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혁명에 단두대는 필요없다-89화 (89/258)

89화. 총재 정부 - 결론

프랑지아의 수도, 뤼미에르.

이제 13살이 된 루이스 다키텐은 겨울방학을 맞이하여 오랜만에 수도의 아키텐 저택에 방문했다.

과격파들의 습격에서 깨어나고 얼마 안 있어 루이스를 마도 왕국으로 보내주었던 크리스틴은 저택 앞에 미리 나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누님.”

“어서 와, 루이스. 공부하느라 수고했어.”

오랜만에 만난 누이는 해사하게 웃으며 다가와서 루이스를 그대로 끌어안아 주었다.

누이에게서 풍기는 향기와 부드러운 몸의 감촉은 이제 사춘기를 맞이한 소년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누, 누님.”

“응?”

부드럽게 웃으면서 답한 누이에게, 루이스는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말했다.

“……살이, 조금 찌신 것 같네요.”

크리스틴이 짓고 있던 미소에 금이 갔다.

잠시의 침묵이 흐르고, 안고 있던 팔을 풀며 천천히 물러난 누이에게 루이스가 황급하게 덧붙였다.

“그, 그런 뜻이 아니고!”

“그, 피에르. 아니, 라파예트 후작님이 자꾸 먹는 거에 신경 쓰라고 해서…….”

어째 변명조로 말하던 누이가 루이스의 눈치를 살피더니 물었다.

“……많이 쪘니?”

루이스는 입을 몇 번 뻐끔거렸다.

뭘 제대로 챙겨 먹질 않아서 약혼자가 챙길 정도인 사람이 살이 찌면 얼마나 찐다고.

가슴팍에 배다른 누이의 가슴이 닿아서 당황한 나머지 아무렇게나 지껄인 말이었다고는, 입이 찢어져도 말할 수 없었다.

“보, 보기 좋아지셨어요, 전보다.”

“그래…… 고마워.”

아무리 봐도 크리스틴은 동생이 그녀를 배려해서 좋게 말해줬다고 생각하는 눈치여서, 루이스의 등을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문 앞에 너무 오래 세워뒀네. 들어가자.”

크리스틴이 애써 웃어준 다음 등을 돌려, 루이스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눈칫밥이나 먹던 신세에서 해방되어 마탑에서 교육받으며 나름대로 자신감도 붙어, 누이를 다시 만나게 되면 멋진 모습을 보여주려고 잔뜩 고민했었는데.

오랜만에 만난 누이와의 재회는 완전히 엉망진창이었다.

* * *

여독을 풀고, 다음 날.

루이스가 정신을 집중하자, 그의 손에서 강렬한 바람이 휘몰아쳤다.

닫아놓은 창문이 흔들릴 정도의 바람을 불러일으킨 루이스는 집중하느라 흐른 땀을 닦아내며 입을 열었다.

“어때요?”

고작 1년 조금 넘는 기간 만에 이 정도 성취를 거둔 루이스는 마탑에서도 나름 신동으로 알아준다.

특히나 바람 마법의 재능은 인정받는 편이어서 뿌듯하게 보여준 건데…….

“멋있어, 루이스.”

크리스틴은 여상한 어조로 답하며 그의 앞에 서류 더미를 내려놓았다.

하루라도 빨리 우수한 마법사가 되어서 누이에게도 당당하게 도움 되고 싶은 루이스와 달리, 그의 누이는 아무리 봐도 마법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 보였다.

아니면, 아직 미숙한 루이스 정도의 능력은 그녀의 눈에 차지 않던가.

루이스는 슬며시 미간을 좁히면서 크리스틴이 내려놓은 서류 더미를 바라보았다.

“겨울방학 동안 잠깐 들린 건데 이런 걸 봐야 하나요?”

“응, 중요한 내용만 파악할 수 있게 간단하게 추려준 거니까 그 정도는 괜찮지?”

루이스는 마법사가 될 자신이 누이 대신 아키텐 상단을 물려받을 것도 아닌데 이런 걸 왜 해야 하나 싶었지만, 유학 비용을 전부 크리스틴이 내어주고 있어서 별 수없이 서류를 보기 시작했다.

잠시 동안 서류에서 나는 종이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크리스틴의 깃펜이 사각거리는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혹시 마도 왕국에 게르마니아 제국과 계약하려는 마법사들이 있었니?”

