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총재 정부 - 혁명의 수호자 (2)
북부군 사령부에 있던 라파엘 발리앙은 믿을 수가 없다는 얼굴로 보고를 받고 있었다.
“뭐라고?”
“그, 그게. 리슐리외 주교가 갑자기 혼수상태에 빠져서 준비한 고발이 무산되었다고 합니다.”
“그게 무슨 개소리야?”
아침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노인네가 갑자기 혼수상태라니?
어이가 없을 노릇이지만, 일어난 일은 일어난 일이었다.
발리앙은 허탈하게 손을 뻗어, 체스판 위에 놓여 있던 그의 비숍을 끄집어내 눕혀버렸다.
가장 최적의 기회에 모든 것이 완벽하게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었는데, 제일 중요한 명분을 얻어줄 주교가 이렇게 실패해?
재수가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가 있나?
“허.”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계획대로라면 리슐리외 주교가 국민의회의 부정선거를 고발하며 그의 인망을 이용해 시민들을 선동하고, 그가 군대를 이끌고 국민의회를 해산시켜야 했다.
라파예트 후작이 없는 사이 국민의회에 부정선거 의혹을 뒤집어씌워 해산시켜버리고 준비해둔 새 헌법을 발표하며 선거를 해버리면, 국민의회에 실망한 국민들은 공화국의 영웅인 그를 지지해줄 테니까.
일단 그렇게 정권을 장악하고 나면 라파예트를 회유해보고, 안 되면 어쩔 수 없이 리슐리외와 함께 숙청할 생각이었는데…….
“환장하겠네.”
이렇게 되면 명분 자체가 부족해지는데, 이제 와서 발뺌을 하는 것이 가능한가?
일이 틀어지면 리슐리외에게 덮어씌울 작정이긴 했지만, 정작 그 리슐리외가 저 꼴이 되어버렸다.
이제라도 오해였다며 드제를 풀어주면 없던 일로 넘길 수 있을까? 대신 책임을 질 자가 없는데 그렇게 간단하게?
운 없게도 이렇게 꼬여버릴 줄이야.
아니, 이런 타이밍에 이런 일이 단순한 불운으로 생길 수 있나?
“사령관 각하!”
발리앙의 고민은 부하의 보고로 끊겼다.
“뭐지?”
“남부군 각 부대에 비상대기 명령이 하달되었다고 합니다!”
“뭐? 어떻게?”
루이 드제는 이미 확보되었다.
남부군 전체에 명령을 하달할 수 있는 명령권자가 없는데, 대체 어떻게?
“라, 라파예트 후작의 명의로 명령서가 하달되었다고…….”
“뭐라고?”
라파예트 후작은 확실히 수도를 떠났다.
사절들과 함께 가는 행렬에 잠입시킨 세작을 통해, 후작이 직접 그들과 함께 이동하여 수도에서 멀어졌다는 것까지 전서구로 보고받은 뒤에야 행동한 거다.
정식 외교 협상을 체결하기 위해 떠나 이동하던 후작이 벌써 수도로 귀환할 수 있을 리도 없고, 설사 가능하다 한들 그런 행동을 할 리가 없다.
자신의 세력인 중앙당의 반발을 무릅쓰고 혁명당의 지지를 받아 가며 간신히 통과시킨 수교인데, 그걸 또 자신의 독단으로 깨버린다고?
그런 짓을 했다간 후작의 정치생명은 그대로 끝장이다.
그러면, 대체.
“하.”
이런 일이 가능한 사람이 딱 한 명 있다.
피에르 드 라파예트가 절대적으로 신뢰한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는 사람.
발리앙의 시선이 체스판으로 향했다.
적 편에 우뚝 서 있는 퀸으로.
라파예트의 명의로 명령서를 미리 준비해두었고 아키텐 백작이 하달한다면, 남부군은 명령 계통 따위 무시하고 라파예트 후작의 명령처럼 따를 거다.
