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총재 정부 - 거울
“정말 너무 아름다우세요, 왕녀님.”
“언제나 고마워.”
시녀 제니의 호들갑에, 에리스는 웃으면서 답했다.
에리스가 보기에도 오늘은 시녀가 아주 힘을 줘서 공들여 꾸며준 덕분에, 화장이나 머리나 화사하기 그지없다.
“그래도 이번에는 꼭 드레스를 입혀드리고 싶었는데.”
“미안해, 제니. 나는 역시 그런 건 조금…….”
“네네, 사치스러운 드레스 같은데 쓸 돈 있으면 자선 활동에 더 쓰신다고요.”
다 안다는 듯이 끄덕이며 답하는 시녀에게, 에리스는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고 에리스도 드레스 같은데 쓸 돈이라면 그런 쪽에 쓰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지만, 그게 드레스를 입지 않는 진짜 이유는 아니다.
진짜 이유는 그런 걸 다시 입게 되면 드레스를 입고 다니던 시절을, 어머니와 함께 궁에 머무르며 부족함도 어려움도 모른 채 살던 때를 그리워하게 될까 봐.
그런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를 성녀다운 이유로 알아서들 착각해 주니까, 굳이 정정해 주지 않을 뿐.
에리스가 어색하게 웃고 있자 마차가 멈춰 서고, 노크 소리가 들렸다.
“도착했습니다, 왕녀 전하.”
마차 문이 열리고, 에리스는 피에르가 내민 손을 보곤 빙긋 웃으며 그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렸다.
게르마니아 제국의 군사들이 거리를 둔 채 예를 갖추고, 저 멀리 에리스에게도 익숙한 문장이 보였다.
레오폴트 대공가의 문장.
피에르는 에리스를 에스코트하면서, 낮게 속삭였다.
“미리 말해뒀지만, 황후가 주는 건 뭐든 먹으면 안 됩니다.”
“티타임에선 결례가 아닐까요?”
“결례지만, 적국 상대로 그런 사소한 예의 차릴 필요 없습니다. 중요한 건 왕녀 전하의 안전이죠. 알프스 왕국이 경고는 했지만, 황후는 악마들과 거래하고 있습니다. 즉효성이 아닌 독이라도 얼마든지 쓸 수 있겠죠.”
그러지 않아도 대표단에서 아주 호들갑을 떨며, 시녀 제니가 에리스가 티타임에서 먹을 다과는 물론 차까지 챙긴 바구니를 들고 따라오고 있다.
“알았어요. 음, 혹시 무슨 일이 있으면…….”
“그럼 그냥 신성력을 끌어내서 폭발시키십시오. 무슨 일이 있어도 구해드리겠습니다.”
타국 수도 한복판에서 난장판을 벌이라는 소리를 너무 태연하게 한다.
그런 피에르가 든든하기도 하고 조금 재미있어서, 에리스는 일부러 조금 소리 높여서 답했다.
“라파예트 후작님만 믿을게요.”
뒤에서 따라오던 호위기사 프레데릭 드 보몽 경이 저는요? 하는 얼굴을 해서, 에리스는 쿡쿡 웃었다.
“프랑크 아저씨도요.”
걸음 끝에 잡담의 시간은 끝났고, 에리스는 자연스럽게 미소 지은 채 적국의 노장과 마주했다.
“어서 오십시오, 에실리스테 릴리안느 드 프랑지아 왕녀 전하. ……그리고 오랜만이구려. 라파예트 후작.”
“반갑습니다, 레오폴트 대공님.”
“레오폴트 대공 전하.”
백발이 성성한 레오폴트 대공은 피에르에게 시선을 잠시 향하더니, 이내 에리스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프랑지아의 성녀님께서 이렇게 젊고 아름다운 분이신 줄은 미처 몰랐군요.”
“과찬이시네요, 대공님.”
레오폴트 대공의 심경은 굉장히 복잡해 보였다.
에리스는 신성력으로 프랑지아의 군대를 보호하여, 결과적으로 대공의 부하들이 무수히 죽어나가는 데 기여했다.
그녀는 프랑지아에서는 성녀지만, 대공에게는 악마와 다를 것 없겠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에리스는 그저 웃어 보이기만 했다.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대공은 오랫동안 에리스를 바라본 것치고는 별말 없이 등을 돌려 안내를 시작했다.
정식 궁도 아닌, 지하 도시의 빌린 거처는 궁처럼 드넓지 않았다.
“이 방 안에서 카이제린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후작과 호위는 밖에서 기다려야 합니다.”
