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혁명에 단두대는 필요없다-83화 (83/258)

83화. 총재 정부 - 왕위 주장자

다음 날, 국민의회.

예상대로 게르마니아 제국과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 3왕녀를 옹립하여 왕정을 복원하자는 제안을 처음 꺼내자, 국민의회 의원들은 격렬하게 반발했다.

이미 내가 혁명군 총사령관이고, 크리스틴과 중앙당이 국민의회를 상당히 장악한 상황에 우리의 제안은 대충 서출의 왕녀를 꼭두각시로 앉혀놓고 구체제로 회귀하겠다는 소리처럼 들렸을 테니까.

그러나 격분했던 국민의회 의원들의 절반은 그 3왕녀가 에리스라는 걸 알자 언성을 낮췄다.

아예 듣도 보도 못하던 실종된 왕녀면 몰라도, 성녀 에리스는 이미 전 국민에게 엄청난 인기를 얻은 인사다.

내가 후원자라는 거야 누구나 알지만, 함부로 꼭두각시로 폄하하기엔 지나치게 거물이다.

거기다 그 에리스가 자신의 입으로 국민의 선거를 통해 왕을 선출하되 임기제로 하고, 국민의회의 권한을 축소시키지 않는 쪽을 희망한다고 하자 나머지 반도 신중한 태도가 되었다.

국민의회의 의원들이 바라보는 가운데, 에리스는 시종일관 차분한 얼굴로 질문에 답하고 있다.

“……그러니까, 성녀님, 아니, 에실리스테……릴리안느 드 프랑지아 왕녀 전하. 요는 왕정을 회복시키되, 국민의회에 의한 통치를 이어가자는 겁니까?”

“네, 맞습니다. 탈레랑 총재님.”

에리스의 답을 들은 혁명당 총재 탈레랑은 슬며시 미간을 좁혔다가, 내 쪽으로 시선을 보냈다.

노골적으로 반신반의하는 얼굴에,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기만 했다.

“국민 투표를 통한 임기제 국왕의 선출이라, 획기적이긴 하나 전례가 없습니다. 이런 제안을 하신 왕녀님의 저의가 궁금하군요.”

자유당 총재 니콜라 브리소의 질문에, 에리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프랑지아의 여왕으로 군림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외국이 프랑지아의 왕위를 전쟁 명분으로 삼는 것을 막고 싶을 뿐이니까요.”

에리스는 잠시 뜸을 들이며 로브 자락을 매만지더니 덧붙였다.

“하지만 여러분께서 혁명을 수호하고자 하고, 이미 실패한 왕정을 재건하자는데 불안을 품으시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국민의 신임 없이는 유지될 수 없는 왕위라는, 일종의 보완책을 말씀드린 겁니다.”

“흠…….”

국민의회의 의원들은 제각각 소곤거릴 뿐, 극심한 반발은 하지 않았다.

이런 제안을 한 것이 에리스가 아니었다면, 국민의회는 일단 왕정을 복고시키기 위한 위선자의 기만책 정도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말하는 장본인의 행실과 무게가 그녀의 주장을 뒷받침해 준다.

프랑지아를 지키기 위해 루이 왕과 게르마니아 제국에 맞선 전투에서 실신할 때까지 병사들을 보호하고, 전투 후에도 자기 몸을 아끼지 않고 부상자들을 돌보던 에리스의 행동은 너무나 유명하다.

국민의회의 어느 누구도 에리스만큼 민중에게 봉사해본 적이 없고, 에리스는 그 긴 내전과 혁명기 동안 자신이 왕녀라는 사실조차 밝히지 않았다.

이제 와서 왕위에 욕심을 부린다고 매도하기엔, 에리스는 성녀라는 칭호에 부끄럽지 않은 행보와 그만한 민중의 사랑을 등에 업고 있다.

“좋습니다, 일단 왕녀 전하의 고결한 의지는 알 것 같군요. 하지만 걸리는 부분이 있는데, 게르마니아 제국에서 과연……흠. 우리 ‘민중’에 의한 투표로 선출되는 왕위를 받아들일까요?”

