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총재 정부 - 왕녀
수도 뤼미에르에 복귀하고 일주일이 흘렀다.
나는 그동안 밀린 총사령관 업무를 처리하고, 이베리카 반도 사절단 대표로서 올릴 보고서를 작성하는 등 바쁜 시간을 보내야 했다.
결국 데미앙 드 미르보는 부하가 올린 서류에서 착오를 발견하여 정정에 시간이 필요하다는 핑계를 대며 하루를 더 썼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서류를 늦게 올려준 덕분에 그나마 여유를 가지고 업무를 볼 수 있었다.
만약 데미앙까지 드제 정도로 완벽하게 일 처리를 해두고 나만 기다리고 있었으면 난 아마 쉴 시간도 없었을 거야.
물론 그렇다고 내가 데미앙을 안 갈군 건 아니었지만.
그렇게 나를 기다리고 있던 일 더미를 거의 다 치우고 한숨 돌렸을 때쯤, 프랑지아 각지를 돌며 빈민 구제와 자선 활동을 마친 에리스가 뤼미에르로 돌아왔다.
“어서 오십시오, 성녀님. 돌아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언제나처럼 하얀 로브 차림의 에리스에게 내가 가볍게 목례하며 정중하게 말하자, 그녀는 베일 너머로 잠시 나를 올려다보더니 느릿하게 답했다.
“오랜만이네요, 라파예트 후작님.”
언제나처럼 에리스를 따르는 시녀 제니, 그리고 보몽 경과 가볍게 눈을 마주친 뒤 내가 손을 내밀자, 에리스도 자연스럽게 나에게 손을 맡겼다.
에리스는 저택 안으로 들어서며 후드 안에 쓰고 있던 베일을 벗어, 제니에게 건네주었다.
10대가 끝나가서 그런가, 드러난 에리스의 얼굴은 이전과 달리 앳된 느낌은 많이 가셨다.
하긴, 생각해 보면 에리스는 이제 회귀한 직후 만났던 크리스틴보다 연상이 된 셈이다.
내심 동생처럼 생각해서였는지, 어째 기분이 묘하다.
"아, 참. 후작님이 주신 아티팩트, 정말 요긴하게 썼어요. 여름에도 시원하니 너무 행복하더라고요. 다시 한번 감사드려요."
에리스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여름에도 껴입고 다니느라 고생하던 걸 기억해서 준 선물은 만족스러웠던 모양인데, 어째 묘하게 예의 바른 것이…….
“조금은 차분해지신 것 같습니다?”
특유의 장난기와 가벼움이 원래부터 가진 신비한 외모의 분위기를 죽였다면, 지금의 에리스는 태도와 외모가 맞물려서 제법 기품이 느껴진다.
그러나 내 말을 듣기가 무섭게, 에리스의 보라색 눈동자에 장난기가 차올랐다.
“이쪽이 마음에 드시나요?”
얼씨구.
“글쎄요.”
“흠~”
일부러 애매하게 답하자 에리스는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장난스럽게 웃더니, 이내 표정을 고치고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는 조금 신경 써야죠.”
“그렇군요.”
지금은 내가 정중하게 대해도 굳이 편하게 대하라고 요구하지 않는 것처럼, 에리스의 자유분방함은 어리석은 방종과는 거리가 멀다.
소녀 시절부터 조숙했던 이 왕녀님은 자신의 입장을 아주 잘 알고 있으니까.
그래도…….
“……조금만이니까, 너무 기대하시면 안 돼요.”
그렇게 말하면서 장난스럽게 웃는 에리스는 역시나 너무나 그녀다워서, 나도 슬며시 웃어버렸다.
* * *
에리스를 에스코트하여 응접실로 들어서자, 미리 기다리고 있던 크리스틴과 앙쥬 백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키텐 백작님, 앙쥬 백작님.”
“왕녀 전하.”
에리스가 로브 자락을 들어 올리며 살짝 무릎을 굽혀 인사하자, 크리스틴이 마찬가지로 예를 갖추고-앙쥬 백작이 대뜸 한쪽 무릎을 꿇었다.
“서, 성녀님, 아니, 에실리스테 릴리안느 드 프랑지아 왕녀 전하를 뵙습니다!”
대번에 응접실의 공기가 어색해졌다.
으음, 하긴. 보통은 이렇겠지.
심지어 앙쥬 백작은 중앙당 내에서도 연로한 귀족이니…….
