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총재 정부 - 군인과 검
방 안에 에리스만 남겨두고 나와 안절부절못하는 제니를 보몽 경과 함께 달래주고 있자, 레오폴트 대공이 다가왔다.
“라파예트 후작, 이렇게 만난 것도 오랜만인데 두 분 전하를 기다리는 김에 잠시 대화라도 하시겠소? 응접실이 따로 있소.”
나는 에리스가 들어가 있는 방을 흘긋 본 다음 답했다.
“저도 그러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오늘은 왕녀 전하를 모시는 임무를 맡은 지라 자리를 비우기는 곤란하군요. 조금 떨어져서 대화하는 정도라면 괜찮습니다만.”
레오폴트 대공은 내 답에 픽 웃더니, 나와 함께 방에서 조금 물러난 뒤 품에서 시가를 꺼냈다.
“한 대 피우시겠소?”
“마음만 감사히.”
대공은 꽤 익숙한 듯, 선 채로도 시종의 도움을 받아 시가의 캡을 잘라내고 불을 붙였다.
시가의 불이 약해질 때까지 잠깐 기다리는 사이, 대공이 입을 열었다.
“결국, 다시 전쟁을 하게 될 모양인가 보오?”
“제국이 그걸 원하니까요, 대공 전하.”
레오폴트 대공은 시가를 입에 물고 잠시 향을 음미하는 듯하더니 답했다.
“틀린 말은 아니로군.”
그렇게 말하는 대공은 꽤 착잡한 기색이었다.
데미앙의 남부군을 구하기 위해 대치했을 때 보여주었던 백전노장의 여유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마지막에 싸운 전장에서 그와 직접 대면하지는 못했지만, 그 패배가 그의 심경에 큰 변화라도 준 걸까.
대공은 말없이 시가를 태우다가 입을 열었다.
“아, 그래. 축하드리오. 명실공히 프랑지아군의 일인자가 되셨지.”
“……감사합니다. 축하받을 일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원래 경쟁자와 공존하는 건 어려운 일 아니겠소.”
대공은 여상하게 말하더니, 잠시 뒤에 덧붙였다.
“아쉽기는 하군.”
“전장에서 되갚아줄 수 없게 되셔서 말입니까?”
“글쎄.”
대공은 쓴웃음을 지으며 애매하게 답하더니, 다른 말을 했다.
“지난 전쟁 후, 나는 은퇴하려고 했다오.”
“그렇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 대표단에 왔다는 건, 거부당했다는 소리군.
프랑지아군 총사령관인 내가 대표단에 같이 온다고 했으니, 제국도 그만한 이름값이 있는 대공을 내세운 건가.
“유감이군요.”
“무얼, 군사들의 피를 흘려서 명예를 얻는 자들이 우리네 족속 아닌가.”
대공은 시가의 연기를 들이마시더니 씩 웃었다.
“그렇게 쌓아 올린 전공으로 조국이 하사한 명예를 누렸으니, 부름에 응할 책임을 외면할 수 없을 뿐이지.”
나는 가만히 대공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지난 전쟁에서 프랑지아는 준비되지 않았고, 제국도 전력을 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닙니다, 대공 전하.”
대공은 조용히 시가의 연기를 맛볼 뿐, 답하지 않았다.
“또다시 전쟁이 터진다면 양쪽 모두 끝을 봐야 합니다. 제국의 명분은 이미 흔들렸는데, 황후의 야망을 위해 제국이 흔들릴지도 모르는 전쟁을 해야만 합니까?”
대공은 씩 웃으며 말했다.
“그대가 부럽군.”
“……무슨 말씀이신지.”
대공은 다 태운 시가를 시종에게 건네주며 덧붙였다.
“카이저께서 카이제린을 위한 전쟁을 준비하신다면, 나는 카이저의 뜻을 따를 뿐이오.”
“그 결과 제국이 위험에 빠지고, 죽지 않아도 될 제국의 군사들이 희생된다고 해도 말입니까?”
“……그건 애석한 일이지. 하나, 후작. 우리의 임무가 군사들의 생명을 걱정하는 일인가?”
“…….”
