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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혁명에 단두대는 필요없다-81화 (81/258)

81화. 총재 정부 - 로즈마리

딜루스를 떠나는 길.

크록스와 그의 백성들은 성대한 환송식을 열어주었다.

핫산은 우리와 함께 먼 길을 떠날 그의 동생, 샨드라를 배웅해 주며 눈물을 펑펑 쏟……지는 않았다.

그저 나이에 걸맞지 않게 세파에 찌든 지친 얼굴로 ‘저 녀석이 우리 대표라니 세상 참 말세로구나.’ 같은 무언의 표현을 했을 뿐.

사절단으로 같이 갔던 이들도 상당한 환영과 저들이 보여준 모습 덕분에 어느 정도 편견을 벗어던져서, 오크와 고블린, 인간, 수인이 한데 모여 우리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는 모습에 제법 좋은 인상을 받은 것 같다.

처음 관문에서 오크의 왕이 만남을 청한다고 보고해서 내려올 때만 해도, 이런 관계가 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지.

뿌듯한 마음으로 프랑지아로 돌아갈 수 있어, 다행이다.

* * *

짧지 않은 여정 끝에, 여름이 끝나고 가을로 접어들 무렵.

우리는 수도 뤼미에르에 도착했다.

그러나,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나를 기다리는 건 일더미의 산이었다.

“수도에 돌아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라파예트 후작 각하.”

누구보다 빠르게 들이닥친 루이 드제는 짙은 피로감이 보이는 얼굴로 싱긋 웃었다.

“그동안 수고했네, 드제 사령관.”

“이쪽에 있는 것은 그랑제콜 계획으로 실시된 훈련과정에 대한 보고서와 승인을 필요로 하는 서류, 이쪽은 북부군에 대한 보고서와 서류입니다.”

“고맙……군.”

수도에 도착하면 크리스틴의 얼굴을 보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는데, 차마 나 대신 그동안 고생하고 있었을 그의 앞에서 일을 미룰 수는 없었다.

“자세한 내용은 보시면 아시겠지만, 일반 병사들의 마력 사용 훈련은 상당히…… 흠. 이렇게 말씀드리자니 좀 송구스럽습니다만, 기대 이하입니다.”

“그런가.”

나는 보고서를 펼쳐서 빠르게 훑어 내렸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다.

군마는 값비싸고, 기병은 고급인력이다.

그중에서도 중기병은 나름대로 일반 병사 중에서는 가장 정예로서 선발된, 기사에 가장 가깝게 단련된 병사들이었다.

자연히 그런 자들은 약간의 마력 수련만으로도 성과를 거두는 자들이 많았고, 훈련과정을 거치면 일반적인 병사를 훨씬 능가하는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러나 기초 군사훈련이나 좀 했을 뿐인 일반 병사들은 그렇지 않았다.

보고서는 수개월에 걸친 훈련을 통해 마력에 소양을 보인 군사들은 고작해야 10%를 밑돌고, 개중에서도 정말 전투에 도움이 될 만한 적성을 보인자는 1% 정도에 그친다는 사실을 여과 없이 보여주었다.

라파엘 발리앙은 평민들이 모두 마력을 다루게 된 초인들의 군대를 꿈꿨지만, 애석하게도 현실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은 거지.

그나마 1%도 무시할 만한 숫자는 아니니 준비만 된다면 상당한 전력이 되어주겠지만, 문제는 시간과 비용이다.

“게르마니아 제국이 전쟁을 준비 중이라고 들었는데.”

“예, 각하. 지난번 제국회의에서 황후가 아예 프랑지아 왕위를 명분으로 한 전쟁에 참여를 호소했고, 제후들이 군대를 동원 중이라고 합니다.”

“쯧. 빠르군.”

게르마니아가 저렇게 나올 거라는 건 빤히 알고 있었고, 크리스틴이 저들이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 징후를 발견해 알려주기도 했다.

그러나 근위마도단 같은 엄청난 전력을 잃고 대패해서 물러난 것 치고, 전쟁 준비 과정이 빨라도 너무 빠르다.

