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혁명 수호 전쟁 - 전초전 (3)
프랑지아 왕국 동부 최전선, 로렌 지방.
봄의 맑은 하늘에서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는, 나들이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아 보이는 날씨였다.
그러나 로렌 전선의 최전방 도시 메츠에는 그 좋은 날씨에 듣기에는 과히 좋지 않은 소리만이 가득했다.
수 시간에 걸쳐 양측 진영에서 퍼부어진 포격은 어느 한쪽 할 것 없이 난타했고, 수없이 쏘아진 머스켓이 뿜어낸 흑색 화약의 검은 연기는 전장을 매캐하게 뒤덮었다.
포격을 피하기 위해 아예 강을 끼고 참호를 파 땅에 숨어버린 알자스 전선과 달리, 여차하면 총검 돌격을 가하는 전열보병을 상대로 참호는 별다른 방호력을 발휘하기 어렵다.
덕분에 라파예트 후작과 레오폴트 대공의 본대가 맞붙는 로렌 전선에서 혁명군은 시가지와 전선에 바리케이트를 설치하여 그것을 끼고 싸우거나, 평야 회전을 연달아 벌이는 중이었다.
오와 열을 맞춰 걸으며 규칙적인 발소리로 땅을 울리는 게르마니아 제국군의 사이에서, 군악대가 연주하는 흥겨운 음악이 울려 퍼졌다.
제국군이 혁명군이 지키는 마을의 낮은 벽에 가까워지자, 격려하기보다 등 떠미는 것에 가까운 군악대의 음악 소리 사이로 불협화음이 끼어들었다.
벽 위로 팔과 머리만 내놓은 혁명군의 머스켓이 일제히 불을 뿜으며 총성이 연달아 울렸다.
총탄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피가 튀고, 질서정연하게 전진하던 게르마니아 제국군이 여럿 쓰러졌다.
그러나 군사들이 쓰러지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고 전진한 제국군의 옆에서, 하사관이 검을 들어 올리며 소리쳤다.
“조준!”
하사관의 외침에 게르마니아 제국군이 일제히 머스켓을 들어 올리고-
“발사!”
벽 위로 내놓은 머리에 총알을 맞은 몇은 피를 튀기며 쓰러졌지만, 대부분의 총알은 벽에 가로막혔다.
“재장전 서둘러!”
하사관의 째지는 외침에 제국군이 머스켓에 총알을 밀어 넣기 위해 꽂을대를 열심히 쑤시고 있는 사이, 혁명군의 방어선에서 외침과 함께 총성이 터져 나왔다.
“컥…….”
안간힘을 쓰며 잘 들어가지 않는 총알을 꽂을대로 밀어 넣던 제국군 병사는 그의 옆에서 터져 나온 단말마와 함께, 난데없이 얼굴에 피가 튀어서 기겁했다.
“으읏-!”
그 병사가 정신없이 손으로 눈가를 비빈 끝에 눈을 뜨자,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의 옆에 서 있던 병사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히, 히익-!”
순식간에 앞사람이 사라져서 뒷사람이 비명을 지르자, 뒤에 서 있던 하사관이 그의 엉덩이를 발로 차서 앞 열로 밀어냈다.
“앞으로 나가!”
그러는 사이 병사들의 재장전이 대부분 끝난 듯하자 하사관이 다시 검을 들어 올렸다.
“조준!”
마지못해 떠밀려 앞으로 나가 손을 벌벌 떠는 병사를 포함해 제국군이 머스켓을 들어 올리고-
“발사!”
다시 총성이 연달아 터지며 혁명군 몇이 뒤로 쓰러지고, 굉음을 내며 날아든 포격은 아예 뒤에 숨은 병사들 채로 벽을 무너트려 버렸다.
조금이나마 요새화된 거점을 방어하는 혁명군에 비해 제국군의 희생이 많았지만, 근본적으로 제국군의 숫자가 2배에 달한다.
