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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혁명에 단두대는 필요없다-95화 (95/258)

95화. 혁명 수호 전쟁 - 이기적인 이타심

알자스 전선.

강 너머에 참호를 파고 숨은 채 포격을 회피하고 병력 규모를 숨기겠다는 데미앙 드 미르보의 기상천외한 작전은 아주 잘 먹혀들어 갔다.

적들은 강 너머에서 어느 정도 병력인지도 모를 데미앙의 군세를 섣불리 공격하지 못한 채 우왕좌왕하며 시간만 끌었고, 분노한 나머지 기사랍시고 어설프게 결투를 걸었다가 패배한 바덴 백작은 데미앙에겐 그야말로 행운의 사자였다.

그러지 않아도 데미앙이 거창하게 ‘미르보선’이라고 이름 붙인 참호선에 낚여 당황하고 있던 군힐드 공작은 바덴 백작의 해방 협상을 진행하며 시간을 허비하고 있었으니까.

물론 그 책임을 다 뒤집어쓰게 될 바덴 백작은 차라리 죽여 달라고 날뛰고 있었지만, 적은 병력으로 군힐드 공작을 붙잡아 둬야 하는 데미앙의 입장에선 이 이상은 없을 정도로 완벽한 진행이었다.

그러니까, 딱 어제까지는 그랬다.

“이건 말도 안 돼! 이건 말도 안 된다고오오!”

데미앙 드 미르보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울부짖었다.

바로 전날까지만 해도 바덴 백작의 교환 몸값 협상에 임하며 소극적으로 굴던 군힐드 공작이 난데없이 협상 결렬을 선언하더니 공세를 준비하기 시작한 거다.

거기까지는 그래도 레오폴트 대공이 지령을 내렸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진짜 문제는 다른 곳에서 나왔다.

데미앙은 저주스러운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시커먼 먹구름으로 뒤덮여, 비를 내리고 있는 하늘을.

그저 땅을 팠을 뿐인 급조된 참호에 배수 기능 같은 것이 있을 리가 만무했고, 결국 데미앙의 군대는 기껏 파놓은 참호를 버려야 했다.

당연하게도, 군힐드 공작은 그를 붙잡아 두고 있던 데미앙의 군대가 극히 소수라는 걸 똑똑히 목격해 버렸다.

그러지 않아도 공세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기만당하고 있었다는 것까지 깨달았으니 이를 갈고 있겠지.

비가 그친다고 참호에 가득 찬 물이 바로 빠질 것도 아니니, 비가 그치고 땅이 굳는 대로 군힐드 공작의 포병대가 그의 군대를 박살 내며 강을 건널 것이 명백하다.

“우린 이제 망했어, 망했다구…….”

데미앙은 흠뻑 젖은 군복 모자를 손에 쥔 채 우울하게 읊조렸다.

“힘을 내십시오, 백작 각하. 그래도 지금껏 잘 막으셨지 않습니까. 라파예트 후작도 각하의 공을 치하-”

“차라리 그렇게 보고하지 말았어야 했어!”

그의 충성스러운 기사 페터 드 카젤이 위로랍시고 말했지만, 데미앙은 몸을 비틀며 뒤늦은 후회를 뿜어냈다.

라파예트 후작에게 치열하게 잘 싸워서 막아내고 있다는 것처럼 보고할 때는 이런 사태가 터질 줄 몰랐지.

차라리 언제라도 후퇴할 수 있는 위급한 상황이라고 보고했어야 했는데, 아무 문제 없다는 듯이 보고해놓고 여기서 내빼버리면…….

데미앙은 그를 몇 번이고 붙잡아 겁박하던 라파예트 후작과, 음험하기 짝이 없는 협박을 조곤조곤하게 말하던 아키텐 백작을 떠올리곤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내 역작 ‘미르보선’은 완벽했는데, 하필이면 비라니. 이럴 때 비라니. 하여간 운이 없어서 되는 일이 없어!”

데미앙이 절규하고 있을 때, 카젤 경이 말했다.

“백작 각하. 전령인 듯합니다.”

“전령? 또 뭔 전령.”

바로 어제 잘하고 있으니 그대로 하라고 명령을 받은 참인데, 하루만에?

전령 역인 장교는 완전히 물에 빠진 생쥐 꼴로 말을 몰아, 데미앙의 앞으로 왔다.

“데미앙 드 미르보 백작 각하를 뵙습니다! 피에르 드 라파예트 후작 각하께서 보내셨습니다!”

