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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혁명에 단두대는 필요없다-105화 (105/258)

105화. 혁명 수호 전쟁 - 변화

프랑지아 동부, 로렌의 도시 낭시.

연이은 보급선 파괴와 처절한 패전으로 엉망진창이 된 제국군의 사기는 증원군의 도착으로도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증원군이 기존에 있던 군대의 영향으로 싸우기도 전에 기세가 엉망이 되었지.

그의 거처에서 올라온 보고서들을 살피던 레오폴트 대공은 노크 소리를 듣고 입을 열었다.

“들어오게.”

들어선 장교는 바로 대공에게 경례를 붙이곤 말했다.

“대공 전하, 본국에서 도착한 명령서입니다!”

대공은 바로 장교가 건네준 명령서를 받아들었다.

받아든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대공은 심호흡을 한 뒤 봉인을 뜯고 명령서를 펼쳤다.

명령서에 적혀 있는 내용은 전선에서 고생 중인 대공과 장병들의 노고를 치하한다는 의례적인 내용으로 시작했지만, 그 안에 담겨 있는 내용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떨리는 눈으로 명령서를 읽던 대공은 전쟁 목표를 변경한다는 내용에서 숨을 삼켰다.

[최종적인 전쟁의 목표를 뤼미에르 함락과 프랑지아 괴뢰정부의 무조건 항복에서 알자스 로렌 지역의 방위와 할양으로 조정한다.

단, 이 사안은 주요 지휘관에게만 전파하고 함구하라.]

그 내용을 읽은 레오폴트 대공은 말없이 명령서를 들어 올려, 눈가를 가렸다.

“대, 대공 전하?”

장교가 당황하는 가운데, 레오폴트 대공은 진심으로 안도하며 입을 열었다.

“카이저께서 우리를 버리지는 않으셨구나.”

대공도 진심으로 전쟁을 바로 멈출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하지는 않았다.

그런 식으로 멈추기엔 이미 너무 많은 것이 투입된 전쟁이고, 그걸 그저 패배로 끝낸다는 것은 카이저에게 막대한 정치적 타격을 줄 테니까.

하지만 카이제린에게 프랑지아 왕위를 주겠다고 프랑지아 정부를 전복시키려면 대체 얼마나 많은 피가 흐를지, 아니 그것이 가능하기나 할지를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베르됭 요새를 돌파하여 뤼미에르를 함락시킨다는 것부터가 현실적이지 않았고, 그나마 알프스 왕국과의 교역로를 차단하려고 했지만, 그마저도 처절한 패전으로 실패해 버렸다.

그래서 대공도 명령체계를 무시해가며 황제에게 직언을 올리는, 큰 부담을 지는 행동을 한 거다.

그러나 전략목표가 이미 점령한 지역의 프랑지아를 협상장으로 이끌어내는 거라면 그나마 할만하다.

그래, 방어전이라면. 카이제린이 프랑지아 왕위를 포기한다면.

최소한 이미 점령한 알자스 로렌을 지켜낸 끝에 이 영토라도 할양받을 수 있다면, 제국도 어떻게든 이 전쟁을 승리로 포장할 수 있다.

일단 주요 지휘관만 알고 함구하라는 것도, 애초부터 전쟁 목표를 그렇게 잡고 싸운다는 건 이미 이 전쟁은 실패했다고 시인하는 것이나 다름없으니 납득할 만하다.

레오폴트 대공은 동쪽으로 몸을 돌려, 허리를 깊이 숙여 보였다.

카이제린을 위한 프랑지아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제국을 피폐하게 만드는 대신, 그나마 현실적인 명령을 내려준 그의 카이저에게 감사하며.

그러나 대공은 그것이 카이저가 아니라 카이제린이 내린 명령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심지어 그 카이제린이 어떻게든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카이저에게조차 비밀로 한 채 대공에게 가해질 압력을 대신 받아낼 생각으로 내린 것이라는 것도.

* * *

브장송 평야 전투가 끝나고 한 달 뒤.

마침내 재정비와 모든 부상병 치료가 끝나자 나는 군대를 발루아와 프랑슈콩테, 제국이 점령한 알자스 로렌 지역의 인근으로 재배치했다.