그렇게 말한 탈레랑은 슬며시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왕녀 전하께는 굉장히 죄송스러운 말이지만, 저들은 민중에 의한 선거 자체를 부정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저들이 황제를 선출할 전통적인 선제후의 권리와, 전례도 없던 프랑지아 국민의 권리를 동일시할 리가 없으니까요.”

“저도 게르마니아 제국에서는 우리의 제안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총재님.”

에리스는 단호하게 답했고, 탈레랑은 고개를 갸웃했다.

“하오면, 외국의 왕족들에게도 피선거권을 주자는 의견에 무슨 의미가 있으신지요?”

에리스가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려, 내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왕녀 전하의 말씀대로, 게르마니아 제국은 당연히 민중 투표의 정당성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을 겁니다.”

한낱 평민들이 왕을 선출한다는 것부터가 저들에겐 말도 안 되는 소리인데, 심지어 투표를 통해 황후 세실리아가 옹립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건 저들도 알고 있겠지.

“만약 게르마니아 제국의 황제를 평민들의 선거로 투표하자고 한다면, 제국의 제후들은 당연히 극심하게 분노하겠지요. 하지만 프랑지아의 왕위는 냉정하게 말해서 제국의 제후들에겐 남의 일입니다.”

평민들의 투표를 인정할 수 없다고? 알 바인가.

원래부터 국민의회와 프랑지아 공화국은 저들에게 토벌 대상인 일개 반란군이자 폭도였다.

“왕이 사라진 프랑지아에 새로운 왕을 세우겠다고 한다면, 일단 명목상으로나마 우리가 저들과 일종의 타협을 하는 형태로 보이게 될 겁니다.”

인식은 원래부터 이 이상 떨어질 곳이 없었고, 아무튼 적법한 왕위 계승권자를 왕위로 올리겠다는 행동을 취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전쟁 외에 선거라는 대안이 생겼으니, 설사 그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못하더라도 당장 전쟁을 부르짖기보단 타협점을 모색하자고 주장하는 제후들이 나오겠죠.”

“흠. 저들은 우리 선거의 정당성 자체를 인정하지 않을 텐데, 그렇게 쉽게 나오겠습니까?”

“나올 겁니다. 저들이 우리 제안을 무작정 반대하고 전쟁을 강행해서 우리가 왕녀 전하를 여왕으로 옹립해버리면, 신성 교국이 직접 지지하는 왕녀 전하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왕위에서 끌어내리기 위해 전면전을 벌여야 한다는 부담이 생기니까.”

제국의 제후들 입장에선 우리 선거가 정당하든 말든 알 바 아니고, 자신들이 손해를 피하게 할 핑계가 생겼다는 것이 중요하다.

애초에 저들이 전쟁에 참여하려는 것은 황후 세실리아가 프랑지아 왕위에 올라 주기로 한 이권 때문인데, 에리스 때문에 세실리아의 즉위 자체가 불확실해진 거다.

그런 와중에도 교국에게 밉보여가며 전면전을 치르느니, 되든 안 되든 우리들의 선거를 저들 기준에서 받아들일 수 있을 만한 쪽으로 조정하려고 시도하겠지.

하물며 외국 출신 황후가 자신의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저들에게도 익숙한 통치자의 선출 자체를 부정하고 전쟁을 강행한다?

제국의 선제후들은 그런 황후를 지원할 정도로 황권 강화에 헌신적인 자들이 아니다. 그 반대면 모를까.

“우리의 선거가 당장 저들의 제후들이 받아들일 수 있을 만한 것일 필요는 없습니다. 저들은 이해당사자가 아니니까요.”

어차피 황후 세실리아도 가벼운 마음으로 프랑지아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진 않았을 터다.

나름대로 긴 세월을 준비해서 모든 걸 걸었을 테니, 에리스를 왕위에 올린다고 깔끔하게 물러날 가능성은 낮지.

오히려 우리가 에리스를 옹립하겠다고 나섰다면 황후도 빠른 결단을 내릴 수 있을 거다.

약한 명분과 교국과의 관계를 우려해 전쟁 지지를 철회하는 제후들을 단념해서라도 전쟁을 벌일지를.

