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총재 정부 - 밀실 회담 (1)
어느 정도 예상하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부족 단위 동맹과 포르투 군대의 연합체인 적들은 결속이나 연계 자체가 상당히 어설펐다.
혼란에 빠진 우리를 야습하려다가 예상과 다른 사태와 마주하자, 도리어 저들이 동요하다 갑작스러운 우리의 돌격에 혼비백산하며 허무하게 무너져 버렸다.
그렇게 초전부터 적들을 대파해 버린 크록스의 군대는 전투 후 부대를 수습하고, 다시 조금 더 남하한 다음 주둔지를 꾸렸다.
그리고 이들은 아예 전 병력 채로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떠들썩한 웃음소리와 말소리가 들리고, 오크와 인간, 고블린들이 제각각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고기와 빵을 즐긴다.
“음, 원래 자주 이러나?”
“되도록 자주 하려고 하고, 승전하고 나면 꼭 한 번은 하지!”
크록스는 우적거리며 고기를 뜯어먹다가 꿀꺽 삼키곤 답했다.
기본적으로 수렵에 의존하는 것으로 알고 있던 이들이 왜 그렇게 대량의 식량을 수입하려고 드나 했더니…….
“군대를 잘 먹이는군?”
“으하하, 열심히 먹고, 훈련하고, 행군하고, 싸운다! 그게 군대의 역할이 아닌가!”
확실히 어느 나라든 군대의 식사에는 신경을 쓰지만, 이들만큼 식량을 아끼지 않고 먹이지는 않는다.
술을 마시지 않는 문화 덕분에 이렇게 먹어대도 다음날 큰 지장은 없겠고, 사기 유지에는 도움이 되겠군.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저들이 따라준 음료를 입에 댔다가 깜짝 놀랐다.
“이건 뭐지? 짠데.”
“염소젖을 발효시키고 소금으로 간하면 오래 보관할 수 있거든. 그걸 물로 희석시킨 거다. 목을 축이는 데는 아주 제격이야!”
이렇게 짠데 갈증 해소에 도움이 되나?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몇 모금 더 마셔보자 갈증이 가시는 느낌이 들었다.
신기하군.
그러고 있자 옆자리에 앉아있던 카로크가 입을 열고, 샨드라가 통역해 주었다.
“이번 전투에서 후작님의 활약을 들었다고, 대단하다고 하십니다.”
“아, 감사합니다. 임기응변일 뿐이었죠.”
“으하하, 임기응변은 무슨! 아주 능숙하게 효과적으로 처리했던데! 아마 나였으면 그렇게 깔끔하게는 못 했을 거야!”
웃음을 터트린 크록스는 예의 염소젖 음료를 들이켜더니 입을 열었다.
“형제, 나이가 어떻게 되나?”
“스물둘인데.”
“허, 젊군.”
“그러는 그대는?”
“난 스물여덟이다.”
“만만치 않게 젊은 것 같은데…….”
오크도 수명은 인간과 큰 차이가 없는 걸로 알고 있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크록스는 손으로 턱을 매만지더니 입을 열었다.
“형제. 핫산에게 그대의 이력에 대해 듣고, 어제의 활약도 봤지만 이제 겨우 스물둘이라기엔 실로 대단하군.”
지금의 나이는 그렇지만, 회귀 전까지 생각하면 나는 10년을 넘게 전장에서 구른 셈이다.
그것도 그 치열했던 프랑지아 내전과 발리앙에 맞선 혁명기를 경험하고, 이번에는 아예 게르마니아 제국과도 싸워봤지.
그러니 전장에서 벌어질 수 있는 상황에 대해 기본적인 대처는 능숙할 수밖에.
하지만…….
“고작 스물여덟에 왕국을 세운 그대가 할 말이라기엔 좀 묘하지 않나?”
“으하하하! 그것도 그렇군!”
거기다 지금은 저렇게 호쾌하게 웃고 있는 크록스가 어젯밤 전장에서 보여준 모습은 내 등골이 서늘해질 수준이었다.
아예 아군이 방해되는지 적진 한복판에 뛰어들어 날뛰는 폼이, 거의 괴수에 가까워 보이던데.
그러고 보니.
