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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혁명에 단두대는 필요없다-102화 (102/258)

102화. 혁명 수호 전쟁 - 레오폴트 대공 (3)

[라파예트, 나의 형제여! 이 크록스가 약속을 지키러 왔노라!]

마력에 가득 차 평야를 쩌렁쩌렁하게 울린 외침은 전장의 모든 고함과 소음마저 뒤덮어버렸다.

그러나 그렇게 들려온 것은 다소 어색한 억양의 중앙대륙 공용어.

순간적으로 고요해진 전장에서 크록스의 외침이 뜻하는 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모두가 정지한 순간, 피에르 드 라파예트의 외침이 다시 울려 퍼졌다.

[혁명군, 증원군이 왔다! 적들을 몰아붙여라!]

그제야 양측 군사들의 희비가 엇갈렸다.

절망적인 전황에 증원군이 도착했다는 소식에 기세를 올리는 프랑지아군.

분명히 유리함에도 불구하고 악착같이 버티는 적을 보며 기가 질리고 있던 와중에 절망적인 소식을 듣고 완전히 혼란에 빠진 제국군.

“대, 대공 전하. 저들은 프랑지아군이 아닙니다! 야만족입니다! 2만은 족히 넘어 보입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후사르의 보고에, 레오폴트 대공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시선을 돌려 북서쪽을 바라보았다.

대공은 들어 올린 망원경을 통해 빠른 속도로 평야를 달리며 접근해오는 오크의 군세를 볼 수 있었다.

몇 번이고 패주하며 한계까지 공세를 퍼붓다가 완전히 기진맥진한 채, 빠르게 가까워지는 오크들을 보고 어쩔 줄을 몰라 완전히 동요하고 있는 군힐드 공작의 군세도.

“이교도 야만족이, 저들을 도우러 왔다고…….”

믿고 싶지 않은 상황에 대공이 내뱉은 말에는 현실감이 없었다.

이 순간 레오폴트 대공의 머릿속에 떠오른 결론은 단 하나였다.

이 전투는 패배했다.

그의 손에는 어떤 패도 남지 않았다.

라파예트 후작의 군대가 무너져 내리는 것만을 유일한 희망으로 삼은 채 악과 깡으로 버티고 있던 제국군은 상상도 못한 증원군의 존재에 완전히 전의를 잃었다.

후퇴해야 하나?

어디로?

라파예트 후작과 혁명군을 함정에 빠트리기 위해, 이미 무너져 도움만을 갈구하고 있었을 바덴 백작과 점령군을 단념했다.

제 손으로 보급선을 포기하고 단기 결전이라는 도박수를 던졌고, 실패했다.

알자스와 로렌이 멀쩡할지 어떨지도 모르는 상황에 후퇴한다고 해도 의미가 있나?

이런 패배를, 감당할 수 있는가?

대공은 저도 모르게 허리춤에 차고 있던 권총을 잡았다.

차라리, 여기서.

“대공 전하!”

“어찌해야 합니까, 대공 전하!”

대공의 상념은 절박하게 그를 부르는 부하들에 의해 깨어졌다.

그들의 눈에 가득 찬 절망과 공포, 그리고 대공에게 어떻게든 답을 갈구하는 절박함이 보였다.

대공은 그 광경을 보고서야 이를 악물었다.

그의 부하들 모두에 대한 책임을 내던지고 도피하려 들다니.

아직은 아니다.

대공은 빠르게 시선을 돌렸고-

마치 기병처럼 평야를 질주하다 공중으로 뛰어오른 오크가 군힐드 공작의 보병대 한가운데 떨어지는 광경을 보았다.

여러 명을 동시에 자빠트리고 거대한 도끼를 휘두르는 덩치 큰 근육질 오크의 기세에 완전히 혼란에 빠진 전열보병들에게 다른 오크들이 돌격해오는 광경도.

대공이 조금만 더 정신줄을 놓고 있다간 본대까지 완전히 휩쓸리고 만다.

“전면 철수하라! 목적지는 알자스다!”

“예, 옛!”

“살아남은 기병대를 전부 투입해서 적들의 추격을 조금이라도 저지하라!”

사실상 다른 병력들 대신 죽으라는 명령에-

“대공 전하의 명을 받듭니다!”

기병전에서 패배하고 간신히 목숨만 건졌던 기병 장교는 주저하지 않고 답하고 말을 내달렸다.