게르마니아 제국은 황제 아래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국가가 아니고, 여러 제후국이 모인 국가들의 연합체니만큼 다음 전쟁까지 시간은 좀 있을 거라고 생각했건만…….

황제가 반쯤 허수아비라는 건 공공연한 사실인데도 이럴 정도면, 제국의 실세라는 황후의 정치역량이 우리 생각보다도 굉장하다는 얘기다.

프랑지아에서 사실상 평화를 위한 볼모로 넘겨진 여자가 제국을 저 정도로 장악할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북부군의 장악 수준은?”

“이제 그럭저럭 통제할 수 있을 수준은 됩니다.”

피곤한 얼굴로 답하는 드제의 말에, 나는 싱긋 웃었다.

“정말 고생했네, 드제 사령관. 덕분에 마음이 놓여.”

북부군은 사실상 라파엘 발리앙의 친위대였다.

쿠데타로 지휘부가 쓸려나가긴 했지만, 그래도 그 단기간 내에 이 정도 답이 나올 정도면 그가 얼마나 고생하며 노력했을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하하, 뭐, 근위대원으로서 혁명군에 항복할 때만 해도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상관 잘 만나서 출세했으면 밥값은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고맙군. 그럼, 그동안 고생했을 테니 가서 좀 쉬어. 안색이 안 좋은데. 나머지는 남부에서 놀다 온 내가 처리하지.”

“보통 이럴 땐 저도 돕겠다고 하겠지만…….”

드제는 슬며시 웃었다.

“감사합니다, 각하!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어, 그, 그래…… 고맙네.”

보내줄 생각이긴 했는데 저러니까 괜스레 붙잡고 싶어지네.

드제가 남기고 간 서류 더미와 씨름하고 있자, 다음 손님이 찾아왔다.

“뤼미에르에 돌아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후작 각하! 이 데미앙 드 미르보, 후작 각하를 다시 뵙게 되어 실로 기쁨을 감출 수가 없-”

“보고서는?”

“예?”

“그동안의 업무처리에 대해 보고서 없나?”

나는 드제가 산더미처럼 놓고 간 북부군의 보고서를 턱짓으로 가리켜 보였고, 데미앙은 어색하게 웃었다.

“아니, 긴 여행길로 피로하실 후작 각하께 보고서 더미부터 올린다니요, 업무에 열성적인 것도 좋지만 이건 너무 배려가 없는 것 아닌지요?”

“…….”

이게 이 인간이 진짜로 날 배려하는 거야, 아니면 그동안 태업해서 올릴 보고서가 없는 거야?

“그래, 배려는 고맙군. 신임 남부군 사령관으로서 그간 업무는 충실히 수행했으리라 믿지.”

“이를 말씀이십니까! 라파예트 후작 각하와 아키텐 백작이 믿고 맡겨주신 소임, 빈틈없이 수행하고 있습니다!”

크리스틴이라면 기겁하던 작자가, 남부군 사령관 자리에 추천해 주었다고 바로 태세 전환한 것 봐라.

데미앙 드 미르보는 아주 믿음직스럽게 각 잡힌 자세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그래, 그럼 남부군 현황에 대한 보고서도 내일 받아볼 수 있겠군?”

내 말을 듣자마자, 그 각 잡힌 자세는 바로 흔들렸지만.

“내일, 말씀이십니까?”

“그래, 내일. 내 그대의 배려는 아주 감사히 받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게르마니아 제국이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데 내가 남부군 상황도 모른 채 대비할 수 있겠나?”

“무, 물론입니다. 후작 각하. 혁명군 총사령관으로서 실로 귀감이 될 만한 자세십니다! 내일, 내일…… 물론 전부 제출하겠습니다. 각하.”

데미앙이 식은땀을 흘리며 답하는 꼴이 어째, 오늘 남부군 사령부는 철야하게 될 것 같은데.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지만, 내가 총사령관이 되기 전에 남부군 사령관이었다는 사실은 기억하고 있겠지? 기대하겠네.”

대충 거짓으로 작성했다가 걸리면 죽는 거다.

“이를 말이겠습니까, 각하! 그럼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그래. 수고하도록, 사령관.”

