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총재 정부 - Requiem (2)
라파엘 발리앙은 나를 꽤나 반기는 눈치였다.
내가 들고 온 바구니 안에 담긴, 빵과 와인을 보고는 아예 기뻐하기 시작했고.
“오오, 이것 참. 하하…… 승자의 관용, 뭐 그런 겁니까?”
발리앙은 와중에 파리해진 얼굴로도 싱글싱글 웃으며 철창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글쎄요.”
나는 철창 밑으로 바구니를 밀어 넣어주었다.
발리앙은 미리 따둔 와인을 들어서 아예 병 채로 벌컥벌컥 들이켜더니, 빵을 열심히 먹기 시작했다.
나는 그 광경을 보다가 한 마디 덧붙였다.
“그냥 제가 받은 호의를 돌려주는 겁니다.”
“……?”
발리앙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 되었지만, 이내 오랜만에 맛보는 질 좋은 와인과 빵을 탐식하는데 집중했다.
나는 그런 발리앙을 보며, 제니를 떠올렸다.
지금은 에리스의 전속 시녀가 되어서, 좀처럼 가만히 있지 못하는 성녀님 덕분에 늘 투닥거리며 푸념하는 소녀.
승전 기념 연회에서 반드시 에리스에게 드레스를 입히고야 말겠다고 전의를 불태웠지만, 결국 패배해서 시무룩해하던 얼굴을 떠올리자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나는 내가 이 감옥에서 지나온 길들을 되짚어 보았다.
어둡고 차갑기 그지없는, 사람을 위압하기 위한 장소.
회귀 전 나에게 혹독하게 굴던 간수들은 혁명의 수호자로 불리는 나를 어려워하며 정중하게 안내했다.
하지만 힘도 권력도 없는 귀족가의 옛 하녀 출신에겐 결코 그렇지 않았겠지.
귀족과의 내통 혐의나 반혁명적이라는 낙인이 찍혀 처형당하는 평민도 수도 없던 시기에,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마음으로 나에게 그런 호의를 베풀었을까.
정작 그 호의를 받은 나는 그녀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했는데.
내가 상념에 잠겨있는 사이, 목을 축이고 배를 채워 한결 여유로워진 발리앙이 입을 열었다.
“아, 고맙습니다. 이제 조금 살 것 같군요.”
발리앙은 잠시 내 표정을 살피는 듯하더니 물어왔다.
“그래서 어쩐 일이십니까?”
“떠나기 전의 작별이라고 할까요?”
“하하, 감사라도 표해야 합니까?”
나는 발리앙의 답에 픽 웃으며 입을 열었다.
“북부군의 주요 지휘관들은 우선 직위 해제하겠지만, 가벼운 처벌 후 전시에 복귀시킬 예정입니다.”
“오, 그래요.”
발리앙은 그다지 관심 있는 얼굴은 아니었다.
“북부군 지휘관들과 꽤 가까웠던 것 아닙니까?”
“뭐, 그랬죠. 나름 친구도 있었고.”
발리앙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가, 이내 코웃음을 쳤다.
“그래봐야 제 패배가 확정되자 다 제 살길을 찾아 투항한 것 아닙니까?”
나는 아무런 답도 해주지 않았고, 발리앙은 픽 웃었다.
“그들보다는 제 쪽이 후작님께 훨씬 더 큰 도움이 될 텐데.”
“당신의 운명은 제가 아니라 국민의회가 결정하게 될 겁니다.”
“그건 좀 의외군요.”
발리앙은 약간 놀란 얼굴이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는 후작님께서 앞장서서 저를 처형하라고 하실 줄 알았는데?”
“제가 굳이? 저는 당신이 이런 일을 치르기 전까지만 해도, 같이 갈 생각이었습니다.”
“하핫, 그건 고마운 말씀이시군요. 그러면 후작님께서는 제 가치를 아니까, 지금도 살리고 싶으신 겁니까?”
나는 피식 웃었다.
