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혁명 수호 전쟁 - 이름값
피에르 드 라파예트가 이끄는 혁명군은 메츠와 모젤 평야, 그리고 알자스를 포기하고 후퇴한데 이어 결국 로렌의 중심지였던 낭시까지 단념하고 물러났다.
수도 뤼미에르에서 긴급하게 열린 국민의회에는 불안감이 감돌고 있었다.
“벌써 로렌 동부와 알자스를 전부 내어주다니, 괜찮은 것 맞소?”
“원래부터 프랑지아 내부로 끌어들이는 것이 작전이라고 듣지 않았소? 주민들 대피를 괜히 시킨 것이 아니지 않나.”
친라파예트 파인 중앙당의 의원이 답했지만, 분위기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첫 전투 개시 후 한 달도 지나기 전에 두 차례나 물러날 거라는 소리는 들은 적이 없소.”
“작전상 후퇴라는 거요, 작전상 후퇴. 베르됭에는 군사 요새도 있으니 그리 쉽게 무너지진 않을-”
“하지만 베르됭이 뚫리면 다음은 랭스고, 그 바로 다음이 뤼미에르요. 벌써 여기까지 밀려났는데 전쟁이 라파예트 후작의 의도대로 진행되고 있는 것이 맞소?”
“흥, 그럼 지금 불만을 표하는 의원들이 직접 나가서 싸우면 후작보다 잘 할 수 있소?”
결국 못마땅한 얼굴로 침묵을 지키던 중앙당 총재 앙쥬 백작이 불쾌한 심기를 드러냈다.
“아니, 그건 아니지만 라파예트 후작만이 답은 아닐 수도 있다는 겁니다.”
“라파예트 후작이 아니면 누가 있소? 댁들이 데려와서 쿠데타를 터뜨린 자를 말하는 건가? 아, 죽어서 데려올 수가 없겠구려.”
“아니, 무슨 말을 그렇게 하시오!”
“자, 잠시 진정들 하시지요.”
결국 분위기가 격해져 가자, 그때까지 느긋한 얼굴로 회의장을 감상 중이던 혁명당 총재 모리스 탈레랑이 입을 열었다.
“초전의 후퇴는 어느 정도 예정된 진행이기는 하지만, 그 진도가 너무 빠른 것은 사실입니다. 혁명당을 대표해서 제가 묻고 싶은 건 한 가지군요. 라파예트 후작이 저들에 맞서 대응할 수 있겠습니까?”
탈레랑의 시선을 받은 앙쥬 백작은 슬쩍 시선을 돌렸다.
자연스럽게 탈레랑과 앙쥬 백작의 시선을 받은 크리스틴은 살랑거리던 부채를 탁- 탁자 위에 내려놓고 입을 열었다.
“아직까지는 상정 이내입니다. 라파예트 후작님은 2배에 달하는 대공의 군대를 상대로 절반도 안 되는 피해만을 입으며 무사히 물러났습니다. 조금만 더 시간을 벌면 증원군이 도착하고 새로운 군대를 투입할 여력을 낼 수 있을 겁니다.”
탈레랑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혁명당은 앞으로도 라파예트 후작께 전권을 위임하고 가능한 모든 공조를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자유당도 마찬가지요. 결국, 이토록 불리한 상황에 혁명군을 가장 잘 이끌 수 있는 인선은 라파예트 후작 외에 달리 없소.”
자유당 총재 니콜라 브리소까지 동의하고서야, 불만을 품고 있던 의원들도 일단은 수긍하고 넘어가 주었다.
하지만 정작 회의가 끝나고, 크리스틴은 굉장히 우려된다는 얼굴의 앙쥬 백작을 상대해야 했다.
“아키텐 백작. 정말 괜찮은 것 맞소? 피해도 적게 입었는데 낭시 정도 되는 도시를 그냥 내어주다니. 사실은 더 큰 피해를 입었는데 숨겼다거나…….”
