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재 정부 - 그림자 문답
우리는 핫산과 샨드라를 데리고 수도 뤼미에르로 출발했다.
야심한 시각.
야영을 위해 일행이 군데군데 모닥불을 피우고 둘러앉은 가운데, 나는 저들의 관료라는 핫산과 대화중이었다.
“그러면 그대들은 이미 이베리카 반도의 절반 정도를 장악했다는 소리군?”
핫산은 관료답게 차분하고 진중한 성격으로 보인다.
피부색이 달라서 정확하진 않겠지만, 멋들어진 수염을 기르고 이마에도 약간 주름이 있는 걸 보니 대략 40대 정도 될까?
“그렇습니다, 후작 각하. 우리 형제들은 이미 크록스 왕 아래에서 단결하여 싸우고 있습니다.”
핫산이 굳이 말하지는 않았지만, 어비스 코퍼레이션의 후원을 받는 포르투 항구와 야만 부족들에 맞서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닐 터다.
특히나 수렵과 약탈에 의존해온 야만족의 고질병, 식량 문제는 제대로 된 항구도 교역로도 없는 저들의 발목을 잡는 가장 큰 문제겠지.
그래도 무려 이베리카 반도의 절반에 달하는 야만 부족이 따를 정도면, 크록스가 실력을 증명해 보였다는 건 확실하군.
저 둘이 크록스를 대하던 태도로 미루어 보아, 인망도 있는 것 같고.
“흐아압!”
나는 고함과 함께 검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가스통이 휘두른 대검이 허공을 가르고, 뒤로 뛰어 그것을 피한 샨드라는 착지하자마자 다시 뛰어들었다.
샨드라의 양손에 들린, 특이하게 초승달 모양으로 휘어진 곡도의 날이 모닥불의 빛을 받아 번뜩였다.
가스통은 그녀의 공격을 힘으로 쳐냈지만 샨드라는 그 힘을 그대로 이용해 뛰어올라, 공중제비 돌며 연달아 검을 휘둘렀다.
프랑지아의 기사가 싸우는 방식과는 완전히 다른, 빠르고 가벼운 쌍검이라.
저만한 실력이면 평범한 기사 하나나 둘 정도는 압도하고도 남을 것 같은데?
“하압!”
“으아앗-!”
하지만 가스통은 평범한 기사가 아니었고, 검을 휘두를 때마다 반동으로 뛰어 오르며 공중제비 돌던 샨드라는 기겁하며 가스통의 검을 받아냈다가 그대로 멀리 튕겨 나갔다.
와중에도 공중에서 몸을 비틀며 착지하는 걸 보니 제법이긴 하네.
그건, 그렇고. 나는 크록스가 썼던 표현을 떠올리며 물었다.
“샨드라라는 전사는 크록스 왕의 몇 번째 심복인가?”
“일곱 번째입니다, 후작 각하.”
일곱 번째 심복이라. 그러니까, 저 여자가 크록스의 부하 중 일곱 번째 가는 실력자인 걸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자, 핫산이 덧붙였다.
“저는 두 번째입니다, 후작 각하.”
...?
나는 핫산을 슬며시 살폈다.
어떻게 봐도 단련되지 않은 몸인데... 아.
“크록스 왕의 심복이라는 건 전사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닌가 보군?”
“그렇습니다, 후작 각하. 왕께서는 무력뿐 아니라 지식이나 다른 재능도 중시하시지요.”
나는 지금 핫산에게서 들은 답으로 그동안 내가 가지고 있던 야만족에 대한 인식을 전부 버렸다.
짐승에 가깝고 힘만 숭상하는 야만족이라더니.
우리가 단단히 잘못 알고 있었던가, 설사 제대로 알고 있었어도 크록스가 세운 새 왕국에는 전혀 안 맞는 정보겠지.
아, 그래도 그건 궁금하네.
“그러면 샨드라는 그대들의 전사 중 몇 번째로 강한 자지?”
“네 번째입니다, 후작 각하.”
나는 가스통과 샨드라의 실력 차이를 대충 가늠해보고는 다시 물었다.