침묵을 깬 크리스틴의 물음에, 루이스가 심드렁하게 답했다.

“아니요. 폭풍의 마녀가 라파예트 후작님에게 죽고, 실용파들의 입지가 많이 약해져서요. 마탑에선 역시 전쟁 같은 것보단 진리 추구가 우선이라는 기조가 더 강해졌죠.”

“그래, 다행이구나.”

현자로서 폭풍의 마녀라는 이명까지 얻었던 빌헬미나는 자신의 죽음으로 의도한 것과 전혀 다른 결과를 낳았다.

답한 루이스는 조금 고개를 갸웃하다가, 누이에게 물었다.

“누님은 이미 알고 계시는 사실 아닌가요?”

마도 왕국에 아키텐 상단이 없는 것도 아니고.

“정보의 교차 검증은 많이 할수록 좋으니까.”

너무나 크리스틴다운 답에, 루이스는 픽 웃었다.

반역자의 아들로서 가신들의 눈치를 보는 신세가 싫어서 누이의 집무실에서 지내던 시절에는 생각도 못 했는데, 막상 타지에서 지내니 이런 느낌이 조금 그리웠는지도 모르겠다.

루이스는 다음 서류를 꺼내고, 특이한 제목에 멈칫했다.

[앙리 남작 계획 결과 보고서]

이건 대체 뭐 하는 계획인가, 싶어서 펼쳐보자 안에 적힌 내용은 이러했다.

계획의 목적은 앙리 남작의 파산 유도와 방직 사업장의 확보.

1단계. 중앙당의 의원들에게 로비를 벌이느라 돈이 필요할 앙리 남작에게 기존의 사업장만으로는 납품하기 어렵지만, 대출을 통해 맞출 수는 있을 정도의 대규모 옷감 발주를 넣는다.

발주는 표면적으로는 아키텐 상단과 무관한 위성상단 C사를 통해 넣고, 그럴싸하게 꾸민 사업장을 직접 보여주며 후한 선수금을 제공하고 위약금을 제시해 의심을 덜어준다.

2단계. 앙리 남작은 거래를 성사시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대출을 받아 사업장을 확장하고 대규모 인력을 충원한다. 이때는 충분한 자격 검증을 하기 어려우므로, 생산자와 관리자에 첩자를 심는다.

3단계. 심어둔 첩자를 통해 일부 부실 상품을 제작하며 이를 숨기고, 발주한 물량이 대부분 완성되었을 즈음 위약금을 물어주고 계약을 파기.

위약금을 받더라도 이미 대출금이 쌓여있는 앙리 남작은 넘치는 물량을 손해 봐서라도 급히 처분하여 대출금을 상환하려 하므로, 다른 위성상단 D사를 통해 비교적 좋은 조건으로 옷감을 매입하기로 제안.

4단계. D사에서 물품을 수령 후 첩자들을 통해 생산하고 숨겼던 부실 상품들을 적발, 앙리 남작을 부당거래 혐의로 고발하여 대금 지급을 유보.

파산해 제대로 재판을 진행할 여력이 없는 앙리 남작에게 부채 탕감을 조건으로 사업장 매입완료.

아키텐 상단과의 연관성이 드러난 C사와 D사는 재판 종료 후 통폐합 및 처분 예정, 추후 계획에 이용하기 위한 위성상단 별도 설립 필요.

마치 별것 아닌 것처럼 건조하게 기재되어 있지만, 철두철미하다 못해 악의까지 느껴지는 계획의 진행을 본 루이스는 마른침을 삼켰다.

“……누님?”

“응? 말하렴, 루이스.”

“이 앙리 남작인가 하는 사람이 대체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렇게까지…….”

“아, 그 사람.”

크리스틴은 슬며시 고개를 기울이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답했다.

“방계 왕족이라고 왕위를 노려서, 라파예트 후작님의 계획에 방해되었거든.”

“…….”

“겸사겸사 방직 사업장도 확보하면 좋잖아?”

라파예트 후작을 위해서라면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이런 짓을 벌이는 건가.

루이스는 할 말을 잃은 채,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서류작업에 들어간 누이를 바라보았다.

누이가 아예 죽지 못해 살아가는 것 같아서, 차라리 라파예트 후작 그자와 잘 되기를 바란 것은 루이스였다.

그렇다고는 해도 역시 이런 건 조금, 다른 의미로 문제가 아닐까.