“우리는 분명히 한배에 타고 있을 텐데요, 앙쥬 백작님. 라파예트 후작님이나 제가 국민의회는 물론이고 총재님까지 거짓 보고로 속인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무, 물론 그건 아니오. 다만 걱정이 되어서 그러지. 여태까지 라파예트 후작이 저렇게 일방적으로 밀린 적이 없으니까…….”
“그만큼 상대가 강하고, 우리 군사가 적으니까요. ……그래도 말했듯, 이 이상 허무하게 물러나는 일은 없을 겁니다. 너무 심려치 마시길.”
“그, 그래. 알겠소. 필요한 부분이 있다면 협조할 테니 언제라도 말해주시오.”
“배려 감사드립니다, 백작님.”
크리스틴은 드레스 자락을 들어 올리며 우아하게 인사한 후, 그대로 의회를 빠져 나왔다.
답답한 장소를 벗어난 크리스틴은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거짓 보고로 속이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후퇴해야만 했던 진짜 이유는 지나치게 무리한 여왕 에실리스테의 건강이 악화되어서지만, 그걸 숨긴 것이 거짓은 아니니까.
군사들과 국내의 동요를 피하기 위해서 불가피한 조치였지만, 피에르가 질 정치적 부담을 조금이라도 줄여주려고 동분서주해야 하는 크리스틴으로서는 짙은 피로감을 느끼고 있었다.
건물에서 빠른 걸음으로 빠져나온 크리스틴은 기다리고 있던 마차에 타, 시녀인 리나와 마주했다.
“리나. 게르마니아 제국에 심어둔 자들, 이번에 써야겠어.”
“네? 주, 주제넘을지 모르지만 한 말씀 올려도 될까요?”
“말하렴.”
“이제 막 정착시킨 자들이라 은폐 공작 같은 건 어렵지 않을까요? 힘들게 심어둔 이들인데 단순히 소모품으로 쓰기는…….”
“아깝지. 하지만 필요한 순간에 쓰기 위해 심은 건데 아깝다고 안 쓰면 주객전도야.”
“그렇……네요.”
리나는 그렇게 답하며 크리스틴에게 서류를 내밀었다.
“이쪽은 최우선으로 검토하셔야 할 것들, 이쪽은 후순위예요.”
“그래, 고마워.”
“저, 저야말로 믿고 맡겨주셔서 감사합니다.”
크리스틴은 리나에게 살짝 웃어주며 서류를 받아 들어서 읽기 시작했다.
백작위를 계승할 때 새로 들인 시녀 리나를 충분히 오랫동안 지켜본 크리스틴은 그녀를 믿을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
크리스틴이 거의 손이 가지 않는 타입이라 별로 할 일이 없던 시녀에게 시험 삼아 정보관리 업무의 보좌를 맡겨보자, 제법 의욕 있게 일해서 아예 제대로 맡기게 되었다.
내심 하는 일이 적어서 민망해하던 리나의 뿌듯한 얼굴을 흘긋 바라본 크리스틴은 제법 만족감을 느꼈지만, 동시에 속으로 씁쓸함을 곱씹었다.
나름 오래 함께 지낸 시녀가 기뻐하면 그녀도 기분이 좋지만, 본질적으로 그녀가 다루는 패들 중 하나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그저 조금 더 신뢰할 수 있고, 더 중히 쓸 패.
게르마니아 제국에 기껏 심어두고 어렵게 접선루트를 마련해두었지만, 지금 피에르를 돕기 위해 소모해버릴 패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제는 아마도 그녀 외에는 기억도 하지 못할, 말로를 암살하고 창문 밖으로 투신해버린 소녀처럼.
크리스틴은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서류를 살피다, 목적지인 육군 사관학교에 도착하자 마차에서 내려 교장실로 향했다.
“어서 오십시오, 아키텐 백작 각하.”
“오랜만이에요, 카론 남작.”
