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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혁명에 단두대는 필요없다-104화 (104/258)

104화. 혁명 수호 전쟁 - 낭만

전투가 끝나고 4일째.

보통 이 정도면 뒷수습은 끝나야 정상이지만, 한계까지 내몰리도록 싸운 병사들의 상당수가 앓아누웠고 전투 규모가 워낙 커서 우리는 아직까지도 정비 중이었다.

그동안 제국군을 추격했다가 귀환해 포로들을 인계한 크록스의 군대는 잔류하여 우리를 지원하기로 결정했지만, 크록스는 다시 이베리카 반도로 복귀하기로 했다.

나와 크록스가 어비스 코퍼레이션의 지원품을 파괴하고 포르투와 동맹 부족들에게 심각한 타격을 입힌 뒤 반도는 한동안 소강상태긴 하지만, 그렇다고 전쟁 중에 왕이 장기간 부재인 건 문제니까.

아니, 애초에 여기까지 크록스가 직접 와준 것만으로도 놀랄 일이지.

“먼 길을 와주었는데 제대로 접대도 못하고 바로 돌아가게 만들다니, 내가 좀 미안해지는군.”

감사함과 미안함을 담아 말하자 크록스는 언제나처럼 호탕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으하하, 전시라는 것이 그런 것 아니겠나! 온 김에 형제의 얼굴도 보고 프랑지아의 인간들과 안면을 익혔으니 그거면 된 거지!”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군. 어쨌거나, 다시 한번 감사를 표하지. 덕분에 우리는 승리를 거두고 위기를 넘길 수 있었으니, 정부가 줄 보상과는 별개로 개인적인 빚으로 달아두지.”

온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가히 완벽한 타이밍이었으니.

2만의 대병력으로 여기까지 지원 와준 걸 내가 저들의 반도에서 소소한 도움 준 걸로 퉁칠 순 없지.

“오, 형제의 빚이라면 이거 참 수지 맞는구만! 부대는 샨드라에게 맡기고 갈 테니, 적당히 부려먹도록 해.”

“큰 피해 없도록 각별히 신경 쓰지.”

크록스는 내 말이 뭐가 웃기는지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한참을 웃던 크록스는 입을 닫더니, 내 눈치를 살폈다.

……저 근육과 호탕함을 반반 섞어서 빚어낸 듯한 오크가 내 눈치를 본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자 크록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봐, 형제. 내가 조금 실례일 수도 있는 질문을 해도 되나?”

“음? 빚도 졌는데 뭐든 물어보라고.”

크록스는 손을 들어 그의 어금니를 매만지더니 다시 물었다.

“그, 아키텐 백작인가 하는 여자. 믿을 수 있나?”

“엉?”

크리스틴? 수도를 거쳐 오면서 만난 건가?

그런데 반응이 왜 이러지.

“혹시 내 약혼녀가 뭔가 실수라도?”

“아니, 그건 아니야.”

크록스는 바로 부정했다.

“오히려 좋은 제안을 하더군. 이베리카 반도 북부에 새로운 항구를 하나 세우도록 허락하면 필요한 자금은 투자해 주고, 건함기술도 가르쳐줄 테니 지원하고 돌아가는 길에 협의하자고 하더군.”

그러고 보면 원래부터 크록스의 형제들과 프랑지아의 교역은 상당 부분이 아키텐 상단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베리카 반도에 사는 자들은 거의 부족 생활을 했기 때문에 교역항으로 쓸만한 제대로 된 항구는 반도 남단의 포르투뿐이다.

그래서 그동안엔 남부 산맥의 관문을 거쳐 육로 교역을 했는데, 아예 교역항을 새로 만들면 교역을 하기도 더 수월해지겠네.

“좋은 제안 아닌가?”

“좋은 제안인데, 그래서 묻는 거야. 형제의 약혼녀라는 소리는 들었는데, 내가 알기로 인간들은 부부라고 꼭 같은 편이나 사이가 좋은 건 아니라고 알고 있으니까.”

이 오크, 확실히 인간을 잘 알아. 인간들과 같이 지내서 그런가.

“그렇긴 한데, 내가 그대들에게 호의적인 이상 그녀는 믿을 수 있어. 그건 보증하지.”

“으하하! 그대가 그렇게 말한다면 믿도록 하지, 형제!”

크록스는 호탕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나는 나대로 궁금증이 생겼다.

