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혁명 수호 전쟁 - 전초전 (1)
수도 뤼미에르에서 출정한 혁명군은 게르마니아 제국과의 국경지대인 알자스 로렌으로 진군했다.
지난 전쟁에서는 국왕군과 제국군이 거점으로 썼고 우리가 공격한 지역이지만, 이번에는 우리가 이 지역을 방어하고 제국이 공격하는 입장이 되었다.
도착하자마자 방어선을 구축하도록 지시해둔 채, 나는 혁명군의 주요 지휘관들과 함께 작전 회의를 열었다.
“주민 대피는 어떻지?”
첫 전투에서 우리는 패배할 거다.
절대적으로 열세인 상황에서 그건 어떻게 해도 막기 어렵고, 자연히 최전선인 이 지역의 상실도 기정사실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지역의 주민을 대피시키기로 결정했다.
시가지를 요새화하고 싸우게 될 텐데 주민들이 있으면 피해가 우려되기도 하고, 무엇보다 우리가 패배하고 물러난 뒤 남은 주민들은 적들이 물자를 징발할 대상이 되니까.
내가 세운 전략을 위해서는 그런 사태를 최소화해야 한다.
“비교적 순조롭습니다. 처음에는 내키지 않아 하던 주민들도 여왕 폐하께서 친히 설득하시니 대부분 응했습니다만…….”
내 참모장 베르테르는 잠깐 말을 고르는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래도 떠나지 않으려는 자들은 있습니다. 강제로 소개시킬까요?”
“아니, 그럴 필요는 없어.”
에리스는 지금도 각지의 마을을 돌며 주민들을 설득하고 있는데, 그래도 버틸 정도로 고집 센 자들을 억지로 고향에서 몰아내서 살려봐야 불평불만만 나오겠지.
민심의 지지를 받는 것이 현재 우리 최대의 강점인데 그런 자충수를 두느니…….
“자신이 선택해서 남은 자들이니 겪을 일도 알아서 감당해야겠지.”
냉정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이 정도 했는데도 남은 자들이라면 전투에서 피해를 입든 제국군에게 약탈을 당하든 우리 책임은 아니다.
“휘유, 쿨하시군요.”
제롬 모렐이 휘파람을 불며 건들거렸지만, 나는 적당히 무시하고 지도를 짚으며 말했다.
“내 예상에 적들의 본대는 라인란트 방면, 로렌으로 진입할 거다. 알자스로 오려면 강을 건너야 하는데, 그러기엔 12만이라는 병력은 지나치게 많아.”
그러자 루이 드제가 입을 열었다.
“타당한 생각이십니다, 후작 각하. 하지만 레오폴트 대공은 기책도 즐겨 쓰는 지휘관입니다. 만일에 대비해 강을 지킬 병력도 어느 정도는 두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만. 넘치는 병력 중 일부만 할애해도 우리에게 위협을 가하기엔 충분하니까요.”
“좋은 의견이야, 드제 사령관. 그런 의미에서 미르보 백작.”
“어, 예? 저요?”
나는 어벙한 얼굴을 하고 있는 데미앙을 보며 싱긋 웃어 보였다.
“남부군에서 1만을 주겠네. 알자스로 향해서 강을 방어하게.”
“아니, 남부군 병력이 얼만데 고작 1만 가지고 뭘 하라고요? 적군이 12만인데 그중 얼마나 올 줄 알고…….”
“반대로 안 올 수도 있고, 강도 끼고 있잖나. 남부군의 나머지 병력은 가스통 장군이 지휘해서 주 전선을 보조해야 한다. 그러니 그대를 믿지. 불리한 상황에서 버티는 건 잘 하잖나.”
“아니, 또요? 그 괴물 같은 레오폴트 대공을 적은 병력으로 상대하는 걸 두 번 하라니. 위대하신 라파예트 후작 각하! 각하의 자비심과 통찰력이 저를 그런 사지로 다시 모는 일은 없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미안하지만 내 자비심과 통찰력을 의심하는 게 좋을걸. 명령에 번복은 없어, 백작.”
“그, 그럴 수가.”
반쯤 절망하는 데미앙에게, 나는 싱긋 웃으며 덧붙였다.
“만에 하나라도 태업하다 뚫리면 내가 어쩔 수 없이 아키텐 백작에게 그대를 위한 특별한 조치를 부탁할 수밖에 없어. 뭐, 그녀는 즐거워할 것 같다만.”