그저 여흥이자, 장난으로 그가 준비했던 체스판에는 확실하게 상대가 앉아 있었다.
비상대기 명령? 굳이 내릴 필요가 없는 명령이었다.
남부군으로 무언가 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거다.
저 명령은 선전포고다.
이미 그가 뭘 하고 있는지 알고 있으며, 이대로 그냥 넘어가 줄 생각 따위 없다는 시위.
불운이라고?
발리앙은 이 순간 확신했다.
저 검은 마녀는 확실하게 그들의 의도를 읽고, 방해하기 위해 리슐리외를 제거한 거다.
대체 무슨 수를 쓴지는 모르겠지만, 그도 같은 식으로 당할 수 있다는 경고까지 곁들여서.
“사령관 각하……?”
발리앙은 이 자리에 모여 있는 그의 부하들을 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하하하! 멋지군!”
“각……하?”
오히려 저들이 아무것도 모른 채 당하고만 있으면 실망하고 애석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던가?
발리앙의 전신을 타고 소름이 내달렸다.
정말로 라파예트 후작은 감히 그를, 라파엘 발리앙을 낚아내려고 했다.
자신이 이길 거라 믿고, 그토록 끼고돌던 여자를 이 체스판에 앉혀둔 거다.
발리앙은 체스판 앞에 털썩 앉았다.
“좋아, 어디 한번 해보자고.”
그를 궁지에 몰아넣은 적들에게 경의를 표하며, 발리앙은 폰을 들어 올렸다.
“자, 어디- 이 정도쯤 왔으려나?”
* * *
프랑지아 왕국 동부, 로렌.
라파엘 발리앙의 명령을 전달받은 알렉상드르 베르테르는 국경지대에 배치된 북부군의 주력부대를 인솔하여 출발했다.
전시의 동원령이 해제된 지금, 뤼미에르에 주둔하고 있는 군대는 북부군 남부군 할 것 없이 소수.
지난 전쟁을 경험한 정예군은 대부분이 게르마니아 제국과의 국경지대에 배치되어 있었다.
폰. 체스의 말 중 가장 보잘것없어 당장은 큰 도움이 되지 않지만, 체스판의 끝에 도달하면 어떤 말이든 될 수 있는 최후의 히든카드.
베르테르가 이끄는 북부군의 국경수비대가 유사시를 대비해 발리앙이 호출해둔 폰의 역할이었다.
그리고 그 지휘관인 베르테르는 오만상을 찌푸린 채 길을 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그 길에 뻘쭘하게 서서 머리를 긁적이고 있는 데미앙 드 미르보 백작을.
“미르보 백작님. 지금 대체 뭘 하고 계신 겁니까?”
“훈련입니다, 훈련. 하핫.”
베르테르는 슬쩍 고개를 돌려, 길을 가로막고 여기저기 둘러앉은 채 한가롭게 시간을 때우고 있는 남부군을 바라보았다.
“길가도 아니고 길을 틀어막은 채 가만히 앉아서 대체 무슨 훈련을 하신다는 말씀이신지…….”
“아, 애들 밥 좀 먹이려고요. 훈련에는 역시 도시락 아니겠습니까? 하하.”
데미앙은 아주 뻔뻔하게 말했고, 베르테르는 다시 한번 한가롭게 시간을 때우는 중인 남부군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봐도 식사 중인 걸로는 보이지 않습니다만.”
“훈련부터 출발하고, 나중에 식량을 전달받기로 했는데 이놈들이 좀 늦는 것 같군요. 나중에 경을 쳐야겠습니다!”
“아니, 그럼 그냥 우리 군이 지나갈 수 있게 길을 좀 비켜주시고 나중에 식사하셔도-”
“예? 힘겨운 훈련 끝에 이제야 겨우 식사한다고 휴식을 취하게 했는데, 식사를 미룬다고 하면 제가 무슨 욕을 먹겠습니까.”