하지만 레오폴트 대공과 제국군은 상당한 시간이 있었음에도 여전히 알자스 로렌에 주둔한 채 전혀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우리는 지지부진한 대치만을 거듭했다.

저들이 뤼미에르를 함락시키고 황후 세실리아에게 왕관을 바치려면 여름이고 뭐고 당장 공격해야 맞다.

저들은 지난 전투에서 잃은 것과 비슷한 병력을 증원으로 받았고, 우리의 군대는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 양성되고 있으니까.

그럼에도 저들이 진격하지 않는다는 것은 저들이 목표를 바꿨다는 이야기겠지.

그렇게 양측의 이해가 맞아떨어져, 전투 없는 전쟁의 여름이 지나고 있었다.

* * *

발루아, 내가 사령부 겸 임시 거처로 쓰고 있는 저택.

나는 오랜만에 한가롭게 침대에 누워, 내 옆에서 평온한 얼굴로 잠들어 있는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으음…….”

나직한 신음과 함께 침대 위에서 뒤척거리는 움직임에 따라, 새하얀 살결 위로 긴 검은 머리칼이 물결쳤다.

나는 그 광경을 느긋하게 보다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미리 준비해둔 물컵을 가져가 내밀었다.

크리스틴은 조금 몽롱한 검은 눈동자로 그것을 빤히 보더니, 이내 그것을 받아 입에 대었다.

그녀가 물을 마시는 사이, 내가 창가로 걸어가 커튼을 걷자 밝고 따스한 햇볕이 내리쬔다.

등을 돌리자 그 사이 완전히 잠에서 깼는지, 크리스틴은 방금까지는 흐트러져 있던 슈미즈의 옷매무새를 고치고 평소의 차분한 얼굴로 돌아와 나를 보고 있었다.

그런데도 얼굴에 약간의 홍조가 떠올라 있어,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크리스틴.”

“……좋은 아침이에요, 피에르.”

이렇게 서로 인사를 주고받고 있으니, 묘한 충족감이 차오른다.

“아침은 식당에서 드시겠습니까? 아니면-”

크리스틴은 슬며시 시선을 피하면서 답했다.

“여기서요.”

“알겠습니다. 준비시키죠.”

내가 웃으면서 답하자, 크리스틴은 살짝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은근히 부끄러워하는 모습에 더 깊은 만족감이 느껴지는 걸 보니, 확실히 나도 정상은 아니라는 걸 실감했다.

그런데, 그게 또 오히려 좋단 말이지.

어쩌면 크록스가 우려한 대로, 내가 이미 과하게 푹 빠져있는 지도 모르겠다.

* * *

침실로 음식을 가져와서 식사를 하는데, 힘들긴 했는지 크리스틴이 묘하게 평소보다 많이 먹어서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크리스틴은 어제 막 발루아에 방문한 참이다.

정확히는, 삼당의 총재가 전부 발루아에 방문할 때 따라왔지.

총재들은 정부를 대표해 압도적으로 불리한 전투를 결국 승리로 끝내고 알프스 왕국과의 교역로를 지켜낸 공을 치하하고 장병들을 위로하고자 다양한 물품을 가져와 주었다.

군사들의 사기를 유지하고, 지난 전투에서 발생한 심각한 희생을 조금이라도 잊게 해줄 겸.

덕분에 대전투를 치르고도 여름에 대치전을 이어가느라 알게 모르게 지쳐가던 병사들은 마음껏 풍요로운 식사를 맛보고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어쨌거나, 우리는 업무 얘기를 하는 중이었다.

원래라면 어제 나누어야 했을 이야기지만, 어젯밤엔 정신이 없어서.

“그러면 이베리카 반도에 무역항 건설을 시작하는군요.”

“네, 처음 만났을 때는 어째서인지 조금 꺼리는 모양새던데, 당신과 만나고 와서는 바로 받아들이더군요.”

“하하…….”

크리스틴도 크록스의 기색은 제대로 읽은 거군.