처음에는 제법 든든한 방어선을 이루게 해준 마을의 벽이나 급조된 바리케이트는 지속적인 공세로 점차 무너져 내리고 제 구실을 못 하는 신세가 되었다.
“돌격하라!”
마침내 충분히 밀어붙였다고 판단한 제국군 하사관의 명령에, 수차례의 전투와 포격으로 너덜너덜해진 도시의 벽을 향해 제국군이 돌격하기 시작했다.
벽을 낀 혁명군이라고 가만히 있지는 않았고, 그들의 총이 다시금 불을 뿜어 돌격하던 제국군 중 상당수가 쓰러졌다.
지근거리에서 가해진 일제사격은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
제국군은 대번에 동요했고, 쓰러지는 동료의 이름을 비명처럼 부르짖는 자도 많았다.
“히, 히익, 이건…….”
“한스, 한스!”
“돌격하라, 당장! 멈추는 놈은 군법회의다!”
“으윽-”
그러나 돌격을 멈추면 아군에게 맞아 죽고, 돌격하면 운 좋으면 살 수 있다.
거의 세뇌에 가깝게 두들겨 맞으며 교육받은 제국군은 다그치는 하사관의 음성에 고함을 지르며 돌격을 강행했다.
“와아아아-!”
“카이저 만세- 크아악!”
지속된 포격으로 무너져 내린 벽의 틈으로 기세 좋게 뛰어 들어간 제국군은 발을 딛자마자 찔러 들어오는 혁명군의 총검에 벌집 신세가 되었다.
“밀어붙여!”
“물러서지 마라!”
백병전에 돌입하자 사방에서 고함과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인간의 피륙을 총검이 파고드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서로가 악을 쓰며 밀고, 찌르며 엉겨 붙었다.
“이 비열한 게르마니아 침략자 놈들!”
“반란 폭도들을 죽여라!”
“틀어막아!”
혁명군은 최선을 다해 방어하려고 들었고 벽의 틈새를 지킬 때는 할만했지만, 배로 많은 제국군은 끝도 없이 밀려들고 이미 너덜너덜한 벽을 무너트리며 새 틈을 만들어 내자 방어선도 곧 흔들리기 시작했다.
“저, 저쪽 벽도 무너졌습니다!”
“이, 이런!”
“공격, 공격하라! 제국을 위해!”
결국 버티다 못한 혁명군 중 하나가 도망치기 시작했다.
“으, 으아아! 난 죽고 싶지 않아!”
“헉, 어디가!”
“이대론 다 죽을 거야!”
하나로 시작한 균열은 순식간에 퍼져 나가고, 제국군이 그 동요를 비집고 밀고 들어오며 절망이 퍼지는 순간.
“혁명군, 물러서지 마라! 총사령관 피에르 드 라파예트가 그대들을 도우러 왔다!”
마력으로 증폭된 음성은 온갖 전투의 고성과 소음으로 시끄러운 와중에도 명확하게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 직후, 말발굽 소리와 함께 일단의 기병들이 나타났다.
그들의 선두에서 말을 달리고 있는 라파예트 후작의 모습에, 양군 반응은 완전히 상반되었다.
“라, 라파예트 후작님이 와주셨다!”
“총사령관 각하가 오셨다! 물러나지 마라!”
혁명군은 도망쳐야 하나 고민하다가 크게 안도하며 다시 전의를 불태우고-
“무, 뭐라고?”
“빌어먹을, 또 그 작자인가!”
거의 외곽을 점령하기 직전에 놓여있던 제국군은 대번에 동요했고, 기껏 힘겹게 넘어선 벽을 향해 정말로 돌진해오고 있는 라파예트 후작과 흉갑기병대를 보곤 경악을 금하지 못했다.
“사, 사격해! 어서!”
제국군 장교가 다급하게 소리쳤지만 헛수고였다.
