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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혁명에 단두대는 필요없다-98화 (98/258)

98화. 혁명 수호 전쟁 - 수 싸움

광장을 가득 메운 이들이 마녀라는 날이 선 비난을 퍼붓는다.

적의로 가득 찬 눈초리가 몸을 찌르는 듯했다.

에리스는 무거운 족쇄를 차고 비척비척 걸으면서 온갖 악의를 감당해야 했다.

도저히 지워지지 않는 피비린내가 풍겨오는 단두대로 향하는 내내.

자신에게 온갖 비방을 퍼붓는 이들이 원망스럽지는 않았다.

다만 서글프다고 느꼈다.

신성 교국이 제안한 성녀 자리를 거부한 것이 이런 식으로 돌아올 줄 알았더라면, 받아들였을까?

설사 그렇다 한들…….

멍하니 생각하는 와중에, 눈앞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누구지?

광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과는 확연한 이질감이 느껴지는 처음 보는 사람이, 수염을 기른 남자가 쓴웃음을 짓고 있다.

처음 보는데, 이 사람을 알고 있다.

아니, 처음 본 것이 맞는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남자가 손을 뻗어 에리스의 이마를 톡 쳤고-

“……루이 오라버-”

에리스는 그대로 꿈의 밑바닥으로 잠겨 들었다.

* * *

잠에서 깨어난 에리스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교국에 와서 성녀가 되라는 제안을 거부했었지.

당장 환란으로 가득한 프랑지아를 떠나 교국을 위해 이용당하는 것은 내키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주교님. 자살한 사람은 정말 지옥에서 고통받는 길밖에 없나요?

-물론입니다, 성녀 후보님. 생명을 부여해 주신 신의 뜻을 정면으로 거스른 자는 영겁의 시간 동안 고통받으며 그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광신을 담아 답하는 주교를 따라가고 싶지 않았다.

잘난 듯이 신의 뜻을 말하는 이들에게 굴복하고 싶지 않아서, 마지막까지 신이 주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기원이라 주장하다 단두대로 끌려갔다.

그래서-

아니, 자신은 성녀로 인정받았다.

저런 대화는 주고받은 적이 없다.

결국, 어머니를 구하지 못한 이 힘도 신께서 내려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라파예트 후작님이…….

에리스는 머리가 뿌연 안개로 감싸인 것 같은 감각 속에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 순간, 방 밖에서 들려온 시녀 제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침하셨습니까, 여왕 폐하?”

그 목소리가 머릿속에 낀 탁한 안개를 날려버렸다.

급격하게 돌아오는 현실감 속에, 에리스는 몇 번 눈을 깜빡이고 입을 열었다.

라파예트 후작님을 만나본 적도 없다니, 그런 생각은 왜 들었을까?

“응, 일어났어.”

“오늘은 좀 어떠세요, 폐하?”

세숫물이 담긴 대야를 들고 온 제니의 물음에, 에리스는 활짝 웃으며 답했다.

“무척 좋은 것 같아.”

에리스는 그러면서 손을 펼쳐 보였고, 방 전체를 뒤덮을 듯한 빛이 퍼졌다.

“앗, 힘쓰시면 안 돼요!”

“아하하. 괜찮아, 이 정도는. 그냥 시험 삼아 조금 써본 것뿐인걸.”

에리스는 당황하는 제니에게 웃으면서 답했다.

기분 탓인지, 신성력은 전보다도 더 강해진 것 같다.

라파예트 후작님 덕분에 보름 넘게 푹 쉬며 요양했으니 당연하지.

아니, 그런 문제가 아니라.

25살까지 계속 늘어난다는 걸 알고 있다.

“……어라?”

에리스는 슬며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알고 있지?

* * *

여름의 도래를 눈앞에 둔 시점, 베르됭의 요새.

어제 레오폴트 대공의 군대가 낭시에서 출진했다는 보고를 받고, 나는 바로 군사회의를 소집했다.

“결국 올 것이 왔군.”

나는 긴장감이 가득한 지휘관들을 보며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휘유- 그렇게 털리고 보급품 사고까지 당했는데도 결국은 봄이 끝나기 전에 공격해오는군요.”

“적장이지만 집념 하나는 알아줘야겠습니다.”

제롬 모렐과 루이 드제가 각각 한마디씩 했다.

“출진한 적 병력은 9만가량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참모장 베르테르의 보고에, 나는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답했다.

“제법 줄었군.”

당초 제국이 동원한 병력이 12만. 그중 지난 메츠-모젤 전투에서 손실된 병력을 감안하더라도 많이 적은데.

“예. 후방 점령지를 관리하고 수비할 병력과 보급선을 지킬 숫자를 감안해도 꽤 줄었습니다.”

군사 보급품 오염이라는 수단에 대해서는 우리 측 지휘관들도 기겁했고, 솔직히 나도 크리스틴이 뭔가 한다는 걸 알았지, 저런 건 줄은 몰랐지만…….

“……아키텐 백작의 공이지.”

“부정할 수 없군요.”

