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혁명에 단두대는 필요없다-68화 (68/258)

총재 정부 - 폭풍전야

혁명당 당사에 위치한 살풍경한 집무실.

나는 다시금 막시밀리앙 이지도르와 마주하고 있었다.

“이베리카 반도 야만족과의 수교 안건에 지지가 필요하다고요.”

“그렇습니다, 총재님. 야만족이라는 편견만 내려놓고 본다면 파탄 난 농촌 경제를 곡물 수출로 약간이나마 안정시킬 수 있을 테고, 저들에게 구할 광물은 여러모로 유용하겠지요. 잘만 되면 실패한 알프스 왕국과의 교역에 쓸 수 있을 지도 모릅니다.”

나는 안경알 너머로 보이는 냉막한 이지도르의 눈을 보며 말했다.

“혁명당의 주 지지층인 농민들의 민생을 개선하고, 동시에 다가올 위협에 대비한 국방을 강화하기 위해 꼭 필요한 일입니다. 총재님과 혁명당의 지지를 구할 수 있을 지요?”

막시밀리앙 이지도르는 가만히 나를 보더니 입을 열었다.

“우리가 중앙당의 기수가 되는 건 원하지 않습니다. 설사 제가 동의한다고 해도 혁명당의 의원들은 그대의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을 겁니다.”

쓴웃음이 절로 나오네.

“중앙당은 이 안건에 대해 반대하는 의원들이 훨씬 많습니다.”

내 말을 들은 이지도르는 슬며시 눈썹을 틀어 올렸고, 잠시의 침묵 끝에 그가 입을 열었다.

“어째서입니까?”

“아무래도 귀족과 자본가 출신이 많은 중앙당의 의원들은 그리 크게 와닿지 않는 농촌 경제의 안정보다는, 야만족에 대한 적개심과 불신이 더 강하니까요.”

이지도르는 손을 들어, 안경을 고쳐 쓰고 다시 말했다.

“제가 물은 것은 그게 아닙니다, 후작.”

“...”

“중앙당의 의견을 거스르고 혁명당에 도움을 청해가면서까지 이 안건을 통과 시키려고 드는 이유를 물은 겁니다.”

“간단합니다. 농민 경제를 안정시키고 알프스 왕국과의 교역으로 무기를 수입해 군대를 강화해야, 다가올 외세의 위협에 대비할 수 있습니다.”

이지도르는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다시 물었다.

“그걸 위해 중앙당의 분열을 초래하고 혁명당의 입지를 강화할 수도 있는 안건을 밀어 붙인다?”

이지도르는 천천히 두 손을 들어 깍지 꼈다.

“제가 아는 게 틀리지 않다면, 라파예트 후작과 아키텐 백작이 지금껏 해온 일은 우리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그대들이 의회를 장악하는 과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이전의 행보에 반대되는 일을 하겠다고 하니, 저로서는 이걸 믿어야 할지 모르겠군요.”

나는 처음 만났을 때와 달리, 많은 일을 겪고 총재가 되며 꽤나 현실에 찌들었다는 인상을 주는 이지도르를 바라보았다.

“저는 총재라면 알아줄 거라고 여겼습니다만.”

이지도르는 눈썹을 틀어 올렸다.

“무엇을?”

“권력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에 불과합니다. 아닙니까?”

이지도르는 침묵했다.

“예, 저는 혁명당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중앙당의 세력을 강화해 왔습니다. 그래야만 귀족 출신인 우리가 안전을 보장받고, 우리 뜻을 펼칠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것 자체를 목적으로 삼은 것은 아닙니다.”

나는 천천히 이지도르가 준비해 준 차를 맛보았다.

역시나 설탕 한 알 넣지 않은 싸구려 차는 떫기 그지없다.

“일개 의원이었던 당신이 총재가 되고 많은 것이 변했습니다. 그래도 이 차처럼, 여전히 변하지 않은 부분이 있죠. 저 또한 그렇습니다. 제 뜻을 펼치기 위해 권력을 장악한 건데, 권력을 지키기 위해 제 뜻을 꺾으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후작은 중앙당에서의 권력을 공고히 하는 것보다 이 안건을 통과시키는 쪽이 더 중요하다고 여기는 거군요.”

“맞습니다.”