내 말을 들은 데미앙의 얼굴은 마치 공허 속에서 절규하는 듯한 괴팍한 모양새로 구겨졌다.
“그 꼴 당하기 싫으면 무슨 수를 쓰든 강을 지키게. 알겠나?”
“부, 분부대로…….”
“좋아, 그대는 미리 나가봐도 좋아.”
데미앙은 반쯤 혼이 나간 얼굴이 되어 지휘 막사를 빠져나갔다.
저렇게 한심하게 구는 인간이지만, 막상 굴려서 위기에 몰아넣으면 잘 하는 작자니까 어떻게든 하겠지.
그 어떻게든은 내가 알 바 아니고.
한동안 지휘 막사에 정적이 흐른 끝에, 제롬 모렐이 헛기침을 하더니 말했다.
“……크흠, 크흠. 후작 나으, 아니, 각하. 그간 제 말투가 조금 거슬리셨다면 앞으로는 주의하도록 하겠습니다.”
“좋군, 모렐. 그러지 않아도 그대를 위한 특별 명령을 준비해두고 있었는데.”
“예, 예?”
제롬 모렐이 대놓고 당황해서, 나는 씩 웃었다.
“내가 그대를 잡아먹기라도 할 것처럼 반응하는데, 너무 그렇게 겁먹을 필요 없어. 나는 일을 확실히 하는 사람들에겐 잘해주거든.”
“그, 그러십니까…….”
모렐은 입꼬리를 파들거리면서 억지로 웃어 보였다.
“알겠지만, 지난 전쟁 때 우리는 제대로 된 경기병 전력이 거의 없어서 게르마니아 제국의 후사르들에게 완전히 휘둘려야 했다.”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등골이 서늘하다.
전령이고 뭐고 다 차단당해서 아무런 정보도 모른 채로, 기껏 데미앙을 구원하려고 헐레벌떡 뛰어간 것이 무색하게 감과 예상만으로 레오폴트 대공과 줄다리기 협상을 해야 했다.
우리가 패주하거나 후퇴하는 순간 사냥하려고 호시탐탐 노리는 경기병들을 손 놓고 봐야 하는 건 두 번 하긴 싫은 경험이지.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추격기병대.
라파엘 발리앙이 오를레앙 공작의 기사들을 낚아내서 사냥할 때 썼던 카빈총 무장을 아예 제식화해서 육성한 경기병대다.
오를레앙 공작의 기사들이야 워낙 프랑지아 기사들 중에서도 최약체였고 매복한 경보병들과 사방에서 쏴댔으니 잡는 것이 가능했던 거지만, 경기병들을 상대할 땐 저걸로도 충분히 유효하겠지.
나는 싱긋 웃었다.
“모렐. 저들의 자부심인 후사르들에게 한 방 먹여보자고.”
“엥. 각하도 가십니까?”
“그럼 지휘 막사만 지키고 있을까?”
모렐은 기겁했지만, 나는 내 눈으로 직접 봐야 직성이 풀리는 부류라서.
우리가 열심히 키운 경기병들이 저들을 상대로 얼마나 유효할지 직접 보고 판단해야 이후의 계획도 세우지.
* * *
후사르.
중앙 대륙 전체를 통틀어 최고의 경기병이자 척후, 패잔병의 추격 섬멸에 능한 게르마니아 제국의 자랑거리.
그들은 이번에도 언제나처럼, 게르마니아 제국군 본대의 진격에 앞서 척후로서 앞장서 출발했다.
“뭐야, 경기병대인가?”
멋들어진 후사르 제복을 입은 게르마니아의 젊은 기병 장교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저 멀리에서 접근 중인 기병들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할까요, 중대장님?”
-30세가 넘어서도 살아 있는 후사르는 겁쟁이다.
그런 말이 돌 정도로 무모하고 겁대가리 없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남자들이 그들이다.
“어쩌긴 뭘 어째. 프랑지아 촌놈들이 감히 우리에게 맞선다니.”
중대장은 바로 사브르를 뽑아 들었고, 그에 맞춰 중대의 부하들도 검을 뽑아 들고 말을 몰았다.
“허, 저놈들 도망도 안 가?”
“최소한 기병을 자처할 자격은 있군요!”