“으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역시 너무한 것이 아닌지…….”

“적의 허점을 경제적으로 공격하는 게 정의롭지 못하니?”

“아뇨, 그렇게까지 말하지는 않겠지만…….”

“나는 상단 직원들의 헌신에 충분한 보상을 해주고 있어. 이번에 매입한 앙리 남작의 사업장도, 이전보다 훨씬 나은 대우에 만족하고 있고. 상인에게 필요한 정의는 그런 거란다, 루이스.”

“으으음, 누님의 말씀이 틀린 건 아닌 것 같은데요…….”

루이스는 고민 끝에 쓴웃음을 지었다.

“저는 역시, 누님처럼 할 순 없을 것 같아요.”

“그러면? 만약 네가 상단을 운영한다고 가정하면…….”

“가신들이 듣기만 해도 절 찔러 죽일 것 같은 무서운 말씀을 하시네요.”

크리스틴은 쿡 웃더니 다시 물었다.

“어디까지나 가정이니까. 만약 그렇게 된다면, 너는 무슨 일을 하고 싶은데?”

루이스는 조금 우물쭈물거리더니 답했다.

“기왕 돈 벌어서 쓰는 거, 좀 좋게 쓰는 게…….”

“아키텐 상단은 프랑지아에서 가장 자선사업을 많이 하는 상단일걸?”

“그, 그렇죠.”

어색하게 웃는 루이스에게, 크리스틴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악마처럼 벌어서 만든 상단이니 천사처럼 쓰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모르지. 느긋하게 고민해 봐도 좋아. 어차피 아직은 시간이 많으니까.”

루이스는 할 말이 없어져서, 말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누님, 라파예트 후작님과 결혼은 안 하세요?”

루이스도 바보가 아니니, 크리스틴이 결혼하는 것이 자신의 입지에 더 안 좋을 수도 있다는 정도는 알고 있다.

하지만 그건 그의 사정이고, 누이나 라파예트 후작은 약혼한 사이고 혼기는 진작에 찼는데도 아무런 소식이 없는 것은 이상하다.

“응, 아직은.”

정작 크리스틴은 여상하게 답해서, 루이스는 언제 봐도 무슨 생각 하는지 모를 누이를 빤히 보다가 다시 서류로 시선을 내렸다.

설마하니 정말로 그에게 상단을 물려주려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잠깐 떠오른 망상에, 루이스는 고개를 열심히 휘저었다.

미쳤지, 미쳤어.

아키텐 상단이 무슨 지방의 작은 상단도 아니고, 누이가 그런 짓을 하려고 들었다간 가신들은 둘째치고 남편 될 사람부터 루이스의 목을 따려 들 거다.

루이스는 괜스레 서류를 노려보았다.

이게 다 저 속도 모를 누이가 그에게 아키텐 상단의 기밀과 보고서를 쓸데없이 들이밀어서 드는 잡생각이다.

“너는?”

“네?”

잡념 속에 크리스틴이 갑작스럽게 물어, 루이스는 바보 같은 목소리로 답했다.

“편지에 사귀는 사람 이야기가 없어서 궁금하던 참인데. 한참 관심 많을 나이 아니니?”

“……누, 누님이나 잘하세요! 약혼만 해놓고 안심하고 있다가 라파예트 후작님이 눈 돌리면 어쩌시려고요!”

확 달아오른 얼굴로 답하는 13세 동생의 말에, 크리스틴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 * *

알프스 왕국, 9번째 봉우리.

양국 대표단이 모인 회담장.

근 한 달에 가까운 줄다리기 끝에, 게르마니아 제국의 외무상은 저들이 내린 결론에 따른 성명서를 읽고 있었다.

“게르마니아 제국의 위대한 카이저 오토 폐하를 대신하여, 프랑지아 왕국 대표단과의 최종 협상 결과에 대해 밝히는 바다.

첫째, 프랑지아 공화국은 국왕을 평민들의 투표로 선출하자는 무리하고 부당한 요구를 고수하고 있으며, 선출권을 자격 있는 계층으로 제한하자는 요구에 지속적인 대답 회피로 사실상 거부하였다.

둘째, 프랑지아의 정통성 있는 귀족들이 상당수 희생되었으므로, 적법하고 권위 있는 외국 귀족들을 선출 과정에 개입시키자는 제안 또한 지속적인 대답 회피로 사실상 거부하였다.