“그런데, 왜 그런 의문을 품은 거지?”

영토에 외국 자본을 들이는 일이긴 하지만 지금 양국 관계상 꽤 좋은 조건 같은데.

지금쯤 아키텐 상단은 정부에서 발주받아 전열함을 비롯한 함대를 한창 건조 중일 테니 조선기술도 제법일 테고.

내가 크록스에 대해 꽤 좋게 말해두었으니 그녀가 크록스에게 적대적으로 굴었을 리도 없는데?

“그대가 내 말을 곡해해서 듣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냄새가 나서.”

“……냄새?”

크리스틴에게선 좋은 향기만 날 텐데.

아니, 이게 아니고.

내가 정신을 차리자, 크록스는 다시 어금니를 매만지더니 입을 열었다.

“친절하게 굴고 생긴 것도 인간 귀족답게 나약하게 생겼는데 지금껏 만나본 상인이라는 족속 중 가장, 아니, 가장 강한 내 심복들만큼이나 위험한 냄새를 풀풀 풍겨.”

오호라.

내가 핫산과 들고 갔던 협정서를 대충 보더니 바로 서명해 버리길래 크록스가 그저 화통하기만 한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라 일종의 육감 같은 걸 따르는 유형이었나.

확실히 크리스틴이라면 귀족보다 더 귀족적이고, 상인보다 더 상인답게 위험하지.

솔직히, 나라도 그녀를 적으로 돌린다고 상상해 보면 무섭기 그지없다.

내가 혼자 미소 짓자 크록스가 형제가 음험한 약혼녀한테 속고 있는 건 아니겠지? 같은 우려를 담은 눈으로 날 봐서 저절로 웃음이 터졌다.

프랑지아 내부에서 나와 크리스틴의 관계는 그냥 관여하면 안 되는 사이 정도로 인식이 굳어져 있는데, 크록스는 프랑지아의 내부 사정을 잘 모르니 나름 신선한 반응이네.

“아,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녀는 적에게만 위험하니까. 나나 그녀나 서로에 대해 알 만큼 알고 있어. 그대에게 한 제안은 확실히 호의 반, 공동의 이득 반에서 나온 거겠지.”

크록스는 조금 묘한 눈으로 나를 보더니 입을 열었다.

“그래. 그대의 반응을 보니 걱정할 필요는 없어 보여. 공연히 형제의 약혼녀를 의심해서 미안했다.”

“아니. 그대가 그만큼 감이 좋은 거겠지.”

크리스틴은 기본적으로 미인이면서 우아한 태도를 두르고 있기도 하고, 본인이 필요할 때면 모를까 불필요하게 경계를 사는 사람이 아니다.

내가 얘기해둔 것도 있으니 분명히 크록스에게도 친절하게 대했을 텐데, 감만으로 그걸 감지하고 경계하는 이 오크가 대단한 거지.

오히려 내 쪽이 안심이다. 이 화통한 형제가 생각 외로 어디 가서 당하고 다닐 오크는 아니라는 걸 깨달았으니까.

“으하하, 그런가? 그러면 형제의 약혼녀가 베푸는 호의는 감사히 받도록 하겠다!”

저들에게 제대로 된 항구가 생기면 교역에도 좋겠지만, 또 모르지. 어쩌면 프랑지아와 이베리카 형제국의 해군이 공동작전을 펴는 날이 올 수도.

“그래, 그 선택에 후회 없을 거야. 나 또한 그대가 보내준 도움을 요긴하게 쓰도록 하지.”

나는 크록스의 거대한 손을 마주 잡으며 악수하고, 오랜만에 만난 이 화통한 오크를 떠나보냈다.

그건 그렇고, 크리스틴 이야기가 나와서 그런지 괜히 그립네.

* * *

브장송 서부 평야 전투로부터 일주일.

12,000에 가까운 게르마니아 제국군 포로들은 주민들이 대피하고 텅 빈 브장송 시가지에서 머무르고 있었다.

제국군의 포로들은 처음에만 해도 벌벌 떨었다.

붙잡힌 침략군에 대한 처우가 어떨지에 대해 심히 우려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러나 전투 직후에는 혁명군도 애초에 탈진해서 그럴 기운조차 없었고, 혁명군이 조금이나마 쉬고 원기를 회복한 뒤엔 이미 포로들에게 가혹행위를 하지 말라는 여왕의 요청이 떨어진 뒤였다.