지난 전쟁 때와 달리 이쪽으로 달려드는 적 기병대를 보며, 후사르들은 더욱 기세를 드높이며 돌진했다.
경기병대 특유의 작고 날렵한 말은 빠르게 가속하여, 거리는 순식간에 좁혀졌다.
그리고-
“어?”
“잠깐, 저 개새끼들 총으로-”
검을 들고 돌진하던 후사르들은 말 위에서 카빈총을 든 채 빠르게 접근 중인 프랑지아의 추격기병대를 보고 뒤늦게 당황했지만, 한껏 가속한 군마의 질주는 한순간에 멈춰 세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일제히 총성이 울리고, 바람 찢는 소리와 함께 여기저기서 총탄이 인간과 군마의 피륙을 파고드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컥, 비겁한 새끼들-”
“아아악!”
순식간에 여러 명이 총에 얻어맞고 낙마해 버리고, 쓰러진 동료 말의 시체에 다리가 걸린 군마와 함께 바닥을 구르는 자들이 속출했다.
“으, 으아…….”
경기병대 간의 싸움하면 당연히 용맹하게 사브르로 겨루는 것만 상정했던 후사르들이 당황하는 사이, 카빈총을 등에 멘 추격기병대가 일제히 사브르를 뽑아 들며 돌격했다.
“프랑지아를 위하여!”
“성녀 여왕 만세!”
“제길, 정신 차려! 맞서!”
기병과 기병들의 무리가 한데 엉켰다.
정면으로 부딪혀서 아예 엉켜 쓰러져 버리는 이들과, 검에 맞고 쓰러진 주인을 안장에 매단 채 질질 끌며 계속 내달리는 군마.
검이 맞부딪히는 소리와 비명, 다친 군마의 구슬픈 울음소리가 번져드는 가운데 후사르 중대장은 정신없이 싸우면서도 주변을 살피다 욕설을 내뱉었다.
“X발, 이러다 다 뒈지겠네.”
원래는 숫자가 비슷했는데, 멋모르고 전속력으로 질주하면서 맞은 일제사격은 덩치가 큰 기병들에게 치명적이었다.
“핫하, 이 몸이 바로 제롬 모렐 님이시다! 덤벼, 덤비라고!”
와중에 멋들어진 프랑지아 기병 제복을 입은 껄렁한 남자는 호탕하게 소리치며 검을 마구 휘둘러, 부하들을 도륙 냈다.
“입으로 싸우냐, 헉!”
모렐에게 덤벼든 후사르가 검을 휘둘렀지만, 모렐은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검으로 그의 검을 가볍게 쳐내버리고 당황하는 후사르의 배를 뚫어버렸다.
“마력……!”
일개 정찰대일 경기병대에 마력을 다룰 정도의 강자가 섞여있다는 것에 당황한 중대장이 저도 모르게 내뱉은 말.
그러나 그의 외침은 모렐의 주의를 아주 제대로 끌었다.
“오, 댁이 지휘관인가? 이리 와! 넌 내 거다!”
“이익, 후퇴, 일단 후퇴다!”
중대장은 얼마 남지 않은 후사르들에게 소리치고, 그에게 접근하려는 모렐을 피해 말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그러나-
“뭐야, 왜.”
등을 돌려 다급하게 도망치려던 중대장과 후사르들은 그들의 정면에서 달려드는 일단의 다른 경기병대를 보고 절망에 차서 멍한 소리를 내뱉었다.
본격적인 교전이 이루어지기 전에 경기병대의 역할은 정찰이다.
그에 걸맞게 중대 단위로 쪼개서 느슨하게 퍼트리는 것이 상식인데,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 경기병대가 또 있다고?
그들의 머리가 제대로 된 결론을 도출하기도 전에, 정면에서 질주해오던 경기병들이 카빈총을 겨누었다.
“억!”
“아악!”
총성이 울리고, 그나마 남아 있던 이들 중 반수 가까운 자들이 낙마해 버렸다.
“이런, 빌어처먹을…….”
중대장은 핏발 선 눈으로 돌진해오는 자들을 노려보다가, 그들의 선두에 고위 장교의 화려한 제복을 입은 남자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판단은 빨랐다. 어차피 뒤에서는 모렐과 경기병들이 추격해오고 있다면.