지휘 깃발이 정신없이 흔들리며 퇴각 신호를 보내고, 마침내 거의 승리 직전까지 다가갔던 제국군이 뒤돌아 정신없이 달리기 시작하자.

그들이 메우고 있던 평야에 남은 건 무수한 시체들뿐이었다.

레오폴트 대공은 그 참혹한 전장을 바라보다가, 애써 시선을 돌려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 * *

“우리의 승리입니다!”

“이겼다! 와아아아!”

모두가 환호하고 안도하는 가운데, 나도 가쁜 숨을 몰아쉬며 검을 대충 떨어트린 채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피로 더럽혀진 흙바닥이지만 지금은 귀족의 체통이고 뭐고 없다.

비 오듯 흐르는 땀 때문에 눈을 뜨고 있기도 힘들고, 그저 죽을 듯이 힘들다.

“와…….”

군사들도 나와 별반 다르지 않아서 다들 그 자리에 주저앉은 채 크록스의 군대가 군힐드 공작의 군대를 측면에서 강타해 박살 내고 있는 광경을 보고 있었다.

선두에서 크록스와 오크들이 기병대처럼 뛰어들고, 그 뒤를 따라 인간과 고블린으로 구성된 혼성부대가 검과 머스켓을 들고 따른다.

그 이색적인 광경에 혁명군 모두가 흥미로운 얼굴로 지켜보고 있다.

군힐드 공작의 군세가 혼비백산하기 시작하자, 대공의 군대도 바로 후퇴 신호를 올렸다.

잠시 뒤, 군힐드 공작의 군세가 완전히 산산조각 나 패퇴하기 시작하고서야 익숙한 오크가 나에게로 다가왔다.

빤히 적들을 박살 내는 것을 실시간으로 봤는데도 불구하고 거대한 덩치와 위압적인 근육 덕분에 혁명군이 저도 모르게 주춤거리며 물러난다.

크록스는 그 모습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고 나에게로 다가와, 호탕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으하하하, 형제여! 꼴이 말이 아니군.”

“하하…… 부끄럽네.”

크록스가 내민 손을 잡자, 그는 아주 가볍게 나를 일으켜 세웠다.

“올 줄은 알고 있었지만…….”

나는 크록스를 올려다보며 씩 웃었다.

“너무 시기적절하게 와주어서 큰 빚을 졌군.”

“으하하, 왕으로서 한 약조는 당연히 지켜야지!”

크록스는 왕으로서 나에게 약조를 했다. 내가 준 도움에 상응하는 도움을 주겠노라고.

당장 시간은 벌어야 하는데 압도적인 전력 차를 좁힐 병력은 날 곳이 없으니, 크록스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한 거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렇게 빠르게 와줄 거라는 기대는 못했는데.”

당장 이베리카 반도에서도 분쟁 중인데 맨입으로 도와달라고 할 수는 없고, 신뢰할 수 없는 야만족의 군대를 프랑지아에 들일 수 없다고 반발하는 자들도 많았다.

우리도 나름대로 보답을 약속하고 저들을 국경에 들이기 위한 조율을 해야 했는데, 정작 나는 총사령관이라서 당장 전장에 나서느라 그걸 할 수가 없었으니까.

크록스는 손으로 송곳니를 매만지더니 답했다.

“탈레랑인가 하는 그 자가 교섭 솜씨가 제법이더군. 우리도 만족할 만한 보상을 받기로 했으니 너무 신경 쓰지 말게.”

“그건 다행이군.”

야만족의 군대를 프랑지아에 들일 수 없다고 반발하던 자들은 크리스틴이 무마해 준 모양이고, 아무래도 탈레랑은 역시나 이번에도 이들이 만족할만한 조건을 잘 이끌어낸 것 같네.

“보아하니 그대의 군대는 기진맥진한 것 같으니, 추격은 우리가 맡도록 하겠다.”

“부탁하지. ……다시 한번 감사를 표한다.”

이들 덕분에 나도 알프스 왕국과의 교역로를 포기하는 대신 이곳에서 버틴다는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평야에서 5만으로 레오폴트 대공의 9만에 맞선다는 건 꽤 무모한 결정이지만, 크록스의 군대가 오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으하하하! 형제에게 빚을 갚고 백성들의 배를 불릴 수 있다면 남는 장사 아닌가!”