“나는 제국의 황족이오. 그런 내가 전쟁영웅이자 대공으로서 남을 수 있던 것은 정치에 뜻을 두지 않겠다는 나를 믿고, 군대를 맡겨주신 카이저의 은덕이지.”
대공의 입가에는 씁쓸한 미소가 번졌으나-
“설사 내가 반대하고 지휘를 거부한다 해도, 카이저께서는 카이제린의 뜻을 따르실 거요.”
그 눈에는 흔들림이 없다.
“희생된 군사들을 애도할지라도, 군인이란 무릇 반드시 지켜야만 할 것을 위해 싸우는 법. 카이저께서 위험한 길을 가신다면, 나는 기꺼이 그분의 검이 되어 그 길을 열 뿐이오.”
그렇군.
나 또한 숱하게 희생되는 군사들을 안타까워할 수는 있으나, 그들을 위해 크리스틴을 져버릴 수는 없으니.
그러나.
“잘못된 길임을 알고도 맹목적으로 따른다. 그것이 정녕 지키는 길입니까, 대공 전하.”
대공의 생각은 알겠다.
만약 크리스틴이, 내 사람들이 없다면 나 또한 프랑지아를 지킬 가치를 느끼지 못할 테니.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만약 크리스틴이나 그들이 명백하게 잘못된 길을 가려고 한다면 나는 그들을 설득할 거다.
내가 잘못된 길을 가려고 한다면 크리스틴 또한 그러리라 믿으며, 에리스는 반드시 그러겠지.
적어도 나는, 우리는 잘못된 길을 바로잡으려고 애썼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시작부터 잘못된 길이라면 대공 전하께서 충성을 다하고 역량을 발휘하신들, 조금 더 멀리 갈 수 있게 될 뿐입니다. 언젠가, 쌓이고 쌓인 균열을 도저히 막을 수 없게 된 순간 대공 전하께서 그토록 애써 지켜온 것이 무너지겠지요.”
대공은 굳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몇 번이나 입을 열었다 닫은 끝에, 그는 억눌린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적국의 장군에게 할만한 말은 아닌 것 같구려, 후작. 군인에게는 군인에게 어울리는 대화가 있는 법이지. 그대의 생각이 그러하다면, 전장에서 관철시켜 보이시오.”
나는 가만히 대공을 바라보다가 답했다.
“……그러시다면, 제가 반드시 지켜야만 할 것을 위해 전장에서 대공 전하를 가로막아 보이지요.”
내가 말을 마친 다음 순간 문이 열리고, 에리스가 걸어 나왔다.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나를 보곤 살짝 웃는 에리스의 모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다시 대공을 바라보자 그는 다소 딱딱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전장에서 보지, 라파예트 후작.”
“기대하겠습니다, 대공 전하.”
* * *
그로부터 일주일이 흘렀고, 그동안 양측 대표단은 두 차례의 정식 회담을 진행했다.
탈레랑은 능숙한 실력으로 회담을 주도해나갔으나, 황후 체칠리아 또한 녹록하지 않아 프랑지아가 거부할 수밖에 없는 안건들을 집요하게 밀어붙였다.
결국 시간의 문제일 뿐, 양측 모두 이것이 더 이상 타협의 여지가 없음을 도출하기 위한 회담임을 알고 있다.
두 번째 회담을 마친 시점에 나는 본국으로 사람을 보내, 국민의회에 군사 동원 준비 안건을 제출하게 했다.
아마도, 게르마니아 제국도 대충 비슷하게 했겠지.
그러던 중 알프스 왕국의 산맥 왕, 아홉 번째 봉우리의 라주린이 만찬을 열고 우리를 초대했다.
* * *
문화 차이를 감안해서 별로 기대는 안 했는데, 준비 된 드워프들의 요리는 생각보다 맛이 괜찮았다.
푸짐한 양고기와 치즈, 버터를 듬뿍 쓴 기름진 요리들, 으깨고 고기 소스를 부은 감자와 치즈에 찍어먹는 퐁듀 등 프랑지아와는 다른 요리들이 식탁을 가득 메워 입맛을 돋운다.
공통점이 있다면, 하나같이 맥주랑 먹기 좋은 것들뿐이군.