지휘관들도 결국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병력은 뤼미에르에서 증원을 받아 6만이다. 다들 알고 있겠지만 이젠 더 이상 물러나는 식의 지연전은 불가능하다. 어떤 식으로든 여기서 적들을 막아내야 한다.”

“알겠습니다, 후작 각하!”

방어전에 베르됭 요새도 있겠다, 이만하면 충분히 해볼 만하지.

“자, 그럼 요새 방어는…….”

내 시선은 자연스럽게 데미앙으로 향했고, 그는 찔끔하며 입을 열었다.

“후, 후작 각하. 이번엔 병력 좀 넉넉하게-”

엄살은, 요새에는 원래 근무하는 수비병도 있는데.

그렇게 생각한 순간, 장교가 들어섰다.

“회의 중에 실례합니다! 급한 보고가 있습니다!”

“무슨 일이지?”

“제국군이 남하하고 있다고 합니다!”

“남하라고? 이곳으로 오는 게 아니라?”

수도 뤼미에르로 진격하려면 당연히 서진해야 하는데, 남하라니.

병력이고 뭐고 텅 비긴 했겠지만 프랑지아 남부는 인구도 대도시도 적은, 상대적으로 중요도가 덜한 영토다.

제국은 무리하게 병력을 동원했으니 단기 결전을 노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나는 지도를 노려보다가 뒤늦게 대공의 의도를 깨달았다.

“……알프스 왕국과의 교역로를 차단하려는 건가?”

“헛.”

베르테르가 침음을 삼켰다.

혁명 이전부터 기사들에 의존해오고 화병기를 평가 절하한 덕분에, 프랑지아에는 전문적인 총기 생산 장인이 부족하다.

일부 도시 병력이나 쓰는 병기를 소규모로 생산하느니 그냥 수입하는 쪽이 싸게 먹히니까.

혁명 이후에야 뒤늦게 양성하기 시작했지만, 아직 국산 총기류는 품질도 생산량도 많이 떨어지는 실정이다.

그래서 어비스 코퍼레이션과의 적대관계로 거래가 끊긴 우리는 총기를 수급하기가 굉장히 어려웠고, 알프스 왕국과의 교역에 목을 맨 거였는데…….

저 교역로가 차단당하는 순간, 우리의 장비 확보는 기껏 벌어들인 시간이 무색하게 급감하겠지.

“이건 한 방 먹었네.”

그 많은 병력을 들고 지연전에 당하면서 본인이 받고 있는 정치적 압력도 적지 않을 텐데, 조급하게 굴 줄 알았더니 여기서 오히려 이런 식으로 움직인다고?

남부 지역은 당연히 주민 대피고 뭐고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애초에 굳이 수도가 아니라 남부로 진격할 거라는 걸 상정해본 적이 없으니까.

과연 레오폴트 대공이라고 할지, 내 의도대로 끌려만 다니지는 않겠다는 건가.

“방어계획은 폐기한다. 어쩔 수 없이, 회전을 벌일 수밖에 없겠군.”

“하지만 후작 각하. 그것이 바로 저들이 원하는 일일 거라 여겨집니다.”

루이 드제의 지적은 지당하다. 레오폴트 대공이 가장 기대하는 것이 우리가 회전을 거는 것이겠지만…….

“하지만 가만히 앉아서 남부가 유린당하고 장비 확보가 틀어 막히게 내버려 두면 기껏 지연전을 벌인 의미를 전부 잃는다.”

우리에게 별짓을 다 당했으니, 적들도 독이 바짝 올랐을 터다.

장비 수입이 끊기는 것도 심각한 문제지만, 저들을 그냥 남부로 보냈다간 대공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프랑지아 남부는 초토화 당하겠지.

결국 우리가 지연전을 벌인 이유는 프랑지아를 지키고 병력을 확보할 시간을 벌기 위함이었지, 우리 병력을 온존하기 위함이 아니었으니 그렇게 되어서야 주객전도다.

6만과 9만의 회전이라…….

나는 천천히 시선을 돌려, 방해하지 않을 작정인지 조용히 자리에 앉아 듣고만 있던 에리스를 바라보았다.

“괜찮으시겠습니까, 폐하?”

정면에서 격돌하는 회전이 벌어진다면 에리스에게 갈 부담이 적지 않을 거다.

아니, 이런 전력 차에선 분명히 에리스에게 상당히 의존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에리스는 선선히 웃으면서 답했다.

“맡겨주세요. 할 수 있어요.”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웃고 있는 에리스를 살폈다. 그동안 푹 쉬었고 겉보기엔 많이 좋아진 것 같긴 하지만…….

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답했다.

“감사합니다, 폐하. 그래도 가급적 무리가 되지 않는 선에서 부탁드리지요.”

나는 긴장한 기색의 지휘관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그럼, 출진한다.”

* * *

양측의 군대가 행군하는 사이에도, 경기병들은 쉴 새 없이 서로를 탐색하고 허점을 노리느라 여념이 없었다.

어떻게든 상대의 움직임을 살피며 조금이라도 많은 정보를 얻어내고, 보급대를 습격해 조금이라도 더 타격을 입히려는 자들과 그걸 막으려는 자들의 대결이다.