“심복들과 크록스 왕의 힘의 차이는 어느 정도인가?”
핫산은 진하게 웃었다.
“샨드라를 포함한 네 명이 동시에 덤벼야 간신히 왕을 상대할 수 있을 겁니다. 관대한 크록스 왕께서는 무력뿐 아니라 지혜도 높이 평가하시나, 전통적으로 오크의 우두머리는 강자만이 자처할 수 있습니다.”
그의 얼굴은 존경과 믿음에 가득 차 있다.
“그건 대단하군.”
과장일 수도 있겠으나, 어쩌면 크록스의 무력은 청기사에 필적하는 지도 모르겠다.
성직자들이나 귀족 출신 의원들은 이들에 대한 거부감이 심할 텐데, 나로서는 이들에 대해 알면 알수록 우호적인 관계를 가지는 쪽이 나아 보이는데.
힘도 힘이지만 만약 이들이 정말 이베리카 반도를 차지하면 포르투 항구도 이들 손에 들어갈 테니, 크리스틴을 위해서라도 이들과 우호를 다져야 아키텐상단의 교역로를 유지하기 용이하다.
무엇보다 이들은 어비스 코퍼레이션과 척을 진 자들이고, 신성 교국이 이교도인 이들과 교류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시피 하니 일단 교역 파트너가 되면 꽤 긴밀한 관계가 될 수 있겠지.
“그대들에 대해 들으면 들을수록 흥미가 동하는걸. 가능하면 이번 협상에서 좋은 결과가 나오면 좋겠군.”
핫산은 살짝 웃으며 나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크록스 왕께서 프랑지아에서 나온 책임자가 후작 각하여서 다행이라고 기뻐하셨는데, 저 또한 그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크록스가 그랬다고? 조금 의외네.
“우리 형제들도 인간의 국가에서 우리에게 가진 편견에 대해서는 익히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후작 각하와 같은 분과 마주하게 될 거라는 기대는 품지 않았지요.”
하긴, 크록스는 인간의 국가에 대해 꽤 아는 것처럼 보였다. 당장 인간이자 관료인 핫산은 더더욱 그렇겠지.
어쩌면 크록스는 프랑지아와의 평화와 교역에 큰 기대를 걸었다기보다, 이베리카 반도를 통일하는 전쟁을 진행하면서 프랑지아의 의도를 미리 떠보려고 한 건지도 모르겠군.
“실례인지 모르겠으나 각하께서 우리를 신기하게 보시듯, 우리 또한 그렇습니다. 각하께서는 워낙, 우리가 알던 프랑지아의 기사들과는 다르신 터라. 어쩌면 우리의 신께서 형제들을 위해 후작 각하를 예비해 주신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빛의 신을 믿지 않는 이교도가 이런 식으로 말하는 걸 보니 또 좀 재미있긴 하네.
“믿어왔던 가치가 뒤집히는 경험을 이미 해봐서.”
“후작 각하만한 분께서 그런 경험을 하시다니, 보통 일은 아니었겠군요.”
나는 그에게 피식 웃어 보이기만 했다.
혁명 당하고 단두대에서 목이 날아가는 경험을 해보는 것이 확실히 보통 일은 아니지.
내가 가지고 있던 가치관이나 고정 관념이란 것이 얼마나 가벼운 건지 아주 잘 알게 되었거든.
“으아아앗!”
어째 비명이 가깝다 싶더라니, 공중에 붕 떠서 날아온 샨드라가 우리 조금 옆에 떨어졌다.
“어어억...”
두 자루의 칼을 다 놓친 샨드라가 허리를 부여잡으며 바닥에서 몸부림치는 광경에, 나는 가스통을 보며 씩 웃었다.
“아무래도 승부가 난 것 같네.”
약간 숨이 거칠어진 가스통이 다가와서 나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 샨드라에게 손을 내밀었다.
“좋은 승부였습니다.”
잠깐 바르작거리던 샨드라는 가스통이 내민 손을 잡고 몸을 일으키더니, 핫산을 보며 냅다 외쳤다.
“오빠, 나 이 남자 마음에 들어!”