도착하는 건 빨랐고, 레오폴트 대공의 말을 들은 에리스는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피에르와 보몽 경이 예를 갖춰 보여서, 에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프랑지아 왕국의 에실리스테 릴리안느 드 프랑지아 제3왕녀 전하께서 방문하셨습니다!”
시종의 외침을 들으며, 에리스는 자신감 있는 미소를 짓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 * *
“어서 오세요, 3왕녀.”
기품 있는 미소를 지으며 에리스를 반기는 30대의 배다른 언니는 에리스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어머니와 비슷한 나이다.
“첫 만남이지만, 자매지간이니 편하게 있다 가면 좋겠군요.”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체칠리아 전하.”
에리스가 자리에 앉으면서 그렇게 답하자, 체칠리아는 슬며시 웃었다.
“모처럼 고향의 가족을 만났으니, 프랑지아식으로 세실리아라고 불러주면 좋을 텐데.”
“배려 감사드립니다, 전하. 하지만 이 자리는 가족이기 전에 프랑지아의 왕녀와 게르마니아 제국의 황후가 대면하는 자리니까요.”
체칠리아는 피식 웃었고, 제니가 다가와 에리스의 앞에 다과를 내어놓고 차를 따라주자 재미있다는 듯이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한동안 에리스를 바라보던 체칠리아가 입을 열었다.
“과연, 아바마마께서 아끼던 이의 딸이라고 할지. 수려한 용모로군요. 옷도 뒷받침해 주었다면 더욱 돋보였을 텐데.”
흰색의 로브를 입은 에리스를 보며 체칠리아가 말했다.
“전하께서 입으신 옷과 관은 게르마니아 제국의 황후마마께 어울리는 우아함과 권위를 드러내는군요. 프랑지아와는 다른 멋이 있네요.”
화려한 드레스에 황후의 관까지 쓴 체칠리아를 보며 에리스가 답했다.
외모의 칭찬을 가장해 차림새를 비난한 말에 복장만 띄워주고 프랑지아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로 돌려받자, 체칠리아는 픽 웃으며 차를 마셨다.
그녀가 준비한 다과나 차를 권하지는 않아서, 에리스도 싱긋 웃으며 제니가 준비해 준 차로 입을 축였다.
잠시 말없이 에리스를 보던 체칠리아가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고국의 혈육을 보니 기쁘구나. 오붓하게 대화 나누고 싶다.”
그 말에, 체칠리아의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녀들이 전부 물러나기 시작했다.
에리스도 시선을 돌려, 긴장한 기색의 제니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제니는 안절부절못했지만, 결국 체칠리아의 시녀들과 함께 방 밖으로 물러났다.
열린 문이 닫히기 전 피에르와 보몽 경이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는 모습이 보여서, 에리스는 슬며시 웃을 수 있었다.
문이 닫히자, 그때까지 친근하게 미소 짓고 있던 체칠리아의 기세가 변했다.
“보아하니 심약한 꼭두각시는 아닌 듯하구나.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까 하는데, 어떠하냐?”
“편하신 대로 하세요, 전하.”
에리스가 기다렸다는 듯이 답하자, 체칠리아가 미소 지었다.
“왕위 계승권을 포기하고 물러나라. 그리하면 네 안전을 보장함은 물론이고, 프랑지아의 여왕으로서 네가 원하는 자선사업을 마음껏 할 수 있도록 도와주마.”
에리스는 슬며시 웃었다.
“제가 여왕으로 선출되었을 때와 비교해서 뭐가 좋은지 잘 모르겠어요.”
체칠리아는 단호하게 말했다.
“네 조국이 전쟁에 휘말리지 않고, 흐를 피가 훨씬 줄어들겠지.”
“피가 흐를 거라는 걸 부정하지는 않으시네요.”
“백성을 굽어살피는 것은 명군의 덕목이나, 분수를 모르고 왕을 좌지우지하려는 자들을 내버려둔다면 암군의 방기란다.”
“군주가 책임을 다하지 못해, 고통을 참다못해 어쩔 수 없이 일어난 이들이에요, 전하.”
체칠리아는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저들의 방종을 바로잡지 않을 거라면, 너는 여왕이 되어 무엇을 하려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저는 저들이 국민들을 위한 나라를 만들어가는 걸 지켜볼 거예요. 만약 저들이 국민들이 원하는 길로 가지 못한다면 제가 나서야 할 수도 있지만, 그런 일이 없기를 원해요.”
“하, 네 말대로 하는 여왕이라면 그게 왜 필요하겠느냐?”
체칠리아가 헛웃음을 흘리며 묻자, 에리스는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답했다.
“왕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반역도들로 몰아 전쟁을 준비하는 이들이 있으니까요.”
