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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혁명에 단두대는 필요없다-76화 (76/258)

76화. 총재 정부 - 왕의 형제 (2)

일국의 총사령관을 주재무관처럼 데려가겠다는 크록스 왕의 제안에 사절단은 당연히 기겁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너무 빠르게 조약이 체결되어 버려서 일정도 붕 떠버렸고, 우방이 전투하러 간다는데 이쪽 볼 일 다 봤다고 바로 떠나버리기도 뭐 해서 수락했다.

어차피 크록스가 무슨 군대의 참전을 바란 것도 아니고 문화의 차이 같으니, 나와 호위 역인 가스통만 따라가는 것으로.

그렇게 나선 한여름의 작열하는 태양이 내리쬐는 황야.

아침 일찍 출발해서 아직 오전일 텐데도, 달아오른 지면의 뜨거운 열기가 아지랑이로 피어오르고 있다.

나는 행군하는 크록스의 군대를 흥미로운 눈으로 지켜보았다.

오크와 고블린, 인간으로 구성된 혼성군.

마을에서도 그랬지만, 군대도 종족별로 따로 편제되었는지 같은 종족끼리 행군하고 있는 걸 보아하니 주로 같은 종족끼리 뭉쳐 지내는 모양이다.

저들의 군대는 제법 규율이 있으면서도, 동시에 자유분방하다.

행군하는 저들은 질서정연하게 대오를 지키고 있지만, 우리가 군대에 입히는 화려한 원색의 통일된 군복 따위는 없다.

그런 와중에도 행군하면서 자유롭게 대화하는 모양새를 보아하니 기본적으로는 같은 종족끼리 어울리지만, 다른 종족끼리도 제법 자연스럽게 교류하는 모양이다.

그건 그렇고, 인간들 중 일부는 머스켓을 들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냉병기가 많은데…….

그런 것치고는.

“의외로 철제 갑옷을 입고 다니는 자는 보이지 않는군.”

“으하하하! 이런 날씨에 그런 걸 입고 다니다간 싸우기도 전에 지쳐 쓰러질걸!”

크록스가 호쾌하게 웃으며 답했다.

확실히, 이런 날씨에는 아마 흉갑만 입어도 달궈지겠지.

그래서인지 인간 병사들은 제각각 적당한 가죽 갑옷이나, 아니면 전신을 가리는 옷에 터번을 두르고 있다.

저건 저것대로 더울 것 같은데.

“날이 더운 것치고, 인간 군사들은 꽤나 껴입었네.”

“인간들의 피부는 연약해서 태양빛에 쉽게 타버린다. 거기다 지금은 이렇게 더워도 밤이 되면 제법 추워.”

“흠…….”

마력을 수련한 기사, 나나 가스통에겐 그리 해당되지 않는 말이다.

실제로 내 옆에 붙어서 따라오고 있는 샨드라는 문신을 하긴 했지만 군데군데 갈색 피부를 드러내고 있으니까.

그래도 평범한 인간이라면 확실히 심각한 문제지.

하지만…….

나는 흘긋 고개를 돌려 그러는 크록스를 바라보았다.

크록스는 여전히 가죽 바지를 입고 장화만을 신은 채, 근육이 꿈틀거리는 흉터투성이의 녹색 상체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다른 오크들도 거의 크록스와 비슷하게 상체를 드러내고 있고.

오크들은 햇볕이나 기후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은 건가.

그건 차치하더라도 맨몸으로 전장이라…….

종족 전체가 겁을 상실하기라도 한 건지.

나는 시선을 돌려, 이번에는 고블린들 쪽을 바라보았다.

키는 내 가슴 정도 오는 체구의 병사들이 곤봉이나 활, 슬링을 들고 행군하고 있다. 저들은 오크만 한 터프함은 없는지, 인간들처럼 옷을 껴입었다.

“그러고 보니 마을에서는 수인들도 좀 봤는데, 그들은 병사로 복무하진 않나?”

“그들은 주로 정찰대로 복무한다. 빠르고, 냄새를 아주 잘 맡거든.”

“……그렇군.”

수인은 이제 와서는 대륙 전체를 뒤져봐도 찾아보기 힘든, 짐승과 인간의 중간쯤 되는 종족이다.

원래는 남부 대륙에서 그럭저럭 번성한 종족이었고 중앙 대륙에서도 간간히 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개성과 다재다능함에 비해 숫자가 적어 노예 사냥꾼들의 인기 품목이 된 탓에, 소수민족으로 전락해 버렸다.

