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총재 정부 - 왕의 형제 (1)
나는 수도를 떠나 남부로 향해, 핫산을 비롯해 이베리카로 향하는 사절단과 다시 합류했다.
핫산이야 물론 크록스 왕의 의지라며 괜찮다고 했지만, 아키텐 상단을 통해 사과 겸 선물의 의미로 대량의 식량을 챙겨주자 꽤 기뻐했다.
어쨌든 외교관계인 이상, 너무 빚져도 곤란하지.
우리의 행렬은 지난번과 같이 옛 라파예트의 영지인 툴루즈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남부 관문을 지나 이베리카 반도로 들어섰다.
그리고 우리는 산맥을 통과하기가 무섭게, 작열하는 태양 아래 더럽게 고온 건조한 공기와 마주해야 했다.
“……덥군요.”
“여름이니까요.”
핫산은 아주 익숙하다는 듯 답했지만, 이런 기후에 익숙하지 않은 나로선 숨이 턱턱 막힌다.
이럴 줄 알았다면 에리스에게 선물해 준 냉기를 담은 아티팩트를 나도 하나쯤 챙길 걸 그랬나.
갈색으로 쩍쩍 갈라진 마른 땅과 군데군데 솟은 산과 구릉지가 끝도 없이 펼쳐져 있고, 그 대지는 햇빛에 달구어져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다.
이 땅이 왜 황무지로 불리는지 아주 여실히 실감하게 되는군. 저들이 왜 우리와의 식량 거래를 원했는지 아주 잘 알겠다.
이런 지역에서 농사가 잘 될 가능성은 거의 없겠지.
“반도 전역이 이런 기후입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후작님. 북부 지역은 대개 이렇습니다만 해안가는 좀 낫고, 남부에는 제법 농사에 괜찮은 땅이 있지요.”
그리고 그 남부를 장악하고 있는 곳이 포르투라 이거지.
“그 외에도 자체적인 농사는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해안가에서는 어업도 발전했고요.”
“그렇군요.”
나는 핫산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흘긋 시선을 돌려, 조금 떨어진 뒤에서 우리를 따라오고 있는 가스통과 그에게 붙어서 계속 떠들고 있는 샨드라를 바라보았다.
“흠…….”
가스통도 고생이 많군. 그러게 왜 따라와서.
핫산은 내 시선을 눈치챈 건지 헛기침을 했다.
“아무래도 인간 중에 그렇게 완벽하게 패배를 안겨준 사람을 처음 봐서 저럴 겁니다. 아직 철부지라서…….”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렇게 말하는 핫산을 바라보았다.
샨드라가 스물셋이라고 했으니 나와 가스통보다 한 살 연상이다.
그리고 샨드라의 오라비인 핫산은 스물여섯.
그러나 핫산의 지나친 노안 덕분에, 어떻게 봐도 철없는 딸을 걱정하는 아버지로 밖에 안 보인다.
핫산도 내 표정을 보고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깨달은 듯, 이내 헛기침을 했다.
“어쨌거나, 후작님께서도 이제는 프랑지아의 혁명군 총사령관이 되셨으니 왕께서도 그에 부족함이 없는 대접을 준비하고 계실 겁니다.”
“그건 고마운 일이군요.”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가스통을 흘긋 바라보았다.
내가 혁명군 총사령관이 되고 라파엘 발리앙의 직위가 박탈되면서, 북부군과 남부군 사령관 자리도 공석이 되었다.
기존 북부군 지휘관들은 직위해제 당하고 조사나 재판을 받고 있으니 그들을 쓸 수는 없고, 그나마 북부군과 보조를 많이 맞춰 본 루이 드제가 북부군 사령관이 되었다.
문제는 남부군인데.
나는 가스통에게 맡기고 싶었지만…….
-송구하나 후작 각하, 전문적인 군사 운용 교육을 받은 적도 없는 제게 사령관직은 과분합니다. 게다가 저는 기사로서 후작 각하를 모시고 싶습니다. 저보다는 일군을 지휘해본 적이 있는 미르보 백작님께서 적임이실 겁니다.
정작 가스통 본인이 저렇게 말하며 고사해 버렸다.
그의 충성심과 겸손은 참 고맙고 대단한 일이지만, 데미앙 드 미르보라니.