“하하, 역시 제가 없으니 허전하십니까?”
오래간만에 만난 옛 충신의 장난스러운 물음에, 크리스틴은 픽 웃으며 반문했다.
“마구 부려먹던 상사에게서 벗어나니 살만하신가 봐요?”
“크흠, 크흠, 그걸 어떻게 아셨는지…….”
카론 남작은 원래 지금 리나가 해주고 있는 업무의 전임자로서 크리스틴을 보좌해왔지만, 이제는 그랑제콜 과정의 일환으로 설립된 육군 사관학교의 교장을 맡고 있다.
급진파의 암살기도에서 목숨 걸고 그녀를 지키려고 들기도 했고, 그간의 헌신과 충성에 대한 나름의 보답을 줄 겸 피에르에게 부탁해 받아준 직책이다.
“자, 요청한 물품 관련이에요.”
“오, 감사합니다.”
카론 남작은 크리스틴이 건넨 서류를 받아서 신중한 얼굴로 읽어 보았다.
사실상 군사물자 거래를 거의 독점적으로 맡아 하고 있는 아키텐 상단은 군수품이나 군사교육기관을 위한 물자도 다루고, 그게 어떤 군사 직책도 없는 크리스틴이 자연스럽게 군 시설을 오가는 이유였다.
“오, 대부분은 조만간 수령할 수 있겠군요. 새삼스럽지만, 역시 백작 각하십니다.”
“이젠 아부해도 더 줄 것도 없어요.”
“하하하, 그저 본심인 것을요. 아, 이것 좀 봐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카론 남작은 서류를 하나 꺼내서 크리스틴에게 건네주었다.
“이건?”
“장교 후보생의 프로필입니다.”
크리스틴은 서류를 빠르게 훑어 내렸고, 간단하게 결론 내렸다.
“시험 성적이나 모의전 성적이 아주 우수하군요. 훌륭한 장교가 되겠어요.”
크리스틴의 감상은 딱 그 정도였다.
애초에 이걸 왜 그녀에게 보여주는지 모르겠어서, 시선으로 묻자 카론 남작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크흠, 크흠. 백작 각하, 그 후보생의 이름을 한번 봐주심이.”
이름?
크리스틴은 별생각 없이 지나친 이름으로 시선을 다시 돌렸다.
“질 다비.”
……다비?
크리스틴은 익숙한 어감을 입에서 몇 번 굴려보았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엘렌 다비의 가족인가요?”
“예, 백작 각하. 눈에 익은 이름이라 혹시나 해서 확인해 봤는데, 그 다비가 맞습니다.”
공화국이 아직은 피에르와 크리스틴의 남부 귀족 연합을 적성 세력으로 여기고 있던 시점.
그들이 공화국에 합류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노골적으로 저지하려 들고, 여차하면 백색테러도 서슴지 않겠다고 떠들던 쟝 말로를 사전에 제거할 필요성이 있었다.
크리스틴은 그때 혁명 과정에서 피해를 입고 급진파에 원한을 품은 이들 여럿을 확보해 패로 썼다.
쟝 말로를 직접 처단하는 데 성공한 엘렌 다비는 창문에서 투신해 버렸고, 덕분에 심문을 당할 일도 없어 그녀의 어린 가족들은 조용히 잘 지내고 있었다.
크리스틴은 엘렌에게 한 약속을 지켜 그들이 사는 데 지장이 없을 금전을 지금까지 지원해 주고 있지만, 그렇게 자라난 아이가 장교 후보생으로 들어올 줄은 몰랐다.
“조금, 생경한 기분이네요.”
카론 남작은 머리를 긁적이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게, 문제가 있습니다. 백작 각하.”
“무슨 문제요?”
카론 남작은 쓴웃음을 지었다.
“질 다비는 여자입니다.”
“…….”
크리스틴은 눈을 가늘게 떴다.