“어제 카로크, 그대는 전장에서 보이지 않더군?”
크록스만큼 살아 움직이는 근육 덩어리는 아니지만 못지않은 덩치에, 엄청난 위압감 덕분에 무용이 상당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샨드라가 내 말을 전해주자, 카로크는 그 험악한 얼굴로 씩 웃으면서 대답했다.
“카로크님은 눈을 다치신 이후로 최전선에 나서기보단 병사들의 지휘와 보급 관리에 집중하십니다.”
“보급 관리라.”
확실히 전투에서는 하나뿐인 눈이 크게 방해되겠군. 덩치만 보고 그가 선봉장일 거라고 생각한 건 또 편견이었나.
“우리는 각지에서 염소 목축업을 하고 있습니다. 카로크님은 그들에게서 제때 염소젖을 수령해, 병사들에게 먹일 수 있도록 보관하고 가공하는 역할도 하고 계십니다. 이 무더운 이베리카에서는 갈증 해소가 아주 중요하죠.”
“그건, 좀 놀랍군.”
하지만 그런 나도 뒷말까지 듣고는 깜짝 놀랐다. 이들은 우리 생각보다 훨씬 더 체계적인 보급 관리를 하는 모양이다.
“과연 왕의 첫 번째 심복이라 불릴 만하군.”
내가 진심을 담아 말하자, 그것을 전해 들은 카로크는 송곳니를 드러내며 싱긋 웃었다.
“으하하, 카로크는 제법 세력을 가진 족장이었는데 가장 먼저 우리와 함께하기로 결정해 주었지! 내가 많은 신세를 지고 있어!”
그래서 첫 번째 심복인가.
프랑지아와는 완전히 다르고 크록스라는 개인에 상당히 의존하고 있지만, 과연 이들도 효율적인 형태의 국가를 갖추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다음 계획은 어떻게 되지?”
“조금만 더 남하하면 악마들에게 빌붙은 자들 중 가장 큰 부족의 영역이다. 그들에게 복속을 요구하고, 거부하면 짓부순다!”
아주 화끈한 계획이구만.
아니, 잠깐.
“그대 말대로면 딜루스와 거리가 꽤 가까운 것 같은데, 최전선 도시를 수도로 삼은 건가?”
내 말에 크록스는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딜루스가 이베리카 반도의 정중앙이니까! 신의 대지가 나와 형제들을 위해 예비 되어 있는데, 적들을 두려워할 이유가 무엇이 있는가!”
너무나 크록스다운 답에, 나는 피식 웃었다.
과연, 이 정도 호쾌함은 있어야 황무지의 왕이라 이건가.
* * *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밖에서 미미하게 풀벌레가 우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보니, 야심한 밤이다.
나는 덮은 이불 속에서 천천히 손을 뻗어, 허리춤에서 단도를 뽑아들었다.
그리고 바로 이불을 박차며 일어서 그것을 던지려다, 그대로 뻣뻣하게 굳었다.
살짝 비치는 달빛만으로도 도저히 몰라볼 수 없는, 너무도 익숙한 사람이 앞에 있다.
장신구 따위 일절 하지 않은, 상복을 연상시키는 검은 드레스.
등을 덮을 만큼 길고 검은 머리칼.
빨아들일 듯한, 심연 같은 칠흑빛의 눈동자.
“……크리스틴?”
손에 부채를 쥔 채, 조금 놀란 듯이 눈을 크게 뜨고 있던 크리스틴이 작게 한숨을 내쉬고 입을 열었다.
“놀랐어요. 정말 민감하시네요, 피에르.”
“아, 미안합니다.”
나는 재빨리 단도를 허리띠에 다시 찔러 넣었다.
근데, 여긴 이베리카 반도인데?
“당신이 왜 여기에?”
어떻게?
당혹감을 숨기지 못하며 묻자, 도리어 크리스틴이 의아하다는 얼굴이 되었다.
“서신, 전달받지 못하셨나요?”
서신? 무슨 서신.
무언가 위화감이 있는데, 어째서인지 머리가 약간 잘 돌아가지 않는다.
“당신에게 수도 상황을 보고하려고 서신을 보냈는데, 당신이 저들을 따라 전장에 나갔다는 답신을 받아서요.”
