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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혁명에 단두대는 필요없다-84화 (84/258)

84화. 총재 정부 - 그랑제콜

남부군 사령부 앞의, 넓게 펼쳐진 연병장.

나는 혁명당 총재 탈레랑을 안내하며, 마력 운용에 소양이 있는 것으로 분류된 정예군이 모여 훈련하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었다.

“흐앗!”

한쪽 군사들이 기합성과 함께 창날 없는 창대를 내지르고, 상대편 군사들은 무기를 들지 않은 채 그것을 받아낸다.

병사들은 맨몸에 마력을 둘러 창대를 받아내고, 좀 우수한 병사들은 마력 보호 특유의 굉음과 함께 창대를 아예 튕겨내는 경우도 있었다.

개중에는 창날 없는 창대조차 제대로 막지 못해 고통에 신음하는 경우가 나와서, 남부군 사령관 데미앙 드 미르보는 내 안색을 살피며 안절부절못했지만.

“흠, 놀랍군요.”

탈레랑은 그 광경을 보며 턱을 매만졌다.

기사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어설퍼도 너무 어설프지만, 평민 출신 군사들이 귀족과 기사의 전유물인 마력으로 공격을 막아내는 광경은 확실히 처음 보겠지.

우리 눈에는 안 차도 탈레랑 총재가 보기엔 충분히 인상 깊었던 모양이다.

“수고해 주셨군요, 미르보 백작.”

“그리 말씀해주시니 영광입니다! 물론 국민의회의 예산 지원과 라파예트 후작 각하께서 도입한 그랑제콜 과정의 우수함 덕분이 아니겠습니까!”

나는 신이 나서 떠드는 데미앙을 대충 무시하며 병사들을 살폈다.

그나마 제법 훈련을 거듭한 끝에, 처음처럼 배를 부여잡고 구토하거나 쓰러지는 추태를 보이는 군사들은 없어서 다행이군.

“이 부대의 당면 목표는 마력으로 머스켓 사격을 저지할 수 있게 단련시키는 것입니다.”

기사들처럼 아예 다 튕겨내며 돌격하는 건 무리라고 쳐도, 단 1~2발만 막아낼 수 있어도 보병 간 교전에서는 절대적인 우위를 점할 수 있다.

“성공한다면 가히 초인 부대라고 할 만하겠군요.”

“그렇습니다. 조금 더 가시적인 성과를 거둔 이들을 보여드리지요. 수고하게, 미르보 백작.”

“옛! 열과 성을 다하여 프랑지아군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강군으로 이들을 육성, 게르마니아 제국의 위협에 맞선-”

나는 끝도 없이 늘어질 것 같은 데미앙의 일장 연설에서 등을 돌려, 탈레랑을 기병들의 훈련 장소로 안내했다.

“어서 오십시오. 탈레랑 총재님, 라파예트 후작 각하.”

대검을 땅에 짚은 채 훈련하는 모습을 보고 있던 가스통이 우리를 알아보고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수고하네, 가스통 장군.”

나는 탈레랑과 함께 훈련하는 모습을 보다가, 슬며시 미간을 좁혔다.

“오늘도 와있군?”

“그, 그렇습니다. 각하.”

가스통은 다소 민망해했다.

우리가 보는 가운데, 멋진 제복 위에 흉갑을 걸친 기병 셋이 한 사람을 둘러싸고 정신없이 공격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공격을 받아내는 사람, 샨드라는 그들의 공격을 모두 피하거나 흘리고, 마력으로 튕겨내며 능숙하게 상대하고 있다.

일단 대사관의 대표긴 한데, 맨날 평화로운 대사관 업무는 좀이 쑤신다고 칭얼대길래 주재무관으로서 교관 자격으로 참관을 허용해 주었더니 아주 눌러앉았다.

그나마 샨드라가 평소에 입고 다니던 맨살과 문신을 드러내는 검은 옷은 프랑지아에서는 여러모로 정서에 맞지 않아, 다른 옷을 요청한 덕분에 그녀도 멋들어진 우리 제복을 입고 있다.

평소에 쓰던 쌍검이 아니라 기병도를 쓰고 있는데, 손에 익지도 않았을 무기를 쓰고도 나름대로 마력을 운용하는 기병 셋을 가볍게 압도하고 있군.

“……저로서는 눈으로 따라가기도 힘들군요.”

다행히 탈레랑은 교관이 샨드라라는 점에 의문을 품는 대신, 샨드라와 기병들이 주고받는 공방에 주목했다.

상대가 기사 중에서도 상급에 달할 샨드라여서 그렇지, 이미 마력 운용이 궤도에 오른 정예 기병들은 일반인의 능력을 한참 넘어섰다.

“그렇습니다. 아직 기사에 달하는 수준은 아니지만, 저들은 대륙 최강의 기병대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을 겁니다.”

내전 기간 동안 프랑지아군의 생명이던 기사들을 대부분 잃었지만, 그 자리를 대체할 정예병들을 육성하는 것이 내가 준비한 그랑제콜 과정 군사훈련 분야의 핵심이다.

그 과정은 착실하게 진행되고 있는 셈이다.