“일어나 주세요, 앙쥬 백작님.”
에리스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하자, 앙쥬 백작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크흠, 크흠. 실종되신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이리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전하.”
“고맙습니다, 백작님.”
에리스는 간단하게만 답하며 자리에 앉았다.
차가 준비되고, 앙쥬 백작이 입을 열었다.
“실로 놀랍구려, 라파예트 후작. 3왕녀 전하를 모시고 계셨고, 심지어 그게 성녀님이셨을 줄이야.”
“우연이었습니다.”
나는 그렇게만 답했지만, 앙쥬 백작은 나를 굉장히 새삼스럽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나는 백작의 시선을 적당히 흘리며 입을 열었다.
“아시겠지만 게르마니아 제국의 황후가 된 1왕녀 세실리아가 프랑지아 왕위 계승권을 들먹이며 전쟁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프랑지아는 아직 내전과 지난 전쟁의 피해를 복구하지 못한 상황입니다.”
폭풍의 마녀가 있었다고는 해도, 힘겹게 승리한 지난번 공세조차 게르마니아 제국 입장에서는 적은 병력만을 보낸 생색내기에 불과했다.
그런데 저들이 황후에게 프랑지아 왕위를 안겨주겠다고 단결해서 덤벼든다면, 그건 냉정하게 말해서 현재 공화국 전력으로 저지하기 버겁겠지.
“그래서 대응책으로 모색한 것이, 저들의 전쟁 명분인 프랑지아 왕위입니다. 합당한 왕족이 왕위에 오른다면 저들의 주장은 명분을 잃습니다.”
“그래서 3왕녀 전하를 모시고 계셨구려.”
“그렇습니다. 이번에 게르마니아 제국의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국민의회가 열릴 텐데, 그 자리에서 정식으로 3왕녀 전하를 왕위에 옹립하자는 제안을 하려고 합니다.”
“오…….”
앙쥬 백작은 나직하게 감탄했다.
저렇게 대체 몇 수 앞을 내다보고 움직인 거냐는 눈으로 봐도, 나로선 민망할 따름인데.
“하오면, 왕녀 전하께서도 후작의 생각에 동의하시는 것입니까?”
앙쥬 백작의 말을 들은 에리스는 제법 기품 있는 모양새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저는 이 나라의 왕녀로서 책임을 다할 것입니다. 다만, 우려되는 부분도 조금은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왕녀 전하.”
내 말에, 에리스는 조금 망설이는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제 어머니는 코르티잔 출신이셨습니다. 정통성에서는 명백히 게르마니아 제국 쪽이 우위인데, 저들이 그것만으로 쉽게 물러날까요?”
“그 부분은 크게 문제 되지 않습니다, 왕녀 전하.”
에리스의 의문에 답한 것은 크리스틴이었다.
그녀는 늘 들고 다니는 검은 부채를 펼쳐, 살랑이며 덧붙였다.
“확실히 정통성만으로 본다면 다소 밀리는 감은 있지만, 왕녀 전하께서는 동시에 교국에게 공인받은 성녀입니다. 교국에서 전하를 프랑지아 왕위의 정당한 계승권자로서 지지해 주겠다는 답을 받아두었습니다.”
그냥 성녀기만 해도 정통성으로 공격하기는 껄끄러워질 텐데, 아예 대놓고 교국이 지지하는 왕위 계승권자를 서출이라고 까내린다?
교황과 아예 척 지겠다는 소리와 다른 것이 없다.
“오오, 그건 굉장하구려. 제국이 아무리 몸이 달았어도, 교국이 직접 인정하고 지지하는 성녀를 정통성으로 무시할 수는 없겠지.”
“앙쥬 백작님의 말씀대로입니다. 황후에게 왕관을 씌워주겠다고 교국과 척지는 선택을 할 제후는 별로 없겠죠.”
크리스틴은 그렇게 답하곤,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왕녀 전하께서 우려하신 정통성 문제는 저와 아키텐 백작이 충분히 해결해드릴 것입니다. 그쪽은 심려치 않으셔도 됩니다.”
“……그렇군요. 조금, 놀랐어요.”
내 말을 들은 에리스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결과물이야 좋지만, 과정이나 내막을 알면 그리 깨끗하기만 한 거래는 아니니, 이 계획을 에리스에게 미리 알려주진 않았다.
