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총재 정부 - 혁명의 수호자 (1)
피에르 드 라파예트가 크록스 왕의 사절들과 함께 남부로 떠난 다음 날.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새벽.
라파엘 발리앙은 북부군의 사령실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그의 앞에 있는 테이블에 놓인 것은 프랑지아 전역의 지도와 체스 세트.
“자, 그럼.”
발리앙은 천천히 손을 뻗어, 체스판 위의 나이트를 집었다.
“기왕 선공을 잡았으니, 시작은 좀 비겁하게 해야 제맛이지.”
* * *
남부군 참모장이자 사령관 대리, 루이 드제 장군의 저택에 시끄럽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잠을 설친 드제는 창밖을 통해 어슴푸레하게 동이 터오기 직전의 새벽임을 확인하고, 욕설을 내뱉었다.
“어떤 미친놈들이 이 시간에. 아, 젠장.”
짐작 가는 것이 있어 드제가 잽싸게 외투를 걸치고 막 검을 챙길 때쯤, 밖에서 기겁한 사용인들의 비명과 발소리가 들려왔다.
거의 시늉만 하는 노크 후 거칠게 문이 열리고, 들어선 남자를 본 드제는 미간을 구겼다.
“모렐 장군.”
멋들어진 기병 제복을 입은 북부군의 기병장군, 제롬 모렐은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야심한 시각에 미안합니다, 루이 드제 장군.”
“미안한 줄 알면 이러면 안 되는 것 아닙니까?”
“휘유~ 사안이 사안이다 보니 양해해 주시길. 루이 드제 장군? 장군이 남부군에 지급될 보급품을 횡령했다는 고발이 들어왔습니다. 장군 같은 분이 그러셨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조사에는 협조해 주시면 좋겠군요.”
드제는 모렐이 건네준, 라파엘 발리앙 명의의 명령서를 보고 헛웃음을 흘렸다.
막아 줄 피에르가 있었다면 모르겠지만, 계급으로 찍어 누르면 항의를 하더라도 진상이 규명된 이후에나 가능하다.
드제는 뿌드득 이를 갈았지만, 모렐과 그 뒤에 서 있는 흉갑 기병 대원들을 보곤 검을 내팽개치고 두 손을 들어 올렸다.
“일단 조사는 받겠는데, 아니라면 뒷감당은 제대로 해야 할 겁니다.”
매우 불만스럽다는 얼굴의 드제에게, 모렐이 씩 웃으며 답했다.
“현명한 판단입니다, 드제 장군.”
* * *
“사령관 각하, 루이 드제 장군의 신병이 확보되었습니다.”
발리앙은 빙그레 미소 지으며, 체스판 위의 적 나이트를 끄집어내 눕혀놓았다.
규정상 사령관인 라파예트 후작과 남부군 사령관 대리 드제가 모두 부재할 때 남부군의 지휘권은 북부군 사령관인 발리앙이 맡게 된다.
전시에 공조해온 북부군과 남부군이 유사시에 대비하기 위해 만든 규정이 이런 식으로 쓰일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겠지.
그것만으로 남부군이 발리앙의 명령에 고분고분하게 따를 리는 없으나, 머리가 부재한 남부군은 일시적으로 무력화될 거다.
나중에 남부군이 격렬하게 항의하겠지만, 이 정도면 적당한 희생양 하나 찾아서 덮어씌우면 무마 가능한 수준이다.
발리앙도 내전을 터뜨려 수도에서 시가전을 벌이고 싶지는 않았기에 세운 계획.
수도를 떠난 라파예트가 뭘 준비했든, 드제가 체포되며 생긴 지휘 공백 사이에 모든 것을 끝내면 된다.
“자, 그럼 다음은 우리 신실한 주교님의 차례로군.”
발리앙은 킬킬 웃으며 체스판 위의 비숍을 집었다.
국민의회를 뒤흔들어 그에게 명분을 제공하고, 여차하면 버림 패가 되어 그 대신 책임을 뒤집어써 줄 카드를.
* * *
그 시각, 수도 뤼미에르의 아키텐 가문 소유 저택.
미리 뿌려둔 수하로부터 드제의 체포 소식을 보고받은 크리스틴 다키텐은 빠르게 환복하고 자신의 집무실에 있었다.
크리스틴은 그녀의 집무실의 책장을 당겨, 숨겨둔 방으로 들어섰다.
검은 드레스 자락이 빛 한 점 없는 어두운 방으로 녹아들고, 어둠 속에서도 너무나 익숙한 동작으로 방 한쪽으로 향한 크리스틴은 마력등을 켰다.
밝혀진 방 안의 벽면에는 수도 없이 많은 계획들이 빼곡하게 붙어있고, 다른 책상에는 피에르 드 라파예트의 명의로 서명된 백지 명령서가 쌓여 있다.
크리스틴은 제일 먼저 준비해 둔 계획들 중 한쪽에 있던 것들을 치워버렸다.
자신이 아닌 루이 드제를 체포하는 것으로 시작했다는 건, 발리앙은 남부군과의 정면충돌을 원하지 않는다는 뜻.
