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혁명에 단두대는 필요없다-85화 (85/258)

85화. 총재 정부 - 지연전(외교)

프랑지아의 왕을 국민투표로 선출하자는 제안은 역시나 게르마니아 제국 내에서 상당한 반감과 혼란을 산 모양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교국이라는 뒷배를 둔 에리스를 왕위 계승권자로 내세운 이상, 저들이 바로 전쟁하자고 나서지는 않았다.

대신, 게르마니아 제국은 우리가 제안한 왕의 선출 과정과 왕의 권한을 조금 더 저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으로 조정하기 위한 대표단을 보내왔다.

2왕녀가 있는 노던 연합 왕국에서도 대표단을 파견했지만, 그쪽은 어디까지나 계승자를 가진 두 나라가 의견을 함께한다고 보여주기용으로 보냈을 뿐이겠지.

그렇게 도착한 저들의 사절단을 맞이한 것은 혁명당 총재이자 프랑지아의 외교 전문가인 모리스 탈레랑이었다.

“게르마니아 제국의 카이제린께서는 그대들이 제시한 선출된 국왕의 권리에 대해 깊이 우려하고 계시오. 그대들이 진정으로 과거의 무도한 행위를 반성하고 적법한 군주의 왕위 계승을 인정하고자 하는 거라면 응당 왕에게도 그만한 권한을 부여해야 하지 않겠소?”

얼핏 내정간섭으로 들릴만한 제국 대표단의 무례한 요구에, 탈레랑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렇군요. 우려해 주신 부분에 대해서는 국민의회에 안건으로 상정하여 고려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선출 과정부터 문제입니다. 국왕의 신성한 정통성과 권리를 어찌 평민들의 투표로 판가름낼 수 있겠습니까? 하다못해 적법한 프랑지아의 귀족에게만 선출권을 부여한다거나 해야…….”

노던 연합 왕국 대표가 말하자, 게르마니아 제국의 대표는 한술 더 떴다.

“프랑지아는 이미 그대들의 소위 ‘혁명’으로 인해 정통성 있는 귀족들을 상당수 잃었소. 정녕 그대들이 이런 사태의 재발을 방지하고 국왕의 질서 아래 정상적인 국가를 꾸리고자 한다면, 국왕의 선출 과정에 자격 있는 외국 귀족들의 의견을 반영함이 옳지 않겠소?”

아예 우리 측 대표를 분노시켜서 회담을 결렬 내고 그걸 핑계로 삼을 작정이라도 했나 싶은 언사였지만, 탈레랑은 이번에도 싱긋 웃으며 답했다.

“프랑지아의 왕을 선출하는데 외국의 귀족에게 투표권을 준다라, 흥미롭지만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 수 있는 제안이군요. 그래도 프랑지아 국민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조건이 충족된다면, 고려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쯤 되자 대표단들도 슬며시 미간을 좁혔다.

“말했듯이 우리는 그대들이 제시한 초안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소. 지금대로면 평민들이 꼭두각시 왕을 옥좌에 앉혀놓고 프랑지아를 좌지우지하겠다는 것과 다를 바 없으니!”

“여러분의 솔직한 의견을 들을 수 있어서 유익했습니다. 물론 국민의회에서도 여러분의 의견에 대해서 다방면으로 검토하고 있으니, 우리가 이른 시일 내에 상당한 합의를 이룰 수 있을 거라 기대하고 싶군요.”

끝까지 표정 하나 흔들리지 않고 가능성은 열어두는 탈레랑의 모습에, 결국 대표단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물러나야 했다.

대표단이 일단 물러나면 국민의회가 열려 긴 시간 지지부진하게 논의하는 척하고, 다음 모임 전에 저들이 요구한 것 중 극히 일부나 국민의회의 양보처럼 보이는 안건들이 승인되었다.

그런 뒤 탈레랑이 다시 저들의 요구를 들으며 애매모호한 말로 묶어두고, 다시 회의를 거치고.

결과적으로 우리가 양보랍시고 통과시킨 것은 선출된 왕에게 의회에서 채택된 법안에 대한 거부권을 부여한다거나, 국왕 본인에게는 면책특권이 부여된다던가 같은 원래 국왕이라면 당연히 가질법한 권리 정도에 그쳤다.

그나마 이것도 원래 국민의회는 보장해 줄 생각이 없던 걸 저들에게 맞추는 시늉은 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통과시킨 거지.

정작 저들이 제일 문제 삼은 선거 과정에 대해서는 거의 달라진 부분이 없었고, 프랑지아에 몇 달간 머무르며 지지부진한 과정을 거친 대표단들은 다음을 기약하곤 별 소득 없이 프랑지아를 떠났다.

* * *

그렇게 한 해가 다시 끝나가는 겨울, 수도의 내 저택.

나는 식탁에 앉아, 크리스틴을 마주 보며 싱긋 웃고 있었다.