지금 네놈들 욕하고 있는 우리 군은 보이지도 않냐?
베르테르는 목까지 차오른 말을 힘겹게 다시 삼킨 다음, 씹어뱉듯이 말했다.
“지금 당장 길을 비켜주지 않는다면 북부군은-”
만,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남부군의 식사가 도착했다.
“오, 왔네! 왔어! 자식들아! 밥이 왔다!”
“오, 오오오-!”
대놓고 불을 피우고 식사할 준비를 하며, 도시락을 받아 까먹기 시작한 남부군을 보는 베르테르는 울화통이 터질 지경이었다.
‘빌어먹을, 죄다 쓸어버릴까?’
정보가 샌 건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단단히 준비하고 나온 북부군에 비해 남부군은 제대로 된 장비나 보급품도 없이 일단 튀어나온 것이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베르테르는 심호흡을 하며 화를 가라앉혔다.
어차피 발리앙의 쿠데타 기도는 그를 비롯한 극소수의 북부군 수뇌부만이 알고 있다.
여기서 난데없이 아군을 공격하라고 명하면 부하들이 동요할 수도 있고, 자칫하면 내전으로 치닫게 된다.
그건 그가 독단으로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잘못하면 수도에 있을 발리앙이 반역죄를 뒤집어쓸 테니.
결국 베르테르는 이를 갈며 수도로 방침을 묻는 전령을 보내야 했다.
물론, 데미앙이라고 편하게 있었냐면.
한가롭게 길을 틀어막은 채 도시락이나 까먹는 부하들을 보면서 북부군이 덤빌까 봐 노심초사하며 벌벌 떨고 있었다.
크리스틴은 북부군 사령부에서 동부로 전령을 보낸 것을 파악하자마자 동부 남부군의 데미앙에게 전령을 급파했다.
물론 그래봐야 대응이니 당연히 더 늦을 수밖에 없었고, 크리스틴이 보낸 명령서를 본 데미앙은 소스라치게 놀라서 급한 대로 아무 준비도 되지 않은 병력을 무작정 끌고 나와 길을 막은 거다.
‘아키텐 백작, 그 마녀 같은 여자!’
데미앙은 명령서에 적혀있던 크리스틴의 협박을 상기하곤 몸을 떨었다.
미르보 백작령의 권리를 포기하고 혁명정부에 가담하면서 잊고 있었는데, 라파예트 후작에게 처음 포로로 잡혔을 때 그녀가 그에게서 뜯어간 조세권이 있었다.
크리스틴은 무슨 수를 써서든 북부군의 발목을 잡으라고 명하면서, 실패하면 그 조세권에 해당하는 금액을 그에게 청구하겠다는 협박을 곁들였다.
덕분에 데미앙 드 미르보는 설움과 공포에 몸을 떨며, 어떻게 해야 북부군의 발목을 더 잡고 늘어질까를 필사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의 자업자득이었지만.
* * *
치열한 수 싸움이 이어지는 가운데 오후가 된 뤼미에르.
라파엘 발리앙은 북부군 사령실에 앉아 체스판을 노려보고 있었다.
발리앙도 결국 상대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전장에서의 전술 싸움이라면 지지 않겠지.
하지만 지금 벌이고 있는 것은 결국 정보전과 정략의 영역, 준비해둔 패의 대결이다.
기껏해야 라파예트 후작의 정치적 파트너이자 연인 정도로 여겼던 상대는 마치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행동을 미리 예측해 두었다는 듯 빈틈없이 대응하고 있다.
결국 발리앙으로서도 이대로는 어쩔 수 없다고 판단해, 크리스틴 다키텐을 확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지휘계통 상 같은 군 소속이고 하급자인 루이 드제까지는 억지여도 직책으로 어떻게든 무마가 가능하겠지만, 국민의회 의원인 아키텐 백작을 모함하며 멋대로 구속하면 결코 그런 식으로 넘어갈 수 없다.
