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총재 정부 - 산맥 왕국
게르마니아 제국은 대표단만으로는 지지부진하니, 프랑지아 왕국과 게르마니아 제국이 양국의 왕위 계승권자를 대동하여 중립국인 알프스 왕국에서 회담을 진행하자는 요구를 해왔다.
아주 조금 양보하긴 했지만, 일부러 지지부진하게 시간을 끈 것도 사실이라 이번에는 이쪽에서 거부할만한 명분이 마땅치 않았다.
설사 이번 회담이 회담이라기보다, 타협의 여지가 없음을 재확인하고 전쟁을 선포하기 위한 준비과정이라는 걸 양측 모두 알고 있다고 해도.
그래도 1년 정도는 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버는 데 성공한 시간은 반년 정도인가.
단순히 시간만 번 것이 아니라 황후의 부담을 늘리고 이탈하는 제후들이 제법 있을 테니 이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되기는 하겠지만…….
어쨌든 수도를 떠난 우리 대표단은 프랑지아 동부 지역 프랑슈콩테에 도착해서, 고아원에 방문 중이었다.
“성녀님, 성녀님, 앗. 이제 왕녀님이라고 불러야 해요?”
“편한 쪽으로 불러도 돼, 피에르.”
“와, 성녀님 제 이름 기억하네요!”
“그럼~ 피에르는 이름이 좋은걸. 멋있는 이름이잖아?”
마냥 좋아하는 고아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에리스가 이쪽을 슥 본다.
베일로 가려진 얼굴로 얄밉게 웃고 있을 것이 빤히 연상되는군.
이제 곧 20세가 될 왕녀님이 애 이름 가지고 유치하게 굴기는.
잠깐 나를 보던 에리스는 이내 시선을 돌려 다른 아이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안녕하세요, 성녀님!”
“소피, 어머니는 이제 건강하셔?”
에리스가 전국을 돌며 고아들과 빈민들에게 자선 활동을 하긴 했지만, 저 많은 애들 이름을 다 기억하는 건가, 싶었더니 역시나 소녀가 해사하게 웃으며 답했다.
“네, 성녀님 덕분에요!”
나는 아이들과 반갑게 인사하는 에리스를 보며, 출발하기 전 그녀와 했던 대화를 떠올렸다.
-솔직하게 말해서, 네가 간다고 해도 전쟁을 막지는 못할 거야. 이건 황후가 원하는 결과를 내기 위해 여는 회담이니까. 어차피 실질적인 협상은 탈레랑 총재가 할 거고.
-그렇지만 제가 가지 않으면 저쪽의 명분이 조금 더 살겠죠?
-……그래.
-그럼 가야죠. 갈게요.
에리스는 그렇게 간단하게 답하더니, 이내 싱긋 웃으며 덧붙였다.
-대신이라기는 뭣하지만, 후작님도 같이 가주실 거죠?
-어?
-그러면 왕족을 미워하는 혁명당의 총재님이랑 저만 달랑 보내려고 하셨어요? 우와, 여기까지 같이 와놓고 저를 버리신다니…….
-……탈레랑 총재가 그렇게 앞뒤 못 가리는 인사는 아닌데.
-가는 김에 조금 미리 출발해서 지난번 자선 활동 한 지역들 둘러보면서 가고 싶어서 그러니까 힘 좀 실어주세요, 중앙당 실세님. 솔직히, 제가 혁명당 총재님한테 그런 부탁을 하긴 곤란하잖아요?
상념에서 깨어난 나는 에리스가 빛을 흩뿌려주고, 그걸 본 고아들이 마냥 신나 하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먼 길을 여행하는 것만으로도 피곤한 일일 텐데, 거쳐 가는 곳마다 다 들러서 빈민과 환자를 보살피거나 고아들과 놀아준다니 기운도 좋지.
아마도, 에리스가 진짜로 하고 싶은 일은 옥좌에 올라 여왕으로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일들이겠지.
에리스를 옥좌에 올려서 우리가 얻게 될 이득은 과연, 저 고결한 왕녀가 대가로 지불할 자유만 한 값어치가 있을까.
내가 조금 심란한 생각을 하고 있자, 내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탈레랑이 입을 열었다.
“……확실히, 보여주기식은 아니군요.”
여행길 초반에 에리스가 하는 일을 보았을 때는 냉소적으로 반응했던 그의 태도 변화가 새삼스러워서, 나는 슬며시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좋아서 해야 가능한 일이죠.”