가스통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굳어버리고, 핫산은 눈살을 찌푸리며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잠깐, 오빠? 아빠도 아니고?
나는 샨드라를 흘긋 봤다. 아무리 봐도 나나 가스통과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데?
“송구합니다, 후작 각하. 저 아이가 프랑지아의 예법에 무지하여...”
“아니, 그건 괜찮은데. 미안하지만 핫산, 그대 나이가...”
“...스물여섯입니다, 후작 각하.”
지금 그 얼굴로 스물여섯이라고? 이걸 믿으라고?
아무리 잘 봐줘도 30대 중반은 넘은 것 같은데.
내 표정을 본 샨드라가 깔깔거리며 웃음을 터트리고, 핫산은 익숙하다는 듯 반쯤 체념한 듯한 한숨을 내쉬더니 답했다.
“스물여섯 맞습니다, 각하. 그렇게 연민 어린 얼굴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
프랑지아 공화국 수도, 뤼미에르.
해가 져 빛이 비치지 않는 스테인드글라스 아래, 성상을 둘러싼 촛불의 은은 한 빛이 어두운 예배실을 밝히고 있었다.
아키텐의 백작, 크리스틴 다키텐은 우아하고 느릿느릿한 발걸음으로 예배실에 들어섰다.
상복을 연상시키는 검은 색의 드레스를 입고, 검고 긴 머리칼을 늘어트린 그녀는 텅 빈 예배실의 의자들을 지나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녀의 발걸음이 촛불의 미약한 불이 밝히지 못하는 어두운 곳에 접어들 때마다, 그녀가 마치 어둠 속에 스며드는 듯이 보였다.
적어도, 설교자의 연단에 서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아르노 리슐리외 주교는 그렇게 느꼈다.
누구보다 어둠에 가까운 레이디는 그가 선 설교자의 연단 앞까지 도달하여, 드레스 자락을 들어 올리며 고개를 숙여 보였다.
“아키텐의 백작, 상단주, 국민의회 중앙당의 의원 크리스틴 다키텐이 명망 높은 아르노 리슐리외 주교께 인사 올립니다.”
“미천한 신의 종복 아르노 리슐리외가 인사드리겠소, 아키텐 백작.”
그의 인사를 받은 크리스틴은 숙였던 고개를 들며 천천히 눈을 떴다.
아키텐 백작의 눈은 마치 죽은 사람처럼 생기가 없어 심연과 같다고 들었으나, 리슐리외 주교는 크리스틴과 눈을 마주쳤을 때 전혀 다른 인상을 받았다.
얼핏 보기에 냉담해 보이는 눈에는 지극히 위험한 부류의 인간만이 낼 수 있는 형형함이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다.
이게 고작 22세의 어린 여자가 가질 수 있는 눈이란 말인가?
아르노 리슐리외는 내심 전율하며 그녀에게 자리를 권했다.
“귀족의 응접실에는 비할 바가 못 되겠으나, 예배실의 의자라도 괜찮다면 앉아주시겠소이까?”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주교님.”
크리스틴은 자연스럽게 검은 부채를 펼쳐 들고, 입가를 가린 채 예배실 의자에 앉았다.
리슐리외 주교는 천천히 연단에서 내려와, 그녀의 옆에 나란히 앉았다.
“하여, 어쩐 일로 이 미천한 신의 종을 만나고자 청하셨소이까?”
크리스틴은 가볍게 부채를 팔랑이더니 여상하게 답했다.
“수도에 올라온 지가 제법 되었으나, 평소 존경하던 주교님께서 은거 중이시다 보니 만나 뵐 기회를 얻지 못해 아쉬워하던 참이었답니다. 그런데 최근 수도의 혼란이 잦아들고 주교님께서 다시 신자들의 품으로 돌아오셨으니, 신자로서 만나 뵙고자 청한 것이지요.”
리슐리외는 마른침을 삼켰다.
지극히 무난한 언사이나 듣기에 따라서는 수도의 혼란기에는 신자들을 돌보지 않다가, 왜 이제 와서 모습을 드러냈냐는 추궁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렇구려. 아키텐 백작께서 이리 신심이 깊은 줄은 몰랐소이다.”
