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혁명에 단두대는 필요없다-65화 (65/258)

총재 정부 - 황무지의 왕 (2)

어째 나갈 우리보다 관문을 여는 병사들과 오콘 소령이 더 긴장한 것 같아서,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가스통과 함께 관문 밖으로 나서 직접 마주한 오크는 생각보다도 더 컸다.

덩치는 그렇다 치고 키만 봐도 나보다 머리 2개 정도는 큰 것 같은데?

주먹도 거의 내 머리만 하고 등에는 커다란 도끼를 메고 있는 것이 위압감이 상당하다.

“프랑지아 공화국 남부군 총사령관이자 국민의회 의원 피에르 드 라파예트 후작이오.”

“형제들의 왕 크록스다.”

크록스는 남부 억양이 강하지만 제대로 우리 언어로 말해 왔다.

저건 이름인가, 성인가. 그런데, 형제들의 왕?

야만족을 형제로 일컫는 건가? 국명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자, 정작 나를 고민하게 한 크록스도 비슷한 표정으로 고민하고 있더니 입을 열었다.

“후작, 그대는 왕의 몇 번째 심복인가?”

“...”

자연스럽게 나를 후작이라고 부르는가 싶더니, 공화국이나 국민의회는 잘 이해하지 못한 것 같네.

이걸 어디부터 설명해야 하나...

“프랑지아 공화국은 왕이 아니라 국민의 의회가 통치하는 나라요. 따라서 왕은 없고, 나는 의회의 일원이자 군부의 두 수장 중 하나요.”

되도록 간단하게 설명했지만, 크록스는 미간을 구기더니 입가를 씰룩거렸다.

조금의 시간이 흐르고 서야 그가 입을 열었다.

“군부의 두 수장 중 하나라. 그러면 그대를 첫 번째나 두 번째 심복으로 여겨도 되겠나?”

심복이라...

이 자가 이해하기엔 그쪽이 편한가 보지.

“군사 한정이라면 비슷하다고 해두겠소. 나도 질문이 있는데.”

“말하라, 라파예트 후작.”

“크록스 왕, 그대들이 세운 왕국의 이름은 무엇이오?”

“아직 없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왕국이라며, 이름도 없어?

내 표정이 어땠는지는 몰라도, 크록스는 날카로운 송곳니를 움직이며 씩 웃었다.

“지금은 서로를 형제라 부를 뿐이다. 우리가 이베리카 반도를 통일하는 날, 이베리카 형제국이라 선포할 것이다.”

이건 또...

포부 하난 대단한 자로군.

그건 그렇다 치고, 내가 의회에 이걸 뭐라고 설명하라고?

야만족들이 인간과 같은 문화를 공유할 거라는 기대는 당연히 안 했지만, 이건 지나치게 난감한데.

회담이랍시고 관문 앞에 서서 진행하기도 뭣한데, 그렇다고 대충 봐도 가스통에 버금갈 것 같은 이 자를 관문 안으로 들여놓고 싶지도 않다.

“그래서, 프랑지아 공화국에 회담을 청한 이유는 뭐요?”

크록스는 손을 들어 올려 자신의 송곳니를 매만지더니 답했다.

“우리는 프랑지아와의 평화와 교역을 원한다.”

...뭐라고요?

이게, 흉포하고 짐승 같다던 야만족?

“평화는 그렇다 치고 교역이라니, 그대들이? 우리와?”

“그렇다. 불가한가?”

“교역이라는 건 서로 주고받을 것이 있어야 성립하는데, 그대들과 인간의 삶은 판이하게 다를 텐데.”

크록스는 픽 웃었다.

오크의 웃음에 따라 대흉근이 꿈틀거린다...

“프랑지아는 풍요로운 땅이어서 많은 곡물을 생산하는 걸로 알고 있다.”

“그건 제대로 알고 있군.”

하지만 오크나 고블린 같은 야만족은 잡식이긴 하지만 농사보다는 주로 수렵을 통한 육식을 하는 걸로 아는데?

“우리는 그대들의 곡물을 원한다. 그리고 그대들은...”