“글쎄요. 제가 당신을 처형하라고 주장하지 않았다고 해서, 당신을 살려달라고 청한 건 아닌데.”
어차피 국민의회의 분위기만 봐도 그는 처형이 확정이다. 나는 굳이 거기에 한 손 더 보태지 않았을 뿐이지.
발리앙은 잠시 침묵했다.
그가 마른침을 삼켰다고 생각한 순간, 그의 입이 다시 열렸다.
“저는 아직 가치가 있습니다, 후작님.”
“…….”
“당신이 그럴 의사만 있다면, 저는 당신의 장군이 되어 저 외세의 침략에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설사 제가 그걸 원해도, 국민의회는 당신을 살려둘 생각이 없을 겁니다.”
“국민의회의 의사가 왜 중요합니까?”
“…….”
발리앙은 진지한 얼굴이었다.
“막시밀리앙 이지도르는 죽었고, 국민의회가 준비한 당신의 대적자, 저도 자멸했습니다. 이제 당신이 마음만 먹는다면, 국민의회를 무너뜨리고 정권을 장악하는 걸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저는 당신이 깔끔하게 패배를 인정하고 항복했다고 생각했는데?”
항복하던 순간의 그는, 패배를 인정하고 그것이 초래할 자신의 죽음까지 받아들인 것이 아니었나?
“그건 맞습니다만.”
“그렇다면, 왜 제게 당신이 실패한 길을 따라가라고 하는 겁니까?”
“이제는 당신이 유일하게 남은, 프랑지아를 이끌기에 합당한 영웅이니까요.”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프랑지아를 더 위대하게 만들 영웅이라던 당신은 프랑지아 공화국에게 패배했습니다.”
“인정합니다. 저는 프랑지아 공화국을 지나치게 얕잡아보았기에 패배했습니다. 하지만 저를 패배시킨 공화국에는 당신과, 아키텐 백작, 그리고 이지도르 총재가 있었지요.”
발리앙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하지만 아키텐 백작은 기꺼이 당신을 따를 테니, 이제 아무도 없지 않습니까? ……솔직히 말해서 이대로 그냥 죽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습니다만, 저는 여기까지 온 당신이 굳이 저들 같은 짐을 가져갈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차라리 제가 훨씬 더 당신에게 도움 되겠죠.”
그렇게 말하는 발리앙의 태도는 마치 불변의 진리를 말하는 것 같아, 당당하기 그지없었다.
그렇군. 라파엘 발리앙에게 있어, 모든 것은 영웅으로 귀결된다. 가히 영웅주의의 화신이라고 해야겠지.
그가 막시밀리앙 이지도르에게 패배했음을 인정해도, 그것은 이지도르가 말하던 공화국의 가치와 국민의회가 아니라 발리앙이 미처 몰라본 영웅 개인에 대한 패배라 이건가.
나는 가만히 라파엘 발리앙을 바라보았다.
나에게 있어 라파엘 발리앙은 대체 불가능한, 유일한 무언가였다.
회귀 후.
혁명이 터지기 전에 그를 찾아내 제거하면 혁명군에 맞서 싸워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도, 나는 크리스틴을 통해 그를 찾는 순간에도 그런 선택지는 고려조차 하지 않았다.
회귀 전의 나는 청기사에 의해 귀족의 수치로 매도당하며 귀족으로서의 내 가치를 찾지 못했으니까.
그나마 나를 존경하는 영민들을 아꼈지만,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혁명이 터져 선택지조차 없이 살아남기 위해 루이 왕을 따라 싸워야만 했다.
그런 나에게 혁명의 기치를 들고 나의 군대를 압박하며, 민중들에게 칭송받으며 싸우던 라파엘 발리앙의 모습이야말로 내가 바라 마지않던 이상적인 모습이었던 거다.
그러나 그것도 결국, 어떤 본질도 뚫어보지 못한 채 드러난 껍질에 지나지 않았다.
제대로 대화하고 가까이에서 지켜본 라파엘 발리앙이라는 인간에게, 혁명은 처음부터 끝까지 수단에 불과했다.