데미앙 드 미르보는 잽싸게 도망치듯 사라졌다.

여러모로 행정 군인의 귀감인 드제에 비해 저렇게 미덥지 못한 놈이지만, 야전에서는 신기할 정도로 잘 싸운단 말이지.

……특히 열세에서 방어전 펼칠 때.

그러니까 그런 곳에만 던져두면 밥값은 하겠지.

그렇게 생각하자 조금은 기분이 나아져서, 서류를 처리하는 손놀림에 속도가 붙었다.

보아하니 드제가 말한 대로 북부군의 인사 정리와 인수인계는 꽤 이루어진 것 같고, 와중에  이전 북부군 지휘관들이 복직할 때를 대비한 신규 부대 편성도 준비 중이다.

완전히 만족할 만큼은 아니어도, 이만하면 발리앙의 쿠데타로 인한 여파에 발목이 잡히지는 않겠네.

그렇게 서류 정리가 끝나갈 때쯤, 새로운 방문자가 도착했다.

“……크리스틴.”

“수고하셨어요, 피에르.”

크리스틴은 언제나처럼 상복을 연상시키는 검은 드레스를 입고, 손에 부채를 쥔 채 눈을 휘며 웃었다.

“미안합니다, 내가 먼저 찾아가야 하는 건데.”

“아뇨. 무척 바쁘실 것 같아서, 업무 처리하실 시간을 두고 온 건데…….”

크리스틴은 내 책상 위에 남은 서류들을 흘긋 보더니 고개를 슬며시 기울였다.

“방해가 된 걸까요?”

“아니요, 그럴 리가.”

내 답을 들은 크리스틴은 싱긋 웃었다.

“그러면, 잠시 차를 대접할 시간 정도는 내어주실 수 있죠?”

* * *

크리스틴은 직접 차를 우려내서, 내 잔에 따라주었다.

“로즈마리예요. 피로를 조금 덜어주고 정신이 맑아져서, 저도 업무 볼 땐 자주 마신답니다.”

“아, 고맙습니다.”

잔을 들어 마시자 따뜻하면서도 시원한 느낌이 목을 타고 넘어간다.

“좋군요.”

솔직히 망할 그레모리인가 하는 서큐버스 때문에 그녀의 얼굴을 볼 일이 걱정이었는데, 차분한 그녀 특유의 분위기와 차가 정신을 맑게 해주는 느낌이다.

“다행이네요.”

크리스틴은 빙그레 웃었다.

“제가 돌아오는 사이 잘 지냈나요?”

“언제나와 같았죠. 아-.”

내 물음에 답하던 크리스틴은 잠시 고개를 기울였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이 돌아오는 사이, 알프스 왕국과의 교역 협정이 체결되었어요.”

“오, 정말입니까?”

“네. 혁명당의 탈레랑 총재가 나섰어요. 듣기로는 우리 와인을 혹평한 드워프들에게 분개해, 고용한 주방장과 함께 저들의 식문화를 분석해가며 준비한 요리로 저들을 감동시켜서 설득해냈다던가?”

크리스틴은 픽 웃으며 부채를 펼쳤다.

“재미있는 사람이죠? 어쨌든 탈레랑 총재 덕분에 콧대 높은 드워프들도 진지하게 이야기를 들어주었고, 미스릴을 재료로 저들의 질 좋은 무기를 수입할 수 있게 되었어요.”

“그건 또, 재미있군요.”

크록스와의 거래로 남부에서 입수할 미스릴이 교역 재료가 되어줄 거라 기대하긴 했지만, 고집 센 드워프들이 한번 거부한 거래를 이렇게 빠르게 수락할 줄은 몰랐는데.

어비스 코퍼레이션과의 거래를 하지 못해서 무기 수입이 곤란한 상황이었는데, 이렇게 되면 그 부분이 상당히 해소될 거다.

동방 제국에 접촉하려던 것이 일방적으로 차단되어 분개한 국민의회 덕분에, 해군 양성도 진행 중이고.

주먹구구식으로 돌아가던 공화국의 군대가 이제야 좀 제대로 운영되겠군.