“후사르! 저기 내가 지휘관입네 선전하는 놈 보이나? 나를 따르라! 길동무라도 챙겨서 가자!”
“Jawohl!”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용맹 빼면 시체인 후사르들은 중대장을 따라 돌진했다.
그러나 중대장은 지근거리까지 돌진하여, 그 화려한 제복의 남자를 알아보고는 경악을 금하지 못했다.
“멋지군. 이 상황에 돌격이라.”
지나치게 유명해진 문장과 가슴팍에 흑장미 브로치를 단 남자.
“라, 라파예트 후작?”
그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후작의 검이 마치 빛으로 만들어지기라도 한 듯 푸른빛으로 번뜩였다.
중대장이 온 힘을 다해 휘두른 검은 후작의 검 앞에 허무하게 두 동강 나버렸다.
중대장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를 지나쳐 부하들을 도륙 내고 있는 후작을 보며 허탈하게 읊조렸다.
“X발, 저런 놈이 왜 정찰대에…….”
그는 말을 다 잇지 못한 채 피를 뿜어내며 낙마했다.
* * *
게르마니아 제국군 본대의 진중.
레오폴트 대공은 오만상을 다 찌푸린 채 하인리히 공작의 보고를 듣고 있었다.
“후사르의 20%가 당했다니. 정찰전에서? 적 경기병대에게?”
“송구합니다, 대공 전하. 적 경기병대의 전력을 오판한 데다, 처음 보는 전술이어서 부대 간 전파가 늦었습니다.”
“끄응…….”
레오폴트 대공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척후 임무를 맡는 후사르들은 중대 단위로 나누어, 비교적 넓은 지역에 산개시켜서 정찰 임무를 수행한다.
그러다 보니 한쪽에서 교전이 벌어져도, 다른 부대들은 그 정보를 제때 전달받을 수가 없는 것도 당연하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건 마치.
“……프랑지아 놈들, 경기병대를 정찰대로 운용하려고 육성한 것이 아닌 것 같구려?”
“예, 휴대도 불편할 카빈총에, 정찰에는 효율적이지 못한 간격이 좁은 포진, 그리고 마력을 익힌 고급 전력들이 각 부대를 지휘하고 있는 걸 보자면…….”
하인리히 공작은 마른침을 삼키더니 답했다.
“저들이 운용하는 경기병대의 창설 목적은 정찰이 아니라 우리 경기병대의 사냥인 것 같습니다.”
“하. 저들의 경기병대 명칭이 Chasseurs a cheval 이라고 했던가. 추격기병대, 내지 사냥기병대의 의미였지. 적절하게도 붙였군.
대공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제 와서 본국에 카빈총을 주문해 봐야 보급하고 훈련하려면 한세월일 테고, 적어도 이번 전쟁에서는 제국군의 자랑이던 경기병대의 우위가 완전히 수포로 돌아가는 셈이다.
“……후사르들의 정찰 편제를 대대 단위로 변경하고, 적 경기병대와의 교전은 절대로 피하라고 전달하시오.”
“그리하겠습니다, 대공 전하.”
레오폴트 대공은 심각한 얼굴로 작전지도를 내려다보았다.
바로 지난번 전쟁만 해도 후사르들로 척후와 정찰을 꽉 잡아놓고 편하게 전투를 치렀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전쟁에서 그걸 정확히 저격하는 편제를 들고나왔다?
“저들의 저력은 실로 놀랍기 그지없군.”
프랑지아가 자랑이던 기사들을 내전에서 전부 희생시키고 국토를 황폐화시킬 때, 제국은 저들을 비웃으며 얕잡아보았다.
그러나 저들은 기사가 없으면 아무것도 아닐 거라 믿고 방심한 제국에게 쓰디쓴 패배를 안겨주고, 그 내전의 피해를 극복하여 벌써 여기까지 따라왔다.
대공은 확신에 가까운 예감을 느꼈다.
지금, 여기가 게르마니아 제국이 저들을 압도할 수 있는 마지막 전장이다.
“정찰에 의존할 수 없으니, 기교 따위에 기대느니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철저한 전면전으로 저들을 붕괴시키겠소.”
대공은 지도 위에서 라파예트가 구축한, 알자스와 로렌에 걸친 방어선을 노려보며 읊조렸다.
“……저들은 지금 여기서 무너뜨려야 하오. 제국을 위해, 반드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