그게 벌써 수백 년 전이었는데, 소위 야만의 땅이라는 황무지에서 이런 식으로 정착해있는 걸 볼 줄이야.

“흠! 드디어 도착했군.”

크룩스의 말에 나도 시선을 돌려, 망원경으로 저 멀리에 진을 치고 있는 적들의 진지를 바라보았다.

몇몇 황무지 부족들의 깃발과, 포르투의 깃발이 함께 걸려 있다.

“고대하던 전장이로다!”

크록스가 긴 송곳니를 드러내며 히죽 웃었다.

그의 호쾌함과 잔혹함을 동시에 드러내는 미소라고 생각한 순간, 그가 숨을 깊게 들이마시더니 천둥처럼 소리쳤다.

“Aliastiedad liltakhyim!”

“Naem!”

그러자마자 행군하던 전 병력이 일제히 입을 모아 복창하는 소리가 대열 전체로 퍼져 나간다.

설마하니, 이 지나치게 화끈한 왕은 도착하자마자 전투부터 하려는 건가?

“야영 준비하라고 하십니다.”

긴장하고 있던 나는 샨드라의 말에 순간 맥이 빠져서 비틀거릴 뻔했다.

……아, 제길.

적과 조우했는데 전투 준비도 아니고 야영 준비를 해서 특이하다고 생각했는데, 듣자 하니 여름의 한낮은 오크들조차 싸우기 힘들 정도로 더워서 도저히 전투를 벌일 수가 없단다.

그래서 무더위 속에 행군해온 부대를 쉬게 할 겸, 가장 무더운 오후에는 간단하게 낮잠을 자고 전투는 다음 날에나 하게 될 거라고.

새삼 느끼지만 프랑지아와 제법 가까운 반도인데도, 너무나 다르군.

나는 천천히 걸으며, 이들이 아주 익숙한 듯이 천막을 펼치며 야영지를 구축하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부족 생활을 할 때의 습관 덕분인지, 굉장히 빠르고 익숙해 보인다. 심지어 인간들도.

그러고 있자, 샨드라가 쾌활하게 웃으면서 다가왔다.

크록스 왕의 일곱 번째 심복이자 네 번째로 강한 전사라는 그녀가 왜 나를 따라다니고 있는가 하니.

원래 내 통역을 맡아주던 핫산이 수도 딜로스에 남자, 크록스가 대신 통역하라고 붙여두었기 때문이다.

크록스와 핫산, 샨드라가 모두 유창하게 말해서 잘 몰랐는데, 이들 중 중앙 대륙의 공용어를 잘 하는 이는 적은 모양이다.

그쪽만큼은 우리의 고정관념이 맞았던 모양이군.

“어떠신가요, 후작님? 우리 형제들에 대한 감상은?”

“규율을 지키면서도 다양한 종족들이 저마다 자유로운 것이 인상적이네.”

샨드라는 내 답이 제법 마음에 들었는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하핫. 우리 형제들의 자랑입니다, 후작님.”

나는 샨드라의 답을 듣고, 다시 한번 야영지를 둘러보았다.

중앙 대륙의 주요 인간 국가들에게 배척받는 인간 이교도들과 야만족이라 멸시당하는 오크, 고블린, 거기에 박해받던 소수민족 수인들까지 한데 모여 차린 왕국.

배척받은 자들이 한데 모여, 종족의 차이에 구애받지 않고 서로를 형제들이라 부르며 왕을 모시는 국가.

배척받은 자들이 모여 만든 낙원이라. 신생 국가로서는 굉장히 이상적이긴 한데…….

이들 모두가 믿고 따를 크록스라는 구심점이 없다면, 이런 체제가 유지 가능할까?

문득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가, 눈앞에 그늘이 져서 고개를 들자 크록스만큼이나 거구인 오크가 서 있었다.

심지어 큰 흉터가 있는 한쪽 눈에는 안대를 하고, 덥수룩하게 기른 수염 때문에 내가 여태껏 본 오크 중 가장 험악하게 생겼다!

나도 모르게 움찔하자, 가스통도 그에 반응해서 내 옆에 와서 섰다.

“아, 후작님. 우리 왕의 첫 번째 심복, 카로크입니다.”

샨드라가 옆에서 대신 소개해 주었다.