대표단에까지 자신의 전속 주방장을 데리고 올 정도로 요리에 집착하는 탈레랑 덕분에 우리 입맛이 제법 높아진 상황이란 걸 감안하면, 이들도 나름대로 자기네 식문화에 자부심을 가질만한 거지.
에리스는 신이 나서 드워프들의 이색적인 요리를 즐기며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다.
계승권 포기를 요구할 줄은 몰랐지만, 꽤나 걱정했던 황후와의 대면은 별일 없었던 것 같아서 다행이군.
내가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 에리스는 준비된 요리 중 정체불명의 길쭉한 튀김을 한입 베어 물고 우물거리더니 감탄했다.
“음~! 이거 맛있어요!”
“왕녀 전하의 입맛에도 맞으신다니 다행이군요.”
탈레랑이 묘하게 뿌듯해해서, 나도 하나 집어먹어 보았다.
이 요리가 드워프들에게 밀을 수출할 수 있게 만든 그거라 이거지.
손가락 크기의 길쭉한 막대 형태의 튀김을 토마토소스에 찍어 입에 넣자, 안에서 부드러운 치즈가 늘어나며 씹혀 맛의 조화를 이룬다.
계란과 밀가루를 쓴 바삭한 표면과 안의 치즈가 토마토소스와 함께 어우러지는 것이…….
“이건, 맥주와 잘 어울리겠군요.”
“오, 역시 후작님! 바로 그겁니다! 와인의 우수함을 모르는 드워프, 앗, 실례.”
탈레랑은 이쪽에 주의를 기울이는 드워프가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는 다시 덧붙였다.
“아무튼 맥주라면 좋아 죽고 치즈를 즐겨 먹는 드워프들에게 어필하기에 최적의 요리죠! 오랜 시간의 연구와 고심 끝에 탄생한 결정체, 제 자랑입니다!”
……다행히 드워프들이 우리와 자신들의 식탁을 분리해서 대접했으니 망정이지, 그 능숙한 외교관이 이런 초보적인 실수를 할 정도라니.
이 사람 대체 요리에 얼마나 진심인 거야.
“그래서 이 요리의 이름이 뭐라고요?”
“Freundschaftsleiste.”
“……뭐라고요?”
“하하, 저들 말로 친구 막대라는 뜻이랍니다.”
친구 막대라. 음식 이름으로서는 좀 애매하고 간단하면서도, 드워프들이 이 요리를 얼마나 마음에 들어했는 지 확실히 알 것 같은 이름이다.
하긴, 이 콧대 높은 드워프들이 우리의 교역 요청을 거부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 다시 그걸 성사시킬 정도면 대단한 거지.
그러고 있자, 관문 수호대장 글라스텍이 다가와서 걸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하하, 즐기고들 계시는 것 같구려! 잠시 실례하겠소이다! 우리 요리는 입에들 맞으시오?”
“네! 굉장히 맛있어요!”
에리스가 누가 봐도 진심이 듬뿍 담긴 목소리로 환하게 웃으며 답하자, 글라스텍은 기쁘긴 기쁜데 미혼의 여성에게 말을 걸 수 없어서 어쩔 줄을 모르더니 탈레랑에게 말했다.
“우, 우리가 무척이나 기뻐하노라고 왕녀 전하께 전해주시오!”
“하하, 물론입니다, 친구!”
수염이 덥수룩한 근육질의 배 나온 드워프가 저러는 걸 보자니 이건 또 귀엽네.
글라스텍은 입가를 손으로 가리며 웃는 에리스를 바라보더니, 의외로 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라파예트 사령관. 폐하께서 부르시오.”
“폐하께서 말씀이십니까?”
한번 인사했을 때 외에는 저들의 왕인 라주린과 볼 일이 없었는데, 나를?
“그렇소! 이게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지를 말하지 않을 수가 없겠구만. 왕께서 마지막으로 인간을 직접 부르신 적은 내가 알기로 23년하고도…….”
“자자, 친구. 저와 이야기합시다. 왕께서 부르신다니 라파예트 후작님은 가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오오, 그렇지! 탈레랑, 이 친구. 대표단과 함께 있는 것도 좋지만 우리가 심심하지 않나! 자, 이쪽으로 오게나! 우리 그동안 쌓인 회포를 풀어야…….”