셋째, 정당한 왕국의 주인을 몰아낸 불법 괴뢰정권 프랑지아 국민의회는 적법한 왕국의 주인에게 응당 주어져야 마땅한 권리조차 부정하며, 이를 조정하는 것에도 극히 소극적으로 대응했다.

따라서 본 대표단은 프랑지아 국민의회가 3왕녀 전하를 꼭두각시로 세워 괴뢰정권을 통한 프랑지아 통치를 계속하고자 하며, 프랑지아 대표단에 왕위 계승 문제를 본질적으로 해결할 의사가 없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의거, 프랑지아 왕위 계승 문제 해결을 위한 양측의 협상이 최종적으로 결렬되었음을 선언한다.

본 문제 해결을 위해 비외교적 수단이 불가피하게 동원될 수 있으나, 이는 프랑지아 국민의회 괴뢰정권의 책임임을 분명히 한다.”

잠시의 침묵이 흐른 회담장에 짝-짝-짝- 세 번의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소리를 낸 장본인, 탈레랑은 그의 앞에 놓인 홍차를 느긋하게 한 모금 마시더니 천천히 그것을 삼키고서야 입을 열었다.

“첫째, 국민에 의해 수립된 프랑지아 정부에는 국왕을 선출할 방식을 정할 정당한 권리가 있으며, 외국이 무리한 요구를 강요하는 것은 내정간섭에 지나지 않는다.

둘째, 자국의 국왕을 선출하는데 외국 귀족의 투표를 허용하라는 요구야말로 외국의 주권 침해를 받아들여 괴뢰정권을 수립하라는 부당한 요구이다.

셋째, 정당한 프랑지아 왕위의 계승권자이자 신성 교국에서 성녀로 인정한 에실리스테 릴리안느 드 프랑지아 왕녀 전하께서 국민의회가 부여하는 왕의 권리와 책임을 인정하셨는데, 이를 일방적으로 부정하는 게르마니아 제국의 주장에는 정당성이 없다.

이와 같이 게르마니아 제국의 부당한 요구를 거부한 것은 프랑지아 국민의 뜻을 대변하는 국민의회의 당연한 의무이며, 왕위 계승 문제 해결을 포기하고 갈등을 격화시킨 것은 게르마니아 제국의 책임임을 분명히 한다.”

마치 준비해두기라도 했던 것처럼 말을 마친 탈레랑은 자리에 앉은 체칠리아를 똑바로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 원하던 결론을 도출하기 위한 회담 수고하셨습니다.”

체칠리아가 조소를 짓자, 탈레랑은 그녀를 쏘아보며 덧붙였다.

“하나 기억하시길. 프랑지아의 혁명은 그대들을 위협한 적이 없습니다. 우리를 위협으로 간주하고 부당한 명분으로 위협하는 것은 그대들이며, 적법한 왕위 계승권자이신 3왕녀 전하와의 경쟁을 이길 방법도 명분도 없어서 억지 주장을 펴는 것도 그대들입니다.”

결국, 신성 교국이 인정하는 성녀인 에리스의 정통성을 부정할 수 없어 저들이 택한 것은 국민의회가 에리스를 괴뢰 여왕으로 세울 거라는 어설픈 주장에 불과하다.

“그동안 어찌 참고 그리 고상하게 외교적 수사만을 입에 담으셨는지 궁금해지는군.”

체칠리아가 이죽이자, 탈레랑은 내게로 시선을 돌리며 답했다.

“제가 맡은 피 흘리지 않는 전쟁은 끝났고, 이제 피 흘리는 외교의 차례가 되었으니까요, 전하.”

탈레랑이 자리에서 일어서, 우리 또한 일어났다.

“그토록 원하던 전쟁을 준비하시되, 명심하십시오. 그대들이 가져다 붙인 억지 명분이야말로, 그대들을 옥죄고 압박할 실재하는 위협이 될 것입니다.”

탈레랑의 마지막 말에 답한 자는 아무도 없었고, 그는 나에게로 성큼성큼 다가와서 쓴웃음을 지었다.

“이제부터는 후작님의 차례군요.”

“맡겨주시길, 총재.”

나는 자리에 앉아 딱딱한 얼굴을 하고 있는 레오폴트 대공을 흘긋 본 다음, 등을 돌렸다.

혁명을 수호하기 위한 전쟁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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