“겨울이면 전열함들의 건조가 끝날 거예요. 그에 대비해서 해군도 제대로 양성에 들어갔고요.”

“으음, 이제야 제대로 된 해군입니까…….”

프랑지아는 기사의 왕국이라 불릴 정도로 나름대로 육군 강국이었지만, 해군은 그에 크게 미치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해군이 없냐면 없지는 않지만, 국가의 해군이 크리스틴이 이끄는 상단만도 못한 함대를 가지고 있었으니 말 다 했지.

그러나 막상 노던 연합 왕국 같은 극북의 적대국 때문에 제대로 된 외교나 무역로도 뚫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니, 해군의 필요성이 절실해진 거다.

물론 나와 크리스틴은 어비스 코퍼레이션을 더 경계대상으로 삼고 있지만.

“네. 그렇게 되었죠. 탈레랑 총재는 함대가 구축되는 대로 크라프테 왕국, 그리고 동방 제국과 접촉해보고 싶어 해요.”

“그도 부지런하군요.”

과연 프랑지아의 외교 책임자라 이건가.

크라프테 왕국은 게르마니아 제국 내에서 황제에게 정면으로 거스르고 있는 강력한 군사강국이다.

그렇다고 외교관을 보내자니 제국 한가운데고, 해로는 적성국인 노던 연합 왕국의 해역을 통과해서 가야 하니 접촉할 수는 없었지만…….

강화될 해군으로 노던 연합 왕국을 압박해서 영해를 통과할 수 있게 되면 잘만 하면 우리와 괜찮은 관계가 될 수도 있을 거다.

엘프들의 동방 제국은 드워프들의 알프스 왕국과 함께 교류 대상으로 꼽았었는데, 해상 봉쇄 때문에 접근도 못 해봤고.

어쨌거나, 저게 실현된다면 이제 본격적으로 판이 커지는 거다.

내가 잠시 생각에 잠겨있자, 가만히 나를 바라보던 크리스틴이 슬며시 웃었다.

“그건 그렇고 너무 잘나가시는데요, 피에르. 20대에 원수라니.”

“하하, 그러게나 말입니다.”

나도 모르고 있었는데, 미리 총재들과 작당한 에리스가 갑자기 나에게 원수 계급장을 하사하는 바람에 깜짝 놀랐다.

나는 슬며시, 벽에 걸어둔 내 군복에 붙은 원수 계급장을 바라보았다.

자기는 훈장도 못 받았는데 몹시 부럽다는 얼굴로 나를 보던 데미앙을 떠올리자 묘하게 웃기는군.

어쨌거나, 이걸로 나도 군사 계급으로는 그 청기사를 능가한 건 물론이고 저 레오폴트 대공과 동급이 된 거다.

나는 씩 웃으며 말했다.

“당신 덕분이 큽니다, 크리스틴.”

“……전장에 별 도움은 못 드렸는데요.”

“당신이 아니었으면 애초에 제가 공 세울 기회도 얻기 어려웠을 테고, 당신의 공작이 제국군에 입힌 타격이 아니었다면 증원군이 도착하기도 전에 우리가 무너졌을지도 모르니까요.”

크리스틴은 빤히 나를 보더니 살짝 미소 지었다.

“그렇게 말해주시니, 기쁘네요. 사실 조금은 걱정했었어요. 여왕 폐하는 싫어하실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어쩌면 당신도.”

“아, 그거요.”

확실히 보급품을 오염시켜서 군대를 타격한다는, 군인들은 상상도 못한 발상이었지.

비열하다고, 또는 잔혹하다고 듣기도 한 방법이지만…….

“여왕 폐하는 탓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그런 수단을 또 쓰지 말아 줬으면 한다는 말 정도만 하셨죠.”

“……의외네요.”

처음 만났을 때의 에리스였다면, 아마 직접적으로 반발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지금의 에리스는 자신의 정의로 모든 걸 관철할 수 있다고 믿는 철부지 성녀가 아니라 제대로 된 여왕이다.

“자신의 입장과 영향력, 그리고 우리가 처한 상황을 이해하고 계신 분이신지라.”

크리스틴은 가만히 나를 보다가 다시 물었다.