크록스는 바지에 찬 주머니를 만지작거리더니 광물로 보이는 걸 몇 개 꺼냈다. 손이 워낙 커서 작아 보이지만, 하나하나가 내 엄지 손가락만하다.

“이런 걸 필요로 하지 않나?”

나는 크록스의 손 위에 놓인 광물들을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았다.

이거, 설마.

“금과 은, 그리고 미스릴이다. 필요하다면 철광석도.”

나는 헤 벌어질 뻔한 입을 잽싸게 닫고 평정을 가장하며 허리를 일으켰다.

황량하고 척박해 황무지라 불리지만, 산맥과 고산지대가 많은 땅이다. 쓸만한 광산이 있어도 이상할 건 없지. 이 땅에 기어 들어와서 광물을 캐는 게 어려울 뿐.

놀랍게도 크록스는 인간의 언어는 물론이고, 인간의 사회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의 지식이 있어 보인다.

...저런 걸 어떻게 알았지? 야만족과 인간의 교류는 거의 없을 텐데.

“신기하군, 그대는 마치 인간의 사회를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크록스는 뿌득거리는 소리를 내며 목을 좌우로 흔들더니 답했다.

“인간들과 지냈다.”

인간들과 지냈다라.

저 몸으로? 아니, 그보다 이 오크는 몇 살 정도인 거지?

나는 눈을 가늘게 뜬 채 그를 바라보았다.

나이가 가늠이 안 돼서 판단이 안 서는데.

이만하면 교역 자체는 가능하다. 이들은 곡물을 원하고, 우리에게도 충분한 값어치가 있는 물건을 가졌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우리는 평화와 교역을 원한다. 라파예트 후작, 대답은?”

크록스는 붉은 눈동자로 나를 빤히 바라보며 물어왔다.

“일단 확인해봐야겠는데, 곡물을 필요로 하는 이유는?”

“형제들을 먹이고 가축을 기르기 위해서다.”

크록스는 고민도 없이 대답했다.

지금 확장 전쟁을 계속 벌이고 있다고 했지. 수렵을 할 여력을 내기가 힘들 테고, 이 자가 이끄는 자들의 규모가 커질수록 수렵으로 먹고살기는 더 어려워진다.

이베리카 반도는 황무지로 불릴 정도로 농사에 적합한 땅이 적으니, 아예 전쟁을 위해 군량을 수입한다? 판단은 나쁘지 않네.

이 자는 자기 입으로 이베리카 반도의 통일을 논했다. 즉, 적어도 이베리카반도의 통일까지는 프랑지아가 끼어들지 않기를 원할 거다.

그러니 이베리카 반도를 통일하기 위해, 우리와의 평화와 교역을 원한다.

우리도 게르마니아 제국과의 전쟁에 대비해 이들과 평화를 유지하는 건 나쁠것이 없고, 무역 봉쇄를 얻어맞은 입장에 귀한 광물 수급처는 당연히 환영이다.

문제는 과연 이들을 신뢰할 수 있는가?

예상과 달리 제대로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기는 하지만, 이 자를 보기만 해도 대부분의 인간은 위협을 느낄 거다.

솔직히 내가 된다고 해도 야만족을 어떻게 믿느냐고 떽떽거릴 국민의회가 눈에 선한데.

“우려되는 점이 몇 가지 있는데.”

“말하라, 후작. 듣겠다.”

“나는 그대들이 확장 전쟁을 벌이고 있다고 들었고, 방금 그대도 직접 이베리 카 반도를 통일하겠다고 했지.”

“그렇다, 후작.”

“우선 그대들에게 그만한 역량이 있는지를 알 수가 없으니, 섣불리 판단 내리 기가 어렵군. 만약 그대들이 패배한다면 우리는 교역 상대를 잃는 것은 물론, 다른 야... 부족의 적개심만 살 우려가 있는데.”

크록스는 가만히 나를 보더니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으하하하!”

가스통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그대들에겐 실례겠군. 하지만 나약한 인간들에게 내 힘을 직접 보여줄 수도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가스통은 더욱 발끈했고, 내가 무어라 하기도 전에 검을 뽑을 기세가 되었다.