탈레랑은 애매한 얼굴이 되었다.
막시밀리앙 이지도르와 혁명당은 나를 경계했다.
내 존재 자체가 혁명의 의의를 빛바래게 만든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러면, 에리스는?
에리스는 귀족조차 아닌 왕족이다.
원래 이들의 혁명 이념대로였다면 제일 먼저 제거해야 할 대상이고, 실제로 회귀 전에는 누명을 씌워서까지 사형시켰지.
그러나 국민의회의 누구도 에리스보다 도덕적일 수 없을 테고, 이 나라의 누구도 에리스만큼 국민에게 사랑받지 못할 거다.
조용히 에리스를 바라보던 탈레랑이 나직하게 말했다.
“혁명의 근간 이념은 결국 압제자들에게 빼앗긴 제3신분의 권리를 되찾자는 것에서 비롯되었건만.”
리슐리외 주교와 시에예스, 아니 할파스가 펴낸 신분론은 혁명을 촉발시켰지만 동시에 이들의 혁명에 근본적인 한계를 부여하기도 했다.
나와 크리스틴은 신분론의 내용 중 상당 부분을 어비스 코퍼레이션에서 유도했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끝내 그것을 밝히지 않았다.
설사 그것이 진실이라고 해도, 귀족인 우리가 혁명의 근간을 무너트리려는 수작으로만 보일 테니까.
그러나.
“이제 조금은 생각이 바뀌셨습니까?”
탈레랑은 쓴웃음을 지었다.
“결국은, 인정할 수밖에 없겠군요. 국민에 대한 헌신은 신분에서 기초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봐라, 결국.
“이념이든, 사람이든 문제는 있을 수 있죠. 그걸 받아들이고 변화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 구체제는 그러지 못했기에 무너졌으니, 그걸 무너뜨린 우리는 달라야 합니다.”
이 혁명에 악마들의 수작질이 있었고 한계가 있었다고 해도, 그것을 직시하고 변화해 나간다면 얼마든지 그 한계를 벗어나 더 나아갈 수 있다.
탈레랑은 나를 보며 슬며시 미간을 찌푸리고 있더니 답했다.
“인정합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혁명당이 왕녀 전하와 후작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지는 않을 겁니다.”
“하하, 그건 저도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도 안 되죠. 냉정하게 말해서 그대들의 혁명이 없었다면, 저부터도 지금과 같은 생각을 하고 살 수는 없었을 테니까.”
탈레랑은 슬며시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웃었다.
“이것 참, 우리는 앞으로도 서로에게 배울 점이 많을 것 같습니다.”
* * *
우리는 웅장하고 거친 알프스의 좁고 거친 산길을 따라 이동한 끝에, 드워프들이 세운 산맥 입구의 관문에 도착했다.
병사들을 데리고 우리를 마중 나온 드워프는 금속으로 만든 전신 갑옷을 입고 있었다.
대충 내 허리 정도 오는 땅딸막한 키에 근육질의 몸.
거기에 거의 허리까지 오는 덥수룩한 수염의 무뚝뚝한 얼굴까지.
말로만 듣던 드워프를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인데-
“반갑습니다, 글라스텍 사령관!”
“으하하, 어서 오시오! 탈레랑, 드워프의 친구!”
정작 그 근엄해 보이던 드워프는 탈레랑을 보자마자 반색하며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다시 만나게 되어 기쁩니다, 프랑지아의 친구여!”
탈레랑은 스스럼없이 글라스텍과 포옹을 나누며 인사했다.
우리가 모두 어리벙벙하고 있자, 글라스텍은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반갑소, 일곱 번째 봉우리의 글라스텍이라 하오! 관문 수호대 총사령관을 맡고 있다오!”
이들은 자신들이 태어난 봉우리를 가문명으로 쓴다고 했을 테고, 관문 수호대는 이들의 군대 명칭이다.
즉, 나랑 동격이군.
“반갑습니다, 일곱 번째 봉우리의 글라스텍 사령관님. 프랑지아군 총사령관 피에르 드 라파예트입니다.”
“글라스텍이면 된다오, 라파예트 사령관! 탈레랑의 친구면 내 친구지! 자, 안내하겠소!”
글라스텍은 의전 서열에서 명백하게 나나 탈레랑보다 위일 에리스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우리 일행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드워프들은 남성이 미혼의 여성에게 말을 거는 것을 추파를 던지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그러니 혹여나 왕녀 전하를 무시하더라도 저들 식의 예법이니 너그러이 여겨주십시오.