이지도르는 눈을 가늘게 뜬 채 나를 바라보았다.

꽤 긴 침묵이 흐른 후에야, 그가 입을 열었다.

“당신은 존재 그 자체로 혁명의 의의를 흔드는 사람입니다. 공화국의 법이 아니라, 개인의 무력에 의거해 자신만의 정의를 마음대로 집행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런 당신이 이 공화국을 위해 자신의 권력을 수단으로 쓴다니, 당신의 목적이 애국이라는 말입니까?”

-이따위로 해야만 유지될 질서라면 차라리 무너져야지.

나는 내가 그에게 했던 말을 떠올리고는 피식 웃었다.

“착각하지 말아 주시지요, 총재. 저는 그렇게 숭고한 인간이 아니니까. 저는 저와 제 사람들을 보듬기도 벅찬 사람입니다.”

말을 마친 나는 내 명령에 따라 폭풍의 마녀에 맞서 돌격하던 이들을 떠올렸다.

“저는 아직도 공화국이 최선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공화국을 따르는 프랑지아의 국민들은 자신의 가치를 충분히 입증해 보였으니, 아직은 이 공화국을 지키는 쪽이 제 사람들에게 더 좋은 길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지도르는 가만히 나를 쏘아보더니 입을 열었다.

“결국 당신에게는 국가와 국민들조차 수단에 불과하군요.”

“부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와 제 사람들에게 해가 되지 않는 선이라면, 이 나라와 국민들에게 더 나은 미래를 줄 정도의 기여는 하는 사람이죠. 그만 하면 공화국에겐 꽤 쓸만한 검이 아닙니까?”

“검, 이라.”

만약 이 공화국과 국민의회라는 체제를 무너트리고 나와 크리스틴이 독자적인 정부를 꾸렸다면, 이번과 같은 일은 진행하기는 어려웠을 거다.

내 사람들만이 남아있는 정부에서 그들 모두를 거스른다면 정권 전복과 숙청외에 남는 길이 없으니까.

“예, 그 검은 총재에게 공화국의 가치를 증명해 보이라고 했습니다. 제가 계속 공화국을 위해 싸울 검으로 남을지는, 총재와 공화국이 하기 나름이죠.”

나는 웃었다.

단두대에서 내 목을 자른 남자의 앞에서 이런 표정을 지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어떠십니까. 당신 또한 목적을 위해, 저를 수단으로 삼아보시겠습니까?”

-

핫산과 샨드라가 이교도의 사술이나 야만성을 드러낼 것을 우려하며 호들갑떠는 의원들 덕분에, 성녀인 에리스가 친히 와서 두 사람을 정화하는 의식을 해줬다.

웃으면서 두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폼을 보나, 찬란하게 흩뿌려지는 빛으로 보나 그냥 신성력을 허공에 흩뿌리는 퍼포먼스로 밖에 보이지 않지만.

그래도 그 광경이 자못 신성해 보이고 심지어 핫산과 샨드라도 제법 감탄해서, 어쨌거나 핫산과 샨드라는 정식 사절로서 국민의회에 출석할 수 있게 되었다.

“과연 우리가 그대들을 믿을 수 있겠소? 국명조차 정해지지 않은, 정식 왕국도 아닌 국가와의 외교를 뭘 믿고 할 수 있다는 말이오?”

“귀족 가문이나 상단 명의로 국가와의 거래가 이루어지는 경우도 드물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크록스 왕의 명의로 조약문을 작성하는데 문제는 없겠지요. 또한 향후 조약의 이행을 준수하기 위해 양국 간의 대사를 파견하는 것도 검토할 수 있겠습니다.”

상당히 적대적이고 날이 선 질문에도 불구하고, 핫산은 지극히 신중하고 현명한 태도로 답한다.

“그대들이 말한 교역품, 특히 금과 은, 미스릴의 지속적인 납품이 가능한지 의문스럽구려. 그대들이 광산을 운영할 정도로 체계적인 산업을 구축한 것을 어찌 증명하겠소?”

“원하신다면, 우리 왕께서는 기꺼이 귀국의 인사가 방문하여 의문을 풀 수 있도록 협조할 것입니다.”

연이은 질문이 오가자, 질문은 점점 줄어들고 의회의 술렁거림만 번져 나간다.