“후작 각하! 이 야만족에게 명예를 가르쳐 주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크록스는 마치 귀여운 아이를 보는듯한 얼굴이 되었고, 이건 나조차 미간을 구기게 만들었다.

“...크록스 왕.”

“무엇인가?”

“전쟁은 개인의 무력만으로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물며, 평화와 교역을 원한다면서 협상을 망칠 모욕을 일삼는 자를 우리가 신용할 수 있겠는가?”

크록스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답했다.

“그렇군. 내 말에 귀 기울여준 그대에게, 내가 무례를 범했다. 사과한다, 후작.”

크록스가 발끈해서 덤벼드는 것도 생각했는데, 나는 그의 반응에 내심 감탄했다.

구체제의 머저리들보단 차라리 나은데.

“가스통 경, 검에서 손 떼게.”

“옛, 후작 각하!”

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다시 질문을 던졌다.

“좋아, 그대의 자신감은 알겠소. 하지만 내가 알기로 그대들의 종족은 각자의 영역을 지키며 살아왔을 텐데, 그걸 전부 침략해 정복하겠다는 그대들이 그다음에 프랑지아를 위협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있는지?”

크록스는 고개를 슬쩍 옆으로 기울이더니 대답했다.

“오해가 있군. 우리는 침략하는 것이 아니다. 맞서는 것이다.”

“맞선다고? 무엇에?”

크록스의 붉은 눈에 노기가 어리고, 뿜어져 나오는 살기에 가스통은 물론이고 나까지 검을 잡을 뻔했다.

잠시 침묵하던 크록스가 씹어뱉듯이 말했다.

“악마들과, 그들과 손잡은 변절자들.”

-

크록스의 말에 따르면, 3년쯤 전부터 어비스 코퍼레이션의 악마들이 노예들을 매입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각 부족들을 돌며 그들에게 보호세를 바치던 인간들을 매입하다가, 최근에는 아예 포르투의 용병들이나 다른 야만 부족을 고용해 인간이고 야만 족이고 가리지 않고 사냥해 노예로 끌고 간다고.

나는 그걸 듣자마자 깨달았다.

회귀 전보다 일찍 터진 혁명 과정에서 공화국과 어비스 코퍼레이션이 척을 져버렸고, 프랑지아의 내전은 6년이나 일찍 혁명군의 승리로 끝나버렸다.

어비스 코퍼레이션은 기껏 산업혁명을 일으켰지만, 회귀 전과 달리 인간의 주수급처이던 프랑지아에서 별 재미를 보지 못한 거다.

크록스의 말대로면 야만족도 동력으로 쓸 수 있는 모양이지.

그제야 모든 것이 이해가 되었다.

왜 회귀 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던 야만족의 왕국이 생겨났는지.

그동안엔 그저 각자의 영역에서 산발적인 다툼만 벌이던 야만족들이 살아남기위해 뭉치면서 왕국이 형성된 거다.

크록스의 형제들과 전쟁을 벌이고 있다는 변절자들은 아마 어비스 코퍼레이션에 인간과 동족들을 적극 팔아치우던 자들일 테고.

그래도 무작정 크록스의 말만을 믿을 수는 없어서, 우리가 국경 요새로 받아들인 난민들에게서는 그런 말을 듣지 못했다고 하자 크록스의 답은 간단했다.

-이미 팔려나간 자들은 당연히 도망칠 수도, 고할 수도 없다.

심지어 크록스는 자신의 ‘형제들’은 오크와 고블린뿐 아니라 다른 종족들과 인간들도 포함된다고 해서 우리를 놀라게 했다.

나는 그에게 증명해 보이라고 했고, 크록스는 아주 흔쾌히 그러겠노라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약속한 날 가스통, 오콘 소령과 함께 관문 앞에 나와 있었다.

“그 야만족의 말이 사실일까요, 후작 각하? 야만족들이 인간들과 공존하는 국가를 세웠다니, 그런 일이 가능할지...”

오콘 소령은 영 미덥지 않다는 얼굴이다.