내심 라파예트 후작 외에는 적수로 인정하지 않던 발리앙으로서는 속이 쓰리지만, 저 지독한 여자는 결국 그를 무언가 걸지 않으면 움직일 수 없는 자리까지 끌어내렸다.
“사령관 각하!”
급하게 들어서 경례하는 부관의 표정을 본 발리앙은 표정을 구겼다가, 픽 웃으며 물었다.
“또 무슨 비보려나?”
“아키텐 저택으로 향한 니콜라 네 장군이 보낸 전령이 도착했습니다. 그게, 그…….”
“빨리 말해. 바쁘니까.”
“성녀님이 아키텐 저택 앞에서 연주 공연을 하고 있어서, 인파 사이로 비집고 들어갈 틈도 없다고…….”
“허. 하하, 하하하하! 끝내주네!”
성녀를 방패로 써?
라파엘이 헛웃음을 터트리고 있자, 부관은 그의 눈치를 보다가 물었다.
“네 장군이 그냥 강행 진압하고 확보하냐고 묻는데, 뭐라고 할까요?”
“미쳤어? 철수하라고 해. 성녀한테는 절대 손대면 안 돼.”
쿠데타에 성공해도 눈 돌아간 라파예트 후작이 작정하고 같이 죽으려고 들면 밤에 편히 잠도 못 잘 신세가 된다.
그래서 크리스틴 다키텐을 확보하더라도 털끝 하나 다치게 하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해서 보낸 참이다.
그런데 시민들이 보는 앞에서 전 국민, 심지어 그의 부하들에게까지 사랑받는 성녀에게 손을 댄다? 자살과 다를 바 없다.
“하핫, 하하하…….”
라파엘 발리앙은 실소를 흘리며 체스판에서 적의 비숍을 집어, 퀸의 옆에다 가져다 놓았다.
“이야, 이거 완전히 체크네? 저 여자, 대체 우리 계획을 언제부터 어디까지 파악한 거지?”
“사령관 각하!”
다른 부하의 부름에, 발리앙은 픽 웃었다.
“이번엔 또 뭔데?”
“국민의회가 소집되었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오늘 있었던 사건들 때문인 것 같습니다만…….”
“하하…….”
이상할 건 없다.
남부군 사령관 대리가 북부군에게 구속당했고, 내전을 터뜨리지는 않았지만 크리스틴 다키텐과의 계속된 신경전과 수 싸움은 수도에서 무언가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싫어도 알게 될 정도로 이어졌으니.
“오히려 좋아.”
발리앙은 자리에서 일어나, 모자를 썼다.
인정하지. 이쪽에선 저 여자가 괴물이다.
그러나 군대와 군대의 싸움이 된다면 다를 텐데.
저 여자는 자신을 감당할 자신이 있어서 이런 식으로 몰아붙였을까?
분명 궁지에 몰린 상황인데도, 오히려 살아있음을 느끼는 자신도 정상은 아니다.
“사령관 각하?”
“부대 소집해. ”
“예, 옛! 알겠습니다!”
이렇게 된 이상, 국민의회를 억지로라도 해산해 버리고 강행돌파로 나간다.
시민들에게 선거로 지지 받는 아름다운 모양새를 연출할 계획은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국정을 장악하고 라파예트 후작이 귀환하기 전에 남부군을 무력화시켜야 한다.
내전은 어떻게든 피할 생각이었지만, 발리앙은 이 순간 그것조차 머릿속에서 지웠다.
피를 흘리는 한이 있어도 이 나라는 무능하고 제 살을 깎아먹기 바쁜 의회 따위가 아니라, 더 위대한 영웅에 의해 지배되어야 한다.
모든 것을 얻느냐, 아니면 모든 것을 잃느냐.
“자- 주사위는 던져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