크리스틴은 슬며시 눈을 흘기면서도 적절한 크기로 잘린 닭고기 요리를 포크로 찍어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꽤 오랫동안 크리스틴을 관찰하며 알게 된 건데, 그녀는 근면하면서 게으르다.

얼핏 듣기로는 말도 안 되는 조합이지만 크리스틴에 한해서는 이보다 적절한 표현이 없다.

서류작업이나 상단을 관리하고 두뇌활동을 할 때는 이보다 더는 없을 정도로 열성적이지만, 본인이 관심 없는 활동이나 먹느라 시간을 할애하는 일 같은 건 한없이 귀찮아하니까.

당장 그만두고 나와 논의하고 싶다는 얼굴로 마지못해 먹고 있는 걸 보자면…….

그나마 일부러라도 시간을 내서 만찬에 초대하면 응하긴 하고, 일부러 그녀가 먹기 좋게 열심히 썰어주면 그 음식은 성의를 봐서라도 먹어주긴 하니 다행이지.

“별로 맛이 없나 보군요. 이번엔 내가 당신의 혀를 감동시킬 수 있는 요리를 준비해보겠다고 주방장과 머리를 싸매고 토론해서 내온 건데…….”

정말 귀찮다는 얼굴로 닭고기를 찍어 입에 가져가고 있던 크리스틴이 멈칫했다.

“……아니요, 맛있어요.”

그러곤 어색하게 웃으며 답하더니, 입에 넣고는 조금 우물거리다가 약간 놀란 얼굴이 되었다.

“이건 맛있네요, 정말로.”

바로 다음 조각에 포크를 가져다 대는 그녀가 정말 진심인 것 같아서, 나는 쓴웃음을 흘렸다.

맛도 모른 채 음식을 먹고 있을 정도면, 그녀의 두뇌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며 얼마나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걸까.

“다행이네요. 앞으로는 매일 초대해야겠어요.”

“……매일이요?”

크리스틴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매일 보자는 것에 좋아할지, 매일 식사에 이렇게 시간을 쓰자는 것에 싫어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애매모호한 표정이라 픽 웃음이 나왔다.

“늘상 그렇게 일하면서 간단히 집어먹을 수 있는 것들로만 끼니를 때우면 몸이 상하니까요. 당신의 몸은 제가 챙겨야겠습니다.”

크리스틴은 고개를 슬쩍 기울여서 고민하는 듯하더니 답했다.

“……매일 이런 만찬은 곤란하고, 간단한 식사 정도라면.”

나로서는 따라갈 수 없는 모략과 재무관리의 천재가 고민 끝에 낸 타협안치고는 굉장히 귀여워서, 나는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 * *

식사를 마치고 난 뒤, 집무실.

크리스틴은 들고 온 보고서들을 건네주며 입을 열었다.

“혁명당 내부의 분위기는 나쁘지 않아요. 탈레랑 총재는 일단 이번 건에 한해서는 당신에게 맞춰주기로 결정한 것 같아요.”

“그렇군요. 총재의 결정이라고는 해도, 결국 왕정의 복고니 혁명당 내부에서 반발하는 자들은 있을 줄 알았는데요.”

크리스틴은 내 말에 선선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조금은요. 하지만 노골적인 수준은 아니에요. 당신과 왕녀 전하의 인기도 인기고, 전쟁을 가장 기피하는 농민들은 다름 아닌 저들의 핵심 지지층이니까요.”

과연, 어느 정도 그걸 기대하긴 했지만, 생각보다는 잘 먹혀 들어간 모양이다.

“자유당도 원래부터 우리를 좋게 보던 브리소 총재가 이끌고 있으니 더더욱 괜찮고요. 이 정도면 적어도 당분간은 국내 분위기로 인해 문제가 생기진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고맙습니다, 크리스틴. 수고하셨어요.”

“제 일인걸요.”

크리스틴은 싱긋 미소 지으며 답했다.

바로 방금 전까지 저녁 식사에 들일 시간을 줄이려는 귀여운 타협을 시도하던 사람과, 국민의회와 다른 당들의 내부 사정을 당연하다는 듯이 파악하고 있는 사람이 동일 인물이라는 것이 재미있지.

크리스틴은 다른 보고서를 건네주며 입을 열었다.

“우리와 교역 중인 알프스 왕국, 그리고 신성 교국을 이용해 게르마니아 제국에 세작을 심는 일은 순조로워요. 아직은 시작 단계지만, 시간만 있다면 저들의 내부 사정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게 되겠죠.”

“음, 아무래도 적성국에 구축하는 거니까 이 정도로도 굉장하죠. 그건 그렇고, 저들의 황후는 여전히 전쟁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모양이군요.”

크리스틴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네, 제후들은 몰라도 황후는 확실히 전쟁 준비를 끝내가고 있어요. 그대로 물러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역시 전쟁을 피하는 건 어려워 보이네요.”