“글쎄, 직접 눈으로 본 것만 믿으면 되겠지.”

“후작 각하, 옵니다.”

나는 가스통의 말을 듣고 시선을 돌려, 저 먼 지평선에서 흙먼지를 일으키며 접근해오는 자를 바라보았다.

지난번에 만났을 때도 저 자가 떠날 때 본 광경이지만, 영 적응이 안 된다.

크록스는 흙먼지를 일으키며, 자신의 다리로 군마만큼 빠른 속도로 질주해오고 있다.

“허.”

이번에는 심지어 자신의 양 어깨에 사람을 앉혀놓고, 그 둘을 손으로 잡은 채 뛰어오고 있다.

“허, 헉, 경-”

오콘 소령이 저도 모르게 경계하라고 외치려는 걸 내가 손을 들어 제지하자, 순식간에 우리의 조금 앞까지 달려온 크록스가 땅을 미끄러지며 멈춰 섰다.

그러기가 무섭게, 그의 어깨에 앉아있던 두 사람이 내려왔다.

“우웨에에엑-!”

거의 굴러떨어져서 바닥에 대고 구토해대는, 로브에 터번을 쓴 남자.

“영광이었습니다, 왕이시여.”

그리고 고양이처럼 사뿐한 폼으로 뛰어내려 감사를 표하는 여자.

둘 다 구릿빛의 피부라서, 한눈에 보기에도 프랑지아나 중앙 대륙 출신은 아니다.

“우욱, 우웨엑, 왕이시여, 이건, 너무...”

남자가 구토하며 하소연하자, 크록스는 씩 웃음을 터트렸다.

“으하하하, 그대들의 발로 뛰어서야 오는 데만 한 세월이 아닌가!”

저 오크는 지치지도 않나.

나는 크록스와 수하들이 남부 억양이지만, 인간의 언어로 자연스럽게 대화하는 광경을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제대로 왕이라고 부르긴 하지만, 아무리 봐도 둘이 크록스를 두려워한다는 느낌은 없는데.

확실히 대충 급하게 아무나 구해서 억지로 강요한 것 같지는 않다.

최소한 인간들과 어울려 지낸다는 주장은 사실이겠지.

“어서 오시오, 크록스 왕. 이쪽은 관문의 책임자인 장 오콘 소령이오.”

오콘이 뻣뻣하게나마 고개를 숙여 보이자, 크록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갑다, 라파예트 후작.”

크록스는 손을 뻗어 아직도 창백한 얼굴로 바닥에서 비실대고 있는 남자를 가리켜 보였다.

“관료인 핫산이고-”

어째 비리비리하게 생겨서 로브 차림이더니, 아마도 거래를 하게 된다면 이자가 실무협상을 맡는 건가.

크록스는 이번엔 그의 옆에 서있는 여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전사인 샨드라다.”

검은 옷을 입고 드러난 피부마다 문신을 새긴 여자는 호기심에 찬 눈으로 나와 가스통을 들여다보다가, 살짝 눈을 감으며 목례해 보였다.

어째 몸놀림부터 가볍더니 전사라. 저들의 기사쯤 되나?

“이들이 그대를 따라가, 우리 형제들에 대해 설명하고 증명해 보일 자들이다.”

말을 마친 크록스는 조금 생각하는 듯하더니 덧붙였다.

“라파예트 후작. 나는 우리의 말에 귀 기울이는 그대를 믿고 내 형제들을 맡긴다.”

“알고 있소, 크록스 왕. 다만 내가 보장할 수 있는 건 이들의 안전과, 그대들의 제안에 대한 논의까지라는 건 이해해 주길 바라지.”

사절이랍시고 오크와 고블린을 데려가는 것보다야 한결 낫겠지만, 과연 이 야만족과 이교도의 국가를 국민의회에서 어떤 식으로 받아들일지는 나도 아직 모르겠거든.

그런데, 크록스는 뜻밖에도 씩 웃더니 답했다.

“인간들의 국가가 음흉하고 답답하다는 건 잘 알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그것참, 듣는 인간 할 말 없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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