“그러면 당신은요?”

“저야 뭐.”

-통치자가 전쟁을 결정하고, 전장에서 피 흘리는 대부분은 그저 지배를 받는 이들이죠. 저는 저들도 피해자들이라고 생각해요, 후작님.

에리스는 그렇게 말했지.

과연 성녀라고 불릴 만한, 존경받아 마땅한 나의 여왕이지만.

“글쎄요. 저는 당신이 한 행동이 옳다고, 또는 나쁘다고 단정 지을 수 없습니다.”

그 에리스도 혼자서, 그녀의 가치관만을 가지고는 끝내 실패했다.

에리스의 선함, 크리스틴의 필요악.

이지도르의 평등주의, 발리앙의 능력주의.

제국에 바치는 대공의 충성과, 국가가 아니라 내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나.

결국 무엇이 절대적으로 옳고, 무엇이 절대적으로 그르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그러나 결과는 확실히 알죠. 당신의 행동을 껄끄럽게 여긴 자들조차 당신의 행동으로 인해 큰 도움을 받았고, 승리를 거두었다는 것.”

나는 크리스틴을 똑바로 마주 보며 입을 열었다.

“제가 당신이 그런 일을 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면, 또는 결국 이 나라를 지킬 수 없다고 여기고 포기했다면. 그랬다면 저는 아마 당신에게 해외로 도피하자고 청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런다고 좋게 끝났을까?

나는 라파예트 후작이자 툴루즈 백작인 나를 믿고 따른 이들을 모두 포기하고, 크리스틴은 그녀의 가문과 상단을 포기하고 도피했다면.

돈이야 충분했겠지만, 아무런 정치적 힘도 없고 연고도 없는 외국인의 자산쯤, 별 핑계를 대서라도 압류하는 건 일도 아니다.

설사 아니라 한들 아무것도 남지 않은, 도피뿐인 인생에서 우리가 무슨 가치를 느꼈을까.

“하지만 저는 도피하는 대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서라도 이 나라에 남는 길을 택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결국 내가 나를 따른 이들에게 마땅한 보상을 해주고 프랑지아군의 총사령관이자 원수가 되어, 영웅이라 불리며 지금의 전장에 서 있을 수 있는 것도.

크리스틴이 아키텐을 지키고 루이스에게 물려줄 수 있는 권력을 손에 쥔 것도.

에리스가 마녀로서 처형당하는 대신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여왕이 된 것도.

우리가 이 땅에 남아서 최선을 다했기에 얻어낼 수 있던 결과다.

나는 크리스틴의 손을 잡아, 그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당신이 죄책감을 느끼고, 그런 일을 벌여서 미움받을까 우려하면서도 필요한 일을 해주고 있어서 가능했던 일이죠. 그렇다면, 제가 할 일은 그런 당신을 존중하고 감사하는 겁니다.”

크리스틴은 가만히 나를 바라보더니 천천히 미소 지었다.

“……고마워요.”

나도 그런 크리스틴에게 마주 웃어주며 답했다.

“저야말로.”

처음에는 그저 혁명의 혼란에서 살아남아 무의미한 죽음을 피하고 싶을 뿐이었다.

기껏 또 다른 기회를 얻고도, 청기사보다는 나은 인간이 되고 싶다는 막연한 소망만 있던 삶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나를 따르는 이들을 지키고, 그들에게 합당한 승리와 보상을 안겨주고 싶다.

그저 차악에 불과하다고 여겼던 혁명에서 지킬 만한 가치를 찾았다.

단순한 권력자나 도구가 아니라, 따르기에 합당한 여왕을 모시고 있다. 그 이상에 완전히 공감하지는 못해도 조금이나마 보답받는 모습을 보고 싶다.

우리가 지킨 이 땅에서 크리스틴과 행복을 누리며 괜찮은 삶을 살았노라고,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순간을 꿈꾸고 있다.

그 모든 걸 가능하게 도와준 사람.

내가 회귀해서 제일 먼저 얻은 변화이자 가장 큰 변화에게, 진심을 담아서 말했다.

“여기까지, 저와 함께 와주어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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