제국 전체가 아니라 황실만으로 저런 준비가 가능하다는 건…….

역시나 그 망할 어비스 코퍼레이션의 협조 덕분이겠지.

“……우리도 대비해야죠. 시간을 벌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소득이니.”

“아, 그리고…….”

크리스틴이 다른 서류를 건네주었다.

“이건?”

“혁명 중에 살아남은 방계 왕족이 있더군요. 그자가 중앙당에 로비하며 후원자를 찾고 있어요.”

“허.”

나는 앙리 남작이라는, 30대 남성에 대한 서류를 살펴보았다.

혁명 이전에는 그냥 별 존재감 없던 방계 왕족이었는데, 내전과 혁명 동안 왕족이 싹 쓸려나가고 보니 계승 서열에 들어갔군.

“아무리 직계라도 궁에서 떠나 있던 여성보다는 궁정에서 교육받은 남성인 자신이 왕위에 오르는 것이 옳다……?”

나는 그가 중앙당에 보냈다는 주장에 실소를 흘렸다.

이런 자가 갑자기 어디에서 나왔나 했더니 혁명이 한창 터지던 북부에서 운 좋게 재산을 챙겨 남부로 도망치는 데 성공했고, 사업 수완은 나름대로 있었는지 방직공장을 차려 재미 좀 본 모양이다.

남부에서 조용히 사업하며 살고 있다가, 혁명의 광기도 좀 식고 이제 좀 살만해지는데 갑자기 왕정복고가 논의 중이니 도전할 마음이 드셨나 보군.

애초에 국민들에게 사랑받는 성녀인 에리스라서 왕정복고가 가능한 건데, 국민의회의 내막을 모르는 이자는 성녀에게만 양보받으면 외국의 황후 정도는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 건가.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처리할까요?”

마치 밥이나 먹을까요, 같은 여상한 어조에 고개를 돌리자 크리스틴이 부채로 입가를 가린 채 가볍게 미소 짓고 있었다.

“으음.”

다 된 수프에 코 빠뜨리는 것도 아니고, 기껏 외국 압력을 이용해 에리스의 권한을 조금이나마 늘려주는 안건도 통과시켰는데 이런 불청객이라.

이런 자가 왕이 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시피 하겠다만, 내버려 두면 시대착오적인 귀족들과 엮여서 잘 돌아가던 국민의회에 귀찮은 잡음이 나올 수도 있었겠군.

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입을 열었다.

“아무리 그래도 죽이는 건 조금 껄끄럽군요. 마침 국민의회 분위기도 괜찮은데 괜히 경계를 사기도 그렇고…….”

“네, 그러면 죽이지 않고 문제 되지 않게 처리할게요.”

크리스틴은 입가에 아주 음험한 미소를 지은 채, 여상하게 덧붙였다.

“아키텐 상단도 이참에 방직 사업을 손에 넣으면 수지도 맞을 테니, 마침 잘 되었네요.”

“하하…….”

저 앙리인지 뭔지 하는 왕족께선 이제 좀 살 만하다고 과욕을 부린 대가로, 기껏 키운 사업을 홀랑 먹히시는 건가.

나는 기분이 좋아졌는지 미소 지은 채로 생각에 잠긴 크리스틴을 보며, 내심 그녀를 분노하게 할 짓은 절대 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게.”

들어온 시종은 나와 크리스틴에게 예를 갖춰 보이고, 서신을 건네주었다.

“탈레랑 총재가 보낸 서신입니다.”

“탈레랑?”

그가 나에게 개인적으로 서신을 보낼 일이 있었나?

의아해하며 크리스틴과 함께 서신을 개봉하자, 간단하지만 중요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프랑지아 공화국 혁명군 총사령관 라파예트 후작 귀하.

금일 게르마니아 제국으로부터 공식 외교 문건을 수령하였습니다.

저들이 이곳 프랑지아가 아니라 중립국인 드워프들의 알프스 왕국에서 양국 대표단이 왕위 계승권자를 직접 대동하여 회담을 하자고 요구했습니다.

해당 안건에 대하여 왕녀 전하 및 후작님과 대책을 논의해야 할 듯합니다.

혁명당 총재 모리스 탈레랑.]

“……황후가, 강하게 나왔네요”

눈을 가늘게 뜬 크리스틴의 입에서 나온 말에, 나도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황후가 직접 나서고, 이쪽에서도 에리스가 나올 것을 요구했다?

권한을 대행 받은 사절단이라면 몰라도, 의사결정권과 계승권을 가진 장본인이 상대라면 지금처럼 흐지부지하게 시간을 끄는 것도 어렵다.

우리의 수작에 이대로 끌려만 다닐 생각은 없다 이거지.

아무래도, 황후는 끝내 봄과 함께 전쟁을 몰고 올 작정인 것 같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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