“빨리 말해, 무슨 내용이지?”

전령은 품 안에 꼭 넣고 있던 명령서를 꺼내, 몸으로 비를 막으며 데미앙에게 건네주었다.

“비 때문에 명령서가 젖을 수 있어 일단 구두로 전달해 드립니다! 본대가 메츠를 버리고 낭시로 후퇴할 테니 각하께서도 전선을 뒤로 물려 합류하라는 명령입니다!”

“어, 뭐라고?”

“지금쯤이면 레오폴트 대공의 군대가 메츠를 점령했을 겁니다, 각하! 포위를 피하기 위해 후퇴하셔야 합니다!”

적이 최전선 요충지를 점령했다는, 비보에 가까운 소식.

그러나 데미앙의 얼굴에는 바로 환희가 차올랐다.

“알겠네! 와서 전해줘서 고마워! 내가 따뜻하게 데운 술이라도 준비해 주지! 잠깐 몸 좀 덥히고 먼저 가서 라파예트 후작 각하께 이 데미앙 드 미르보가 바로 명령을 수행하겠다고 전해주면 되네!”

“어, 예? 예, 알겠습니다…….”

장교는 물론이고 카젤도 떨떠름해하는 가운데, 데미앙은 쏟아지는 비 사이로 보이는 강 건너의 적진을 보며 신이 나서 소리쳤다.

“하하하, 이 방어의 명장 데미앙 드 미르보 님께선 철수하신다! 다음에 보자 멍청이들아!”

비와 진창으로 군힐드 공작이 강 너머에서 발이 묶인 사이, 데미앙 드 미르보는 전투 한번 없이 1만의 군세를 온존하여 알자스에서 물러났다.

* * *

프랑지아 동부, 옛 로렌 공작령의 수도 낭시.

봄비가 추적추적 쏟아지는 가운데, 하늘에서는 간간이 천둥 번개가 치고 있다.

바로 며칠 전까지만 해도 맑기만 하던 날씨가 급변했는데, 운이 좋았지.

내 결정이 조금만 늦었다면 제때 후퇴하지 못한 채 레오폴트 대공의 공세에 무너져 내리고, 빗속에서 패주할 뻔했다.

그랬다면 군대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겠지.

그러나 적절한 타이밍의 비는 되려 이제 막 메츠와 알자스를 확보하고 있을 제국군의 피로를 가중시키며 재정비를 방해해 줄 거다.

레오폴트 대공이 이끄는 2배에 가까운 병력을 상대로 5,000명의 희생으로 전초전을 성공적으로 치러냈으니 선방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나는 다른 문제에 봉착해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후작 각하.”

나는 이제는 여왕이 된 에리스의 근위기사 프레데릭 드 보몽 경과 시녀 제니의 인사를 받았다.

“여왕 폐하는 좀 어떻지?”

“찾아오시면 안으로 들이라 하셨습니다.”

“……그래. 그럼 고해줘.”

제니는 나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 방문을 두드렸다.

“여왕 폐하, 라파예트 후작께서 오셨습니다.”

“들어오세요.”

방 안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평소 에리스가 내던 통통 튀고 밝은 느낌과는 거리가 멀었다.

가늘고 힘없는 음성.

나는 가볍게 심호흡을 하고 안으로 발을 들였다.

마력등의 은은한 불빛이 비추는 방 안.

에리스는 침대에 앉은 채 나를 반겨주었다.

“어서 와요, 후작님.”

“……여왕 폐하.”

나는 침대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원래는 하얗다 못해 창백한 에리스의 피부가 살짝 붉게 달아올라 있다.

에리스의 보라색 눈동자가 약간 흐릿한 느낌이어서, 나는 가볍게 입술을 깨물었다.

“괜찮……지는 않으신 것 같군요, 폐하.”

“그러게요. 저, 괜찮지 않은 것 같아요.”

에리스는 머리를 가누기 힘들어하는 것 같더니, 어색하게 웃으면서 물었다.

“그냥 누워서 이야기해도 되나요?”

“……그러시지요, 폐하.”

에리스는 사양하지 않고 침대에 누워 나를 올려다보았다.

“……폐하.”

에리스는 말없이 나를 보더니 입을 열었다.

“지금은 그냥, 평소처럼 대해주면 안 되나요?”

평소처럼이라.

“이제는 여왕 폐하가 되셨는데.”

에리스는 흐리게 웃으며 말했다.

“……지금은 아프니까, 조금 봐줘요.”