“네 사리사욕 같은 건 없고, 순수하게 저들을 위해 여왕이 되겠다고?”
“네.”
그렇게 답하는 에리스의 보랏빛 눈동자에는 한 점의 흔들림조차 없었고, 체칠리아는 노골적으로 불쾌한 얼굴이 되었다.
사람을 잘 읽는 편인 에리스로서도 체칠리아의 얼굴에 떠오른 복잡한 감정들을 전부 읽어낼 수 없었다.
불신, 아니 부정. 질투와 분노?
숱한 감정들이 소용돌이친 끝에, 체칠리아가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네가 정녕 권력욕도 무엇도 없이 프랑지아의 국민들을 위하노라고 말할 거라면, 여기서 물러나야지. 정말 그들을 위한다면, 네 옥좌를 지키겠다고 전쟁이 터지게 두지 말아야지.”
“제가 물러나서 전쟁 없이 전하가 여왕이 된다면 프랑지아의 국민들이 기뻐할까요? 그들은 전하의 통치를 바라지 않아요. 이미 자유를 맛보고 평등을 배운 이들은 과거로 돌아갈 수 없으니까요.”
에리스는 가만히 체칠리아를 보더니 덧붙였다.
“정녕 왕족으로서 고국의 국민들을 보살펴야 한다는 책임감을 가지고 계시다면, 그들을 기쁘게 하고 싶으시다면. 전하께서 물러나셔야 해요.”
“그건 원래부터 내 권리야.”
체칠리아의 눈은 불타는 것처럼 이글거렸다.
이번에는 에리스도 체칠리아의 감정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가 빼앗긴 것에서 비롯된 박탈감과 분노. 그로 인해 생겨난, 방향성 잃은 복수심.
“……박탈감에 사로잡혀 계시네요.”
“네가 뭘 안다고!”
체칠리아는 격노했다.
“……저도 비슷한 감정을 알고 있으니까요.”
“나를 적국 한가운데 팔아치운 아비에게 총애받던 네가, 조국에서 성녀랍시고 떠받들리는 네가 감히 나를 이해한다고?”
알고 있다.
선왕이 죽고 내전이 시작되기 직전, 어머니는 보몽 경에게 의지하여 에리스와 함께 궁을 떠났다.
궁에서 선왕과 어머니에게 사랑받고, 좋은 교육을 받으며 부족함 없이 자란 에리스에게 갑작스러운 궁 밖의 생활은 그저 초라하고 궁핍하기만 한 것이었다.
어린 마음에 쉴 새 없이 어머니에게 칭얼거리고 화냈다.
그런 상황에 어머니가 가장 괴로워하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어머니가 지독한 우울증에 시달리게 될 때까지 잃어버린 것만 그리워했다.
그 어리석음이 아직 남은 소중한 것마저 잃게 만들 줄도 모른 채.
에리스는 분노로 가득 찬 체칠리아를 바라보았다.
“……제가 감히 전하를 이해한다고 할 수는 없겠죠. 제가 무언가를 해드릴 수도 없고요. 다만, 전하.”
자신의 어리석음으로 어머니를 잃어버리게 되는 경험을 해보지 않았다면, 지금 체칠리아의 모습이 자신의 모습이었을지도 모른다.
만약 프랑크 아저씨, 보몽 경이 없었더라면.
왕의 여자를 사모하여, 모든 명예를 내버리고 따라와 어머니와 에리스를 지켜준 기사가 지금까지 남아주지 않았더라면.
그랬다면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아름다움도, 가진 권능도 도리어 독이 되었을 거란 것을 안다.
그저 경험과 행운 덕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 에리스는 체칠리아를 비난할 수 없다.
다만.
“잃어버린 것만을 갈구하다가, 남아있던 것마저 잃어버리면 더한 괴로움만이 남아요. 저는 전하께서는 그런 경험을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하! 네가, 네가 감히 나를 협박하느냐?”
닿지 않는다.
닿을 수 없다.
만약 에리스가 체칠리아의 입장에서 그녀의 경험만을 했다면, 자신 또한 저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에리스는 천천히 눈을 내리감았다.
“……나에겐 이 길밖에 없어. 모든 전쟁 준비가 끝나가는 지금, 네 선택에 의해 프랑지아가 피 흘리게 될 거야. 네가 옥좌에 앉기 위해, 네가 위한다는 그들이 무수히 죽게 될 거란다. 이제 와서 권력을 탐하는 주제에 고결한 척하는 위선자, 그런 결과로 만족하니?”
체칠리아의 말에 눈을 뜬 에리스가 답했다.