이자가 핫산보다도 위 서열이라고? 척 봐도 엄청난 위압감이 느껴진다.

설마하니, 자기 왕이 첫 번째 심복도 아니고 나를 형제로 인정한 것이 불쾌해서 시비라도 걸러 온 건가? 힘을 신봉하는 자들이니 충분히 그럴 수도 있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 험악하게 생긴 카로크가 싱긋 웃으며 목례해 보였다.

……어? 뭔가 생각한 것과 반응이 다르다?

그가 무어라고 말하자, 샨드라가 통역해 주었다.

“후작님과 가스통 경이 머무를 숙소가 준비되었다고 합니다. 아, 참고로 이렇게 생겼지만 형제들을 자기 아이처럼 자상하게 대해주는 친절한 분이십니다.”

……어째 얼굴이 화끈거렸다.

“반갑습니다, 카로크. 피에르 드 라파예트 후작입니다. 숙소를 준비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내가 악수를 청하자, 카로크도 싱글싱글 웃으며 악수를 받아주며 뭐라고 답했다.

“존경하는 왕의 형제분께서 편하게 지내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으니, 혹시나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라도 제게 말해달라고 하시네요.”

나는 샨드라가 전해주는 통역에 자괴감을 느꼈다.

이들에 대한 편견에서 완전히 벗어나려면, 나도 시간 꽤나 걸리겠는데.

* * *

이들이 준비해 준 잠자리는 당연히 천막이었지만, 푹신한 카펫을 바닥에 깔아준 덕분에 그럭저럭 편안히 잠자리였다.

나와 가스통 모두 샨드라에게 감사를 표하고, 내일의 전투에 대비해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그리 오래 쉬지는 못했다.

자고 있던 나는 밖에서 들려오는 소란에 눈을 떴다.

다소 몽롱한 머리에 뭐라고 하는지는 몰라도 다급함과 혼란이 느껴지는 소리가 들려오자, 잠이 확 달아난다.

제일 먼저 검부터 챙긴 내가 천막 밖으로 뛰어나가기가 무섭게 가스통, 그리고 샨드라와 마주쳤다.

“후작 각하!”

“후작님!”

“무슨 일인가!”

“야습인 것 같습니다!”

야습. 야만족이?

허.

아니, 빌어먹을. 그딴 편견은 내려놓아야 하는데. 포르투의 군대도 있는데 뭔들 못하겠어?

정신을 차리자 여기저기 천막에 불이 나고, 병사들이 우왕좌왕하며 정신없이 불을 끄러 뛰어다니는 혼란이 한눈에 들어왔다.

여기저기서 당혹한 외침이 터져 나오며 병사들이 헐레벌떡 뛰어다니고, 그런 행위는 혼란을 더욱 가중시키고 있다.

아니, 이게 무슨 난장판이야?

“설마하니 불침번도 안 두는 건 아니겠지?”

“당연히 아닙니다!”

샨드라가 자신들을 어떻게 보냐는 눈으로 억울하다는 듯이 소리쳤지만, 실제로 이 꼴이 나 있으니…….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그럼 크록스 왕을 따르는 자들은 즉시 입 다물고 자리를 지키라고 해!”

“예, 예?”

“불침번의 시선을 피해서 대규모 병력이 숨어들 수 있겠어? 숨어든 소수가 혼란을 유도하고 야습하려는 거겠지!”

“아……!”

“명령에도 불구하고 혼란을 유도하려고 정신 사납게 구는 놈들이 있을 거다! 숫자도 적을 테니 그놈들만 잡아내면 충분히 수습할 수 있어!”

“알겠습니다!”

샨드라가 즉시 뛰어다니며 소리치기 시작하자, 크록스 왕의 심복으로 인정받은 자여서인지 형제들의 군대는 즉각 복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란을 유도하려고 구는 놈들을 몇 명 베어 넘기자, 소란은 금세 가라앉았다.

눈치가 빨라서 입 다물고 살아남은 첩자들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어차피 혼란이 잠재워진 시점에 저들의 작전은 실패다.

일단 상황이 정리되고 병사들에게 집결 명령이 전달될 때쯤, 크록스가 등장했다.

뭐라는지는 모르겠지만 샨드라를 치하하는 것 같은 말에, 샨드라가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왕이시여. 제가 아니라 왕의 형제분께서 낸 계책입니다.”

“오, 형제여! 그대의 생각이었던가! 이 크록스가 감사를 표한다!”