제국군 포로들은 며칠이 지난 시점에는 가볍게나마 응급처치를 받을 수 있었고, 다시 또 며칠 뒤에는 아예 프랑지아의 성녀왕이 돌아다니며 부상이 심한 이들부터 치료해 주기 시작했다.

물론 우선순위에서 밀려서 시름시름 앓다 죽는 자들이 없진 않았으나 그렇게 일주일을 채워가자, 제국군 포로들의 분위기는 풀리다 못해 별 희한한 광경까지 보이고 있었다.

이미 해가 떨어져, 마력등의 불빛이 비치는 방 안.

“에헤이, 좋게 말할 때 비키지?”

험상궂은 얼굴의 제국군이 눈을 부라리자, 그의 시선을 받은 다른 병사는 슬며시 시선을 피했다.

그 병사는 발에 빨갛게 물든 천을 둘둘 감고 있었다.

“씁, 대답도 안 하고 비키지도 않으면 나가게 도와달라는 거지?”

“나, 나는 제대로 걷지도 못하오.”

“에헤이, 하면 다 돼. 오늘은 이 방 차례잖아. 이 어깨를 보라고. 아주 시뻘겋게 물든 붕대에서 퀴퀴한 냄새가 나고 찝찝하고 따가워서 참을 수가 없거든? 불쌍한 전우에게 양보 좀 해달라고, 친구.”

제국군에게 대충 응급처치를 해준 군인들은 제국군을 이방 저방으로 나누어 놨는데, 처음엔 그게 무슨 의미인지 잘 몰랐던 제국군도 며칠이 지나자 분위기를 파악했다.

대충 부상의 경중에 따라 분류해둔 모양이고, 저들의 성녀왕은 상태가 심한 방부터 돌며 치료를 해주고 돌아가곤 했다.

그걸 눈치챈 탓에 어깨 좀 가볍게 다친 사람이 자기가 먼저 치료받겠다고, 다리를 심하게 다쳐 걷지도 못하는 사람을 쫓아내려고 하는 기가 차는 상황이 생긴 거다.

다리를 다친 병사는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공교롭게도 이 방에는 그와 같은 제후국 출신이 없었다.

당연하다. 애초에 험악하게 생긴 병사도 척 봐서 혼자 노는 만만한 인간에게 들이댄 걸 테니.

다리를 다친 병사는 모두의 외면 속에 억울한 표정이 되었지만, 험악한 병사는 더욱 기세등등해져서 얼굴을 들이밀며 악취 나는 입을 벌려 떠들었다.

“어이, 친구. 그래도 같은 제국군 동지끼리 좋은 일 좀 하지, 꼭 험한 꼴을 봐야 비켜줄 거야?”

모두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집중되어 있는 데도, 제국군 중 누구도 굳이 나서서 귀찮은 일에 끼어드려고 하지 않았다.

애초에 이 방에 있는 사람들은 그래도 좀 부상 정도가 심한 사람들이었으니까.

“그래도 같은 제국군 동지끼리 좋은 일을 강요하시는 걸 보니, 치료 대신 험한 꼴이 필요하신 것 같네요.”

대신 끼어든 것은 피로와 짜증이 묻었음에도 제법 고운 여성의 음성이었다.

“엇?”

“헉!”

“서, 성녀왕.”

기겁하는 제국군의 시선을 받은 장본인, 에리스는 긴 은발머리를 휘날리면서 방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특유의 보랏빛 눈동자로 방금까지 동료를 겁박하던 험악한 남자를 마주했다.

“아, 이건, 그, 오, 오해-”

“제압해 주세요.”

“컥!”

에리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번개처럼 움직인 프레데릭 드 보몽 경은 험악한 제국군을 그대로 쓰러뜨렸다.

“이, 이익- 악!”

저도 모르게 오기로 반항하려고 들던 험악한 남자는 고개를 쳐들려다 그대로 보몽 경의 발에 머리가 밟혀서 차가운 바닥에 처박혔다.

“으, 으으읍-!”

모두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가운데, 에리스는 짐짓 상냥한 얼굴로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런 분이 더는 없을 거라 믿을게요. 어차피 제가 보면 다 아니까, 이런 작자가 있다면 자진해서 나가주시겠어요? ……아프기 싫으면.”

침묵이 흐르자, 에리스는 방 안의 제국군 부상자들을 한 번씩 슥 훑고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싱긋 웃었다.