어쩌면 국민의회를 전복시킨 이후, 피에르와 타협하여 협조를 요구할 생각인지도 모르겠다.
크리스틴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번졌다. 순진한 발상이다. 아니, 오히려 오만한 자신감이겠지.
크리스틴이 저자의 입장이었다면 아예 피에르를 숙청할 계획을 잡고, 완벽을 기해 제일 먼저 그녀부터 제거했을 거다.
어쩌면 숨 쉬듯 당연하게 이런 발상을 할 수 있는 쪽이 이상한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크리스틴은 자신에 대한 조소를 흘렸다.
피에르는 귀엽게도 그녀가 에리스와 피에르의 남녀로서의 관계를 경계한다고 생각했지만, 크리스틴도 둘의 사이가 그런 관계가 아니라는 정도는 알아볼 수 있다.
그것은 그보다는 자신은 결코 따라 할 수 없는 순수한 선의와 고결함의 결정체 같은 인간에 대한 열등감을 내포한, 조금 더 근원적이고 질척질척한 부류의 질투다.
애써 외면하던 애정을 인정해버린 그녀는 이제 절대로 피에르를 놔줄 수 없는데, 저런 순수한 빛을 곁에 둔 그가 언젠가 그녀에게 환멸 하는 일이 생길까 봐.
그러나 피에르 드 라파예트가 선택해 준 것은 크리스틴 다키텐이다. 그녀에게 그의 운명을 걸고 모든 것을 맡겨준 거다.
피에르는 그녀가 얼마나 냉혹해질 수 있는 사람인지를 빤히 알면서, 수단과 방법 따위 가리지 않고 날뛰어도 된다고 허락해 주었다.
그렇다면, 그 기대에 부응해 주어야지.
크리스틴은 천천히 손을 뻗어, 한편에 놓여있던 신분증명서를 집어 들었다.
할파스가 사용한 가짜 신분. 에마뉘엘 시에예스의, B급 마법사의 신분증명서.
크리스틴의 눈이 어둡게 침잠하고, 입가에는 잔혹한 미소가 걸렸다.
분하게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그 성녀처럼 진짜로 고결한 인간도 아닌 주제에, 여기까지 와서도 점잔 떨며 명분과 퇴로 따위를 신경 쓰고 있다니.
그녀는 이미 어둠에 속한 자신을 인정한 사람으로서, 그런 위선을 참아줄 정도로 관대하지 않았다.
* * *
동이 트고 아침이 된 뤼미에르의 중앙 광장에는 상당히 많은 시민들이 모여 있었다.
어제 명망 높던 아르노 리슐리외 주교가 마침내 은거에서 나와, 혼란스러운 정국을 겪어온 시민들을 위한 설교를 해주겠다고 공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연단 뒤의 의자에 앉아, 그들의 앞에서 할 설교를 준비 중인 리슐리외 주교는 불안과 초조함으로 몸을 떨고 있었다.
여기까지 온 이상 돌이킬 수 없다. 더는 이 나라가 신의 뜻을 등지고 타락해가는 모습을 방관해서는 안 된다.
“아버지 주여, 저를 굽어살피소서…….”
그렇게 생각하며 기도문을 읊어도, 마치 사람이 아닌 것같이 냉혹하게 침잠한 검은 마녀의 형형한 눈이 계속 기억나 소름이 돋았다.
리슐리외 주교가 답답함 속에 떠올린 것은 오래전에 실종되어버린 조언자이자 친우였다.
‘이럴 때 시에예스, 그가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구체제 하에서 고통받던 프랑지아의 민중들을 위한 길을 고민할 때, 아낌없는 조언과 따스한 격려를 해준 그가 있었더라면.
혁명이 터졌을 때 만약 시에예스가 있었더라면, 그 또한 그 혁명의 피와 광기에 충격받아 은거하는 대신 저들의 길을 바로잡아줄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리슐리외가 깊은 아쉬움을 느끼고 있을 때, 오랜 세월 그를 섬겨온 사제가 다가왔다.
“주교님!”
“무슨 일인가?”
“시에예스 님으로부터 서신과 선물이 도착했습니다!”
“뭣?”
리슐리외는 다급하게 사제가 건네준 서신을 받아보았다.
눈에 익은 시에예스의 봉인을 본 그의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이, 이 친구가. 그동안 대체 뭘 하다가 이제야.”
리슐리외는 떨리는 손으로 봉인을 뜯고, 서신을 읽었다.
그가 속한 마탑에서 극비 소환령을 내려 그동안 부득이하게 연락하지 못한 데 대한 사죄와, 마침내 임무가 끝났으니 조만간 마도 왕국을 떠나 직접 찾아뵙겠다는 내용의 서신.
너무도 익숙한, 틀림없는 시에예스의 필적이다.
그것을 본 리슐리외는 그에 대한 원망보다도 그리움이 더 커서, 눈물을 흘렸다.
평소였다면 리슐리외도 곰곰이 내용에 대해 곱씹어 보고, 의문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가장 중압감과 공포 속에 짓눌리던 순간 전해진 바라 마지않던 소식에 기쁜 나머지.