그러니 아예 제후들이 이탈할지 여부를 어중간하게 고민하며 황후에게 압력을 넣게 만드는 쪽이 더 발목을 잡게 된다.

“중요한 건 제후들에게 황후가 약속한 이권을 받기 어려워질 것 같다는 인식과 그럼에도 전쟁을 강행하면 그 책임이 황후에게 있으니 전쟁 지지를 철회해도 된다는 핑곗거리를 주는 것뿐입니다.”

설사 원하지 않을지라도 명목상이나마 해결책이 제시된 이상, 황후는 싫어도 저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다.

제국은 전쟁을 벌일지 벌이지 않을지도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 우리와 제후들에게 타협을 시도하며 지지부진하게 시간을 허비하게 될 거고, 그동안의 전쟁 준비는 전부 짐이 되어서 황후를 짓누르겠지.

물론 우리가 왕을 선출하겠다는데 이래라저래라할 저들의 요구를 받아들일 필요도 없다.

저들의 의견에 귀 기울이는 척하며 최대한 시간을 끌어, 제국의 국론을 분열시키며 시간을 벌면 이득이니까.

“게다가, 이건 제 추측입니다만.”

나는 씩 웃었다.

“제국의 선제후 중에, 제국의 국론이 분열되는 이런 사태를 지극히 반길 사람이 있을 겁니다.”

“……크라프테의 대왕이군요.”

탈레랑이 나직하게 답했다.

대놓고 제국에 반기를 들고 전쟁까지 치렀던 선제후다.

이 정도 판을 깔아주면 우리가 예뻐서가 아니라, 자신의 이득을 위해 알아서 나서겠지.

모두가 어느 정도 수긍하자, 차분히 서 있던 에리스가 고개를 들었다.

“존경하는 국민의회의 의원 여러분. 우리가 원하는 것은 같습니다. 이 땅을 지키고, 프랑지아의 국민들이 더는 고통받지 않는 것.”

확신에 찬 보라색의 눈동자가 이 자리의 모두를 사로잡을 듯이 빛났다.

“군림하며 지배하기 위한 프랑지아의 왕이 아니라, 국민의 대표체를 지키기 위한 프랑지아인의 왕을 선출해주십사 청합니다.”

* * *

게르마니아 제국 수도, 게르만부르크.

황후 체칠리아는 허탈하게 입을 열었다.

“성녀가, 3왕녀였다고?”

“그렇습니다, 카이제린.”

체칠리아는 외무대신의 말에 손을 들어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프랑지아의 혁명 정부는 국민 투표에 의한 왕의 선출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제안을 정식으로 보내고, 제국의 그녀와 노던 연합 왕국의 동생도 입후보할 자격이 있음을 통보해왔다.

“감히, 왕위에 오를 자를 평민들의 투표로 정하자고?”

심지어 평민들의 국민의회를 그대로 존속시키고, 8년의 임기제 국왕?

체칠리아는 기가 차서 헛웃음을 흘렸다.

“저 폭도들이 아직도 주제 파악을 못 하고 있습니다만, 3왕녀의 존재가…….”

저들이 만약 쓸데없이 살아남은 왕가의 방계를 데려오거나, 아무것도 아닌 서출 왕녀를 데려와 이런 말 같지도 않은 제안을 했다면 체칠리아는 무시하고 침공했을 터다.

그러나 신성 교국이 직접 지지하는 성녀인 3왕녀가, 저 말 같지도 않은 평민들의 선거에 응하기로 했다는 점이 문제다.

체칠리아는 전쟁을 강행할 것인지를 묻거나, 전쟁 지지를 재고하겠다고 청하는 제후들의 끝도 없는 서신들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제후들도 교국의 눈치를 보지만, 그녀도 아주 교국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녀와 황제의 아이, 오토가 미성년이어서 아직 차기 황제로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황제 선출권을 가진 7인의 선제후 중 3인이 교국의 영향을 받는 주교령의 제후들이다. 남은 4인 중 한 명은 대놓고 황제에게 반기를 든 크라프테의 국왕이고.