“이래 보여도 아키텐 상단은 라파예트 후작님과 성녀님의 도움을 받아, 많은 자선 활동을 해왔답니다. 수도의 시민들을 어루만지며 높은 명망을 얻으신 주교님께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라파예트와 성녀.
다분히 의도적인 언급에 리슐리외는 슬며시 미간을 좁혔고, 이내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아키텐 백작, 이 미천한 신의 종은 이제 귀족적인 화법에 신물이 난다오.”
그래도 크리스틴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부채를 살랑이고 있다.
“너무 오랫동안 구체제를 섬겨왔지만, 그 체제는 무너졌지. 원하는 것을 말해 보시오.”
“별것 아니랍니다, 주교님. 주교님께서 은거하시는 동안 수도가 변화한 탓에 분주하신 듯하여, 허락해 주신다면 제가 주교님께 작은 도움을 드릴까 했지요.”
크리스틴은 별일 아니라는 듯 태연하게 말했다.
리슐리외는 그녀의 의도를 가늠해보려고 눈을 가늘게 떴으나, 크리스틴의 침잠한 검은 눈동자에서는 어떤 것도 읽어낼 수 없었다.
리슐리외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제안은 고맙지만 마음만 감사히 받도록 하겠소, 아키텐 백작.”
크리스틴의 얼굴이 조금 나른해졌다고 느낀 순간, 그녀가 착- 소리 나게 부채를 접었다.
“아무래도, 주교님께서 다소의 오해를 하고 계신 것 같군요.”
“오해라?”
리슐리외가 허허롭게 웃자, 크리스틴은 싱긋 마주 웃었다.
“주교님. 우리는 국민의회에서 이 나라를 위해 일할 뿐이랍니다.”
리슐리외는 움찔했지만, 이내 나직하게 답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구려, 아키텐 백작. 미천한 신의 종복인 내가 왜 그 대들과 국민의회에 신경을 쓰고, 오해를 한다는 말이오?”
크리스틴은 나른한 미소를 지었다.
거칠게 위협하는 것도, 많은 말로 그를 현혹하는 것도 아니다.
저 빨아들일 듯한 검은 눈동자 안의 형형한 빛과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리슐리외는 짙은 피로감을 느꼈다.
크리스틴은 꽤 긴 시간, 느긋하게 그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주교님께서 은거하시는 동안, 주교님께 도움받던 이들은 굶주리거나 직접 무기를 들고 혁명의 대열에 서야 했죠. 한데, 은거에서 나오신 지금도 그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계시지는 않으시더군요. 오히려...”
“그만.”
리슐리외의 얼굴이 와작 구겨졌다.
이 여자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모르겠으나, 그의 행적을 감시하고 있었다는 걸 숨길 생각조차 없는 가증스러운 여자에게 휘둘리는 상황은 그의 인내심을 갉아먹었다.
“국민의회에 합류하라는 말이 하고 싶은 거요?”
“우리는 이미 서부의 신자들과 국민의회의 오해를 풀고 교회에 대한 탄압령을 해제한 바 있답니다. 주교님께서 함께해 주신다면-”
“나는 그럴 생각이 없소.”
회유가 거부당했는데도 크리스틴은 은은하게 미소 짓기만 했고, 리슐리외의 인내심은 거기까지였다.
“나는 그대들 중앙당의 꼭두각시 중 하나가 되고 싶은 마음이 없소.”
“꼭두각시라니, 신심 깊으신 분께서 말씀하시기엔-”
“아니오? 국민의회는 그대가 휘두르는 금권에 목줄이 잡혀 제 기능을 못하고 있지 않소.”
“프랑지아의 일원으로서, 국가와 정부가 필요로 하는 도움을 드렸을 뿐인데요.”
“프랑지아의 법을 무시하고 도시 한복판에서 학살을 벌인 자와 약혼한 분이 하실 말씀은 아닌 것 같소.”
처음으로, 크리스틴의 표정에 가면으로 덧씌워진 미소가 지워졌다.