제아무리 대단한 두뇌를 가진 그녀라도 몇 년 전에 패로 쓴 자의 가족 명단까지 기억해 낼 수는 없었지만, 카론 남작이 설명해 주었다.
“본명은 지젤 다비, 엘렌 다비의 여동생입니다. 이름은 대충 가명으로 쓴 모양이군요.”
“……성별을 숨기고 사관학교에?”
“그렇습니다. 원칙대로라면 퇴교시켜야 합니다만…….”
카론 남작은 그렇게 말하며 크리스틴의 눈치를 살폈다.
원래라면 발각한 시점에 쫓아냈을 테지만, 하필이면 크리스틴이 직접 후원하는 집의 아이다.
애초에 그런 아이가 아니었다면 카론 남작도 장교 후보생 질 다비가 지젤 다비라는 사실을 알 수 없었겠지.
크리스틴은 다시 한번 프로필을 보았다.
운동능력은 평균에서 약간 밑돌지만, 모의전이나 시험에서는 굉장히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있다.
왜 굳이 군에 입대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피나는 노력으로 얻어낸 성적이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장교 후보생으로서의 능력에는 문제가 없어 보이네요.”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백작 각하. 오히려 능력은 아깝지요. 하지만 여성 장교 자체가 허용되지 않습니다. 뒤늦게 발각되기라도 하면 저도 교장으로서의 체면이…….”
크리스틴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엘렌 다비.
쟝 말로에게 분노와 증오를 품었던 소녀가 은인의 이름이나마 알려 달라 청했을 때, 크리스틴은 엘렌에게 자신의 의지를 과대평가하지 말라고 답했다.
엘렌 다비가 크리스틴에게 특별했던 것은 아니다.
그저 쟝 말로를 죽이기 위해 크리스틴이 예비했던 여러 패 중 하나고, 그중에 운 좋게 성공한 패였을 뿐이다.
크리스틴의 얼굴은커녕 이름도 모른 채 죽어버린 하찮은 목숨.
그러나 자신이 죽을 줄 알고도 끝내 말로를 처리하고, 혹시나 가족들에게 피해가 갈까 봐 그 자리에서 창밖으로 몸을 던진 소녀.
엘렌 다비에게 그녀의 의지를 과대평가한다고 말했지만, 과소평가한 쪽은 오히려 크리스틴이었는지도 모른다.
크리스틴은 동생들을 위해 목숨을 버릴 엘렌 다비에게 동생들을 보살펴 주겠다고 약조했다.
몰랐다면 그저 돈을 충분히 준 걸로 약조를 지켰다고 여겼을지도 모르겠지만, 피나는 노력이 허무하게 부정당할 것을 내버려 두고서도 보살펴 주었다고 할 수는 없겠지.
크리스틴은 고민 끝에 말했다.
“……일단, 밝히지 말고 그대로 두세요.”
“예? 하면…….”
크리스틴은 가볍게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여성 장교, 허용하게 만들면 되니까요.”
“그게 쉽게 되겠습니까?”
투표권도 안 주는 여성을 장교로?
카론 남작은 당연한 의구심을 품었지만, 크리스틴은 답하는 대신 미소 짓기만 했다.
“크흠, 실언했습니다. 라파예트 후작 각하께서 총사령관이신데, 아키텐 백작 각하께서 하고자 하신다면 능히 가능하겠지요. 저로서도 내심 조금 아까운 인재라고 생각했던 터라…….”
“이런 수고를 들일 가치가 있는 인재면 좋겠네요. 그럼 전 이만.”
“옛! 살펴 가십시오, 백작 각하! 실망하시지 않도록 열심히 키워내 보겠습니다.”
크리스틴은 카론 남작에게서 등을 돌려, 조금 걸어가다가 나직하게 읊조렸다.
“……이만하면, 이름값 대신 정도는 될까?”
“예?”
“……아니에요.”
크리스틴은 씁쓸하게 웃으며 답하고, 사관학교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