크록스는 호탕하게 웃으며 내 등을 탕탕 치더니 그대로 쿵쿵거리며 달려가 버렸다.

혁명군이 입을 헤 벌린 채 그 뒷모습을 쳐다보는 광경을 보자니 조금 재미있네.

어쨌거나, 이걸로 프랑지아 내에 남아있던 저들에 대한 편견과 적개심도 많이 희석되겠지.

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아직도 저릿저릿한 몸을 풀어주고, 시선을 돌렸다.

결국은 승리했다. 절대적인 열세에서 레오폴트 대공의 압도적인 병력에 맞서, 크록스가 도달할 때까지 버텨냈다.

그러나.

나는 주저앉아 쉬고 있는 내 군사들에게서 시선을 돌려, 평야를 가득 뒤덮은 시체들을 바라보았다.

결국, 이 전투는 양군 모두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고작 제국의 황후라는 한 개인의 권력욕이 부른 상처라기에는 지나치게 깊고도 거대한 상처를.

* * *

브장송 서부 평야에서 펼쳐진 결전의 결과는 참혹했다.

프랑지아군은 5만의 병력 중 17,000의 사상자를 냈다.

게르마니아 제국군은 9만의 병력 중 26,000의 사상자를 내고 12,000명이 포로로 잡히는 참패를 당했다.

그러나 제국군의 손실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전장에서도 엄청난 손실을 냈지만, 그렇지 않아도 보급로가 차단되어 부족하던 보급품을 무질서한 후퇴 과정에서 챙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전투 후반에 도착해 쌩쌩한 크록스의 형제들은 미약한 제국군 기병대의 저항을 금세 분쇄해버렸고, 알자스까지 물러나는 동안 굶주리고 지치고, 다친 제국군은 수도 없이 낙오했다.

“……4만, 4만이라고.”

결국 9만의 군사 중 알자스 근방까지 물러나는데 성공한 병력은 고작해야 4만에 불과하다.

“송구합니다, 대공 전하.”

레오폴트 대공은 멍한 눈을 들어 올려 금방이라도 비가 올 것처럼 우중충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던진 도박은 완전히 실패했다.

도박.

군사지휘관으로서 군사들의 생명을 걸고 모험을 벌인 대가로 잃어버린 부하들의 숫자가 5만.

대공은 감정을 최대한 억누른 채 애써 담담하게 말했다.

“……조금이라도 군사들의 태세를 정비해보게. 라파예트 후작의 군대도 추격할 여력은 없겠지만, 어쩌면 야만족들과 미르보 백작의 군세에게 협공당하는 사태가 올 수도 있으니.”

그렇게 지시하는 대공도 그렇게 되면 완전히 끝장이라는 것을 알았다.

지시받는 하인리히 공작도, 지난 전투의 부상으로 머리에 붕대를 감고 있는 군힐드 공작도 완전히 엉망진창인 패잔병들에게 정비를 명한다고 잘되지 않으리란 것은 알았다.

“……알겠습니다, 대공 전하.”

그럼에도 하인리히 공작은 고개를 숙여 보이고 맡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움직였다.

레오폴트 대공이 조용히 손을 뻗어 허리춤에 있는 권총을 다시 매만지고 있자, 군힐드 공작이 희망에 찬 목소리를 냈다.

“대공 전하, 전령입니다!”

대공이 고개를 들자 저 멀리서 말을 달려오고 있는 후사르가 보였다.

최소한, 바덴 백작이 전령을 보낼 정도의 여력은 있었던 모양이군.

대공은 내심 마음의 준비를 하며 몸가짐을 가다듬고, 전령의 당도를 기다렸다.

그가 보급로를 포기하고 라파예트 후작의 군대를 친 시점에, 바덴 백작은 미르보 백작의 혁명군을 패퇴시킬 방법을 잃었을 터다.

문제는 미르보 백작이 어느 정도의 군대를 온존해서 그들의 길목을 가로막았을지, 그리고 야만족의 군대는 아직까지 그들의 뒤를 쫓고 있을지다.

“대공 전하, 바덴 백작의 전언입니다!”

대공은 마른침을 삼키며 전령이 들고 온 종이를 펼쳐보았으나, 전령이 들고 온 소식은 그의 예상을 한참 넘어선 것이었다.

“……미르보 백작이 후퇴했다고?”