그녀의 표정을 본 리슐리외는 미약한 죄책감을 느끼며 변명했다.
“백작이 당한 부당한 일은 알고 있고, 유감으로 여기오. 그러나 그렇다 한들, 라파예트 후작이 벌인 일은 그자들과 별 다를 바 없는 일이오. 결과적으로 공포로 국민의회를 휘어잡아, 무력화시켰을 뿐 아니오?”
리슐리외는 그 모든 것을 보고, 이 국민의회에는 희망이 없다고 판단했다.
똑같이 영웅으로 떠올랐지만 정치로 더렵혀진 피에르 드 라파예트가 아니라, 순수한 군공만을 세운 라파엘 발리앙을 민중을 이끌 자로 확신한 것도 그래서였다.
끊임없이 갈등과 견제, 반목만을 되풀이하는 국민의회 대신 발리앙이 민중과군을 이끌고, 자신이 정치를 맡아 그를 보좌하기 위해.
“만약 라파예트 후작님이 그들을 체포하여 국민의회의 법정에 세웠다면 그들 전원이 합당한 처벌을 받았을까요? 바로 그 법을 무시한 이들로 가득한 의회에서? 만약 그러지 못했다면, 그들이 더 손쉽고 효과적인 방법을 다시 사용하지 않으리란 보장은 있나요?”
리슐리외는 크리스틴이 라파예트를 변호할 거라고 생각했다.
시가지에서 민간인을 가리지 않고 행한 테러와, 범행을 저지른 의원과 그 하수인만을 처치하는 것은 다르다는 얄팍한 주장이나 할 거라고.
그래서 리슐리외는 대답하지 못했다.
“저 동방 제국에는 하나를 죽여 백을 떨게 한다는 말이 있죠. 라파예트 후작님은 테러로 테러를 갚는 행동을 하셨지만, 결과적으로 국민의회의 누구도 테러를 고려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결과만 좋으면 과정은 아무래도 좋다는 말이오?”
“아니요, 주교님. 하지만 아직 정립되지 못한 사회에서 정의가 제 기능을 못하는 상황에, 다른 쪽에만 정의를 강요하시는 것은 현실적이지 못하다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선량하고 올곧기만 한 이는 신뢰받지만, 신용할 수는 없는 것과 같죠.”
말을 마친 크리스틴은 마치 리슐리외를 뚫어보듯이 물었다.
“...주교님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시지 않으시나요?”
리슐리외 주교는 움찔했다.
그녀의 앞에서 라파예트 후작의 도덕성을 비난하기에, 그가 준비하는 일도 도덕적이라고 부를 수는 없는 것이다.
리슐리외의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흐르는 가운데, 크리스틴이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입을 열었다.
“바로잡는 것을 포기하고 질서를 무너트린다면, 영원한 혼돈만이 남습니다.”
리슐리외는 미간을 좁혔다.
“국민의회의 누군가가 한 말입니다. 정의와 질서가 부재한 혼란은 길었고, 피도 충분히 많이 흘렀습니다. 지금은 그 끝에 모든 걸 다시 세워가는 과도기죠.”
이 여자는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건가?
“시간이 늦었군요. 모쪼록, 더 나은 분위기에서 오해 없이 주교님께 가르침을 받을 기회가 있다면 좋겠습니다.”
리슐리외 주교는 대답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여 보이기만 했다.
크리스틴의 구두가 또각또각 거리는 소리를 내며 멀어져 가고서야, 리슐리외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돌아보았다.
천천히 멀어져 가던 크리스틴은 촛불의 불빛이 비치지 않는 어둠 속에 스며들 때쯤 우뚝 멈춰서 고개를 돌려, 리슐리외 쪽을 바라보았다.
어둠으로 그녀의 표정은 보이지 않으나, 그 속에서도 형형하게 빛나는 눈과 마주친 리슐리외는 소스라칠 뻔했다.
크리스틴은 별말 없이 다시 돌아서서 떠났다.
그러나 리슐리외는 그녀의 눈빛을 잊을 수 없었다.
지극히 차가워, 마치 그의 생사 여부를 판단하는 것 같은 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