이건 우리가 교국의 요청대로 프랑지아 내의 종교 박해를 중단시키는 데 성공했고, 겸사겸사 두둑한 기부도 약속했기에 가능한 일이니까.
교국 입장에서도 자신들이 인정한 성녀가 왕위에 오르면 권위 확대에 큰 도움이 될 테니, 못 이기는 척 들어준 거지.
에리스는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러면, 하나 더. 국민의회는 제 즉위를…….”
에리스는 잠시 말을 고르는 듯 뜸을 들이고선 말을 이었다.
“혁명의 종말로 받아들이지는 않을까요?”
“확실히 그런 우려는 있습니다.”
나는 막시밀리앙 이지도르의 마지막을 떠올렸다.
그는 죽어가면서도 국민의회의 운명을 걱정했다.
특히나 견제자가 모두 사라진 상황에, 나로 인해 혁명이 무너지는 것을 두려워했지.
“왕녀 전하를 즉위시키기로 결정한 이상, 공화국은 종말을 맞이하고 왕국의 부활이 됩니다. 중요한 것은 저들의 혁명을 부정하고 여왕 아래의 통치체계를 구축하느냐, 전하를 여왕으로 옹립하되 국민의회에 의한 통치를 이어가느냐의 문제겠죠.”
“제가 원하는 것은 물론 후자예요.”
에리스는 아주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녀라면 이렇게 말할 줄 알고 있었지.
“하지만, 모두가 우리 의도를 이해해 줄지는 잘 모르겠네요.”
에리스는 그렇게 말하며 조금 걱정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아마도 에리스를 여왕으로 즉위시킨다고 하면, 프랑지아 민중들의 지지를 받는 것은 어렵지 않을 거다.
내전과 전쟁으로 지친 프랑지아 국민들은 평화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지금까지 에리스의 행보를 보자면 신분을 숨긴 채 왕위에 욕심을 내지 않고, 내전과 혁명을 거치는 동안 프랑지아 국민들을 위한 선행만을 베풀던 성녀다.
그런 에리스의 즉위를 전쟁으로부터 프랑지아 국민들을 구하기 위해, 원하지 않던 옥좌에 앉는 희생으로 포장하는 것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에리스가 왕녀라는 것을 미리 알고 준비해온 나를 배제하고, 에리스 입장에서만 보자면 저게 진실이기도 하니까.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국민 여론이고, 국민의회는 좀 별개지.
“말씀하신 대로 주도자가 저와 중앙당인 이상, 국민의회는 당연히 우리의 의도를 의심할 겁니다.”
막시밀리앙 이지도르의 후계를 자처한 탈레랑과 혁명당은 우리의 행동을 구체제로의 회귀 시도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적지 않다.
니콜라 브리소와 자유당은 공화국 초기부터 우리와 비교적 우호적인 관계였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강세였던 급진파들을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지금은 오히려 나와 크리스틴이 국민의회를 반쯤 휘어잡은 상황이니, 아예 혁명당과 자유당이 손을 잡고 우리를 막으려 들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흠, 왕녀 전하시라면 인품이나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나 부족함이 없으시거늘, 이제야 이 나라가 제자리를 찾아가려는데 어리석은 자들이…….”
앙쥬 백작이 혀를 차서, 나는 슬며시 미소 지었다.
물론, 중앙당의 귀족들은 대개 이렇게 반응하겠지.
귀족들이야 평민 출신 정부 수반인 총재들보다는 여왕이라는 정통성 있는 권위자를 섬기는 쪽을 선호할 테니까.
하물며 그 여왕이 될 사람이 누구나 사랑하고 존경할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앙쥬 백작은 턱을 매만지더니 입을 열었다.
“아예 강행 돌파하는 건 어떻소? 이제는 우리 세력도 적지 않고, 라파예트 후작과 아키텐 백작, 그리고 나와 중앙당이 함께하면 능히 가능할 것 같소만.”
앙쥬 백작의 말대로, 하려고 하면 가능이야 할 거다.
당장 게르마니아 제국과 전쟁을 벌여서 공화국이 멸망할 위기니까, 반발하는 자들을 게르마니아 제국과의 내통자로 몰아가며 밀어붙이면 못할 것도 없지.
하지만 크리스틴의 부상에 분노한 내 행동이 어떻게 비쳤는지를 보면 별로 선택하고 싶은 길은 아니다.