진입하기 전에 탈레랑이 말해주긴 했는데, 실제로 보니 느낌이 좀 묘하네.
정작 에리스는 신기한 눈치로 여기저기 둘러보면서 보몽 경에게 재잘거리느라 신경도 안 쓰는 것 같지만.
우리는 글라스텍의 안내를 받아, 관문을 지나 통로를 통해 지하로 내려갔다.
산을 통째로 깎아내고 석재로 보강한 통로는 투박하지만 어지간한 인간의 건물보다도 넓고 견고해 보이고, 그 관문 입구와 통로마다 머스켓을 든 근육질의 드워프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그리고 그러는 동안, 글라스텍은 쉴 새 없이 입을 놀렸다.
정말 쉬지 않고 무한한 말의 향연을 쏟아내고 있어서, 우리는 반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그를 따랐다.
“탈레랑과 우리가 어떻게 친구가 되었는지 내가 말했던가? 그걸 먼저 말하려면 이 친구가 우리를 위해 뭘 해줬는지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가 없겠구먼! 알고는 있겠지만 우리는 감자와 치즈, 그리고 맥주를 주식으로 삼는다네. 그 정도야 인간들도 다 알지!
그런데 탈레랑 이 친구는 무려! 인간이! 우리 드워프들의 식문화와 그 맛에 대해 깊이 있는 통찰과 조사를 했더군! 그래서 우리는 쓰레기 같다고 생각해서 쳐다도 보지 않던 밀로 우리 입맛에 맞는 근사한 요리를 만들어서 맛보여줬지 뭔가!
인간이라면 별로 믿을 족속들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이런 정성과 배려를 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드워프의 친구가 될 수 있지! 암, 그렇고말고! 그렇게 탈레랑과 친구가 된 다음에 대해서 말하자면-”
나는 대충 탈레랑이 미스릴에 우리의 밀도 끼워팔기에 성공했다고만 들었는데, 이렇게 듣자니 꽤 대단한 일이었던 모양이군.
그건 그렇고.
거만하고 무뚝뚝해, 퉁명스럽다던 드워프들은 어디로 갔냐.
그렇게 긴 통로를 지나자, 은은한 마력 등의 불빛이 마치 산맥의 안을 통째로 깎아 만든 듯한 거대한 공동을 비추고 있다.
드높은 공동의 천장 아래에는 무수한 건물들과 드워프들이 돌아다니고 있어, 인간의 도시와는 완전히 다른 도시의 모습을 보여준다.
“우와-”
에리스가 나직하게 탄성을 지르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리자, 후드를 벗은 에리스의 움직임에 맞춰 긴 머리칼이 흔들리며 마력 등의 불빛을 받아 은빛으로 반짝이고 있다.
흠, 이런 거대한 지하 도시라.
보통 지하실은 습하고 퀴퀴한 냄새가 나기 마련인데, 신기하게도 이들의 도시에는 그런 느낌이 거의 없다.
뭔가 특별한 기술이라도 있는 건가.
글라스텍은 우리를 안내하여, 공동을 벗어나 다시 관문을 지나 통로로 접어들었다.
“언제까지 이동하는 겁니까?”
내가 물어보자, 글라스텍은 쉴 새 없이 떠들다 말고 바로 답해주었다.
“하지만 여전히 맥주에 한해서는 게르마니아 제국 놈들이 좀 더 좋아! 그대들 프랑지아인들은 맥주 맛있게 만드는 법을 좀 배워야 하- 아, 아홉 번째 봉우리로 가고 있다오. 이번 대의 산맥 왕이 그곳 분이시니까. 회담 장소도 그곳으로 잡아두었소!”
“그렇군요.”
산맥의 봉우리마다 도시를 건설해두고, 이렇게 통로로 이어둔 건가.
어느 의미로는 하나의 거대한 도시국가라고 볼 수 있을까.
글라스텍은 답하자마자 다시 원래 화제로 돌아가 쉴 새 없이 떠들기 시작했다. 그걸 다 들어주며 중간중간 추임새를 넣어주는 탈레랑이 존경스러워지기 시작했는데…….
어쨌거나 글라스텍의 쉬지 않는 수다를 길동무 삼아 여러 관문을 지난 우리는 이번 대의 산맥 왕, 아홉 번째 봉우리의 라주린과 대면할 수 있었다.
