략 목표를 바꾼 것이 누구의 뜻인지는 몰라도, 군사들을 차출당하고 전비를 지불하고 있는 제후들이 그 사정을 알아주진 않지.
“그러니 우리는 저들에게 포로들을 떠넘겨 두고, 느긋하게 기다리며 전력을 증강시키고 있으면 됩니다. 그러면 저들의 군대에도, 수뇌부에도 알아서 균열이 일어날 테니까요.”
더 이상의 이견은 없었다.
총재들도 마음이 정해진 듯 해보이자, 에리스가 입을 열었다.
“탈레랑 총재님.”
“말씀하십시오, 여왕 폐하.”
“포로교환 협상은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리하지요.”
탈레랑이 가볍게 목례해 보이자, 에리스는 보랏빛의 눈동자를 빛내며 말했다.
“제국의 전쟁에 끌려 나왔을 뿐인 포로들은 마땅히 몸 성히 돌려보내주는 것이 옳겠지만, 침략해온 제국에게까지 관용을 베풀 필요는 없겠죠. 기왕 보내는 거, 뜯어낼 수 있는 건 전부 뜯어내 주실 거라 믿을게요.”
오, 이게 그 에리스가 한 말이라고?
나는 물론이고 크리스틴도 놀람 반 기특함 반으로 웃는 가운데, 눈을 크게 뜬 채 잠시 굳어있던 탈레랑은 이내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에리스에게 허리를 숙여 보였다.
“여왕 폐하께서 원하시는 대로.”
* * *
여름이 끝나고, 가을로 접어드는 시점.
전쟁이 시작되고 한 달도 되지 않아 알자스와 로렌을 모두 차지했을 때만 해도, 제국군의 분위기는 꽤 낙관적이었다.
애초부터 긴 내전과 혁명으로 난장판이 된 프랑지아를 상대로 제국이 패배할 가능성을 진지하게 고려하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그 직후 프랑지아가 벌인 보급로 파괴 활동은 굉장히 성가셨고, 보급품 오염 사건이 준 충격은 상당했으나 그것 또한 일시적인 곤란 정도로만 여겨졌다.
그러나 적을 완벽하게 함정으로 몰아넣었다고 여겼는데도 불구하고 대패하며 수만을 잃은 지난 전투 이후, 제국군은 이 전쟁에서 승기를 잡을 수 있을지에 대해 확신이 없었다.
레오폴트 대공은 지휘소에 앉아 보고서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프랑지아 측이 한창 전쟁이 이어지고 있는 상황에 포로를 해방해 주겠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했을 때, 제국은 떨떠름해했다.
당장 공세를 벌일 것도 아닌데 상태가 얼마나 안 좋아졌을지도 모를 포로들을 대규모로 떠안아 봐야 돈만 나갈 것이 뻔하니까.
하지만 응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애초에 포로 중 상당수는 황제의 직할군이 아니라 제후들에게서 차출한 군대다.
황후를 위해 벌인 명분 약한 전쟁에 협조해 준 제후들의 군대가 포로가 된 상황이니, 제국이 마음대로 포기하고 말고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거다.
문제는, 프랑지아 측 대표로 온 탈레랑이라는 자가 그런 제국의 내부 사정을 아주 잘 알고 있다는 듯 악착같이 벗겨 먹으려 들었다는 거였다.
말이 포로 해방이지, 강매에 가까웠던 협상 당시의 상황을 떠올린 레오폴트 대공은 미간을 찌푸렸다.
한참 보고서를 읽던 레오폴트 대공은 맥이 탁 풀린 얼굴로 시선을 들어 올려, 하인리히 공작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돌아온 포로들이 퍼뜨린 소문 때문에 군사들의 사기가 더 떨어지고 있다고.”
“송구하나, 그렇습니다. 대공 전하.”
프랑지아에게 사실상 포로들을 강매당한 대공은 속이야 쓰렸지만, 그래도 그의 명령으로 싸우다 붙잡혀 고초를 겪다 돌아왔을 포로들을 조금이라도 배려해 주려고 했다.
정작 마주한 포로들은 수상할 정도로 상태가 좋아서, 이걸 안도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알 수 없었지만.
돌아가는 사태를 보아하니, 둘 다 아니고 분노해야 했다.