그렇게 말하는 크리스틴의 눈초리가 어째 차가워서, 나는 슬며시 시선을 피했다.
“아니, 당신이 걱정할 만한 짓은 하지 않았는데…….”
“전장이 위험하지 않을 수도 있군요.”
크리스틴은 그렇게 말하며 손에 쥔 부채를 착 접어버렸다.
이것 참. 할 말 없네.
그렇다고 그녀를 이대로 세워두기도…….
뭔가 이상한데, 뭐가 이상한지 잘 모르겠다.
마치 술에 취하기라도 한 것 같은 감각에 절로 인상을 쓰는데, 크리스틴이 내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어, 크리스틴?”
“……저는 놀라서 그 먼 길을 급하게 달려왔는데, 당신은 평소와 다를 것이 없네요.”
“아니, 여기까지 오게 해서 미안한데, 뭔가 너무 갑작스럽네요.”
내가 생각을 마치기도 전에 숨결이 가까워지고, 이내 크리스틴이 팔을 뻗어 내 목을 끌어안았다.
입술에 맞닿는 부드러운 감촉에 굳어 있자, 평소에는 차갑게 침잠해 있는 그녀의 검은 눈동자가 열의를 담은 채 불만을 표한다.
허락을 구하듯 이빨에 와닿는 말캉한 감촉에 쓸데없는 생각이 정지했다.
강하게 마주 끌어안자, 크리스틴의 부드러운 몸의 굴곡이 그대로 느껴지는 감각은 자제심을 날려 버렸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크리스틴이 내 밑에 깔려서 가쁜 숨을 내뱉으며 호흡을 가다듬고 있었다.
상기된 얼굴이 약간 몽롱한 눈을 하고 나를 올려다본다.
미치겠군.
그녀의 드레스를 아예 벗겨버리고 싶은 충동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억누르며 몸을 일으키려는데, 크리스틴이 손을 뻗어 내 팔을 잡았다.
“……피에르.”
“크리스틴, 나를 너무 시험-”
“당신이 저를 불안하게 해요.”
크리스틴은 눈물 맺힌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며 호소했다.
“……확신을 주세요.”
그 순간, 내 머릿속에서 무언가 날아가 버렸다.
* * *
크리스틴이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며 나를 올려다본다.
그녀의 시선이 천천히 자신의 목에 들이밀어진 단도를 보다가 다시 내 얼굴로 향했다.
“……피에르?”
“너는 누구냐.”
차올랐던 열기가 그대로 분노로 전환되어 들끓는다.
“왜, 이러시죠?”
크리스틴의 얼굴로 충격받은 표정을 지으며, 떨리는 음색을 낸다.
대체 어떻게 이 정도까지 크리스틴을 흉내 낼 수 있는 거지?
하마터면 속을 뻔했다.
나와 크리스틴은 약혼 관계고, 서로 사랑하는 사이다. 그녀와 사랑을 나누고 싶은 욕망도 분명히 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크리스틴이 루이스에게 아키텐을 물려준 뒤에, 그녀가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자유롭게 된 이후에나 있을 일이다.
그런데 그녀가 먼저 청할 리가 없지.
머리가 차갑게 식고서야, 지금의 상황이 확실히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크리스틴이 서신을 보내고, 내가 크록스를 따라나서서 걱정하는 것까지야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그게 며칠이나 되었다고 뤼미에르에서 여기까지 도착해? 심지어 마력을 연마한 것도 아닌 그녀가 내가 잠자는 천막에 숨어든다고?
오히려 여태껏 왜 이걸 이상하게 느끼지 못했는지 이상할 정도로 부자연스럽다.
아직까지 미약하게 남은, 무언가에 취했던 감각이 불쾌감을 부채질한다.
“그냥 이대로 그어버릴까?”
크리스틴, 아니 크리스틴의 얼굴을 한 무언가는 입을 다물더니, 연기를 그만두었다.
그 순간 유리에 금이 가는듯한 소리가 들리고, 순간적으로 현기증이 덮쳐왔다.
내가 묶고 있던 천막이, 아니 세계가 유리 파편처럼 금 가고 깨지더니 무너져 내린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지?