라주린은 글라스텍만큼이나 근육질의 드워프인데, 거의 발끝까지 닿을 정도로 길게 기른 흰 수염 덕분에 어딘가 신비한 느낌을 주었다.
드워프들은 왕이 죽을 때마다 가장 능력을 인정받은 장인을 왕으로 뽑는다던데, 장인이라기보다는 차라리 현자에 가까운 느낌인데.
“알프스 왕국을 대표하여, 먼 길을 와준 그대들 프랑지아의 대표단을 환영한다.”
라주린의 음성은 근엄하고 말은 짧아, 글라스텍처럼 귀가 아플 정도는 아니었다.
다행히 글라스텍이 드워프 평균은 아니었던 것 같군.
“프랑지아와 게르마니아, 양쪽 모두 아국과 우호적인 협력관계를 이루고 있어 이번에 중재자로서 회담을 주관하게 되었으니…….”
그렇게 생각한 순간 우리를 보며 입을 연 라주린은 잠시 뜸을 들였다가 눈을 번뜩이며 덧붙였다.
“불미스러운 일을 벌이려다 발각되는 자들에겐 모루의 심판이 있을 것이라 알라.”
“물론입니다, 폐하. 우려하시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흘긋 탈레랑을 보니 여전히 싱긋 웃고 있는 것이, 이게 드워프식 외교적 수사인가?
우리가 산맥 왕에게 별 볼일도 없고, 인사도 했으니 이대로 물러나려나 했는데 그가 나를 불렀다.
“그대가 피에르 드 라파예트 후작인가?”
“그렇습니다, 폐하.”
“내 탈레랑으로부터, 그대 덕분에 우리에게 제공할 미스릴을 확보할 수 있었다고 들었다.”
들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고맙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자 라주린은 손으로 흰 수염을 쓸어내리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기사라지? 그대의 검, 보여다오.”
봐도 되냐도 아니고 보여 달라니…….
그렇다고 일국의 수장이 보여 달라는데 안 보여줄 이유도 없어서 허리춤에서 풀어서 근위대원에게 건네주자, 근위대원에게 그것을 건네받은 라주린은 검을 반쯤 뽑았다가 다시 집어넣고 건네주었다.
뭔데?
“볼 것도 없군.”
라주린은 그렇게만 말하고 물러가라는 듯 손짓을 해보였다.
아니, 저게 무슨 무례한.
“그러면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폐하.”
내가 근위대원에게 검을 돌려받는 사이 탈레랑이 잽싸게 말한 덕분에 함께 물러나야 했다만…….
크록스 쪽과 달리 이 망할 드워프 놈들에 대해서는 편견이 틀린 것이 없다는 걸 이런 식으로 확인하다니!
“괜찮아요, 후작님?”
“안 괜찮을 건 또 뭐야.”
에리스가 작게 속삭여서, 픽 웃으며 답했다.
어이가 없긴 하지만, 문화가 다른 거니 내가 참아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걷던 나는 손으로 에리스를 가로막았다.
이곳에서 흔하게 보이는 드워프가 아니라, 게르마니아 제국의 복식을 입은 남자가 다가오고 있다.
“프랑지아 공화국의 대표단 모리스 탈레랑 총재, 피에르 드 라파예트 후작, 그리고 에실리스테 릴리안느 드 프랑지아 왕녀 전하께 인사 올립니다. 게르마니아 제국의 카이제린이자 프랑지아 왕국의 적법한 계승자이신 체칠리아 전하의 명을 받고 3왕녀 전하께 초대장을 전해드리고자 왔습니다.”
프랑지아 왕국의 적법한 계승자, 라.
자연스럽게 조소가 지어졌다.
에리스가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보몽 경이 다가가 초대장을 받아 에리스에게 건네주었다.
“카이제린 체칠리아 전하께서는 3왕녀 전하의 답장을 기다리실 것입니다. 그러면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시종은 그 말을 끝으로 그대로 물러가버렸고, 에리스는 그 자리에서 초대장을 개봉해서 본 다음 나와 탈레랑에게 보여주었다.
“이건 또, 고전적이군요.”
탈레랑이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피식 웃었다.
“흠. 티타임이라.”
경쟁 왕위 계승권자를 정식 회담에 앞서 티타임 자리에 초청한다?
“어찌하시겠습니까, 왕녀 전하?”
에리스에게 묻자, 그녀는 특유의 보랏빛 눈동자를 반짝이더니 기운차게 대답했다.
“이기고 올게요!”
……당연하다는 듯이 싸우러 가는 거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