레오폴트 대공은 굉장히 피로하다는 얼굴로 이마를 짚으며, 믿기지도 않고 믿고 싶지도 않은 소리를 내뱉었다.
“……저들의 여왕이 병동을 돌며 부상자들을 치료해 주고, 새해가 올 때까지 전투는 없을 테니 조심히 돌아가서 즐거운 연말 보내라며 배웅까지 해줬다고? 포로들에게? 직접?”
“그, 그렇, 습니다…….”
하인리히 공작도 뭣 씹은 얼굴로 답하더니, 망설이다가 덧붙였다.
“돌아온 포로들이 하나같이 저들의 여왕을 자애로운 성녀왕이라 부르며 존경하는 모양입니다…….”
레오폴트 대공은 헛웃음을 흘렸다.
차라리 저들이 공격해 왔다면, 저런 분위기는 금방 가라앉았을 거다.
동요야 하겠지만, 맞서 싸우지 않으면 죽는 상황에선 저런 사소한 은혜 따윈 금방 잊혀질 테니까.
그러나 적개심과 긴장감도 심력이 소모되는 감정이다. 몇 달간 전투가 없는데 부하들에게 그런 감정을 강요한다고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
심지어 이런 분위기 속에 내년까지 대치만 할 거라고?
“차라리 공세를 펼쳐야 했나.”
지금은 그래도 증원을 받아서 이쪽이 병력은 많다.
그러나 이미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대공도 알고 있다.
당분간 전투가 없을 거라는, 일선 병사들로서는 가장 바라 마지않는 소식이다. 이미 전 부대에 다 퍼졌을 것이 뻔하지.
그런데 싸움이 없을 거라 믿고 안도하고 있는 병사들에게, 그동안 고생하며 요새화해둔 진지를 버리고 다시 공세에 나서라고 명령한다?
그렇지 않아도 낮은 사기가 밑바닥까지 떨어질 것이 뻔하다.
“……할 수 있는 것이 없군.”
대공이 허탈하게 뱉은 말에는 짙은 무력감이 깔려 있었다.
알자스 로렌을 점령한 상태에서 적의 공세를 강요해 방어전을 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저들은 대놓고 독을 풀어놓고 제국군이 자멸할 때까지 친절하게 기다려줄 기세다.
대공은 차라리 저들의 여왕이 뱉은 말이 기만책이고, 라파예트 후작이 그들을 기습해 주리라 기대하고 싶어졌다.
그러면 최소한 배신당한 대공의 부하들이 복수심이라도 불태우며 전의를 되찾을 테니.
……대공 본인이 생각해도 라파예트 후작이 그리 어리석은 자는 아니라서 문제였지.
“그래도 연말까지 공세가 없을 거라는 정보까지 들어온 이상, 보고는 올려야 하지 않을지요…….”
하인리히 공작이 주저하며 한 말에, 대공의 미간이 더욱 구겨졌다.
그러지 않아도 카이저께 직언을 올려서 어렵게 방어전 허가를 받아냈는데, 이 소식이 전해지면 제후들에게 들볶이게 될 카이제린이 대체 뭐라고 할지.
레오폴트 대공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올려야지.”
라파예트 후작을 상대로 한 전술 싸움에서, 레오폴트 대공은 분명히 승리를 거두었다.
초전에는 결국 알자스 로렌을 손에 넣었고, 보급로를 둘러싼 공방에서는 다소 밀리긴 했으나 후작의 함정을 역이용해 도리어 함정에 빠뜨리기까지 했다.
야만족들의 증원군만 아니었다면, 승리는 대공의 것일 터였다.
레오폴트 대공은 분명히 제국의 명장이라 불리기에 부끄럽지 않은 전투를 연이어 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투가 이어지고 전쟁이 지속될수록 모든 상황은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청기사의 압도적인 무위가 보여준 공포와도, 크라프테의 대왕이 이끌던 규율 그 자체를 체현한 듯한 군대의 위압감과도 다른 무언가.
모든 상황이 올가미가 되어 서서히 자신을 옥죄어 오는 것 같은 감각에, 대공은 몸서리치며 한탄했다.
“우리는 여전히 이 전쟁에서 지고 있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