벽의 좁은 틈을 넘어 공격하며 엉망진창으로 백병전을 벌이던 자들이 사격하란다고 바로 대열을 갖추고 일제사격을 퍼붓는 일 따윈 일어나지 않았다.
그나마 일부 군사들이 급한 대로 총을 겨누고 발사했지만, 조준이 엉망진창이어서 총알은 하늘로 튀거나 엉뚱한 곳으로 날아갔다.
소수의 제대로 쏜 총알마저 라파예트 후작과 그를 따르는 흉갑기병들이 전면에 두른 푸르스름한 마력 방벽에 가로막혀 버렸다.
“으, 으아아-!”
“도망, 도망쳐!”
숱한 피해를 감수하며 어렵게 밀어붙인 제국군이 순식간에 혼란에 빠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돌격하라! 프랑지아를 위해!”
피에르가 검을 겨누며 외친 소리에 호응하듯, 프랑지아의 기병대가 일제히 검을 들어 올리며 무너져가는 제국군을 향해 뛰어들었다.
불운하게도 제일 앞에 나와 있던 적병에게는 검을 휘두를 필요도 없었다.
“으, 으아아-!”
질주해온 라파예트 후작의 군마에 걷어차인 병사는 마치 썩은 나무토막처럼 허공을 붕 떠서 벽 너머로 날아가 버렸다.
썩은 나무토막과 다른 점이라곤 그가 처절한 비명을 지르면서 허우적대며 날아갔고, 벽 안의 소란에 당황하던 적병들이 그들의 머리 위로 날아온 시체를 보고 경악했다는 것뿐이었다.
그 뒤에서 기병들의 돌진을 어떻게든 피하려고 바르작대던 군인들에겐 후작의 검이 날아들었다.
아무 낭비조차 없이 마력을 주입받고, 그걸 오히려 증폭시켜 푸르스름하게 빛나던 미스릴 검은 목표로 한 적병의 목을 단번에 끊어내는 것은 물론이고 그 뒤에 있던 자들마저 휩쓸어 버렸다.
“아아악!”
“히, 히익! 괴물!”
라파예트 후작에게 순식간에 여러 명이 당하고 그 뒤를 따라 돌진해온 흉갑기병들의 돌진에 짓밟히며 으깨지자, 제국군이 패닉에 빠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제국군은 그대로 등을 돌려 달아나려고 했다.
그러나 힘겹게 비집고 들어온 벽의 비좁은 틈새는 벽 밖에서 돌격을 명받고 진입하려는 병사들과 도망쳐 빠져나가려는 병사들의 혼란만을 가중시킬 뿐이었다.
“뭐야, 왜 나와! 소대장님은 전진을 명하셨다! 비켜!”
“너나 비켜, 난 살 거야!”
“밀지 마, 미친놈아!”
“으아악! 내 발, 내 발!”
발 디딜 틈도 없이 꽉꽉 채워져 허우적대는 게르마니아 제국군은 이미 전투고 뭐고 제대로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혁명군, 역습이다! 고립된 적들을 쓸어버려!”
“후작 각하를 따르라!”
“프랑지아를 위해!”
패주 직전까지 내몰렸던 혁명군이 라파예트 후작의 명령에 기세를 높이며 공세를 가하자, 벽에 갇힌 채 대혼란에 빠진 제국군에게 남은 건 처절하게 도륙당하는 일뿐이었다.
* * *
결국 메츠의 외곽을 거의 점령할 뻔한 제국군은 많은 병력을 잃으며 다시 벽 밖으로 내쫓겼다.
“하, 항복, 항복합니다!”
“살려주십시오!”
힘겹게 진입한 제국군 중 상당수가 아군에게 압사당하거나 일방적으로 유린당하고, 버티지 못한 자들이 선택할 길은 항복뿐이었다.
“……후.”
나는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한숨을 돌렸다.