부족한 건 시간이었는데, 게르마니아 제국이 이번 사태로 우왕좌왕하는 사이 이들의 육성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된다면 그 활약은 기대해볼 수 있겠지.

“확실히 군사적인 가치는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결국 이런 정예병은 극소수에 불과하죠, 후작님.”

“맞습니다. 혁명군의 전체 군사들로 보자면 실전에 활용할 수준의 마력 운용이 가능한 자들은 아직은 1%에 미치지 못합니다.”

충분한 시간을 들여서 전 병력에 체계적인 훈련을 실시한다면 더 성과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군대라는 조직은 투자 비용 대비 효율을 무시할 수 없다.

탈레랑은 마침내 모두 바닥에 쓰러졌다가, 샨드라에게 일으켜 세워지는 기병들을 바라보더니 등을 돌렸다.

“혁명군의 미래가 보이는 듯한,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라파예트 후작님. 오늘의 참관을 준비해 주신 것에 감사를 표하지요.”

“좋은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었던 것 같아 다행입니다, 총재님.”

나는 가스통의 경례를 받고, 탈레랑을 안내했다.

연병장의 출구로 향하던 중, 탈레랑은 손짓으로 수행원들을 물리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시겠지만, 국민의회는 후작님께서 최초에 제안하신 이 훈련과정에 대해 제법 우려를 품었습니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는, 이들의 우려가 단순한 기우로 보이지는 않겠지.

“특수한 훈련과정을 통해 정예병으로 육성될 극소수 병력의 존재. 저들이 과연 혁명이 내건 평등의 가치를 지키는 자들이 될 수 있을지, 저로서는 확신을 가지기 힘들군요.”

처음에만 해도 나도 이 정도로 적성을 보이는 자들이 적을 줄은 몰랐지. 아마 마력을 운용하는 군대에 큰 기대를 걸었을 발리앙도 그랬을 거다.

“하물며 후작님께서 공화국을 왕국으로 되돌리려고 하시는 시점에는 더더욱, 국민의회는 후작님과 귀족 장교단의 영향을 짙게 받을 저들이 또 다른 특권계층이 될 것을 우려하고 있습니다.”

“그렇겠지요.”

결국 국민의회는 에리스가 제안한 군주 선출에 동의하긴 했다.

하지만 그것도 결국 당면한 전쟁을 피하기 위해, 그리고 국민의회가 에리스를 기존의 다른 왕족들과 동일시하며 깎아내릴 수 없기 때문에 마지못해 받아들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민심을 무시할 수 없어서 동의는 했지만, 그래도 저들의 속이 편하지는 않겠지.

“후작님은 분명히 혁명을 지키겠노라고 말씀해주셨으나, 보기에 따라서는 ‘상황에 떠밀려서 어쩔 수 없이’ 혁명에 역행할 수도 있는 행동들을 하고 계시지요.”

당장 기사들이 다 죽어버렸는데 전쟁이 다가오니, 프랑지아를 지키기 위해 그들을 대체할 또 다른 특권계층이 될 수 있는 정예병들을 육성한다.

우리가 준비되기 전에 전쟁이 터지는 일을 막기 위해, 프랑지아에 다시 왕정을 세운다.

확실히 타인에겐 불가피함을 가장해, 내가 필요로 하는 조치들을 하나둘 통과시켜 나가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

“후작님께서는 내전 도중에 왕녀 전하를 찾아내, 후원자가 되셨습니다. 이렇게까지 우려하는 저희로서도 굉장히 답답한 일입니다만…….”

탈레랑은 손으로 턱을 매만지더니 입을 열었다.

“후작님께서 귀족임에도 불구하고 영지를 단념하면서까지 혁명 정부에 합류한 것, 발리앙의 쿠데타를 지지하지 않고 혁명의 수호자로 거듭난 것, 거기에 더해 왕녀님을 거의 무결점에 가까운 성녀로 삼았다가, 가장 절실한 순간 여왕으로 옹립하고자 한 것까지.”

그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덧붙였다.

“그 모든 것이 프랑지아를 통째로 손에 넣기 위한 후작님의 치밀한 계획이었던 것은 아닌가, 그런 우려를 품는 자들조차 있을 정도입니다. 그 과정이 지나치게, 너무나 흠잡을 곳 없을 정도로 매끄러우니까요.”

탈레랑은 잠시 침묵하다가 싱긋 웃었다.

“물론 그렇게 되면 후작님은 혁명도 터지기 전에 내전 도중에 이 모든 사태를 예견하신 것이 되니, 말도 안 되지요.”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곤 입을 열었다.

“뭐, 혁명당의 우려는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게 우리의 그랑제콜 계획으로 인한 우려라면 그건 다소 지나치다고 말씀드리고 싶군요.”

“호오?”

“저는 군사령관입니다. 인간의 가치를 생각할 때 전술적 가치를 배제할 수 없죠. 따라서 제가 생각하기에, 혁명이 보장해주어야 할 평등은 결과의 평등이 아니라 과정의 평등입니다.”

“결과가 아니라 과정.”