“좋아요. 그러면, 시작하죠. 아, 그 전에.”

에리스는 보몽 경의 밑에 깔려서 바르작거리고 있는 남자를 싸늘한 눈으로 내려다보더니 말했다.

“프랑- 아니 보몽 경, 그분은 좀 치워주시겠어요?”

“분부대로, 폐하.”

“이, 이익! 이거 놔- 아, 아니, 놔주세- 으앗-!”

방금까지만 해도 강한 척하던 남자가 보몽 경의 압도적인 힘 앞에 무력하게 질질 끌려 나가자, 에리스는 조용히 자리에 무릎 꿇고 앉아서 눈을 감았다.

제국군의 부상병들이 멍하니 보고 있는 가운데, 에리스에게서부터 뻗어 나온 빛이 방 전체를 뒤덮었다.

방 안의 부상병 모두가 상처 부위가 간질거리고, 통증이 사라지고, 몸에 조금이나마 활력이 돌아오는 과정을 생생하게 느꼈다.

찬란한 빛에 금색으로 물든 채 물결치던 에리스의 머리칼이 은빛으로 돌아오는 몽환적인 광경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부상병들은 한발 늦게 반응했다.

“오, 오오……!”

“기적…….”

“서, 성녀…….”

멀쩡해진 몸이 된 제국군들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머리를 조아리는 광경을 보며, 에리스는 익숙하다는 듯이 일어나서 로브를 탁탁 털고는 입을 열었다.

“멀쩡해진 것 같아도 제대로 쉬지 않으면 덧날 수 있어요. 무리는 금물이고, 싸우지 마세요. 그럼.”

“자, 잠시만……!”

에리스가 방에서 나가려고 하는데 방금까지 험악한 얼굴의 병사에게 협박받고 있던 남자가 그녀를 부르고, 이내 무어라고 외쳤다.

그 말을 들은 에리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피로한 얼굴로나마 미소지어 주었다.

* * *

“이제 괜찮아요.”

에리스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보몽 경이 비켜 서자, 차갑고 더러운 복도에 머리를 박고 있던 남자는 잽싸게 머리를 조아리며 비굴하게 떠들었다.

“제, 제가 잘못했습니다. 여왕 폐하. 정말로 사소한 오해-”

“네, 거기까지 들었으면 되었고요.”

“예, 예?”

남자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고, 에리스가 빛으로 만든 채찍을 손에 쥔 채 쫙- 당기는 걸 보곤 기겁했다.

“일단 좀 맞죠.”

“어, 어어, 저, 저는 부상병입니- 어억!”

“알아요! 이건 치료니까!”

“악! 이게 무슨 치료-”

“당신은 몸보다 마음이 더 급하니까 이렇게 치료하는 쪽이 더 효과가 좋다고요!”

“그게 대체 무슨, 억!”

한동안 채찍이 바람을 가르는 호쾌한 소리와 철썩대는 찰진 소리, 그리고 억억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아악!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어요! 제발 용서를! 두 번 다시 그런 짓을 하지 않겠습니다!”

남자가 눈물 콧물을 쏟으며 싹싹 빌기까지 채 몇 분도 걸리지 않았다.

에리스는 거칠어진 숨을 몰아쉬며 채찍을 거두었다.

“후우, 후우. 거봐요, 잘 듣네.”

남자는 영문 모를 여왕의 말에 눈물 콧물을 쏟다가, 문뜩 자신의 어깨를 만져보았다.

“나, 나았어?”

“원래 방으로 가시고, 전파하세요. 당신 같은 짓을 하면 치료를 이런 식으로 당하니까 하지 말라고.”

“아, 아, 알겠습니다!”

남자가 빠르게 달아나버리자, 보몽 경이 입을 열었다.

“괜찮으십니까, 폐하?

“괜찮아요, 괜찮아요. 이래 보여도 어느 나쁜 백작님으로 검증된 방법이라고요.”

“그냥 스트레스 해소 아니고?”

에리스는 갑작스럽게 끼어든 말에 등을 돌려, 이내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웃었다.

“들켰네.”

끼어든 장본인, 피에르 드 라파예트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안색하고는. 오늘은 그쯤 하시지요, 폐하?”

“그러지 않아도 그러려고 했어요.”

에리스는 가볍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피에르 쪽으로 다가오더니 물었다.