“그걸 원한다면.”

“고마워요.”

에리스는 보랏빛의 눈동자를 느리게 깜빡이더니, 멍한 눈으로 천장의 마력등을 보고 있다.

“건강해서 감기 한번 걸려본 적 없다더니.”

“조금, 무리했나 봐요.”

지난 전투에서 내가 소방대로 메츠와 모젤 평야를 오가는 사이, 에리스는 신성력을 발휘해 모젤 평야의 본대를 직접 보호하며 싸웠다.

이틀간, 몇 번이고 탈진하며 신성력을 발휘한 끝에 에리스는 완전히 앓아누웠다.

이건 내가 완전히 간과한 부분이다.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에리스는 작은 마을의 부상자 수십을 치유하는 것만으로도 한계에 달해서 비틀거렸다.

그러나 지금은 단독으로 게르마니아 제국 포병들의 포격을 상당수 저지해낼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

성장하면서 신성력이 커진 건지, 아니면 에리스의 활약을 보고 감화된 이들의 추앙 그 자체가 성녀로서의 힘을 강화해 주는 건지는 모르겠다.

성녀라는 존재 자체가 역사에서도 전례가 몇 없을 정도니 아는 것도 없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에리스의 능력은 이레귤러라 불릴 수준을 넘어서고 있고, 전술적으로 놀라운 도움이 되고 있다.

거기에 에리스가 원한다는 이유로 거리낌 없이 의존하기 전에, 저 정도의 능력이 정말 아무 대가도 없을지에 대해 고민해 봤어야 했다.

“……지나치게 무리한 거야. 네 힘의 대가가 뭔지도 모르잖아, 에리스.”

이건 단순히 감기 같은 걸로 조금 아픈 것과는 한눈에 보기에도 다르다.

누워 있는 에리스의 모습엔 완연하게 생기가 없어, 원래부터 색소가 부족한 순백색의 성녀가 마치 사라져 버릴 것처럼 보인다.

에리스는 멍하니 있다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그래도, 저 도움 되지 않았나요?”

“……도움은 되었지. 엄청나게.”

레오폴트 대공이 끌고 온 병력은 단순히 숫자만 많은 것이 아니었다.

급조 병력의 한계인지 훈련도가 높아 보이진 않았지만, 저들의 장비는 우리보다 오히려 더 낫다.

특히나 포병대가 많았으니, 에리스가 제대로 막아주지 않았다면 우리의 손실은 지금보다 훨씬 많았겠지.

“하지만 나는 네가 도움이 되어 주기를 바란 거지,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자신을 몰아붙일 거라고 기대해서 전장에 세운 것이 아니야. 하물며, 너는 이제 여왕이야.”

“……죽는 것도 아닌데, 저 하나 조금 아프면 어때요. 여왕 하나보다 제가 살린 수백 명의 목숨이 훨씬 귀한걸요.”

에리스는 옅은 미소를 지은 채 말했지만, 나는 단호하게 부정했다.

“아니, 네 목숨이 더 귀해.”

에리스의 표정이 얼어붙었지만, 나는 말을 이었다.

“군사 수백 명이 죽는다고 전쟁에서 지지 않아. 하지만 네가 이런 식으로 제 생명을 깎아내다 죽으면 수백씩 몇십 번을 살려낼 자들이 결국 다 죽게 되고, 수만 명이 사기를 잃을걸.

“그건 조금, 너무한 말씀이신걸요.”

“네가 아픈 걸 숨겨달라는 부탁도 내가 판단하기 전에 네가 먼저 한 거잖아. 너도 아주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에리스는 얼굴을 찌푸리며 손으로 눈가를 덮었다.

한참의 침묵이 흐른 뒤, 에리스가 입을 열었다.

“저, 지금 너무 힘들어서. 후작님이 절 위해 하시는 말이라는 건 아는데, 뭔가. 너무…… 싫어요.”

그렇게 호소하는 에리스는 이제야 갓 20살이 된 태가 나서, 나도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 그만할게. 비가 그치고 미르보 백작과 합류하면 낭시도 버리고 발루아로 물러날 거야.”

“네? 여기도 버리나요?”

“군사 요새가 있는 베르됭은 그렇다 쳐도 여긴 지키려면 다시 회전을 벌어야 해. 네 몸 상태로는 무리고.”

아직은 병력 차가 크고, 포문 수의 격차도 심하다. 차라리 로렌 동부와 알자스를 내어주더라도 에리스가 회복할 시간을 벌어야 한다.