군힐드 공작과 지휘관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레오폴트 대공은 미간을 구겼다.

바덴 백작은 정신 못 차리고 두들겨 맞고 있었을 테고 증원도 없는데 여기서 물러났다고? 미르보 백작이 그럴 이유가?

“어떻게 된 거지?”

“본국과 노던 연합 왕국에서 5만의 증원이 도착했습니다, 대공 전하.”

“오오……!”

“프랑지아 반란군의 괴뢰정부를 전복시키기 위해 카이제린께서 모집해서 보내주신 증원군입니다. 미르보 백작은 메츠에 공세를 펼치다가 저들이 도착하자마자 후퇴했습니다.”

“오오, 감축 드리옵니다, 대공 전하!”

지휘관들이 기뻐하는 가운데, 대공은 헛웃음을 흘렸다.

12만도 제후들의 반발을 무릅써가며 동원하고 차출한 군대인데, 여기서 외국에까지 손을 벌려가며 다시 또 5만?

이걸 위해 제국은 얼마나 비싼 대가를 치른 거지?

카이제린은 대체 뭘 포기해서 저들을 보내주었단 말인가?

대공은 그 긴 시간 제국을 위해 헌신해온, 카이저를 보좌해온 카이제린을 제국을 위한 존재라고 여겼다.

그러나, 정말로 그러한가?

“이러면 다시 한번 기회가 있습니다!”

더할 나위 없이 기뻐하는 지휘관들의 외침에, 레오폴트 대공은 길바닥에 엉망진창으로 주저앉은 채 휴식을 취하고 있는 그의 군대를 돌아보았다.

저들은 이미 만신창이가 되었는데, 그가 등지고 떠난 평야를 뒤덮다시피 했던 부하들의 시체들이 지워지지 않는데.

여기서 다시 저들을 전장으로 내몰아 싸우라고?

그를 끝까지 믿고 군을 맡겨 제국의 영웅으로 세워준 그의 카이저는, 정녕 이것이 제국을 위한 전쟁이라고 여기시는 것인가?

-또다시 전쟁이 터진다면 양쪽 모두 끝을 봐야 합니다. 제국의 명분은 이미 흔들렸는데, 황후의 야망을 위해 제국이 흔들릴지도 모르는 전쟁을 해야만 합니까?

라파예트 후작에게 들었던 말이 비수처럼 대공의 가슴을 찔렀다.

“……카이저, 나의 카이저시여.”

대공은 나직하게 답을 구했으나, 머나먼 제국의 심장부에 있을 카이저의 답은 없다.

대공은 지휘관들의 눈에 담긴 희망을 보았다.

비록 예기치 않은 원군으로 인해 패배하기는 했으나, 저 라파예트 후작을 궁지로 몰아넣었던 대공이 이번에야말로 그들을 승리로 이끌어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그의 군사들의 눈에 서린 절망을 보았다.

명예도, 기세도 잃은 채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만을 갈구하는 패배감을.

거짓된 희망의 빛과 절망의 어둠이 뒤섞여, 검고 질척질척한 색으로 대공의 가슴을 칠해나갔다.

그 깊고 어두운, 질식하고 말 것 같은 감각 속에.

군인으로서 품었던 충성과 신념은 검게 빛바래고,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은 피로만이 남았다.

차라리 카이저가 그의 실패를 꾸짖고 그를 벌하며 직위를 해제해주기를 갈망했다.

그러나.

-잘못된 길임을 알고도 맹목적으로 따른다. 그것이 정녕 지키는 길입니까, 대공 전하.

-희생된 군사들을 애도할지라도, 군인이란 무릇 반드시 지켜야만 할 것을 위해 싸우는 법. 카이저께서 위험한 길을 가신다면, 나는 기꺼이 그분의 검이 되어 그 길을 열 뿐이오.

그렇게 말했다. 군인들이 희생될지라도, 그것이 카이저의 뜻이라면 따르노라고.

그 스스로가 내뱉은 말이 사슬이 되었다.

카이저에게 승리를 바치기 위해 그가 건 판돈으로 허무하게 소모되어, 생명을 잃은 군사들의 무게가 족쇄가 되었다.

그에겐 도피할 자유도, 책임을 내려놓을 자격도 없다.

“……방어전을, 준비하지.”

긴 침묵 끝에 대공이 내뱉은 음성은 그의 칠흑 같은 심상을 닮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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