내가 다시 크리스틴이 준비해 준 차를 음미하고 있자, 크리스틴이 가만히 나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 성녀님을 무대 위로 올릴 차례인가요?”

“맞습니다. 아, 그래. 에리스는 어디 있습니까?”

“자선 활동 중이죠. 지금은 아마 수도 근처에 다 왔겠네요. 당신이 없는 여름 동안, 거의 전국을 돌았으니까.”

“그럼 슬슬 왕녀 전하의 얼굴은 거의 모든 국민들에게 유명하겠군요.”

“네, 맞아요. 당신, 아니, 우리 계획대로죠.”

크리스틴은 나를 잠시 바라보다 싱긋 웃고는 입을 열었다.

“재미있네요. 귀족이면서 공화국에 투신한 우리가, 이제는 공화국에서 굳건한 입지를 다졌는데 다시 여왕을 옹립한다니.”

잠시 뜸을 들인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부채를 착 접으며 덧붙였다.

“……잘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우리는 우리가 처한 상황에 역행하는 선택만 하는 줄 알겠어요.”

나도 웃음을 터트리며 답했다.

“그러게요. 그런데도 당신이 저를 믿고 도와주어서 가능했죠.”

크리스틴은 빙그레 웃었다.

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은 채 온전히 나를 직시하는 검은 눈동자와 마주하는 공간.

그 속에서 따스한 차와 함께 공유하는, 불편하지 않은 침묵이 흘렀다.

나는 그 편안함을 잠시 만끽하다가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보고 싶었습니다, 크리스틴.”

크리스틴은 한번 눈을 깜빡였지만, 이내 슬며시 웃으면서 답해주었다.

“저도요, 피에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앞으로 다가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크리스틴에게 손을 건네자, 그녀가 자연스럽게 손을 맡긴다.

회귀로부터 4년. 무엇 하나 확실한 것이 없던 시간 속에서 얻은, 내 행복이자 반드시 지켜야 하는 사람.

“키스해도 됩니까?”

살짝 얼굴을 붉히면서도 고개를 끄덕여 보이는 그녀의 손등에 천천히 입을 맞추고, 올려다보자 크리스틴이 약간 머뭇거리다 허리를 숙였다.

서큐버스가 보여준 환상 속의 갈급한 것과 다른, 조심스러우면서도 부드러운 입맞춤을 나누었다.

크리스틴과 로즈마리의 향이 섞여들어 몸 안을 채우는 듯한, 향긋하고 따스한 감각이 번져 나갔다.

차오르는 충족감에 크리스틴을 살짝 끌어안자, 그녀가 천천히 머리를 기울여 내 어깨에 기대왔다.

“루이스는 잘 지내고 있답니까?”

“네, 편지는 주고받고 있어요. 그 아이, 마법에 제법 재능이 있나 봐요.”

“그래요.”

크리스틴이 뜬금없이 루이스를 마도 왕국으로 유학 보낸다고 했을 때는 나도 좀 놀랐는데, 잘하고 있는 모양이지.

나는 루이스를 살려두기로 한 결정이 크리스틴에게 더 큰 상처로 돌아오는 것이 아닐까 우려했었지만, 습격당했을 때 제 누이를 지키려 한 소년이 이제 와서 그녀에게 해를 입히려고 들 것 같지는 않다.

그보다는.

“……이제 겨우 12살이겠네요.”

“네.”

루이스가 성년을 맞이할 때까지 앞으로도 6년을 버텨야 한다니.

“조금 더 빨리 자라주지 않으려나.”

나직하게 말하자, 크리스틴이 쿡쿡 웃음을 터뜨렸다.

“후회되시나요?”

귓가에서 작게 들려오는 속삭임에, 나는 웃으면서 그녀를 품에서 놔주었다.

다른 건 다 후회해도, 이 선택은 결코 후회할 일 없지.

“설마, 이 고생을 하고 있는 게 다 그때를 위함인데.”

확신을 담은 내 답에 크리스틴은 진하게 미소 짓더니, 팔을 뻗어 내 목을 끌어안았다.

두 번째 입맞춤은 옅어진 로즈마리의 향을 채우려는 듯, 조금 더 깊고 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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