“조금 쉬면 괜찮아질 거예요. 여기까지 그냥 내어주면 군사들의 사기가…….”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거울 안 봤어?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서. 대체 뭘 위해 그렇게까지 하지?”

“어머니가…….”

“네가 궁에서 잠깐 지낸 어린 시절 풍족하게 지냈으니, 네 생명을 갉아먹으면서까지 이 나라를 위해 봉사해야 한다고? 네 어머니가 정말 그런 걸 바랬을까?”

싸늘한 침묵이 흐르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후, 미안하다. 푹 쉬어. 아픈 사람 붙잡고 할 말이 아닌데, 난 가볼게.”

“가지 마요.”

에리스가 약하고 흐릿한 목소리로 나를 불러 세워 고개를 돌리자, 에리스의 눈가를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제 이야기. ……들어 주실래요?”

“네가 원한다면.”

"어머니는 정말 좋은 분이셨어요. 모두에게 친절하고, 기품 있고. 궁에서 아바마마께 사랑받고 호사를 누리면서도 밖에 가난한 사람들이 있다는 걸 늘 가르치며, 제게 감사해야 한다고 하셨죠."

그렇게 말하는 에리스의 얼굴에는 사랑과 자부심이 진하게 묻어 나왔다.

“……아바마마께서는 당신께서 돌아가시면 우리 모녀가 후계자 분쟁에 휩쓸릴까 봐 걱정하셨나 봐요. 그래서 프랑크 아저씨에게 명해서 우리를 궁에서 떠나게 했어요.”

에리스는 잠시 말이 없다가 쓴웃음을 지었다.

“당연히 저는 사정을 몰랐어요. 그저 막연히 여행을 떠나는 줄로만 알았죠. 얼마간 패물도 가지고 나왔지만, 어머니나 프랑크 아저씨나 상류사회 사람들이라 살림 같은 건 전혀 할 줄 몰랐어요.”

“그래, 그랬겠네.”

“그래서 사용인을 고용했는데, 우리가 너무 물정 몰라서 그런가, 밤사이에 패물을 가지고 도망쳐버렸어요. 그때부터는, 어려웠죠. 궁에서 온갖 호사는 다 누리고 살았는데 당장 돈 버는 재주는 없고, 입맛에도 안 맞는 싸구려 음식조차 구하기 힘들고…….”

“보몽 경은 용케 남았네.”

“프랑크 아저씨, 근위기사 시절부터 남몰래 어머니를 사모하셨거든요.”

“무, 뭐?”

에리스는 쿡, 웃었다.

“……그런 관계는 아니었어요. 프랑크 아저씨는 고지식하고 충성스러운 기사였거든요. 그래도 옆에서 오랫동안 보면 다 티가 났죠.”

“그래…….”

“그땐 저도 철이 없어서, 어머니에게 칭얼대고 짜증만 냈던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하면 어머니도 호사만 누리시다 나와서, 다른 왕족들에게 알려지면 해를 입을까 봐 숨어 지내느라 저만큼이나 힘들어하셨는데.”

에리스는 아련한 얼굴이 되었다.

“어머니는 금세 심각한 우울증에 빠지셨어요. 당신께서 품으신 이상과 너무 다른 현실에 지쳐버려서 그렇게 되신지도 모르지만, ……늘 우아하고 선량하던 분이 그렇게 되고 나니까, 저도 뒤늦게 후회했죠.

그때부터 어떻게든 어머니를 모시겠다고 프랑크 아저씨와 제가 무작정 일을 배웠는데, 다행히 좋은 사람들뿐이라서 입에 풀칠하고 살 만은 해졌어요.”

“그래, 그래서 그나마 평민들에게 별 감정은 없었나 보네.”

일반적으로 호사를 누리던 왕족이 사용인에게 도둑맞아 궁핍해졌으면 원망해도 이상하지 않았을 텐데.

“……저는, 그랬죠. 어머니는 날이 갈수록 우울증이 심해져서, 도둑질한 사용인을 저주하며 철없던 저를 비난하고. 궁에 있을 때 사람들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고 가르치시던 분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모습이 되셨어요. ……점점 안 좋아지시다 결국 어머니가 죽어 가시는 수준이 되셔서…….”

에리스는 웃었다.

“엄청 이기적인 마음이었거든요? 철없던 제가 어머니가 가장 힘드실 때 못살게 굴어서 저렇게 되셨는데, 안 되니까 신에게 도와달라고 빌었더니 소원을 들어주셨어요.”