그것이 검은 마녀가 더 없는 상냥함을 가장하여 할파스에게 캐낸 정보와 그가 남긴 소지품을 이용해 보낸 거짓 서신이라고, 리슐리외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가 고뇌하던 시간 수년간 쌓아 올린 우정이 처음부터 거짓이었으니, 본질적으로는 다르지도 않다는 것조차.
서신을 내려놓은 리슐리외는 시에예스가 보냈다는 선물을 뜯어보았고, 아주 익숙한 포션을 볼 수 있었다.
시에예스를 가르친 마탑에서 개발했다는, 원기를 북돋고 집중력을 향상시켜 주는 포션.
워낙 효과가 좋아 시에예스와 함께하던 시절에 좀 더 자주 마시고 싶은 마음에 청해보았지만, 고가품이라며 아주 가끔만 주던 물건을 오랜만에 본 리슐리외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걸렸다.
그것마저 결코 분해되지 않고 희생자의 몸에 축적되는 독, 이터널 레스트의 작용이라는 것을 리슐리외는 결코 알지 못했다.
긴 세월 여러 번에 걸쳐 나눠 마셨으나, 해는커녕 실제로 도움이 되었으니까.
가장 힘겨운 순간에 친우가 보내준 가장 적절한 선물에, 리슐리외는 바로 포션을 열고 들이켰다.
이내 머리가 밝아지고 자신감이 솟아올라, 리슐리외는 천천히 눈을 내리감고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아버지 주여, 기도를 들어주셔서 감사하나이다. 미천한 종복에게 더없는 기쁨을 주신 자비를 찬미하나이다.”
두려움과 망설임 따위 사라지고, 빈자리에 저 길 잃은 어린 양들을 바르게 이끌어야 한다는 사명감이 차오른다.
리슐리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연단으로 나섰다.
“리슐리외 주교님이시다!”
“주교님! 저희를 이끌어 주십시오!”
보라, 국민의회가 타락하여 올바른 길을 제시하지 못했기에 어린 양들이 이토록 목자를 갈구하고 있지 않은가.
아직 늦지 않았다.
바로잡자.
일어나서는 안 되었던 혁명도.
이들에게는 너무나 일렀던 자유, 평등, 박애도.
준비되지 않은 자들에게 과분했던 민주주의도.
모두 올바른 자리로 되돌려 놓으면 된다.
“뤼미에르의 형제자매들이여, 신의 미천한 종복 아르노 리슐리외가 인사드립니다.”
열화와 같은 환성이 터져 나왔다가, 리슐리외가 손을 들자 바로 멈췄다.
“신의 미천한 종이 이 자리에 선 것은 국민의회가 신의 뜻에 반하는 부정한 정책을 통과시키기 위해, 민중의 뜻을 거슬러 부정선거를 치렀음을 고발하기 위함입니다!”
리슐리외의 외침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역시 이상했어!”
“신의 뜻을 등지고 야만족과 손을 잡는다니, 그게 어떻게 민중의 뜻이겠어!”
온 광장의 시민들이 순식간에 분노와 열기에 차올라, 아우성이 터져 나왔다.
“주교님, 어리석은 저희들을 이끌어주소서! 저희가 어찌해야 하겠나이까!”
그의 인도를 청하는 어린 양들의 모습에, 리슐리외의 가슴에 신과 시에예스에 대한 감사가 넘쳐흘렀다.
아직 늦지 않았다.
리슐리외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걸렸다.
* * *
“어, 어쩌지? 너무 행복한 얼굴로, 푹 주무시는 것 같은데…….”
“그동안 좀 무리하시기는 했지. 그래도 사람들이 주교님의 설교를 기다리고 있으니, 깨워드려야…….”
리슐리외를 오랫동안 섬겨온 사제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의자에 앉아 잠든 채 환하게 미소 짓고 있는 리슐리외를 흔들었다.
“주교님, 송구하나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제 일어나주셔야 합니다.”
그래도 리슐리외는 미소 지은 그대로, 결코 깨어나지 않았다.
“주교님?”
사제의 목소리도, 그의 어깨를 흔드는 손길도 이미 닿지 않는다.
리슐리외가 누구보다도 신뢰하며 믿고 의지했던 친우가 사실은 그를 혁명을 유도하기 위한 도구로 쓰며, 언제라도 처분하기 위해 극독을 먹여왔다는 사실도.
민중을 계몽시킴으로써 부패하고 타락한 지배층과 성직자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할 수 있을 거라는 그의 믿음조차, 처음부터 혼란을 부르기 위해 주입한 왜곡된 사상이라는 진실도.
언제나 신에게 기도하던 그가 실상은 악마가 속삭이던 거짓 우정의 꼭두각시였다는 진상도.
어느 것 하나 깨닫지 못한 채.
자신은 민중을 올바른 길로 이끌고자 했을 뿐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던 주교는, 그의 파탄 난 대의와 함께 행복한 환상 속에 잠겨 들었다.
두 번 다시 눈을 뜨는 일 없이.
영원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