하마터면 방어선이 무너질 뻔했지만, 다행히 제때 틀어막으면서 제국군에 상당한 피해를 입힐 수 있었다.
“후작 각하!”
나는 저쪽에서 급하게 달려온 전령을 보고, 그에게 말을 몰아 다가갔다.
“전황은?”
“모젤 평야에서는 지속적인 교전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여왕 폐하께서는 거의 탈진하셨지만, 적의 포병대도 상당히 소모된 듯하여 전황은 교착 상태입니다.”
수적으로 상당히 열세인 상황에서 제국이 프랑지아로 진입할 로렌 지방을 지키기 위해 내가 선택한 전략은 간단했다.
비교적 큰 도시인 메츠를 요새화시켜 지역 서부를 방어하고, 동부의 모젤 평야에는 바리케이트를 설치하고 다수의 포병대와 에리스를 배치해 적들을 최대한 소모시킨다.
동부에 포병을 다 몰아주면 적어도 동부에서는 포병전력에서 우리가 비슷은 할 수 있고, 거기에 에리스가 신성력으로 포격을 일부만 막아줘도 이쪽이 오히려 우위에 설 수 있으니까.
그리고 마력을 수련한 정예 흉갑기병대를 소방대로 편제해, 나와 가스통이 각각 이끌고 흔들리는 전선마다 원군으로 투입하여 만회한다.
그런 작전 아래 최대한 지연전을 펼치며 싸우고 있다.
신중하고 지휘에 능한 루이 드제를 총사령관 대리로 삼고, 여차하면 그에게 적절한 조언을 해줄 수 있는 알렉상드르 베르테르를 참모장으로 삼고 있어서 내가 직접 최전선을 돌아다닐 수 있다.
“메츠는 일단 한숨 돌렸다. 내 부대도 바로 모젤로 이동할 거니, 드제 사령관에게 조금만 더 버텨보라고 전달해.”
“알겠습니다, 사령관 각하! 그리고 미르보 백작의 전령이 전해온 소식입니다!”
“오, 그쪽은 어떻다고 하던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강을 지켜내고 있고, 바덴 백작을 포로로 잡았으니 염려 놓으시랍니다!”
“……뭐?”
지금 내가 막고 있는 이곳도 이렇게 아슬아슬한데, 그 자가?
이거 지금 거짓 보고하는 거 아니야?
“……알았다. 전령을 파견해서 백작에게 아주 잘 하고 있으니 그대로만 해달라고 치하해 줘. 아, 그리고 전령 보내는 김에 전황 제대로 파악하고 오라고 해.”
거짓이면 나중에 조져두면 되고, 사실이라면 대박을 친 거니 칭찬해 줘도 좋겠지.
……만약 사실이면 앞으로도 더 빡세게 굴려도 되겠는데.
“옛, 각하!”
전령이 떠나자마자, 나는 나를 따르는 부대장에게 명령했다.
“부대 재정비 시켜. 잠시 숨 돌리고 모젤로 바로 이동한다.”
“옛!”
나는 뒷수습에 한창인 혁명군을 흘긋 바라보았다.
“라파예트 후작 각하! 지원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총사령관 각하께 영광을!”
처절한 격전 끝에 엉망진창인 몰골인데도 나를 보자마자 감사를 표하거나 경례를 해서, 경례로 답해주면서도 기분은 복잡하다.
내가 직접 최전선을 돌며 이들과 함께 싸우고 있노라 알리며 사기를 고취시켜 버티고 있다지만, 결국 이들은 시간을 벌기 위해 싸우다 죽는 자들이니까.
나는 벌써부터 엉망이 되어버린 도시의 외벽과 군사들의 행색을 흘긋 보고 결론 내렸다.
아무래도 오래 버티기는 어렵겠군…….
* * *
이른 새벽, 게르마니아 제국군 사령부.
이틀간 이어진 격전 내내 사령부에 앉아 지휘하며 각 부대에 명령을 내리던 레오폴트 대공은 완전히 피로에 찌든 얼굴로 작전지도를 노려보고 있었다.