그 결실인 공화국과 그를 찬양하며 믿고 따르던 민중들 또한 그에게는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후작님, 당신은 제가 마음에 안 들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 폭풍의 마녀를 향해 돌진할 때, 그는 나와 함께 목숨을 걸고 피와 땀을 흩뿌리며 길을 열었던 병사들을 보지 못했다.
라파엘 발리앙의 작전 지도 위에서 생명을 불태우며 처절하게 싸운 병사들은 그저 한 덩이의 말에 불과했다.
“하지만 저는 후작님을 꽤 좋아합니다. 변명 같지만, 제가 패배하는 데는 그것도 크게 일조했죠. 저는 가능하면 후작님을 회유하고 싶어 했으니까요.”
라파엘 발리앙이 주목한 것은, 그가 세운 작전에 따라 길을 뚫은 에리스와 폭풍의 마녀를 끝장낸 영웅으로서의 나 정도겠지.
발리앙은 웃으면서 말했다.
“그러나 설사 저를 이대로 버리시더라도, 당신은 한낱 국민의회의 장군이 아니라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셔야 한다는 것만큼은 진심입니다.”
그는 이지도르의 장례식을 보지 못했다.
막시밀리앙 이지도르가 맞이한 죽음이, 그를 따라 혁명을 지켜낼 자들을 무수히 만들어냈다는 것을 모른다.
나는 발리앙에게 답했다.
“그건 제 길이 아닙니다.”
발리앙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아직도 이상론에 잠식되어, 현실을 보지 못하는 저런 자들을 위해 후작님의 충성과 헌신을 바칠 작정입니까?”
나는 그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저는 단두대를 엄청나게 싫어합니다.”
발리앙은 대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냐는 얼굴이 되었다.
“고통 없이 인도적으로- 라는 취지는 좋은데. 너무도 손쉽고 빠르게 사람에게 죽음을 선사하는 물건이죠. 죽음이 끔찍하고 처참한 것이라는 것조차 잊고, 일종의 유희처럼 보이게 만들 만큼.”
“……전장에서 누구보다 용맹하게 싸우시던 후작님이 그런 감성을 가지고 계신 줄은 몰랐습니다만.”
나는 픽 웃고는 말을 이었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생각이 조금 달라서, 어쩌면 위험할지도 몰라서, 또는 조금 방해된다는 이유로 너무 쉽게 다른 이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행위 자체를 싫어하는 거겠죠. 단두대는 그 도구이자 상징 같은 물건이고.”
발리앙은 얼굴을 찌푸렸다.
“후작님이 제 적일 때는, 그래서 저도 후작님에 반하는 쿠데타를 벌이더라도 후작님과 타협이 가능하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제가 없어진 프랑지아에서 그런 무른 생각은 당신의 발목을 잡을 뿐입니다.”
“그럴까요?”
나는 웃었다.
“후작님은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혁명의 의의 자체를 뒤흔드는 존재입니다. 당장 전쟁이 다가오는 순간에야 어떤지 몰라도, 후작님의 효용가치가 다하면 저들은 반드시 후작님을 제거하려 들 겁니다.”
그런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크리스틴과 함께 국민의회에서 나름의 입지를 굳혀두었다.
게다가 에리스가 여왕으로 즉위한다면, 그녀는 기꺼이 화합을 추구하겠지.
라파엘 발리앙은 내가 준비해둔 패를 전혀 모른다. 하지만, 그 이전에.
“그런 식으로 멋대로 예단해서 벌인 쿠데타가 성공하다고 해도, 그 쿠데타를 인정받고 반발을 무마시키기 위해 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야 할까요?”
그게 우리가 공화국에 위협이 된다고 지레짐작해서 크리스틴을 죽이려든 과격파들과 어디가 다르지?
“권력을 얻고 더 위대한 결실을 얻기 위해서는 희생도 필요합니다, 후작님. 당신은 저를 넘어섰습니다! 이 프랑지아의 누구보다도 위대한 영웅이, 고작 그런 대가도 치를 수 없어서 스스로의 가치를 깎아내린다니!”