솔직히, 몇몇을 제외하면 졸부 수준인 국민의회 의원들보다 핫산 쪽이 더 우수해 보인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데.

젊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중후한 핫산의 외관도 이런 자리에서는 제법 유용하다. ...본인이 기뻐할 것 같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잠자코 보고 있던 앙쥬 백작이 불편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그대를 보고 있자니 실로 놀랍긴 하오만, 당장 내가 불과 십여 년 전에 남부 요새에서 그대들에 맞서 전쟁을 치른 적이 있는 사람이오. 약탈을 일삼던 그대 이교도들이 과연 진정으로 문명국과의 교류를 이어갈 수 있겠소이까?”

“말씀하신 대로 과거의 분쟁은 사실이며, 그대들의 신을 섬기지 않는 우리에 대해 우려하는 바 또한 이해하고 있습니다. 허나 가장 세속적인 프랑지아 공화국조차 이럴 진데, 다른 나라들은 어떻겠습니까?”

핫산은 조용히 고개를 숙여 보이더니, 천천히 고개를 들어 꼿꼿이 선 채로 다시 입을 열었다.

“국가 간의 관계를 지속하는 데에는 어떤 미사여구보다도 국익이 기반이 되기 마련입니다. 귀국이 우리 형제들의 유일한 수교국이 되어 준다면, 우리에게 그 이득을 포기해가면서까지 귀국의 신뢰를 저버릴 만한 어떤 이득이 있겠습니까?”

“...그대들의 왕이 제법 쓸만한 자를 보냈구려. 하지만 나는 그대들에게 속지 않소.”

앙쥬 백작은 못마땅한 얼굴로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크흠, 크흠. 라파예트 후작의 말대로 생각보다는...”

“그렇다고 해도 야만족이오. 저들이 직접 온 대신 인간 하수인을 보내온 이유를 모르겠소이까? 기만책에 불과하오!”

“하지만 저들과의 거래가 유지만 된다면 우리로선 아쉬울 것 없는 것도 사실이니...”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말소리에, 나는 천천히 눈을 내리 감았다.

내가 이지도르와 담판을 짓고 협조를 구하는 동안, 크리스틴은 자신의 인맥과 자금을 이용해 중앙당과 자유당에서 최대한의 로비를 벌였다.

저들의 관료 핫산도 할 만큼 해주었으니, 할 수 있는 건 다 한 셈이다.

다음 날, 국민의회의 투표일.

“찬성 251표, 반대 247표, 기권 52표.”

“마, 말도 안 돼!”

발표된 결과에 중앙당 총재 앙쥬 백작이 비명처럼 소리 질렀다.

자유당 총재 니콜라 브리소도 놀람을 금하지 못하는 가운데, 선언이 울려 퍼졌다.

“크록스 왕과의 정식 수교와 교역 협정 안건이 통과되었습니다.”

국민의회는 순식간에 혼란에 사로잡혔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일이오!”

“중앙당은 물론 자유당도 찬성하지 않았는데 야만족과의 수교가 통과된다고?”

앙쥬 백작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중앙당의 의원들을 훑어보았고, 크리스틴의 로비로 찬성이나 기권표를 던진 의원들은 눈치를 보며 시선을 피했다.

마침내 나와 눈이 마주친 앙쥬 백작은 노성을 터트렸다.

“라파예트 후작! 이게 어찌 된 일이오!”

“의원 중 상당수는 이 안건이 프랑지아의 국익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한 모양이지요.”

우리가 그러는 동안, 자유당 총재 니콜라 브리소는 입술을 깨물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이건 경솔한 결정입니다. 한낱 사소한 이익을 보겠다고 이교도 야만족과 손을 잡으면, 신성 교국이나 다른 나라들에서 좋게 볼 리가 있습니까? 하물며 과반도 채우지 못한 안건 통과라니. 과반이 넘는 의원이 동의하지 않은 안건 아닙니까!”

“애초에 이게 정말 공정한 선거가 맞는지부터 의문이오. 각 당에서 반대자가 이렇게 많은데 통과되는 안건이라니, 이런 결과를 누가 믿고 받아들이겠소?

부정선거 아니오?”

항의가 이어지는 가운데, 탕- 소리가 울려 퍼졌다.