“그 말 하려고 오신 거예요?”

피에르는 보고서로 보이는 서류를 들어 올려, 흔들어 보였다.

“좀 어이가 없어서요. 하루에 수백 명 단위로 치료? 여왕 폐하, 당신은 신이 아닙니다. 혁명군까지는 제가 함부로 말릴 수 없었지만, 제국군까지 이렇게 해가며 치료해야 합니까?”

에리스는 천천히 걷다가, 피에르의 앞까지 도달해 올려다보며 말했다.

“지금은 어떻게든 고칠 수 있는 상처가, 몇 주만 지나면 평생 감당할 장애로 남아요.”

“그래봐야 적입니다. 저들은 침략의 대가를 치르는 거죠.”

에리스는 슬며시 웃으며 되물었다.

“후작님, 저들이 전쟁을 결정했나요?”

“……아닙니다.”

“그러면, 저들 중 자의로 전쟁터로 온 사람은 몇이나 될까요?”

“…….”

“통치자가 전쟁을 결정하고, 전장에서 피 흘리는 대부분은 그저 지배를 받는 이들이죠. 저는 저들도 피해자들이라고 생각해요, 후작님.”

“혁명군은 압제자들의 폭거를 참지 않고 일어났기에 혁명군입니다, 폐하. 복종하는 저들과 달리요.”

“그리고 프랑지아에는 저들과 달리 혁명이 일어날 수 있는 사상이 퍼지고, 혁명군이 승리할 수 있는 상황이 조성되어 있었죠. 저들과 우리가 다른 건 그뿐이에요.”

피에르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말했다.

“당신은 프랑지아인의 여왕입니다, 폐하.”

“맞아요, 후작님. 제게 최우선은 프랑지아에요. 하지만, 당장 손을 뻗으면 구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가만히 있어선 성녀라고 불릴 자격은 없을 것 같네요.”

피에르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당신의 건강을 걱정하는 겁니다. 전투부터 지금까지, 제대로 쉬기는 하셨나요?”

“이제 얼마 안 남았으니, 끝내면 푹 쉴게요. 아, 참.”

에리스는 웃으면서 로브 품에서 무언가가 빼곡하게 적힌 종이를 꺼내서, 피에르에게 건네주었다.

“이건 뭡니까, 폐하?”

“전향을 원하는 분들이요.”

피에르는 리스트를 휙휙 넘겨보더니 답했다.

“……전향. 이게? 다? 천 명은 되어 보입니다만.”

에리스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연고가 없어서 전쟁터로 팔려온 이들, 삼남이나 사남이라 집에서 뭐 건질 것도 없어 전쟁터에 온 이들, 혁명군과 지긋지긋해서 더는 싸우기 싫은 이들, 그리고, 음…….”

에리스는 이리저리 눈을 돌리더니 덧붙였다.

“저를 섬기고 싶다는 이들부터 혁명군의 포로 취급이 제국군의 군인 취급보다 낫다는 사람들까지. 전부 혁명군에 붙겠다네요.”

“……허.”

에리스는 슬며시 고개를 기울이며 웃었다.

“어떠신가요? 저들도 기회만 있으면 우리와 같은 일을 할 수 있다는 생각, 드시지 않으시나요?”

“……포로가 그저 당장 살고 싶거나 더 편하기 위해서, 또는. 흠, 첩자일 수도 있죠.”

에리스는 슬며시 미간을 찌푸리더니 뚱한 얼굴로 말했다.

“쫌생이 의심병 환자.”

“그게 제 임무니까요. 저는 지휘관이고, 저들은 제가 의심하고 효율적으로 처리해야 할 적이니까. 그래도…….”

피에르는 씩 웃으며 덧붙였다.

“좋습니다, 폐하. 이 정도까지 말씀하셨으니 저도 생각을 좀 달리해보죠.”

“저들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라는 거요?”

“……뭐, 제국군을 흔드는 방법으로서는 활용할 수 있어 보여서 말입니다.”

에리스는 결국 쓴웃음을 지었다.

“낭만이 없으세요.”

피에르도 쓴웃음을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건 폐하께 맡기겠습니다. 저는 그보단 당장, 폐하를 쉴 곳으로 모셔다드려야겠군요. 물론 선택권은 없습니다.”

에리스는 쿡 웃곤 피에르에게 손을 맡기며 답했다.

“네, 그럼 그건 당신에게 맡길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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