수적으로는 확실하게 우세했다.
메츠 요새에서도, 모젤 평야에서도 대공은 수적으로 압도적으로 유리한 싸움을 벌이고 있다.
그러나 적들은 요새화된 진지의 이점을 적극 이용하며 방어전을 펼쳤고, 제국군의 기대보다 훨씬 드높은 사기로 악착같이 버텼다.
대공은 쉴 새 없이 몰아붙이며 공격을 가했지만, 힘겹게 뚫어낼 만하면 라파예트 후작이나 가스통이 이끄는 소방대가 귀신같이 도착해서 기껏 열어젖힌 진입로를 다시 닫아버렸다.
마력을 수련한 기사와 흉갑기병대로 구성된 저들의 소방대는 그냥 평야 회전에서 상대해도 버거울 자들인데, 힘겹게 돌파한 쪽으로만 뛰어드니 이미 지치고 진영이 망가진 이들로는 도저히 버틸 수가 없다.
대공도 지난 전쟁 이후 흉갑기병들에게 마력을 수련시키며 정예병으로 육성하기는 했다.
그러나 프랑지아의 기사나 흉갑기병대와 대등할 지도 의문이고, 요새화 된 방어선 안쪽에서 내선기동을 벌이는 자들을 상대로 기병을 투입할 기회 자체를 찾기가 어려웠다.
호시탐탐 제국군의 측면을 노리며 후사르들을 사냥하고 다니는 추격기병대도 골치다.
라파예트의 중기병대와 결전을 벌이겠다고 중기병들을 다 투입하고 나면 후사르만으론 막을 수 없는 추격기병대가 그의 측면이나 후방의 포병대를 노리게 될 테니, 기병 결전을 섣불리 시도하기도 어렵다.
그나마 가장 힘으로 밀어붙이기 편한 모젤 평야에서는 요새화 진지에 포병대를 다 몰아넣고 성녀로 그들을 보호하며 일방적인 포격전을 벌인다는 반칙을 쓰고 있어서, 이쪽도 영 지지부진하다.
“정말 더럽기 짝이 없군.”
대공은 헛웃음을 흘렸다.
분명히 전력에서는 이쪽이 우위인데도 불구하고, 이쪽이 전력을 다 발휘할 수 없는 상황을 강요하며 끊임없는 손실만을 유도하고 있다.
대공은 검을 뽑아, 지도상의 메츠에 박아버렸다.
그래도 이제 전투 개시로부터 삼 일째, 대공의 꾸준한 공세로 저들의 방어선은 결국 붕괴 직전에 이르렀다.
오늘, 적의 방어선은 끝내 돌파당하고 말 거다.
결국 애초부터 이건 지려야 질 수가 없는 전투였고, 대공은 그런 전투를 패배로 끝낼 만큼 무능하지 않다.
그럼에도, 그의 표정은 펴질 줄을 몰랐다.
알자스로 보낸 군힐드 공작에게 별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지지는 말라고 충분히 줘서 보낸 부대로 변변한 전투도 못 해봤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아무 소득 없이 바덴 백작이 포로로 잡히기만 했다는 보고를 들었을 때는, 대공마저 어이가 없어서 당장 총공격을 펴라고 윽박지르며 전령을 보냈다.
대공의 이마에 잡힌 주름이 더욱 깊어졌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는 초조해지고 있었다.
대공은 벌써부터 제국군 내에서 암암리에 대공과 후작을 비교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안전한 후방에서 군사들을 계속 사지로 몰아넣는 아군 지휘관과, 적군이 위험에 빠질 때마다 나타나 앞장서 싸우는 적의 지휘관.
일선 병사들에게 어느 쪽이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할지는 말 할 것도 없다.
레오폴트 대공은 이제 60이 눈앞인데, 라파예트 후작은 고작 스물셋이다.