“저는 정말로 그런 일을 피하고 싶지만, 불가피하다면. 제가 있을 곳은 옥좌가 아니라 그들의 옆이에요. 그들이 피 흘릴 전장에서, 그들의 깃발 아래에서, 제 몸이 부서지는 순간까지 그들을 지키겠어요. 저는, 각오가 되어 있어요.”
체칠리아의 말문이 막혔다.
“전하께는 그런 각오가 있으신가요? 전장으로 보낼 군사들과 같은 전장에 서실 건가요? 그들의 죽음으로 슬퍼할 가족들에 대해 생각해 보신 적은 있으신가요?”
순백의 성녀가, 보랏빛의 눈동자를 빛내며 황후를 추궁한다.
“전하. 그런 행위가, 전하의 슬픔과 고난을 외면하며 제국으로 보내버린 아바마마와 어디가 다른가요?”
체칠리아는 입술을 파르르 떨다가 입을 열었다.
“제아무리 그럴싸한 말로 포장한들, 네가 두른 위선이 고결해 보인들. 너는 어차피 타인에 의해 만들어진, 국민의회의 꼭두각시일 뿐이야.”
그렇게 말하는 체칠리아의 얼굴에 떠오른 측은함은 진심처럼 보였다.
“전쟁이 끝나고, 네 이용 가치가 떨어져도 저 평민들의 의회가 권한도 없는 너를 섬길 것 같으냐? 너를 성녀로 만들고, 왕위에 앉히려는 후작은 아무 사심 없이 그랬을 것 같더냐?”
그렇게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최소한 나의 자리는 내 손으로 일궈낸 것이야. 내 운명은 나의 것이고, 앞으로도 내가 움직인다. 너는 어떻지? 내 아비에게 사랑을 구걸하고, 타인에 기대어 고결한 성녀로서 칭송받고, 옥좌조차 타인에 의해 추대되려는 너는?”
체칠리아의 얼굴에 악의가 번졌다.
“네 스스로 거머쥐어본 것조차 없는 너는, 네 운명마저 타인에게 휘둘릴 것이야. 이 전쟁에서 나에게. 아니라고 해도 제 야망을 위해 널 허울뿐인 옥좌로 올리려는 그자에게.”
에리스는 슬픈 듯이 미소 지었다.
체칠리아가 옳다.
결국 에리스가 지금 손에 쥔 것 중 상당수는 피에르 드 라파예트, 그가 예비해 준 것이다.
그러나.
방랑하는 치유사로서, 그녀는 많은 이들을 만났다.
누군가는 그녀의 미모를, 누군가는 그녀의 능력을 탐냈다.
누군가는 에리스를 성녀로서 이용하고자 했다.
그녀의 신분을 안 자들은 왕녀로서 이용하고자 했다.
어느 쪽이든, 에리스의 꿈이나 원하는 것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원하는 쪽으로 그녀를 제약하고 손아귀 안에 가두려고 했다.
에리스를 지금껏 보살펴준 보몽 경조차 그녀가 사모한 여인이 남긴 마지막 유산이기에 지켜주었음을 알고 있다.
피에르는 어느 쪽도 아니었다.
그는 에실리스테 릴리안느 드 프랑지아로서의 신분을, 능력을, 모든 것을 알고도 에리스라는 개인을 이해하려고 한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랬기에 그가 청하는 것은 언제나 선택지였고, 그렇기에 에리스는 그를 선택했다.
자신을 주군으로 선택해 준 사람이 그라서, 지금도 밖에서 그녀를 지키기 위해 기다리고 있어서.
에리스는 자신 있게 이 자리에 와 있다.
-여기까지 해놓고 나중에 나 버리면 안 돼요, 사기꾼 후원자님.
-진실을 숨긴 적은 있어도, 거짓으로 속인 적은 없어. 사기꾼이라고 불리기엔 양심적인 후원자 아닐까, 왕녀 전하?
그녀를 성녀로 만들기 위한 의식에서 했던 대화를 떠올리고, 에리스는 웃었다.
“전하.”
하지만 혈혈단신으로 적국에 팔려가, 모두를 의심하며 고독하게 자신의 자리를 만들었을 체칠리아에게는 그런 사람이 없었겠지.
지독히 닮았으나 돌이킬 수 없도록 반전된, 거울 속의 자신을 들여다보는 듯한 배다른 언니에게.
에리스는 안타까움을 담아 말했다.
“저는 가능하면 우리 모두, 더 이상 어느 것도 잃지 않기를 바랄 뿐이에요.”
잠시 침묵하던 체칠리아가 답했다.
“애석하구나. 내 권리는 이미 너희들에게 도둑맞았으니, 되찾아오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