탈레랑은 나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더니, 글라스텍에게 이끌려 왁자지껄하게 떠들고 있는 드워프들의 자리로 끌려갔다.
이걸 고맙다고 해야 할지, 저걸 상대할 수 있어서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나는 슥 시선을 돌려, 다른 이들의 테이블과 조금 떨어진 옥좌에 앉아 맥주잔을 손에 든 라주린에게로 다가갔다.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폐하.”
라주린은 들고 있던 맥주를 호쾌하게 벌컥벌컥 들이켰다.
저렇게 마시면서 길고 흰 수염에는 맥주를 거의 묻히지 않는 걸 보자니, 재주도 좋네.
라주린은 한참이 지나고서야 입을 열었다.
“그대들은 결국 전쟁을 할 모양이지?”
……첫 대면부터, 참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왕이란 말이지.
“송구하나 폐하, 아직 확정된 것은 아닙니다.
라주린은 남은 맥주를 다시 벌컥벌컥 들이켜더니, 빈 잔을 옆의 탁자에 내려놓고 입을 열었다.
“그대들의 분쟁이 우리에게 피해 입히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프랑지아군의 총사령관으로서, 저는 물론 그리되도록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폐하.”
내 답을 들은 라주린은 픽- 바람 빠지는 듯한 소리를 냈다.
길고 흰 수염과 여전히 근엄한 표정 때문에 정확히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다만.
그는 옥좌에 기대어 둔 검집을 들어올렸다.
옥좌에 기대둬서 당연히 그의 검일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그에겐 좀 긴데-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라주린은 검집을 나에게 던졌다.
반사적으로 받아들자, 검집부터가 내 검과 굉장히 비슷한 형태로 보인다.
그렇게 생각하며 슬쩍 검집에서 뽑아보자, 검신에서 미미하게 마력이 느껴졌다.
살짝 마력을 운용해보자, 검이 그것을 자연스럽게 흡수하는 건 물론 오히려 내 마력 운용을 돕는다.
강철로만 만든 검과는 차원이 다른 마력 친화.
이거, 설마.
“……미스릴을 조합해서 만든 검입니까, 폐하?”
라주린은 다시 옥좌에 앉더니 툭 던지듯 말했다.
“그대의 검이니, 가져가라.”
아무리 드워프라지만, 이런 걸 별거 아닌 것처럼 던져준다고?
“감사드립니다, 폐하. 이런 물건을…….”
정작 라주린은 코웃음을 쳤다.
“착각하지 말도록. 우리에게 미스릴을 공급하는 나라의 총사령관이라는 자가 너무 형편없는 검을 들고 다녀서야 우리의 위신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여, 남는 재료로 만든 것뿐이다.”
그러곤 물러가라는 듯 손짓을 해보였다.
여전히 무뚝뚝하고 불친절하여,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드워프다만.
대충 반만 뽑아본 내 검의 형태를 그대로 기억해서 이런 걸 만들어준 건가?
나는 그를 불쾌한 드워프로 여겼던 인식을 정정하며, 그에게 정중히 허리를 숙여보였다.
“영광입니다, 폐하. 이 은혜는 꼭…….”
내 말은 라주린의 퉁명스러운 말에 끊겼다.
“잊든 말든 내 알 바 아니니, 미스릴이나 꾸준히 수출하도록 하라. 물러가보도록.”
하하, 이것 참. 기대도 안 한 걸 받았네.
“명심하겠습니다, 폐하.”
그렇게 물러나는데, 라주린이 뒤늦게 생각났다는 듯 나에게 툭 던지듯 한 마디 더 했다.
“……그대가 탐욕스러운 인간이라고는 해도, 짐의 작품을 팔아치울 정도로 배은망덕하진 않을 거라 믿겠다.”
별거 아닌 거라는 듯이 던져주고선 뒤늦게 저런 걸 걱정한다니.
나는 하마터면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거만하고 무뚝뚝해, 퉁명스럽다던 드워프들도 알고 보니 제법 귀엽지 않나.
물론 이런 내 속내를 알면 저 왕이 좋아할 것 같지는 않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