여기서 멋대로 교국을 무시하고 침공했다가 자칫 실패하기라도 하면 수백 년을 이어온 게르마니아의 제위가 다른 가문에게 넘어가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다.

체칠리아가 입술을 깨물고 있을 때, 또 다른 소식이 날아들었다.

“카이제린, 크라프테 왕국의 국왕 카를 2세가 보낸 서신입니다.”

“하. 그자가?”

크라프테 왕국의 대왕, 중앙 대륙 최고의 명장, 계몽전제군주.

무엇보다도 유명한 별명은, 황제를 패배시킨 선제후.

체칠리아는 시종이 전해준 서신을 받아들고, 심호흡을 한 뒤 뜯어보았다.

[위대한 게르마니아 제국의 카이제린 체칠리아.

놀라운 열정으로 헌신해 위기의 제국을 재건해낸 그대의 업적에 찬사를 보내는 바요.

허나 제국의 일원이자 그대를 존중하는 제후로서, 최근 카이제린의 행보에 대해 우려를 담은 소문이 들려오고 있다는 것을 밝힐 수밖에 없겠구려.

카이제린. 프랑지아 출신임에도 제국에서 입지를 다진 그대의 인내는 칭송받아 마땅하나, 사람은 늘 겸손해지는 법을 배워야 한다오.

카이저께서도 최근 건강이 우려되는데, 그대마저 과욕으로 일이 틀어진다면 이 제국의 운명이 어찌 되겠소이까?

물론 나는 크라프테 왕국의 국왕이자 제국의 선제후로서 제국의 혼란에 충실히 대비하겠지만, 제국의 현명한 카이제린이 이 대비를 그저 늙은이의 우려로 그치게 해주리라 기대하오.

크라프테 왕국의 대왕, 제국 변경백, 카를 2세.]

체칠리아는 대왕의 서신을 그대로 찢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힘겹게 억눌렀다.

다름 아니라 제국을 위기로 몰아넣은 장본인이, 대놓고 협박을 일삼고 있다니.

이따위 서신으로 그녀의 심기를 긁어놓으며, 다른 제후들에게 입김을 넣고 있을 그 자를 생각하니 울분이 차올랐다.

“프랑지아의 왕위만 얻으면 저까짓 크라프테 왕국 따위……!”

외무대신은 울분을 토하는 체칠리아의 앞에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카, 카이제린…….”

체칠리아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축객령을 내렸고, 외무대신은 재빠르게 물러갔다.

크라프테의 대왕이 보낸 서신을 대충 책상 위로 던져버린 체칠리아의 눈이 지도 위의 프랑지아로 향했다.

평생을 이 순간만을 위해 달려왔는데, 존재조차 잊고 있던 서출 왕녀 따위가 이런 식으로 걸림돌이 될 줄이야.

“하.”

체칠리아의 입에서 싸늘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비와 오라비. 그녀의 모든 것을 빼앗고 팔아치운 자들에게 직접 되갚아줄 기회는 없었다.

그렇다고 멈춰 서기엔 그 고통 속에 악착같이 지탱해온 삶이 의미를 잃어버릴까 봐, 그녀를 버린 조국이라도 손에 넣고자 했건만.

“에실리스테 릴리안느 드 프랑지아.”

체칠리아는 만나보지도 못한 이복동생의 이름을 곱씹었다.

그녀가 적들만이 가득했던 이 제국에서 뼈를 깎으며 입지를 다지는 사이, 아비가 총애한 코르티잔과 함께 그녀가 받지 못한 사랑을 넘치도록 받았다던 존재.

그 배다른 동생이, 심지어 전 프랑지아에서 칭송받는 성녀이자 그녀의 대적자였다니.

체칠리아의 눈에 핏대가 섰다.

“신이라는 자에게는 진정으로 티끌만 한 공정함도 없구나.”

신이 공정함을 허용하지 않는다면, 그녀에게 어떤 것도 내어주지 않으려고 든다면.

언제나 그러했듯, 그녀는 물려받지 못한 유산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거머쥘 것이다.

저들은 잠시 유예를 얻었을 뿐. 그녀는 결코, 이런 식으로 끝낼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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