직책으로나 실적으로나 가스통이 아니면 그밖에 없긴 한데, 본격적으로 사령관을 맡기자니 능력과는 별개로 믿음이 가야지.
나는 영 내키지 않았는데, 의외로 크리스틴이 데미앙을 남부군 사령관으로 삼아도 문제는 없을 거라고 그를 변호해 주었다.
분명 처음에만 해도 크리스틴은 믿을 수 없는 자라며 데미앙을 꽤나 마음에 안 들어 했을 텐데. 이번 쿠데타 진압 과정에서 국경지대 북부군의 발목을 성공적으로 잡고 늘어져서 그런가…….
나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나와 크리스틴에게 아부 떨며 기뻐하던 데미앙을 떠올리곤 미간을 구겼다.
……혹시 그 작자가 나 몰래 크리스틴에게 수작질이라도 벌여서 그녀의 마음에 든 건 아니겠지.
아니, 무슨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을.
“도착했습니다, 후작님.”
다행히 핫산이 내 잡생각을 끊어주었다.
“우리의 왕께서 형제국의 수도로 삼은 딜루스입니다.”
나는 저 지평선 멀리 보이는 도시를 바라보았다.
아직 뤼미에르에 비할만한 규모는 아니다.
그래도 중앙 쯤에 위치한 꽤 큰 성채를 둘러싸고, 제대로 된 도시의 형태가 구성된 모습이 똑똑히 보였다.
“흥미롭군요. 이런 척박한 대륙 한가운데 큰 성채라.”
“하하하, 원래 이 지역을 차지하고 있던 부족이 제법 채산성 좋은 광산을 보유한 데다, 과시욕이 있는 족장이 꽤 오랜 시간 공을 들여 지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대들의 것이고?”
핫산은 씩 웃으며 답했다.
“그렇습니다. 기껏 대지의 신께 은총을 받았는데, 그 축복을 부족민에게 돌리긴커녕 착취하며 자신의 배만 불리던 자에게는 과분한 곳이 아닙니까?”
“확실히.”
우리가 따라가는 길을 따라 강이 흐르는 것이 보이고, 그 주변에는 제법 농지도 조성되어 있다.
“강이 있는 곳에서는 제법 농사도 짓는 모양이군요.”
“그렇습니다, 후작님. 언제까지고 수렵에 의존할 수는 없는 터라, 우리도 여러 가지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물을 구하기가 용이한 곳에서는 밀과 보리를, 그렇지 않고 비교적 서늘한 곳에서는 감자를 기르지요.”
제법, 체계적이네.
“원래부터 그랬습니까?”
“원래는 부족 단위로 소규모로 진행했지요. 하지만 크록스 왕께서 국가적으로 장려해나가고 계십니다.”
“그렇군요. 훌륭합니다.”
의회에서는 내심 우리가 식량 줄을 잡고 이들을 통제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으로 고려했었지만, 이들도 나름대로 다양한 자구책을 내고 있다.
지금이야 우리에게 의존하더라도 제법 비옥한 남부까지 통일한다면 우리가 어설프게 통제하려다간 반감만 살 수 있겠는데.
우리의 행렬은 강을 건너, 마침내 도시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오크, 고블린, 인간, 심지어 수인도 간간이 보인다.
다양한 종족으로 이루어진 혼성군이 대열을 지킨 채 창을 들고 우리가 지나는 길 양쪽을 지키고 있고, 그들의 뒤로 호기심에 찬 민간인들이 우리를 구경하고 있다.
건물들의 모습은 우리의 것과는 다르게 투박하고 단조롭지만, 그래도 제법 그럴싸한 도시의 모습이 펼쳐져 있다.
이 모습을 국민의회도 봐야 할 텐데.
누가 이들을 보고 야만인이라고 하겠나. 여기 확실하게 이들 나름의 문명이 꽃 피고 있는데.
우리의 행렬은 마침내 도시의 긴 길을 지나, 도시 중앙의 성채로 진입했다.
거대한 왕궁 같은 것은 없고, 어디까지나 정말로 성채의 목적에 부합하는 요새가 있을 뿐이다.
그리고 성벽을 지나 들어서자, 2미터는 훌쩍 넘는 키의 오크 수백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쿵.
거구의 오크들이 일제히 창을 들어 올렸다 내리치고, 마치 천둥이 치는 것 같은 소리가 울렸다.