무엇보다 그렇게 되어서야, 혁명을 배신하지 않는 한 저들을 지키겠다던 내 맹세를 내가 배신하는 꼴이 되지 않나.
최후까지 신념을 지키고 죽어가던 자 앞에서 내뱉은 말은 단순한 위안이나 위선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새기는 각오였을 터다.
게다가.
“앙쥬 백작님, 저는 그대들을 구시대로 회귀시키고자 왕녀임을 밝힌 것이 아닙니다.”
“크흠, 송구합니다, 왕녀 전하.”
앙쥬 백작은 에리스의 싸늘한 시선에 헛기침을 하며 민망해했다.
설사 내가 하려고 해도, 에리스는 그런 수단으로 취한 왕위를 결코 원하지 않겠지.
앙쥬 백작이 민망해하며 차를 마시고 있자, 크리스틴이 입을 열었다.
“중요한 건 우리의 행동을 저들이 혁명의 전복 시도로 받아들이지 않게 하는 겁니다. 의원들을 하나씩 포섭하는 조금 번거로운 과정을 거친다면, 국론은 분열되더라도 아주 못할 건 없겠죠.”
크리스틴이라면 의회 내에서 다른 의원들을 구워삶는 과정을 거쳐서 어느 정도 회유는 가능하겠지.
문제는 시간과 돈이 필요하다는 거고…….
“그편이 현실적이겠지만, 그러는 동안 게르마니아 제국은 착실하게 전쟁 준비를 진행하고 있을 겁니다. 우리가 시간을 끌면 끌수록 좋을 것이 없겠죠.”
저들의 황후가 제아무리 유능하다 한들, 말만으로 제후들을 움직였을 거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분명 프랑지아의 여왕으로서 줄 수 있는 이권들을 약속했을 테고, 당장 에리스가 즉위하여 세실리아가 여왕으로 즉위할 수 있는 가능성이 낮아지면 대다수의 제후들은 전쟁 지지를 철회할 거다.
하지만 지나치게 시간을 끌면 제후들이 자산을 소모해 충분한 전쟁 준비를 마치게 될 거다.
그러면 그들이 적당한 다른 대가만 받거나 아예 프랑지아를 멸망시킬 셈으로 참전을 강행할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다.
이미 돈을 써버렸다면, 그냥 허비하느니 뭐라도 받아내야 그나마 손실이 덜하니까.
그러자 그동안 잠자코 들으며 차를 마시던 에리스가 찻잔을 내려놓더니 입을 열었다.
“제안이 있어요.”
“말씀하시지요, 왕녀 전하.”
“게르마니아 제국, 선거로 황제를 뽑는 국가죠?”
“네, 맞습니다. 선제후들의 선거를 통해 다음 대의 황제를 선출합니다. 최근 들어선 현 황제 가문의 즉위를 승인받는 요식 행위에 가깝습니다만…….”
“우리도 국민의 선거로 왕을 선출하는 걸로 해보죠.”
“예?”
순간 나와 앙쥬 백작, 심지어 크리스틴까지 멍한 얼굴이 되었다.
“선거라고는 해도, 왕녀 전하를 왕위에 올리는 것뿐입니다만.”
“저뿐 아니라 계승권 있는 왕위 계승권자들의 입후보를 받아주는 거죠. 예를 들어서, 지금 한창 전쟁을 준비하고 있을 게르마니아 제국의 황후님이라던지.”
“가능이야 하겠는데, 거기 무슨 의미가…….”
당연히 프랑지아 국민들이 에리스 대신 게르마니아 제국의 황후를 뽑아줄 가능성은 없는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
게다가 지금 국민의회의 지지를 받는 문제를 논의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이게 무슨 엉뚱한 소리야.
그렇게 생각하고 있자 에리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선출된 국왕에게 의원들처럼 임기를 부여하는 거죠. 임기가 끝나면 다시 선출 투표를 진행하도록. 국민의 신임을 계속 받아야만 왕위를 지킬 수 있으니 국민의회도 조금은 수긍해 줄 거고…….”
에리스는 장난기 넘치는 보랏빛 눈동자를 빛내며, 검지를 들어 올려 입가에 가져다 대곤 웃었다.
“명목상이지만 이번이 아니면 다음 선거로라도 즉위할 가능성을 열어주었는데도 제국의 황후가 선거를 부정하고 전쟁을 선동한다고 하면, 투표로 정당성을 인정받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제국의 선제후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