발리앙은 자신이 죽는 것보다도, 그를 꺾은 내가 그가 원하는 영웅의 길을 걷지 않는 것에 더 분노하고 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회귀 전.
크리스틴은 병으로 요절해버린, 비운의 약혼녀에 지나지 않았다.
에리스는 성녀라 불리며 온갖 선행을 하고도, 무엇 하나 바꾸지 못한 채 마녀라는 모함을 받아 죽었다.
가스통은 빛조차 보지 못한 채 내 뒤를 따르다 죽은 무명의 기사로 남았다.
막시밀리앙 이지도르는 공화국의 독선적인 처형인으로서 공포의 대상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겨우 그걸로 끝날 사람들이었던가?
회귀 전의 나는 그저 혁명이라는 위협에 맞서다가 단두대에서 처형당한 귀족에 불과했다.
“당신은 훨씬 위대해질 수 있습니다! 저 어리석은 자들을 이끌 영웅! 저들의 시대정신 그 자체가 되어야만 합니다! 내가 할 수 없다면 당신이라도 해야만 합니다!”
지금의 라파엘 발리앙이 그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듯, 회귀 후에 겪은 경험이 없으면 나도 고작 그런 평범하기 그지없는 인간에 불과했다.
작은 기회, 작은 시도만으로도 사람은 이렇게나 변화할 수 있다.
드제, 미르보, 탈레랑 등. 회귀 전에는 존재조차 알지 못하던 이들도 무수한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데.
그런데 내가 저들보다 위대한 영웅이니, 나를 위해 다른 이들을 희생시켜서라도 올라서야 한다?
자신의 위명을 위해 무수한 자들을 희생시켜가며 전장을 휩쓸던 청기사.
공화국의 가치를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한 지역 사람들을 몰살시키려던 국민의회.
자신의 권력과 명예를 손에 쥐기 위해, 숱한 희생으로 세워진 공화국을 붕괴시키려고 한 발리앙.
"아니요. 저는 그렇게 되지 않을 겁니다."
나는 저들만큼 내가 절대적으로 옳다는 확신도 없고, 내가 모든 면에서 타인보다 우월하다고 믿을 만큼 오만하지도 않다.
굳이 내가 타인을 불행하게 만들고 원한을 사면서까지 절대 권력을 잡아야만 할 이유도 없다.
내가 정략에서 부족한 부분은 크리스틴이 도와줄 거다. 죽이지 않으면 타협이 불가능한 자가 정말로 있다면, 그녀가 먼저 찾아내겠지.
나로서는 할 수 없는 이타적인 행동과 귀족과 제3신분을 아우르는 화합도 에리스에겐 가능하다.
최초의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태도를 버린 국민의회는 분명하게, 귀족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우리에게는 없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나는 회귀 전 나에게 패배를 안겨 준, 나로서는 결코 넘어설 수 없을 거라 여겼던 적에게 고했다.
“라파엘 발리앙. 나는 당신이 원하는 그런 영웅이 아니기에, 당신에게 승리할 수 있었던 겁니다.”
발리앙은 멍한 표정을 짓더니, 더 이상 어떤 답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에게 작별을 고하고 등을 돌렸다.
회귀 전, 재판과 처형을 위해 끌려 나갔던 길을 내 발로 걸어 나섰다.
귀족의 수치로 불리며 무엇을 위해 싸우는 지도 모른 채 운명에 휘둘렸던, 회귀 전 삶의 그림자.
나를 패배시켰던 남자도, 나를 부정했던 남자도 각기 다른 형태로 끝을 맞이했다.
공화국의 영웅 라파엘 발리앙은 이제 없다.
그러나 나는, 아니 우리는 라파엘 발리앙을 넘어설 수 있다.
이제부터 우리가 보여줄 저들과 다른 길이, 내가 저들에게 바칠 장송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