겨우 스물셋의 젊은 사령관이 토대도 없던 혁명군으로 저런 명성과 기량을 발휘하고 있는데, 저기서 더 경험을 쌓고 왕국 시절 이상의 군대를 재건한다면 어찌 될까?
비록 은퇴를 거부당하여 원하지도 않은 전쟁에 나섰지만, 대공도 영원히 군에 있을 수는 없다.
만약 그가 사라진다면 게르마니아 제국의 어느 누가 저 자를 상대할 수 있지?
레오폴트 대공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손으로 다크서클이 짙게 내려앉은 눈을 매만졌다.
그러나, 적어도 오늘은 라파예트 후작이 패배할 거다.
이번 전투에서 최대한의 피해를 입히고, 어떻게든 프랑지아를 재기불능으로 만들어야만-
“시, 실례합니다! 대공 전하!”
대공은 다급하게 뛰어 들어온 장교를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인가?”
“프랑지아군이 철수했다고 합니다!”
대공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뭐? 철수? 그게 무슨 말인가? 지금 철수하고 있다는 건가?”
“아, 아닙니다! 전하! 메츠와 모젤 평야의 적들이 모두 사라졌습니다!”
대공이 어이가 없어서 할 말을 잃은 가운데, 장교가 조심스러워하며 말했다.
“송구합니다, 대공 전하. 아무래도 어제 전투 후 밤사이 몰래 철수한 듯합니다. 전투로 군사들이 지친 데다, 적들이 깃발과 텐트를 그대로 놔둔 채로 철수해서 미처 눈치채지 못했-”
쾅!
장교의 말은 레오폴트 대공이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치는 소리에 끊겼다.
“하.”
메츠, 모젤 평야. 전부 프랑지아의 최전선 로렌을 지키기 위한 요충지 중의 요충지.
프랑지아는 반드시 지켜야 하고 게르마니아는 반드시 넘어서야 할 요충지이며, 적들은 그만큼 처절하게 맞서 싸우고 지형의 이점을 이용해 손실을 강요했다.
그런데, 그 요충지를 방어선이 뚫리기도 전에 버리고 물러나?
방어선이 한계에 달했다는 건 대공도 알고 그 자도 알았을 터다. 그렇다고 해도 이런 식으로 물러날 거라고 생각하지는 못했다.
레오폴트 대공이라면, 아니 그 어느 지휘관이라고 해도 그런 짓은 할 수 없다. 전술적으로는 훌륭할지 몰라도 그런 짓을 했다간 당장 본국에서 난리가 날 테니까.
하지만 이미 국민의회를 꽉 잡고 있고 여왕을 옹립한 장본인이며 경쟁자도 없는 군 총사령관이라면, 이런 짓도 가능하다.
저자는 처음부터 이럴 생각으로 전장을 이곳으로 정했고, 손실을 강요하며 미리 철수를 준비해두었다가 밤사이 도망쳐 버린 거다.
하다못해 후사르들이 제 역할이라도 하고 있었다면 또 모르겠으나, 눈을 막은 채 농락당하는 걸 직접 당해보니 기분은 배로 더러웠다.
“하, 하하, 하하하-!”
레오폴트 대공의 메마른 웃음소리만이 막사에 울려 퍼졌다.
게르마니아 제국군은 메츠를 함락시키며 프랑지아로의 교두보를 여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무수한 손실을 강요받으며 겨우 붕괴 직전까지 몰아붙였던 프랑지아군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으며 전력을 온존해 후퇴해버렸고, 그 대가는 비쌌다.
메츠에서 벌어진 전초전에서 라파예트의 후작의 프랑지아 혁명군이 5만 중 5,000의 손실을 내고 무사히 퇴각하는 동안, 레오폴트 대공의 게르마니아 제국군 9만은 12,000의 손실을 입었다.
전초전은 게르마니아 제국의 상처뿐인 승리로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