그 웃음이 어째, 깨진 유리 조각처럼 흔들려서 눈을 뗄 수가 없다.

“죽어가시던 어머니를 능력을 써서 살리니까, 우울증도 다 날아가 버려서 오랜만에 궁에 계실 때처럼 다정하고 따뜻한 모습이 되셨어요. 너무너무 기뻐서, 신께서 도와주신 거니 저도 착한 일을 많이 많이 해서 신께 보답해드리겠다고 했는데.”

웃는데도, 눈물을 끊임없이 흘리고 있다.

“어머니도 웃으시면서 제가 그렇게 살면 좋겠다고 해주셨는데. 다음 날 마을의 병자들을 치료해 주고 돌아오니까 목을 매셨더라고요.”

“…….”

“왜인지는, 아직도 모르겠어요. 제 능력이 부족해서 우울증이 금방 다시 돌아오신 걸까? 아니면 나쁜 딸에게 복수하신 건가? 그도 아니면 이기적인 마음으로 신성력을 받은 제게 신께서 내리신 벌일까?”

한동안 흐느끼는 소리만이 났다.

잠시 뒤에, 에리스가 잠긴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저, 완전히 나쁜 아이예요. 어머니도, 아마 나쁜 사람. 좋은 사람이었는데, 좋은 사람이었을 텐데, 제가 너무 나쁜 아이라서 어머니는 나쁜 사람으로 죽어버렸어요.”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말해주는 건 쉽지만, 제삼자인 내가 가벼운 마음으로 입에 올려도 되는 말일까.

한참이 지나고서야 에리스가 평소의 경쾌한 음성을 냈다.

“……성녀라고 칭송받던 왕녀는 사실 이렇게 이기적이고, 바보 같고, 나쁜 아이랍니다.”

그러나 내게는 밝고 경쾌한 어조를 힘겹게 흉내 내는 느낌으로 들렸다.

“……저는 후작님이 수백 명의 생명보다 낫다고 말씀하실 만한 사람이 아니에요. 저보다 더 자격 있는 사람도 있었을 텐데, 분수에 넘치는 능력을 받아서. 어머니께서 제가 착한 일을 많이 하고 살면 좋겠다고 말하셨으니까. 이렇게 열심히 하면 저나 어머니의 죄를 신께서 용서해 주시지 않을까 해서.

에리스는 나를 보며 웃었다.

“그런 이기적인 이유로 이러고 있는 거니까, 할 수 있는 만큼은 하게 해주세요. ……저는, 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타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저를 위해서.”

지극히 이기적인 이타심이라는 건가.

나는 잠시 침묵하다가 답했다.

“그래, 할 수 있는 만큼은 하게 해주지. 하지만 전장을 결정하는 판단은 내가 한다.”

에리스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여왕이고 성녀고 나발이고, 전장에 섰으면 군사령관인 내 명령에 따라. 무모하게 굴다가 금방 쓰러져서 못 쓰게 되는 건 용납하지 않아. 무엇보다 값진 패가 스스로를 망치려 든다는데, 그걸 내버려 두면 지휘관 자격이 없다.”

“……제가 무리하지 못하게 하겠다는 말을 그런 식으로 하시네요. 결국 여긴 버리고 물러나겠다는 건가요?”

“그래. 땅을 잃어도 사람이 있으면 되찾을 수 있다. 하지만 땅을 지키고 사람을 잃으면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아.”

나는 에리스의 보랏빛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판단은 내가 하고, 책임도 내가 진다. 너는 여왕이면서 전선에서 군사들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면 그걸로 충분해. 네 능력으로 가능한 한 오래, 더 많은 이들을 구하도록 적절히 다뤄주마. 언젠가 이 정도 했으면 떳떳할 만하다고, 네 입으로 직접 말할 수 있는 순간까지.”

“……뭐에요, 그게. 여왕을 마음대로 부려 먹는 장군?”

“여왕씩이나 되어서도 의욕만 앞서고 자기 관리가 안 되니, 충신으로서 좀 거들어드리는 수밖에. 기왕 이기적으로 이타심 발휘할거면 더 효율적으로 도움 되게 해주지. 강제로.”

에리스는 눈물자국이 남은 얼굴로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사기 치는 후원자님일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막무가내인 신하네요.”

“그것 참 공교롭네.”

나도 마주 웃어주었다.

“나도 참 막무가내인 여왕님이라고 생각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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