모두의 시선이 쏠린 자리에서, 테이블을 내려친 막시밀리앙 이지도르가 천천히 일어섰다.

“일 년 전 이 자리에서, 옛 혁명당의 일원들이 같은 소리를 부르짖었습니다.”

아무도 입을 열지 못하는 가운데, 이지도르가 물었다.

“존경하는 국민의회의 의원 여러분. 저는 투표에서 패배할지언정 민주주의의 패배로 만들 수 없기에 물러났습니다. ...그대들은 어떻습니까?”

-

국민의회에서 이교도 야만족과의 수교 안건이 통과되었다.

그 이득을 알게 되면 농촌에서야 열렬하게 환영하겠지만, 수도 뤼미에르에서는 일반 서민들 중에서도 우려와 의혹을 품는 자들이 나올 정도였다.

그리고 단순한 우려와 의혹을 넘어서, 충격과 배신감을 느낀 이도 있었다.

라파엘 발리앙은 그의 응접실에서 떨떠름한 얼굴로 아르노 리슐리외 주교와 마주하고 있었다.

“나는, 나는 구체제의 타락한 성직자와 귀족들에게 교화가 필요하다고 여겼을 뿐이오. 그 숱한 피를 흘려가며 새로운 길을 열었는데, 그런데도 국민의회는 순수함을 잃고 타락해버렸소.”

그렇게 말하는 리슐리외의 팔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어린 양을 신의 품으로 인도해야 할 위정자들이 신을 등지고 이교도 야만족과 손을 잡다니, 저들은 결코 용서 받을 수 없는 일을 벌였소.”

발리앙은 야만족과의 교류도 결과적으로 이득이니 나쁠 것 없다고 생각했지만, 일단은 주교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정말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자신을 얼굴마담으로 세우고 정치를 좌지우지하겠다는 귀여운 발상을 그대로 이루어줄 생각이야 없지만, 리슐리외 주교는 어쨌든 지금은 발리앙에게 필요한 인사다.

“...지금 해야만 하오, 지금이 아니면 늦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발리앙으로서는 알 수 없지만, 리슐리외 주교는 얼마 전부터 아키텐 백작과 라파예트 후작이 위험하다는 소리를 지껄이며 점점 조급함을 보였다.

발리앙이 잠시 고민하는 사이, 리슐리외 주교는 절박하게 입을 열었다.

“라파예트 후작이 저들과의 정식 조약을 체결하기 위한 사절로 다시 남부로 내려간다고 하오. 뤼미에르의 시민들도 이 부정한 국민의회에 의심을 품었으니, 그 자가 내려간 순간이 적기요.”

확실히, 이보다 더 최적의 순간은 아마 없을 거다.

지나치게 공교롭지 않은가.

마치 그를 위해 누군가가 예비해 주기라도 한듯한 상황이라니.

이쯤 되면 함정이 아닐까 의심해봐야 옳다.

그러나 발리앙은 싱긋 웃으며 답했다.

“좋습니다, 주교. 해보도록 하죠.”

“오오, 드디어! 발리앙 사령관이야말로 진정으로 이 프랑지아와 민중을 이끌영웅이시오!”

“주교님의 올곧은 대의를 따를 뿐이지요. 하하...”

국민의회의 폭력과 부조리에 충격받은 나머지 차라리 무너트리고 다시 세우겠다는 파탄 난 대의 정도, 그의 야심을 위한 수단으로서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다.

리슐리외에게 웃어주면서도, 발리앙의 두뇌는 빠르게 돌아갔다.

만약 라파예트 후작을 비롯한 국민의회의 어느 누구도 그들의 행동을 예상하지 못해서 이 같은 상황이 된 거라면 싱겁기 짝이 없을 거다.

그렇게 된다면 제법 실망하고 또 애석하겠지만, 어쨌든 발리앙에게는 좋은 일이다.

그러나 만약, 그렇지 않다면?

발리앙은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내달리는 감각을 느꼈다.

그렇다면 라파예트 후작은 감히 그를, 라파엘 발리앙을 낚아보겠다고 일부러 허점을 내보였다는 소리다.

발리앙은 진하게 미소 지으며, 진심으로 그쪽을 기대했다.

‘어디 한번 즐겨보자고, 라파예트 후작. 실망시키지 않는다면 좋겠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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