저 체격 좋은 오크들은 일종의 근위병인가?
우리 일행이 성채로 들어서는 내내, 오크들은 규칙적으로 창을 들어 올렸다 내리찍는 행동을 반복한다.
쿵. 쿵. 쿵.
그들의 창이 일제히 바닥을 찍을 때마다 북보다도 거대한 소리가 울려 퍼지고, 지면이 울리는 것이 말 위에서도 느껴질 정도다.
슬쩍 뒤를 돌아보자, 우리 사절단 중 상당수가 제법 압도되어 질린 얼굴들을 하고 있다.
어느 의미로 야만족 같은 퍼포먼스지만, 제법 효과적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크록스와 마주했다.
그는 수행원도 없이 혼자 나왔을 뿐이고, 으레 인간의 왕이 하는 높은 자리에서 내려다보는 권위 과시 따위는 하지 않았다.
왕관도 없고 화려한 옷은커녕 처음 만났을 때 입었던 가죽 장화와 바지, 그리고 상체는 맨살을 드러낸 모습 그대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록스는 그의 거대한 흉터투성이 몸과 기세만으로도 충분히 황무지의 왕에 어울리는 위압감을 내고 있다.
“Al-ardho!”
“Akbar!”
크록스가 저들의 언어로 선창하자, 창으로 바닥을 찍어대던 오크들이 일제히 창을 들어 올리며 화답해 천둥 같은 소리를 울렸다.
오크들이 들어 올렸던 창을 다시 땅에 찍으며 일제히 진동을 울렸으나, 크록스의 목에서 터져 나온 음성은 그에 지지 않았다.
“형제들의 왕 크록스가 먼 길을 와준 프랑지아 공화국의 사절단을 환영한다!”
나는 사절단들이 깜짝 놀라는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이자는 여전하군.
크록스도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았는지, 웃으면서 소리쳤다.
“우리 모두의 신께서 굽어살펴주시는 가운데, 이 만남이 오랜 우정으로 이어지기를 바란다!”
* * *
크록스 왕이 준비해 준 숙소에서 여장을 풀고, 우리는 거의 바로 조약을 체결했다.
핫산과 우리 사절단이 국민의회의 뜻에 따라 어느 정도 협의를 진행하긴 했지만 그래도 당연히 꽤 긴 시간 조율하게 될 줄 알았는데, 정작 크록스가 핫산에게 설명을 듣고 한 번 살펴보자마자 서명해 버렸기 때문이다.
핫산을 믿는 거든, 대범한 거든, 어느 쪽이든 여러 의미로 굉장하게 승인해버린 왕 덕분에 우리는 환영과 조약 체결 축하를 겸한 연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현악기들의 잔잔한 음악과 달리 아주 흥겨운 북과 피리 소리가 울려 퍼지는 연회장.
이들은 특이하게도 술을 마시는 문화가 없다는데,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종교적인 이유란다.
크록스는 딱히 광신도적인 면모를 보여주지 않아서 의외라고 생각했는데, 정작 크록스의 답은 이랬다.
-사실 핑계고 술 마시면 근손실 와서 그래.
나는 크록스의 살아 숨 쉬며 꿈틀거리는 근육을 보고 납득해 버렸다.
“으하하, 빠르게 처리돼서 기쁘군!”
크록스는 나보다 두 배는 큰 손으로 상대적으로 앙증맞아 보이는 잔을 들어, 과일로 만들었다는 저들의 음료를 벌컥벌컥 마셨다.
나도 맛을 보니 취하지는 않아도 음료로서는 달달한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크리스틴은 별로 안 좋아할 것 같고, 에리스는 좋아 죽겠네.
“크록스 왕께서 흔쾌히 수락해 주신 덕분이 아니겠습니까.”
나도 기분은 꽤 좋았다. 곡물 수출로 민간 경제가 어느 정도 숨을 돌릴 테고, 이들이 판매할 귀금속과 광물은 그 자체로 프랑지아의 경제를 활성화시키는 데 유용하게 쓰일 거다.
게다가 미스릴은 교역품이 없다며 우리를 거부한 알프스 왕국과의 거래재료로 쓰일 테고, 무엇보다도 우리는 명실상부하게 악마들에 맞설 최초의 우방국을 얻은 거다.
그러나, 정작 내 답을 들은 크록스는 마음에 안 든다는 얼굴이 되었다.