모든 것이 흩어져 내리고, 발치에 깨져 버린 유리 파편들만이 남은 세계는 아무것도 없는 칠흑 같은 어둠으로 뒤덮여 있다.
분명히 어둠뿐인데, 눈앞에 자리한 인간의 형상은 아주 환하게 시선을 사로잡는다.
수녀복을 입어놓고 치마 한쪽을 완전히 터놓아 맨 다리를 그대로 드러내는, 신성모독적인 모습.
여태껏 본 어떤 금발보다도 찬란하게 금빛으로 빛나는, 긴 머리칼을 휘날리는 여자가 의아하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어라, 이상하다. 분명히 당신이 갈망하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었을 텐데, 어떻게 눈치챈 것입니까?”
그 여자의 등 뒤에서 퍼덕이는 박쥐 날개를 본 순간, 나는 바로 허리춤에서 단도를 뽑아 들었다.
아니, 들었어야 했다.
내 손은 허공을 스쳤다. 잠자는 순간에도 풀지 않는 허리띠에, 단도가 한 자루도 없다.
그러는 사이, 금발의 악마가 금빛의 눈동자를 빛내며 수녀복의 치맛자락을 들어 올렸다.
“처음 뵙습니다. 어비스 코퍼레이션 산하 러스트 사 대표이사, 그레모리가 프랑지아 공화국 혁명군 총사령관 피에르 드 라파예트 후작께 인사 올리는 것입니다.”
“악마.”
검이라도 있다면 당장 목을 날려버릴 텐데, 끝도 없는 어둠만이 가득한 자리에는 검은커녕 아무것도 없다.
방금 전에 떨어져 내렸던 유리 파편들도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이렇게 된 이상, 목이라도 졸라야 하나.
그렇게 생각하고 자세를 낮추자, 자신을 그레모리라고 소개한 악마가 두 손을 들어 올렸다.
“잠깐, 잠깐! 폭력 반대입니다! 저는 연약한 서큐버스지만 이곳은 당신의 꿈이니 저를 죽여도 아무 의미도 없는 것입니다!”
“내 꿈이라고?”
서큐버스. 몽마.
인간의 꿈속에 숨어들어 정기를 빨아가는 전설속의 악마.
그럼 방금까지의 크리스틴이 이 망할 악마의.
분노에 휩쓸려서 뛰어들려고 하자, 그레모리가 민감하게 내 기색을 읽고 두 손을 들어 X자를 그렸다.
“아, 안 돼요! 저는 당신을 기쁘게 해주려고 한 것뿐인데! 방금 전 본 꿈은 당신의 욕망입니다! 제가 연출한 거면 그렇게 정밀할 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욕구불만이라 크리스틴을 덮치는 저딴 꿈이 나왔다 이거냐?
얼굴에 열기가 오르고, 그만큼 불쾌감이 강해졌다.
일단 저 망할 서큐버스의 날개를 찢어놔야 직성이 풀리겠다.
“아앗!”
냅다 뛰어들었지만, 서큐버스는 간발의 차로 날개를 퍼덕이며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저 망할 악마가…….
내가 이를 갈고 있자, 그레모리는 울상을 지었다.
“기껏 찾아낸 특상의 정기가 저렇게 무서운 사람이라니 망했어. 이런 걸 맛만 보고 참으라니, 너무하는 것입니다…….”
뭐라는지 모를 헛소리를 하던 그레모리가 손가락을 튕기자, 익숙한 현기증이 덮쳐오며 세상이 산산조각 났다.
그 끝에 펼쳐진 장소는 칠흑 같은 어둠이 아니었다.
뭔지 모를 금속제로 이루어진 건물 안, 마력등이 비추는 제법 화려한 인테리어의 방이다.
방 한가운데 놓인 소파와 테이블을 보고서야, 나는 이곳이 응접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응접실 소파에서, 본 적이 있는 자가 일어섰다.
보라색의 화려한 드레스와 그 위에 걸친 백의.
“이렇게 직접 뵙는 것은 처음이군요, 피에르 드 라파예트 후작님.”
타는 듯이 붉은 머리칼의 악마가 핏빛의 눈으로 나를 보며 웃는다.
“어비스 코퍼레이션 산하 슬로스 사 대표이사, 파이몬이 그대를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