“그건 좋지만, 감사 인사는 어설픈 야습의 대가를 알려준 다음에 해도 되지 않을까?”

“으하하하! 바로 그렇다!”

우리 진영의 천막들에 붙었던 불은 다 꺼졌고, 사방에 긴장 섞인 고요함이 감돌고 있다.

그리고 우리의 눈에, 별다른 장애물도 없는 황야 위를 저들 딴에는 은밀하게 접근해오고 있던 군대의 그림자가 명백하게 들어왔다.

어째서인지 순식간에 혼란이 수습되자 저들끼리 당황하며 의견을 교환 중이기라도 한 듯, 어정쩡한 위치에서 우왕좌왕하고 있는 모습이.

그 모습을 본 크록스가 근육질 가슴을 부풀리며 깊은숨을 들이마시고, 이내 천둥처럼 소리쳤다.

“Al-ardho!”

그에 호응해, 샨드라까지 포함하여 그의 전 군사들이 한목소리로 부르짖는다.

“Akbar!”

그와 동시에 크록스가 대지를 박차며 질주하기 시작하고, 그 뒤를 군사들과 우리가 따라 달렸다.

“그래서 저게 무슨 뜻인데?”

샨드라가 웃으면서 소리쳤다.

“신의 대지는 위대하시다!”

* * *

포르투 항구.

찬란한 황금처럼 빛나는 긴 금빛의 머리칼을 늘어트리고, 얼핏 보기에는 경건해 보이는 수녀복을 입은 아름다운 여자가 책상에 엎드려서 칭얼거렸다.

“아, 여긴 너무 맛없는 자들뿐인 것입니다~ 저는 욕구불만인 것입니다…….”

정작 수녀복의 옆을 훤하게 터놓아서 허벅지를 그대로 드러낸 모습 덕분에 경건함과는 거리가 멀었고, 등에서 퍼덕이는 박쥐 날개는 아예 경건함과는 담쌓은 종족임을 보여주고 있었지만.

굳이 수녀복을 입고 다니는 악취미의 서큐버스, 러스트 사의 대표이사 그레모리는 책상에 엎드린 채로 앞에 놓인 주스를 쪽쪽 빨아 마셨다.

그런 그레모리를 한심하다는 눈으로 쳐다본 파이몬은 자신의 적발을 손으로 쓸어 넘기고는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기껏 위장용 포션까지 지원해 줬는데, 야습은커녕 역습당해서 대패했다고?”

“소, 송구합니다.”

슬로스 사의 대표이사 파이몬은 매우 불만 어린 눈으로 말단 악마가 벌벌 떠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산업혁명의 재료인 인간의 수급이 여의치 않자, 프라이드 사는 포르투와 손잡고 이베리카 반도에서 아인종과 인간을 수급할 계획을 잡았다.

초기에는 꽤 성과를 거두었지만, 포르투 항구의 노예였던 크록스라는 오크가 탈주하여 왕국을 자처하면서부터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덕분에 인간과 아인종 수요가 제일 시급한 슬로스와 러스트 사가 이 먼 포르투까지 출장 나와서, 이 미개한 현지에 머무르고 있는 처지라니.

‘귀찮아 죽겠네, 정말.’

파이몬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면서 다리를 바꿔 꼬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 크록스라는 자는 계략보다는 힘에 의존하는 자 아니었어? 어쩌다 그렇게 된 거지?”

이기지는 못해도, 어느 정도 피해는 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그것이.”

“말해, 빨리 듣고 쉬고 싶어.”

“간파한 자는 프랑지아의 피에르 드 라파예트 후작이라고 합니다.”

파이몬은 그 말을 듣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고, 부하는 상관이 격노한 줄 알고 기겁하며 머리를 조아렸다.

“소, 송구합니다!”

“라파예트 후작이 이베리카에 와있어?”

“예? 예. 이번에 프랑지아 공화국의 사절단으로 왔다고…….”

“어- 러스트 사의 그레모리는 슬로스 사의 파이몬에게 항의합니다~ 지금 지나치게 색기 넘치는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이건 슬로스 사의 월권인 것입니다~!”

하찮고 무능한 부하의 어리바리함도, 쓸데없는 그레모리의 딴지도 이 순간 파이몬에게는 아무래도 좋았다.

파이몬의 입가에, 도저히 감출 수 없는 진한 미소가 번졌다.

“이것 참, 운이 좋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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