“예. 그랑제콜 과정으로 인해 정예병들이 양성되는 것은 사실이나, 결국 그들을 선별하는 과정은 모든 군사들에게 적용되었습니다. 선별된 이후의 훈련은 몰라도, 선별될 자격은 평등하게 제공되는 셈이죠.”

“……흠.”

나는 탈레랑을 보며 싱긋 웃었다.

“물론, 그렇게 선별된 이들은 분명히 어느 정도 우대를 받고, 특권계층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게 문제가 됩니까? 당장 탈레랑 총재가 받는 대우와 프랑지아의 시민 한 명이 받는 대우가 다른데요.”

탈레랑의 얼굴이 슬며시 굳었다.

그도 그럴 것이, 부패나 사치와 완전히 담쌓고 살았던 이지도르와 달리 탈레랑은 자신의 권력으로 누릴 수 있는 정도의 즐거움은 누리는 사람이니까.

이지도르 쪽이 이상했지.

“그건 비단 군사들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농부와 변호사가 누릴 수 있는 것은 다르고, 달라야 합니다. 그런 것조차 없이 모두가 누릴 것에 평등을 강요한다면 누가 피땀 흘려 노력하겠습니까?”

“후작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평등 자체의 부정처럼 들립니다만.”

“그런 국민의회도 완전한 평등을 제공하진 않죠. 당장 세금을 낼 수 없는 빈민이나, 합당한 교육을 받지 못한 여성들에게는 투표권을 주지 않잖습니까?”

“…….”

“농부의 아들에게 변호사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세금을 낼 수 없는 빈민에게 줄 일자리를 만들고, 여성들을 교육하는 것까지가 우리가 해야 할 일이죠. 그걸 위해 도입한 그랑제콜이고.”

그랑제콜은 결국 국가에 도움 될 인재를 육성하기 위한 총체적 교육과정이고, 마력을 운용하는 정예병을 육성하는 훈련은 그 일부에 불과하다.

“그러나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거기까지입니다. 기회를 균등하게 주려는 과정의 평등을 위한 노력과, 실제로 가능할 리 없는 결과의 평등을 추구하는 건 완전히 별개입니다.”

당장 기사나 마법사 같은 자들이 실재하고, 똑같은 교육을 받아도 더 우수한 인간은 존재한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니 대우도 똑같이 받아야 한다는 이상론을 떠들어봐야 받을 수 있는 공감과 우수한 인재들을 제 발로 차버리는 것에 지나지 않지.

“그대들이 할 일은 혁명의 대의를 약자와 빈자만 공감하는 것이 아니라, 프랑지아의 모든 구성원들이 공감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수한 자들이 특권계층이 되어 혁명의 대의를 더럽힐지를 우려하는 것이 아니라.”

“……저는 그대의 주장에 완전히 공감하지는 않습니다만, 인상적인 의견이군요.”

나는 탈레랑의 말에 막시밀리앙 이지도르의 말이 떠올라서, 픽 웃었다.

-저는 당신의 비이성적이고 반개혁적인 의견에 단호히 반대합니다. 그러나 저는 국민의회의 일개 의원에 불과하며, 저의 독단으로 이 같은 사안을 결정할 수 없습니다.

과연, 막시밀리앙 이지도르의 후계자라 이건가.

“사실 그대들의 우려가 아주 잘못되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왕실이 복원되고 나면 그랑제콜 과정으로 육성될 정예병들을 여왕의 근위대라 명명할 생각이었으니까.”

물론 국민의회에서 별로 반길 명칭은 아니겠지만, 힘든 교육 과정을 견뎌내고 정예병이 될 자들에게 자부심을 심어주는 정도는 마땅한 보상이지.

나는 조금 굳은 탈레랑의 얼굴을 보며 씩 웃었다.

“그런데 왕녀 전하께서 거부하시더군요. 뭐라고 부르자고 하셨는지 아십니까?”

“흠, 그건 저도 궁금하군요.”

“혁명 수호대라 부르자고 하시더군요.”

탈레랑은 쓴웃음을 지었다.

“총재도 본심을 조금 보여주셨으니 저도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그대들의 혁명은 엉망진창이었습니다.”

탈레랑의 표정이 기묘해져서, 나도 조금 유쾌한 미소가 흘러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대들은 운이 꽤 좋습니다. 혁명의 정신 그 자체의 상징이 된 지도자가 있었고, 그가 귀족인 저조차 감화시켰으며, 심지어 가장 국민을 사랑하고 혁명에 공감할 수 있는 성녀님이 왕족이시기까지 하죠.”

이들은 정말 별의별 음모론까지 생각하는 모양인데, 에리스의 그런 인품이 기만을 위한 연출로 나올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그러니 이전에 말했듯, 제 생각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대들에게 기대하고 있을 뿐입니다.”

나는 탈레랑을 똑바로 마주 보며 미소 지었다.

“제가 공들여 길러낸 군대가 왕녀 전하께서 붙일 이름에 걸맞게 헌신할 수 있도록, 그들이 그런 임무에 자부심을 느낄 수 있도록 그대들이 제대로 된 이상을 보여주리라는 기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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