“이번에도 정찰보고 외에는 별 소득이 없습니다, 후작 각하.”

나는 말을 타고 다가온 제롬 모렐이 제출한 보고서를 펼쳐 보았다.

우리의 샤쇠르들은 여전히 제국의 후사르들을 상대로 우위를 점하고 있지만, 당할 만큼 당해준 레오폴트 대공도 적절하게 대응하고 있다.

보병대를 적당히 나누어 적재적소에 배치해두거나 충분히 빼둔 병력으로 보급대를 철저히 호위하는 등, 더 이상 일방적으로 유린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거다.

“씁, 면목이 없군요.”

제롬 모렐이 머리를 긁적여서,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적의 병력은 확실하게 9만가량으로 확인되었고, 남부로 가는 길목인 브장송 서부 평야에 진을 치기 시작했다는 것도 확인되었다. 이것만 해도 감지덕지지.

“아니, 그동안 올린 전과만으로도 모렐 장군의 부대는 제 역할을 차고 넘치게 했어. 결국 경기병대에 대비하기 위해 저들도 꾸준히 전력 낭비를 하고 있으니 존재만 해도 적에게 압박이 되겠지.”

“하하,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하군요! 그런데 부탁 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무슨 부탁?”

“경기병대가 보조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맞긴 하지만, 우리 부하들도 기병이라 전장에서 직접 공을 세우는 역할을 탐내서 말입니다. 전투에서 경기병대의 투입도 고려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하긴, 기병대는 본질적으로 마초적인 자들이지.

“고려해보지, 모렐 장군.”

“휘유- 꼭 좀 잘 부탁드립니다!”

저들을 정면 격돌에 쓰지는 못해도, 측면타격 역할 정도는 할 수 있을 테니…….

“적들이 브장송 서부 평야 지대에서 기다리고 있다는군.”

베르테르는 내 말을 듣자마자 지도를 펼쳐 꺼내 보곤, 미간을 구겼다.

“아무래도 레오폴트 대공이 작정하고 기다리고 있는 것 같군요.”

나도 쓴웃음을 지었다.

“험지에서 싸운다면 지형에 익숙한 우리가 유격전이나 기습이라도 걸어볼 텐데, 그동안 질리도록 당했으니 애초에 그런 변수가 없는 곳에서 싸우겠다 이거지.”

“평야에서 정면 대결이 된다면 저들은 병력 우위를 그대로 살릴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고 싸움을 안 걸면 그대로 남진해 버리겠지.”

베르테르는 심각한 얼굴을 한 채 지도에 병력의 포진을 표시하기 시작했다.

이동 중이라 흔들리는 말 위에서 잘도 저런 짓을 하네.

“선봉은 니콜라 네 장군이 적임이겠지요.”

“아, 내 생각에도 그가 적임자야.”

그 고지식하고 겁 없는 장군이라면 수적으로 밀린다고 해서 위축되진 않겠지.

“후작 각하께서는 이번에도 최전선에서 싸우실 겁니까?”

“그래. 군사들의 사기에 영향이 꽤 크니까. 총사령관 대행은 이번에도 드제 사령관에게 맡기지.”

“옛, 전황에 변동이 있을 때마다 바로 알려드리겠습니다.”

드제가 바로 경례하며 답해서, 나는 피식 웃으며 덧붙였다.

“이번에도 잘 부탁하지, 사령관. 내가 좌익, 가스통 장군이 우익 기병대를 맡아 지휘할 거야.”

“알겠습니다, 각하!”

가스통은 언제나처럼 든든하게 답했다.

베르테르는 지도에 내가 내린 지시대로 빠르게 포진을 표시하고 있고, 그 광경을 질린 듯이 보던 데미앙 드 미르보가 입을 열었다.

“아니, 말 타고 가면서 즉석 작전회의를 하시는 겁니까?”

“아, 내 제일 든든한 장군, 미르보 백작.”

“여, 영광입니다, 후작 각하. 그런데, 이번엔 또 왜…….”

나는 그런 데미앙을 보며 싱긋 웃었다.

에리스도 있고, 비장의 패도 오고 있다.

우리 쪽 전력도 나쁘진 않은데, 역시 1.5배의 적병을 상대로 정면 대결은 부담되는 것이 사실이지.

싸우는 건 피할 수 없다 쳐도 정확히 대공의 의도대로 싸워주는 것도 마음에 안 드니까…….

“내가 다른 계획이 하나 있는데.”

그러자 지도에 머리를 박고 있던 베르테르까지 내게 시선을 돌렸다.

지면 뒤가 없는 싸움인데 할 수 있는 건 다 해봐야 하지 않겠어?

“무슨 계획이십니까? 설마 또 무언가 위험한-”

데미앙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지만, 내 마음속에선 이미 결론 내린 지 오래다.

설마는 무슨 설마야. 1만으로 3만을 강 끼고 무피해로 막으셨다며?

그럼 이것도 할 수 있지 않을까?

“미끼 부대라고, 들어봤나?”

데미앙의 얼굴이 급격하게 썩어들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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