“왜 이제 와서 격식 차리나? 처음엔 그러지 않았으면서.”
“그만큼 프랑지아 공화국이 크록스 왕을 중요한 우방으로서 예우한다는 뜻이지요.”
그때만 해도 잠재적 적국의 야만족 왕이었고, 지금은 명실상부한 우리 우방국의 왕이잖아?
크록스는 코웃음을 치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니, 이 오크가 뭘 하려고?
“핫산!”
“예, 왕이시여!”
핫산은 바로 방금 전까지만 해도 사절단의 인원들과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크록스가 외치자마자 벌떡 일어나 대답했다.
“전하라!”
“예, 왕이시여!”
가타부타 설명도 없이 소리친 크록스는 핫산의 답을 듣자 입을 열었다.
“형제들의 왕, 나 크록스는 서로의 불신을 넘어서 이런 자리를 얻게 되어 한없이 기쁘도다! 우리 형제들과 프랑지아 공화국의 모두가 이번 수교에 라파예트 후작의 역할이 컸음을 알고 있을 것이다!”
크록스가 남부 억양의 우리말로 말하고, 핫산이 저들의 언어로 통역한다.
“이 공을 기리고 앞으로의 우애를 상징하고자, 피에르 드 라파예트 후작을 이 크록스의 형제로 삼고자 한다. 받아주겠는가?”
크록스는 기세 좋게 외치며 나에게 손을 내밀었지만, 나는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에 머리가 정지했다.
저 형제라는 것이 무슨 의미야?
이들이 형제국이라고 했으니, 일종의 명예 국민 같은 건가?
그런 걸 내가 본국과 상의 없이 함부로 받아도 되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자, 방금까지 통역하고 있던 핫산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굳어 있다.
정작 나와 프랑지아 쪽 인사들은 이게 무슨 일인지 파악을 못하고 있는데, 뒤늦게 통역한 말을 전한 핫산이 내게 다가와 고했다.
“우리는 형제들로서 왕을 모시나, 왕을 형제로 부르지는 않습니다. 지금 왕께서는 후작님을 동격으로 예우해 주겠다고 하신 겁니다.”
왕과 동격? 이렇게 갑자기?
아니, 그보다 이런 걸 거부해서 크록스의 체면을 구겨버릴 수도 없잖아?
그 고생을 해서 수교했는데, 그래놓고 그 장본인이 야만인과 형제는 싫다면서 빠지는 모양새를 만드는 건 사절이다.
나는 헛웃음을 흘릴 뻔했지만 이내 손을 뻗어, 내 손을 잡아먹을 듯이 큰 크록스의 손을 잡아 악수했다.
그게 이 자의 취향이라면야, 어울려줘야지.
“영광입니다, 크록스 왕.”
“으하하하! 좋다, 피에르 드 라파예트! 그대는 지금부터 나의 형제다! 우리 형제들은 모두 나를 대하듯 그를 대하도록 하라!”
핫산의 통역을 들은 저들도 굉장히 당황한 눈치였지만, 이내 일제히 답하며 고개를 숙였다.
이것 참, 지나치게 화끈해서 적응이 안 되는데.
“지나치게 화끈하신 것 아닙니까?”
“그대는 형제에게도 그렇게 격식을 차리나?”
“……귀족가문은 보통 그렇습니다만, 뭐. 그걸 원하지 않는다면 편하게 대하지, 크록스 왕.”
“화통해서 좋군!”
크록스는 그 큰 손으로 내 등을 탕탕 치며 앞에 놓인 고기를 잡아 그대로 뜯더니, 우적거리며 씹어 삼킨 다음 입을 열었다.
“하여, 형제.”
“?”
“우리는 내일 전장으로 떠날 건데, 왕의 형제로서 함께할 생각 없나?”
“……뭐라고?”
내가 지금 잘못 들은 건가? 외국 사절단 대표한테 뭐 하자고?
“내일 비열한 배신자 놈들과 전투를 벌이러 떠날 건데, 그 명예로운 전장에 함께 하자고 청했네. 우리 형제들도 그대에게 아주 관심이 많거든! 으하하하!”
……설마 당일치기 조약 체결의 이유가 그거였나.
나는 이 답 없이 화끈한, 오늘 생긴 형제를 보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문득, 그의 취향에 어울려 준 것이 실수는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